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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빈 그릇에서 배운다 / 법정 스님

작성자도문3|작성시간26.06.07|조회수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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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에서 배운다' 
                                       / 법정 스님

물은 가을 물이 맑다. 
사계절 중에서 가장 맑다. 
개울가에 물을 길러 나갔다가 
맑게 흐르는 물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이 개울물에서 세월을 읽는다. 

가을 물이 맑다고 했는데 사람은 어느 때 가장 맑을까?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을에 귀가 밝다. 
이 말이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가을바람에 감성의 줄이 팽팽해져서 
창밖에 곤충이 기어가는 소리까지도 다 잡힌다. 
다람쥐가 겨우살이 준비를 하느라고 상수리나무에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온통 오관이 귀가 된다.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사람은 맑아진다. 
너와 나의 간격이 사라져 하나가 될 때 사람은 투명해진다. 
이 가을 드러나는 빈 그릇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서쪽 창문 아래 조그만 항아리와 
과반을 두고 벽에 기대어 이 만치서 바라본다. 
항아리는 언젠가 보원요 지헌님한테서 얻어 온 것인데,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낸 그릇이라 
그 연한 갈색이 아주 천연스럽다. 
창호에 비껴드는 햇살에 따라 
빛의 변화가 있어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며칠 전에 항아리에 들꽃을 꽂아 보았더니 
항아리가 싫어하는 내색을 보였다. 
빈 항아리라야 무한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백자로 된 과반은 팔모 받침에 네모 판으로 된 것인데 
가로 한자 두치, 세로 한자의 크기. 
과반치고는 크다. 
이 역시 빈 채로 가 더 듬직하고 아름답다.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올려 있지 않는 
빈 과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라보는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감을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다. 
빈 그릇에서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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