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오신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 당시 思考에 있어서 엄청난 혁명이었습니다. 물론 그러한 사고의 혁명은 오늘날에도 요구됩니다. 부처님 가르침과 함께 하기는 하지만, 다양한 사상의 회오리 속에 우리의 사고도 요동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처님 당시 인도에 퍼져있는 사상을 크게 轉變說과 積聚說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이 두 견해와 달리 부처님은 연기법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댜부분 연기법을 상호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합니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연기법을 상호관계성이라고 이해한다면 무엇과 무엇의 상호관계성인지가 중요합니다. 앞의 전변설과 적취설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그 속에도 상호관계성이 작용하고 있습니다. 절대자가 만든 것이지만, 그 만들어진 것 속에서도 상호관계성이 존재합니다. 가령 내가 탁자를 만들었다고 하면 탁자 다리의 상호관계성에 의해 탁자는 유지됩니다. 적취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지· 수· 화· 풍 으로 된 몸뚱이이지만, 어느 하나가 어긋나면 몸에 병이 옵니다. 전변설로 된 세상이든 적취설로 된 세상이든 그 세상도 상호관계성 속에 있습니다. 이처럼 단지 상호관계성만으로는 전변설· 적취설과 연기법에 대해 큰 차이를 발견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 당시 연기법이 사고의 혁명을 일으켰듯이, 연기법에 대한 이해에 사고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전변설과 적취설은 ‘세상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법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습니다. 즉, 연기법은 바깥 사물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작용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어찌 보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생사고락이 펼쳐지는가?’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과 ‘저것’은 사물과 사물,대상과 대상이 아니라, ‘무명, 행, 식’ 등 12연기 지분으로 마음작용을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전유경(箭喩經)』에 나오는 ‘독화살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세상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이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 이에 부처님께서 독화살의 비유를 들면서, ‘독화살이 몸에 박혔으면 독화살을 먼저 뽑아야 한다. 그런데 그 화살을 쏜 사람이 누구인지, 화살의 재료가 무엇인지 알기 전에는 치료받지 않겠다고 한다면 곧 죽게 된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는 이 소견 때문에 나를 따라 수행한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세상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苦集滅道 四聖諦라고 말씀하십니다. 사성제는, 괴로움[苦]은 갈애[集] 때문에 생기고, 괴로움을 떠난 열반[滅]을 팔정도 등 수행[道]을 통해 이르게 된다는 부처님 가르침입니다. 즉, 갈애와 무명으로 얼룩진 마음 작용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므로, 팔정도 등의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이 끝이 있는가, 없는가?’ 등 세상 자체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중심이 있습니다. 굳이 말한다면 ‘세상(우주)이 끝이 있는가, 없는가?’는 천문학 쪽의 관심 영역입니다. 부처님은 그것을 무시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고 중심이 다른 것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 목경찬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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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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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도문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new
유유
전변설과 적취설은
‘세상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법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습니다.
즉, 연기법은 바깥 사물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작용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어찌 보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생사고락이 펼쳐지는가?’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과 ‘저것’은 사물과 사물,대상과 대상이 아니라,
‘무명, 행, 식’ 등 12연기 지분으로 마음작용을 말합니다.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苦集滅道 四聖諦라고 말씀하십니다.
즉, 갈애와 무명으로 얼룩진 마음 작용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므로,
팔정도 등의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부처님 가르침은 ‘세상이 끝이 있는가, 없는가?’
등 세상 자체에 중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에 중심이 있습니다. -
작성자도문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new
유유
전변설과 적취설은
‘세상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법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습니다.
즉, 연기법은 마음 작용의 상호관계성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어찌 보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생사고락이 펼쳐지는가?’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과 ‘저것’은 사물과 사물,대상과 대상이 아니라,
‘무명, 행, 식’ 등 12연기 지분으로 마음작용을 말합니다.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길이 아니고,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한결같이 말하는 법은
사성제라고 말씀하십니다.
갈애와 무명으로 얼룩진 마음 작용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때문에 괴로움이 생기므로,
팔정도 수행을 통해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괴로움이 소멸된 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작성자도문3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6.06.23 new
유유
전변설과 적취설은 ‘세상 자체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다고 한다면,
연기법은 ‘내가 세상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 어떻게 이해하는가?’에 사고의 중심이 있습니다.
즉, 연기법은 바깥 사물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는 게 아니라 마음 작용의 상호관계성에 중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세상을 어찌 보기에 이렇게 살고 있는가,
내가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기에 이렇게 생사고락이 펼쳐지는가?’ 살펴보게 됩니다.
‘이것’과 ‘저것’은 사물과 사물,대상과 대상이 아니라, ‘무명, 행, 식’ 등 12연기 지분으로 마음작용을 말합니다.
이러한 점에서 『전유경(箭喩經)』에 나오는 ‘독화살의 비유’는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세상은 항상한가, 무상한가? 세상은 끝이 있는가, 끝이 없는가? 목숨이 곧 몸인가,
목숨과 몸이 다른가? 여래는 마침이 있는가, 없는가? 아니면 마침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는가?
세상이 항상하다거나 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생로병사와 근심 걱정은 있다.
또 나는 세상이 무한하다거나 유한하다고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이치와 법에 맞지 않으며, 수행이 아니므로 지혜와 깨달음으로 열반의 길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