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와 법에 상응하지 않고 범행의 근본이 되지 못하는 철학은 지와 각과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으므로 진정한 철학이라 할 수 없고, 자신이 항상 설하고 있는 사성제는 의와 법에 상응하고 범행의 근본이 되기 때문에 지와 각과 열반으로 나아가는 진정한 철학이라는 것이다. 그러다면 의, 법, 범행, 지, 각, 열반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우선 원어가 지닌 의미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義(artha) - work, aim, meaning, thing, object; 목적, 의미, 사물, 대상 法(dhamma) - established, order, rule, right, law: 질서, 규율, 진리, 법 梵行(brahmacariya) - good and moral living, rdligioius life: 도덕생활, 해탈을 의한 종교적 생활이나 수행 智(abhinna) - special knowledge: 사물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이해 覺(sambodhi) - awakening: 언제나 누구에게나 일치하는(sam) (진리에 대한) 깨달음(bodhi) 涅槃(nibbana) - final emancipation, extinction :적멸 이와 같은 어의를 통해 볼 때 의와 법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것은 철학하는 목적과 진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범행의 근본이 아니라는 것은 윤리나 수행의 토대가 되지 못한다는 의미다. 우리가 철학하는 목적은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에 의해 올바른 가치관을 세워 올바른 삶을 영위하려는데 있다. 따라서 그것이 진정한 의미있는 철학이기 위해서는 이같은 목적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 같은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올바른 인식론이 요구된다. 어떻게 해야 우리는 진리를 인식할 수 있는 가가 문제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하는 목적에 상응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식론이 요구된다고 할 수 있으며, 義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불타의 비판은 그같은 문제를 철학의 문제로 삼고 있는 사람들의 인식론에 대한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올바른 인식론의 조건은 어떤 것일가? 그것이 올바른 인식론이기 위해서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져 다 줄 수 이어야 한다. 따라서 智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비판은, 義에 상응하지 못하는 인식론은 결코 사물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이해를 가져다 주지 못한다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인식론이 잘못되어 있다면, 그같은 인식론에 근거하여 주장되고 있는 진리는 진정한 진리일 수 없을 것이다. 法에 상응하지 않는다는 불타의 비판은, 문제되고 있는 모순된 명제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진리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한다. 그같은 문제는 그릇된 인식론에서 비롯된 무의미한 명제들의 모순대립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리는 무엇이며 어떤 조건을 갖춰야 하는 것일까? 진리는 존재의 실상에 대한 지식이며, 보편타당성을 지녀야 한다. 존재의 본질에 대해 언제 어느 때 누가 어떻게 인식을 해도 항상 일치된 인식을 가져다 주는 지식이 진리인 것이다. 따라서 진리에는 모순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불타가 무기의 태도를 취한 문제들은 서로 모순 대립하고 있다. 이같이 모순된 지식은 우리에게 보편타당한 인식을 가져다 줄 수 없다. 覺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불타의 비판은 이와 같이 그 문제에서 대립하고 있는 명제는 그 어느 것도 보편 타당성을 갖기 못하고 있다는 비판인 것이며, 그것은 그들의 존재론이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라는 그릇된 존재론에 대한 비판 인 것이다. 도덕적 생활이란 진정한 가치, 즉 善을 추구하는 생활이다. 그렇다면 선은 무엇인가? 그것은 우리를 행복하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모든 욕구가 충족되어 고뇌가 없이 평화로운 상태다. 우리는 이렇게 행복하게 살기를 희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희망은 항상 좌절된다. 우리의 욕구 가운데 가장 큰 욕구는 죽지 않고 살고 싶은 욕구다. 그러나 우리는 태어나서 죽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가장 가치있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죽음에서 해방되는 일일 것이다. 범행이란 좁은 의미에서는 일상적인 삶에서 행복을 추구하는 도덕적 생활을 의미하지만,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죽음이 없는 범천, 즉 본원의 세계로 돌아가기 위한 행위를 의미한다. 따라서 범행이야말로 가장 큰 가치의 추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범행은 어떻게 가능할까? 범행이 본원이 세계로 가기 위한 실천이라면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본원의 세계에 대한 지식 즉 진리가 문제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진리를 안다면 우리는 그 진리에 의해 올바른 가치의 추구가 가능할 것이다. 환언하면 진리에 기초하여 범행의 근본이 되는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순된 주장이 진리일 수 없음을 지적한 불타가 이들은 범행의 근본이 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이같은 불타의 비판은 가치론의 측면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가치관이 바르게 확립되지 않은 철학을 통해 모든 고뇌가 종식된 열반의 세계에 갈 수는 없는 것이므로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을 통해 볼 때 불타가 무기의 태도를 취한 이유는 명백하게 드러난다. 모순된 명제 가운데 어느 하나를 취하여 그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는 것은 그릇된 인식론에 근거하여 수립된 진실되지 못한 존재론을 진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것은 도덕적 생활이나 종교적 수행의 근본이 되지 못하는 무의미한 것이라는 판단에서 이같은 논의 자체를 파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불타의 비판이 철학의 모든 측면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의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사물의 본질에 대한 완벽한 이해에 미칠 수 없다는 비판은 인식론의 측면에서 취해진 것이고, 법에 상응하지 않기 때문에 보편타당한 깨달음에 도달할 수 없다는 비판은 존재론의 측면에서 취해진 것이며, 범행의 근본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으로 나아갈 수 없다는 비판은 가치론의 측면에서 취해진 것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불타는 사견의 파기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철학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의와 법에 상응하고 범행의 근본이 되며 지와 각과 열반으로 갈 수 있는 사성제가 자신의 철학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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