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도
모든 인식의 결정은 인연조합, 연기일 뿐이다. 무자성, 무실체이기에 무상이요, 무아이다.
그러하기에 자기중심주의적 독단과 편견을 파괴할 수 있다.
모순과 편견의 갈등 속에서 업을 쌓고 너의 파멸은 나의 승리라고 착각하는 중생의 슬픈 양태를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잡아함경에서 유와 무는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
두 가지 의지처인데 이러한 두 극단을 떠나 중도가 있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이 있기 까닭에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는 까닭에 저것이 일어나기 때문이라고 하신 것과 같이
유와 무, 단과 상이라는 대립된 두 견해를 완전히 떠난 경지를 중도라고 한다.
유와 무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면 괴로움을 비롯한 모든 현상의 변화를 있는 그대로 볼수 있다.
중도원리는 삶과 죽음, 괴로움과 즐거움 등 모순과 대립을 해결해 준다.
그리하여 차별을 평등으로, 모순을 조화로, 대립을 협동으로, 무지를 지혜로 승화시키고 있다.
따라서 중도사상은 상호협조, 평화적 공생공존의 실천이다.
언어도단
8만4천법문은 불법의 진실을 언어 문자로 표현한 것이지만,
선불교에서 보면 중생을 위한 방편법문이지 불법 그 자체는 아니다.
부처님이나 조사도 설할 수 없는 불법이란 무었인가?
불법 그 자체는 체험적 인식이므로 중생들에게 말로 전할 수는 없다.
그래서 불법의 진실을 각자 본인이 직접 체험하여 스스로 체득해야 한다.
'불립문자 이심전심'이라는 선종의 이론도 능가경의 일자불설이란 정신을 토대로 주장한 것이며,
세존이 꽃을 들어 보이고 가섭이 미소로 대답한 '염화미소'처럼 교외별전 이심전심으로 전법이 이루어진다.
반야는 말장난을 쉬고, 허망한 개념화작용을 그치게 한다.
그리고 이러한 반야가 곧 중도이다. 중도에서 우리에게 연기법이라는 진실을 가르쳤다.
중도는 언어에 의해 야기된 모든 모순 대립을 떠난 입장이다. 즉 언어도단의 입장이 중도이다.
깨달음은 언어로 분석하고 추측하고 헤아려서는 알 길이 없다.
말 길만 끊어지지 않는다. 그 말을 움직이는 마음작용 또한 사라져야 한다. 결국 말과 생각을 떠나라는 것이다.
불립문자
A,B 두 법이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있다면 그 두 법에는 독자적인 존재성 즉 자성(svabhava)은 없다.
상대방의 도움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독자적인 존재성이 없다면 A,B 두 법은 동일한 하나의 법이다.
A는 곧 B요, B는 곧 A이다. 동시에 AB라는 한 쌍의 양식이다.
이렇게 평등한 두 법에 대해서 누가 만일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을 인정한다면, 그것은 식별이요 분별이다.
두 법의 실상을 보지 못한 망념이다. 망념이 있으면 이 무명 망념을 연하여 생사의 괴로움이 일어난다.
모순 대립은 허망한 언어의 유희 즉 희론이다.
언어는 그 언어에 상응하는 실체가 없어 허망한 것이다. 허망한 언어를 떠나 실상을 보아야 한다.
생사는 중생들이 자아라는 망상을 고집할 때 나타나는 착각이며, 아상을 버리면 생사윤회는 사라진다.
반야는 말장난을 쉬고, 허망한 개념화작용을 그치게 한다.
중도는 언어에 의해 야기된 모순 대립을 떠나는 것입니다. 언어도단이 중도입니다. 불립문자는 바로 중도입니다.
중관학
공사상의 귀착점은 연기설의 정신인 중도이다. 연기와 공과 중도의 관계를 논증하기 위해 팔부중도를 설한다.
영원주의 허무주의, 유물론 유심론 등 전제적 철학은 모두 부정된다.
상호의존 관계외 독립적 존재를 부정하며 창조설 존재론도 부정한다.
언어의 허구에 의하여 실체화하여 만들어 내는 분별과 희론의 형이상학을 공의 원리로 논파하는 것이 중관학의 목적이다.
언어와 사물을 이원적으로 분별하는 마음작용을 떠나라. 중도설은 어떤 사물도 자성이 있어서 생하는 것이 아니다.
공도 실재로 존재하는 실체나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시설일 뿐이다.
공사상을 실천적 측면에서 보면 자유의지를 강조하며, 인과설의 긍정으로 창조적인 삶을 가르친다.
반야의 중도사상은 희론 적멸과 그 실천인 보살도로 이어진다.
공설의 진의는 실체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나는 데 있다.
공은 진리를 밝혀 주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지, 형이상학적 진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