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일이 있을 때, 우리는 ‘맞아! 인생은 苦야.’라고 말하게 됩니다. 苦! 세상을 보는 불교의 관점 가운데 하나가 苦입니다. 一切皆苦, ‘모든 것은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부정적이고 숙명적인 느낌이 납니다. 그런데, 불자들은 부정적이거나 숙명적인 가르침이 아니라고 합니다. 세상을 바로 본 관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三法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세상은 무상한 것이고[諸行無常] 나[自性]라고 할 것이 없기[諸法無我] 때문에 모든 것은 괴로운 것[一切皆苦]이다.” 또는 세상은 무상한 것이고 나라고 할 것이 없는데, 無明, 즉 어리석음으로 인해 모든 것이 항상 있다거나, 나 또는 실체가 있다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또는 “세상은 무상한 것이고, 무상한 것은 괴로운 것이고, 괴로운 것이기 때문에 나라고 할 것이 없다. 즉, 無常· 苦· 無我이다.” 그리고 이렇게 마무리하기도 합니다. “지혜가 없어 괴로운 것이지, 지혜를 얻으면 세상을 바로 보기 때문에 괴로울 것이 없어.” 이러한 내용들을 보면, 한편 와 닿으면서도 한편 와 닿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바로 ‘세상’이라는 부분입니다. ‘세상’을 나를 둘러싼 ‘세상 그 자체’라고 본다면, 과연 세상이 괴로운 것일까요?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라고 한다면, 무상하지 않으면 괴롭지 않게 되는 것일까요? 지혜를 얻게 되면(깨닫게 되면) 괴로움이 없게 된다고 하는데, 그때 무상한 세상이 항상 하는 세상으로 바뀌게 되어 괴로움이 없게 되는 것일까요? 깨닫게 되더라도 변함없이 세상은 成住壞空의 과정을 거칩니다. 지구는 돌고, 계절은 바뀝니다. 옆에 있는 사람도 결국 죽고, 옛날의 원수도 만날 수 있습니다. 깨닫게 되더라도 세상은 여전히 무상합니다.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롭다고 한다면, 깨닫는 이가 사는 세상도 무상하니 깨닫는 이도 역시 괴로워야겠지요. 하지만 그렇지는 않습니다. 세상은 여전히 무상하지만 지혜를 얻게 되면 세상이 무상하다는 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그 결과로 괴로움도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데, 그 세상을 보면서 이렇다 저렇다 헤아리면서 자신과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보면, ‘세상 자체’는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닌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에 의해 분별된 세상을 실체화시키고 절대화시켜 놓고 또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여 온갖 감정을 쏟아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세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강조해온 바대로,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입니다. ‘諸行’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마음 작용[行]’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고, ‘諸法’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法]’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모두 ‘내 마음’과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말합니다. 또 어렵다고 할지 몰라,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어느 불교대학 수업 시간에 한 불자가 질문하였습니다. “선생님, 왜 기독교 믿는 나라는 잘살고, 불교 믿는 나라는 못삽니까?” 아마, 그 불자가 이 땅의 불교를 고민한 가운데 나온 질문일 것입니다. 누구나 한번쯤 가져 보았을 의문입니다. 그런데, 그 강사는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그, 질문하신 분의 잘 산다는 기준은 무엇입니까?” “…” 같이 생각해 봅시다. 잘산다는 기준이 무엇인지. 필자는 가끔 業이라는 용어를 선입견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자신이 살아온 과정 속에서 여러 가지 기준을 만듭니다. 그리고 그 기준을 가지고 이런저런 것들을 판단합니다. 살아온 과정을 業이라고 한다면, 그 업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기준들이 선입견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은 선입견의 덩어리입니다. 그런데 선입견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기준이 바른 것인 양 모든 것에 적용시킵니다. 그 기준에 맞으면 좋은 것이고 그 기준에 맞지 않으면 나쁜 것입니다. 언제가 중국 고산 지역 주민의 삶을 다룬 프로그램을 TV에서 보았습니다. 여인들이 모든 가정 일을 책임지는 마을입니다. 여인들은 나무 기둥을 등에 지고 높은 산을 오르기도 하고, 농사를 짓기도 합니다. 어쩌면 힘든 삶입니다. PD가 묻습니다. “희망이 뭡니까?” “오늘처럼 사는 겁니다.” 그 여인의 눈은 너무도 맑았고, 얼굴에도 행복한 미소가 가득하였습니다.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중생이 괴롭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중생이 깨끗하다.” 『잡아함경』 - 목경찬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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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문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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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무상하지만 지혜를 얻게 되면
세상이 무상하다는 바로 그 사실을 알게 되어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그 결과로 괴로움도 사라집니다.
즉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데,
그 세상을 보면서 이렇다 저렇다 헤아리면서
자신과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는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닌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에 의해 분별된 세상을
실체화시키고 절대화시켜 놓고
또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여
온갖 감정을 쏟아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세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입니다.
‘諸行’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마음 작용[行]’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고,
‘諸法’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法]’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모두
‘내 마음’과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말합니다.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중생이 괴롭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중생이 깨끗하다. -
작성자도문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13
유유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데,
그 세상을 보면서 이렇다 저렇다 헤아리면서
자신과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시 생각해보면, ‘세상 자체’는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닌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에 의해 분별된 세상을
실체화시키고 절대화시켜 놓고
또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여 온갖 감정을 쏟아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세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계속 강조해온 바대로,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입니다.
‘제행’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마음 작용[行]’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고,
제법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모두 ‘내 마음’과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말합니다.
“마음이 괴롭기 때문에 중생이 괴롭고,
마음이 깨끗하기에 중생이 깨끗하다.” 잡아함경
세상은 무상하다는 지혜를 알면
집착하는 마음이 사라지고,
괴로움도 사라집니다. -
작성자유유2 작성시간 26.06.14 제행무상
세상이 무상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어리석고 집착하기 때문에
괴로운 것입니다.
세상은 그냥 그렇게 흘러가는데,
그 세상을 보면서
이렇다 저렇다 헤아리면서
자신과 맞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에
괴롭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 자체’는
괴로운 것도 즐거운 것도 아닌
하나의 사건일 뿐입니다.
그런데 나에 의해 분별된 세상을
실체화시키고 절대화시켜 놓고
또 그것을 이렇게 저렇게
분별하여 온갖 감정을 쏟아냅니다.
즉, ‘제행’, ‘제법’, ‘일체’는
세상 자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입니다.
‘제행’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마음 작용[行]’의 측면에서
나타낸 것이고,
‘제법’은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을
‘내 마음으로 이해한 세상[法]’의
측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