1. 광해대왕의 등극
반정(反正)이란 옳지 못한 임금을 축출하고 새 임금을 세워 국정을 바로잡는다는 뜻이다.
역사적으로 조선시대에는 두 번의 반정이 있었다.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세운 중종반정과 광해대왕을 내친 인조반정이다.
단종도 숙부 수양대군에게 양위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축출된 것이니 분명한 반정이다.
그러나 올바르게 정의하자면 반정이 아니라 세 번 모두 찬역(簒逆)이었다.
반정이란 용어는 권력을 잡은 측에서 즐겨 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찬역을 정당화하기 위해서다.
인조반정의 경우 「광해군일기」조차 그의 흠결을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역도들이 뽑은 사관도 반정의 명분을 찾지 못한 것이다.
그 위에 반정의 허구와 부당성이 실록과 「승정원일기」의 행간마다 슬쩍슬쩍 내비치고 있다.
광해대왕․병자호란.소현세자 독살 등은 우리 사랑방에서 이미 얘기한 적이 있지만,
총리 및 장관 지명자들이 오랜 세월 저질러온 각종 비리로 인해 낙마하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 나라 관리들의 행태에 조금도 변화가 없다는 한심한 생각에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되짚어보고자 하는 것이다.
조선조 사대부들의 안중에는 나라도 임금도 백성도 없었다.
오직 사대주의와 파당과 이기주의에 사로잡혀 허구한 날 이전투구를 벌였을 뿐이었다.
그 행태는 면면히 지속되어 대한제국의 끄트머리에서는 을사오적이 나라를 팔아먹었고,
오늘날에는 전직 국회의원들에게 월 120만 원씩 연금을 지급하자는 안을 뚝딱 가결했다.
광해대왕의 가계는 매우 복잡하다.
아버지 선조가 8부인에게서 14남 10녀를 생산했으니 당연한 일로 암투의 온상이었다.
암투는 항용 왕의 자녀들 사이에서가 아니라 그들에게 연줄을 댄 관료들에 의해 벌어졌다.
광해대왕을 몰아내고 보위에 오른 인조는 선조와 4부인 인빈 김씨 사이에 난 3남 정원군의 아들로,
정원군은 임해군과 함께 조선조를 통틀어 가장 광포한 개망나니로 악명이 자자했다.
선조의 화려한 비빈과 그 자녀들 현황은 다음과 같다.(도표를 그릴 줄 몰라 지송)
중종 --------------- 창빈 안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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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남 덕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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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남 하성군 = 선조 1552~1608
재위 1567~1608(40년 7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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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인 2부인 3부인 4부인 5부인 6부인 7부인 8부인
의인왕후 인목왕후 공빈 김씨 인빈 김씨 숙빈 김씨 정빈 민씨 정빈 홍씨 온빈 한씨
자녀 없음 영창대군 임해군 의안군 순화군 인성군 경창군 흥안군
정명공주 광해군 신성군 인흥군 정명옹주 경평군
정원군 정인옹주 영성군
의창군 정근옹주 정화옹주
정신옹주
정혜옹주
정숙옹주
정안옹주
정미옹주
광해군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세자에 책봉되어 분조를 이끌고 전란 극복에 큰 공을 세웠다.
4부인 인빈 김씨 소생 신성군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선조와,
광해군을 세자로 밀려다 귀양간 정철과 파직당한 서인들을 생각하면
임진왜란은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된 결정적 계기가 된 셈이다.
※ 분조(分朝) ; 국가 비상시에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세우는 임시조정.
선조는 광해군이 이끄는 분조를 핑계로 명나라 망명을 기도했다.
임진왜란 직후 선조의 1부인 의인왕후가 죽고 2부인 인목왕후를 들였는데,
광해군이 32세 때인 1606년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자 선조의 마음이 또 다시 요동쳤다.
그 위에 임란에 원군을 파병한 명이 조선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광해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는 무리까지 나서니 광해군으로서는 일대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영창대군이 태어난 다음해인 1607년 10월 9일, 선조가 각중에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왕실과 조정이 발칵 뒤집혔다.
몇 식경이 지나 정신이 든 선조는 이틀 뒤 전․현직 대신들을 소집한 자리에서 양위를 선포했다.
그러나 영창대군을 받들던 무리들이 일제히 반대하자 양위를 거두고 광해군에게 섭정을 명했다.
집권 소북의 영수인 영의정 유영경은 이마저 받들지 않았다.
유영경의 밀명을 받은 병조판서 박승종이 군사로 대궐을 포위하는 등 일촉즉발의 위기가 감돌았다.
후계자를 두고 한창 암투가 벌어지던 선조 41년(1608) 2월 1일, 선조가 숨을 거두었다.
유영경이 즉각 인목왕후를 찾아가 영창대군을 보위에 올리고 수렴청정을 하라고 간했으나,
인목왕후는 선조의 유서를 공개하며 광해군을 지지했다.
영창대군을 보호하려는 현명한 모성이었으나 어린 아들을 끝까지 지켜주지는 못했다.
권력에 줄을 대려는 간악한 무리들의 농간 때문이었다.
2. 반정의 빌미
광해대왕은 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지지한 북인들을 젖혀두고 남인 이원익을 영의정에,
서인 이항복을 좌의정에, 남인 이덕형을 우의정에 제수했다.
동시에 광해군을 지지한 죄목으로 선조에 의해 귀양 가 있던 정인홍을 불러 대사헌에 제수했다.
신하들의 파당을 부추겨 권력의 줄타기를 했던 부왕 선조와는 판이한 탕평책이었다.
왕은 또한 영의정 이원익의 건의에 따라 대동법을 실시함으로써 전란의 조기 극복은 물론,
백성들의 무거운 조세부담을 덜어주어 삶의 질 향상에 크게 기여했다.
오랜 전란으로 피폐한 삶을 살던 백성들은 신왕의 선정에 환호했다.
경기도에 시범 실시되었던 대동법은 후임 왕들에 의해 차츰 전국으로 확대되면서
조선 후기 조세제도의 근간으로 자리잡는다.
허준의 「동의보감」이 완간된 것도 이때였다.
왕은 즉위 직후 명에 사신을 보내 책봉을 주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왕 즉위, 세자 책봉, 왕 및 세자의 혼례 등 중요한 국정마다 일일이 명의 승인을 받아야 했던,
우리 역사의 슬픈 자화상이다.
명은 대신 왕위 계승이 적합한지를 조사하라며 사신을 파견했는데,
명 사신의 횡포는 약소국 조선의 처지를 극도로 비참하게 만들었다.
명 사신이 압록강을 건넌 의주부터 한성의 관문 벽제에 이르기까지,
수개월 동안 백성들이 길가에 도열하여 환영을 하는 굴욕의 장이 펼쳐진 것이다.
더욱이 명 사신 일행은 서강에서 임해군을 만나 수만 냥의 은괴만 뇌물로 챙겼을 뿐
조정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돌아갔다.
오늘날 대한민국 관료들처럼, 망해가는 명나라 관리들의 부패상이 극에 달한 사건이었다.
이때 중국 북방에서는 누루하치가 여진족을 통일하여 대제국의 기틀을 쌓고 있었다.
누루하치는 임진왜란 때 스스로 두 번이나 원군 파병을 제안했으나
모화사상에 젖어 있는 선조와 사대부들의 거절로 성사되지 못한 전력이 있었다.
뿌리를 따져보면 여진족은 우리 겨레와 같은 핏줄이었으니,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남한산성을 에워싼 채 최후의 공격을 가하지 않고 인조를 살려둔 것도
바로 이 먼 핏줄의 情 때문이었다.
왕 8년, 누루하치는 드디어 여진족 통일을 완성하여 金나라를 세우고 중원으로 칼끝을 향했다.
명은 최후의 보루인 요녕성이 금나라에 정복되자 조선에 원병을 명했지만 왕은 이를 거절했다.
대신 정예병을 국경에 파견하여 상황을 예의주시하도록 했다.
절대 상국 명과 신흥 청 사이의 균형외교는 왕만이 행할 수 있는 지혜로운 결단이었다.
대북의 영수 이이첨과 왕의 처남 유희분을 필두로 여야 없이 파병을 강력하게 주청했다.
이이첨의 진언은 400여년이 지난 지금 들어도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간사하기 그지없다.
“상국에 난리가 났을 때 제후가 달려가 구원하는 것은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입니다.”
‘변방을 지키는 자의 직분’,
조선이 명의 제후국에 불과하다는 치욕적이고 자학적인 사대주의 사관이었다.
금나라가 끝내 명을 꺾고 중원을 장악할 것이라고 예측한 사람도 조선을 통틀어 왕뿐이었다.
간관(奸官)들의 등쌀에 못이겨 군사를 보내긴 했지만 왕은 냉철했다.
원군을 이끈 대장군 강홍립은 적당한 기회에 금나라에 항복하여 후환을 줄이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정확한 국제정세 예측에 의해 금나라에 유화책을 쓴 왕의 이 조치는
인조반정의 또 다른 명분이 된다.
금나라가 한창 기승하던 왕 9년, 왕은 서인과 남인의 반대를 묵살하고 인목대비를 폐위했다.
집권당인 대북의 초강경파 이이첨의 주장을 따른 오판이었다.
왕의 서모인 인목대비 폐위는 훗날 인조반정의 최대 명분이 된다.
효는 조선조의 최고 가치였기 때문이다.
전장의 장수도 부모상을 당하면 즉각 사직하고 시묘하는 게 최고 도리였던 것이다.
대북의 이 같은 전횡은 모두 광해대왕의 실정으로 치부된다.
인목대비는 영창대군의 모후로서 영창대군은 당파싸움의 희생물로 이미 처형된 뒤였다.
왕위 계승서열 1위였던 왕의 동복형 임해군은 재위 원년에 이미 처형되었다.
왕의 탕평의지에 따라 잘나가던 연합정권에 균열이 인 것은 국정과 관계없는 파당주의 탓이었다.
발단은 문묘종사였다.
문묘란 성균관에 모신 공자의 묘로서 조선조 사대주의의 핵이었는데,
공자에게 제사를 지낼 때 대표적 공자 숭배자인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등
이른바 오현(五賢)을 함께 모시자는 의견이었다.
왕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문묘종사를 시행했다.
문제는 남인의 지주 이언적과 이황이 포함된 반면 여당인 북인의 지주 조식이 빠진 것이다.
오현의 전력을 놓고 비난의 상소가 빗발치면서
왕의 문묘종사 윤허는 훗날 인조반정의 또 다른 까탈이 된다.
조선은 왕의 나라가 아니라 이미 신하들의 나라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