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순서/26.06.21주일)
●예배의 부름
“내가 여호와를 항상(恒常) 송축(頌祝)함이여 내 입술로 항상(恒常) 주(株)를 찬양(讚揚)하리이다 내 영혼(靈魂)이 여호와를 자랑하리니 곤고(困苦)한 자(者)들이 이를 듣고 기뻐하리로다” (시(詩) 34:1-2)
경건(敬虔)한 마음으로 베풀어 주신 사랑을 경배(敬拜)하고 찬양(讚揚)하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주님(主님)의 권세(權勢)와 능력(能力)으로 함께하시고 하늘 사랑이 온 땅에 더욱더 충만(充滿)하게 하심을 감사(感謝)드립니다. 지난 한 주간(週間) 동안에서 세상(世上)에서 피곤(疲困)한 성도(聖徒)들이 안식(安息)을 얻게 하시고, 오늘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위로(慰勞)받게 하시옵소서. 성도(聖徒)들이 품고 살아가는 여러 가지 문제(問題)들이 오늘 말씀 들을 때 응답되게 하옵시고, 예배(禮拜)를 통하여 믿음이 견고(堅固)해져서 세상(世上)의 소금과 빛이 되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원(祈願)하옵나이다. 아멘
●찬송: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성시교독:39. 시편 95편
●회개와 고백의 기도
거룩한 하나님의 전(戰)에서 예배(禮拜)를 드리면서도 건성으로 드리고 찬송(讚頌)이 입술에만 머물고 기도(祈禱)가 혀에만 얹어 있으면서도 하나님과 깊은 영적(靈的) 교제(交際)를 유보(留保)하고 살아가는 그 자(者)가, 나는 아닌지 반성(反省)하며 회개(悔改)합니다.
빛으로 어둠을 밝히시고 소금으로 부패(腐敗)를 없애시는 하나님 아버지! 하늘 지혜(智慧)가 부족(不足)한 저희에게 하나님의 은혜(恩惠)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알게 하심을 감사(感謝)드립니다. 마음의 고통(苦痛)으로 아파하고 괴로워하였지만 그 고통(苦痛)의 이유(理由)가 무엇인지, 어디서 왔는지 깨닫지 못하고 오늘도 갈등(葛藤)의 소용돌이 속에서 삶의 이유(理由)마저 상실(喪失)한 채 무의미(無意味)한 인생(人生)을 살아온 저희를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오늘 거룩한 주일(週日)에 하나님 앞에 나아와 예배(禮拜)를 드리며 자신(自身)을 돌아볼 때에 나무나 부끄럽고 창피(猖披)하여 얼굴을 들 수 없나이다. 우리는 지난 한 주간(週間)에 세상(世上)에서 밝은 데로 다니지 않고 어두운 데서 온갖 거짓말과 행동(行動)을 하였으며, 옳고 깨끗하게 생활(生活)하지 않고 여러 가지 부정(不正)과 부패한(腐敗限) 삶을 산 것을 고백(告白)하나이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밝은 것을 밝다고 말하지 않고, 옳은 것을 옳다고 말하지 않은 허물을 고백(告白)하나이다. 우리의 부당(不當)한 죄(罪)를 고백(告白)하오니 용서(容恕)하여 주시옵소서. 우리가 때로는 세상(世上)에서 친구(親舊)들과 환담(歡談)을 나누면서 자신(自身)이 좋아하는 정당(政黨)에 편승(便乘)하여 옳지 않는 자신(自身)의 생각을 지나치게 주장(主張)하였으며, 자신(自身)이 싫어하는 정당(政黨)을 가혹(苛酷)하게 비판(批判)한 과오(過誤)를 고백(告白)하나이다. 사회(社會)의 불의(不義)를 보고도 모르는 척했으며, 사회(社會)의 정의(正義)를 보고도 공유(共有)하지 않은 허물을 고백(告白)하나이다. 가난한 이웃과 외로운 독거노인(獨居老人)의 고통(苦痛)을 외면(外面)하고 자신(自身)의 안일만 추구(追求)한 잘못을 고백(告白)하오니 용서(容恕)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祈禱)합니다. 아멘
●사도신경┃한목소리로
“나는 전능(全能)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天地)의 창조주(創造主)를 믿습니다./나는 그의 유일(唯一)하신 아들, 우리 주(主)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聖靈)으로 잉태(孕胎)되어 동정녀(童貞女)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苦難)을 받아 십자가(十字架)에 못 박혀 죽으시고, /葬事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者)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全能)하신 아버지 하나님 우편(右便)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者)와 죽은 자(者)를 심판(審判)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聖靈)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公敎會)와 성도(聖徒)의 교제(交際)와 죄(罪)를 용서(容恕)받는 것과 /몸의 부활(復活)과 영생(永生)을 믿습니다. 아멘.”
●찬송:266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기도담당(맡은이)
●하나님말씀봅니다:마태복음 5장(張) 13-16절(節)
●제목;교회(敎會)는 소금역할(役割)을 잘 감당(堪當)해야 합니다.
●말씀선포
소금은 음식(飮食)에 꼭 필요(必要)한 양념이자 방부제(防腐劑)입니다. 소금이 음식(飮食)에 들어가면 더 좋은 맛을 선사(膳賜)합니다. 소금을 생선(生鮮)을 썩지 않게 해 줍니다. 그래서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우리는 그 소금이 쓸데없다고 밖에 버릴 것입니다.
사람 중(中)에도 짠맛을 잃고 소금의 역할(役割)을 못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信仰生活)을 하는 분들 중(中)에도 믿음의 맛을 상실(喪失)하고 교회(敎會)에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맛을 잃어보린 사람의 입에서는 언제나 부정적(否定的)인 말이 아옵니다.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약(弱)합니다”, “나는 능력(能力)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소금이기를 포기(抛棄)한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짓밟히는 것처럼 그런 사람들도 세상(世上)에서 멸시(蔑視)를 받습니다. 모욕적(侮辱的)인 대우(待遇)를 받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답게 소금의 짠맛을 제대로 내고 있습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子女)요, 백성(百姓)이요, 천국(天國)의 시민권(市民權)을 가졌습니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니 나는 강(强)하다”, “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능력(能力)이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할 수 있다” 고 외치면서 세상(世上)으로 뛰어 나가 담대(膽大)하게 이 진리(眞理)를 선포(宣布)한 사람이 바로 소금의 참 맛을 내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다.
예수님게서는 “소금이 만일(萬一) 그 맛을 잃으면”에서 “만일(萬一)”이라는 말을 써서 가정문(家庭門)으로 말씀하셨습니다. “맛을 잃은 소금을 네가 보지 않았느냐? 그것은 소용(所用)이 없지 않더냐?” 이런 의미(意味)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만일(萬一) 맛을 잃는다고 하면 어디에 쓸 수 있겠느냐? 그것을 생각해 봐라”하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아무 소용(所用)이 없어서 나중에 버려지고 사람에게 밟히는 바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소금을 소금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면 맛을 잃었을 때에는 더 이상(以上) 소금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소금의 독특(獨特)한 맛은 소금으로 성립(成立)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요소(要素)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빠졌는데도 소금의 결정체(結晶體)가 좋다고 그걸 보존(保存)할 사람이 있겠는가 말입니다. 물론(勿論) 소금의 맛만을 쓰는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注意)해야 할 것은 소금이 맛을 잃는다는 의미(意味)를 “소금이 맛을 잃는 것같이 예수님을 믿는 너희들이 그 맛을 잃어 벌린다면 큰일이다. 즉(卽) 너희가 한번(番)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구원(救援)의 그 은혜(恩惠)를 상실(喪失)해 버린다면 큰일이 아니냐? 그것을 상실(喪失)해 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의 요지(要旨)를 그렇게 해석(解釋)하면 크게 잘못된 데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해석(解釋)하면 구원(救援)을 받아서 잘 지내다가 자신(自身)의 잘못으로 자기(自己)가 받은 구원(救援)의 내용(內容)을 상실(喪失)한다면 소용없다는 식(式)의 해석(解釋)이 나옵니다. 아주 잘못된 해석(海石)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번(番) 우리에게 주신 은혜(恩惠)의 생명(生命)은 영원(永遠)하고 확실(確實)한 것이므로 그 생명(生命)이 들어갔다 나왔다 하고 잘못하면 마치 소금이 맛을 잃는 것같이 잃어버리기도 한다고 생각해서는 절대로(絶對로) 안 됩니다.
소금이 하는 일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썩는 것을 막는 일입니다. 생선(生鮮)에 소금을 뿌리면 생선(生鮮)이 썩지 않습니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무와 배추가 썩지 않습니다. 삶은 콩에 소금을 뿌리면 콩이 썩지 않습니다. 소금은 썩는 일을 방지(防止)합니다.
두 번째(番째)는 맛을 내는 일입니다. 생선(生鮮)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굴비도 되고 맛있는 고등어도 됩니다. 무와 배추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김치가 됩니다. 삶은 콩에 소금을 뿌리면 맛있는 된장(된醬)이 됩니다. 소금은 맛을 냅니다.
세 번째(番째)는 스스로 없어지는 일입니다. 소금은 자기(自己)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스스로 녹아서 없어지고 맙니다.
세상(世上)에 대(對)한 신자(信者)와 교회(敎會)의 사명(使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와 교회(敎會)는 썩어져 가는 세상(世上)과 사회(社會)를 썩지 않도록 막는 일을 하여야 합니다. 이 세상(世上)과 사회(社會)는 그대로 놔두면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가정(家庭)도 썩고 학교(學校)도 썩고 사업(事業)도 썩고 정치(政治)도 썩을 수 밖에 없습니다. 거짓과 부정(不正) 부패(腐敗) 그리고 폭력(暴力)과 향락(享樂)과 퇴폐(頹廢)가 판을 치고 있는 곳이 이 세상(世上)이요 사회(社會)이기 때문입니다.
100여년(餘年) 전(前) 복음(福音)이 한국(韓國)에 들어왔을 때 교회(敎會)는 소금의 역할(役割)을 했습니다. 썩어져 가는 한국(韓國)의 사회(社會)가 썩는 것을 막는 일을 했습니다. 정직(停職) 운동(運動)이 일어났고 절제(節制) 운동(運動)이 일어났고 사랑 운동(運動)이 일어났습니다.
오늘의 한국교회(韓國敎會)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썩는 것을 막고 있습니까? 함께 썩어져 가고 있습니까? 한국교회(韓國敎會)는 지금(只今) 향락관광(享樂觀光) 퇴폐관광(頹廢觀光)을 막지 못할 뿐 아니라 향락관광(享樂觀光)에 함께 참여(參與)하기도 합니다. 맛을 내고 있습니까? 오히려 맛이 없어지게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자(信者)의 맛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 없어지며 희생(犧牲)하고 있습니까? 오히려 자신(自身)을 드러내며 이익(利益)과 명예(名譽)만을 추구(追求)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지금(只今) 한국교회(韓國敎會)는 존경(尊敬)을 받는 대신(代身) 비난(非難)과 멸시(蔑視)를 많이 받고 있습니다. 모두가 내 탓이라는 겸허(謙虛)한 참회(懺悔)도 별로(別로)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우리가 소금의 직분(職分)을 감당(堪當)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世上)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 말씀을 전(傳)하고 가르치는 것인데, 그러나 이것이 전부(全部)가 세계(世界)가 멸망(滅亡)하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세계(世界)는 망(亡)해서 마지막에 심판(審判)을 받을 것이지만 당장(當場)에 심판(審判)을 받지 않도록 그 기간(期間)을 미뤄 두는 일을 할 뿐입니다. 부패(腐敗)를 조금씩이라도 방지(防止)해 주는 것뿐입니다. 부패(腐敗)해서 결국(結局) 망(亡)하고 말 그 시간(時間)까지, 하나님께서 정(定)하신 사람을 다 부르실 그때까지 우리를 통해서 막아 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일에 생명(生命)을 바쳐야 합니다. 소돔과 고모라를 생각해 보십시오. 소금과 고모라가 망(亡)해 갈 때 의(義)의 열사람이 존재(存在)했더라면 그 당장(當場)에 그렇게 망(亡)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망(亡)하지 않고 잘 살았을 것이라는 말은 아니지만 거기에 의인(義人) 열사람, 즉(卽) 부패(腐敗)를 방지(防止)하는 요소(要素)들이 거기에 없어서 썩은 생선(生鮮)과 같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그냥 심판(審判)해 버리셨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교회(敎會)의 소금 노릇에 대(對)해서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교회(敎會)가 자체(自體)로는 신령(神靈)하고 거룩하고 하나님을 사모(思慕)하고 날마다 울며 기도(祈禱)할는지 모르나 만일(萬一) 고립(孤立)되어 있어서 사회(社會)와 접촉(接觸)해서 구체적(具體的)인 작용(作用)을 하지 않고 설령(設令) 접촉(接觸)할지라도 그냥 표면해(表面海) 불과(不過)하지 아무런 작용(作用)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치 소금이 소금 그대로 있고 접촉(接觸)한 것과는 아무 상관(相關)이 없는 것과 같은 경우(境遇)입니다.
소금 가마니에서 소금을 가져다가 시멘트 바닥이나 어디에 놓더라도 그것이 결국(結局)은 차츰차츰 용해(溶解)되어 가면서 자기(自己) 맛을 내기 마련인데 소금이 소금 그대로 있고 접촉(接觸)한 것과는 아무 상관(相關)이 없는 경우(境遇)를 상상(想像)해 보면 됩니다. 나무 궤짝(櫃짝)에 소금을 담아 가만히 두면 나중에는 그 나무에도 염분(鹽分)이 배어들어 갑니다. 그런데 만일(萬一) 그런 일이 전연(全然) 없이 나무는 나무대로 있고 소금은 소금대로 있다고 가정(假定)한다면 완전히(完全히) 유리(遊離)되고 고립(孤立)된 상태(狀態)가 됩니다.
우리가 교회공동체(敎會共同體)에 속(屬)한 지체로써 신령(神靈)하고 거룩한 생활(生活)을 하지 못하고 자신(自身)들만의 유익(有益)을 도모(圖謀)한다면 소금따로 나 따로가 되는 따로인생(人生), 쩌로 성도가 되고 말 것입니다. 성도는 세상(世上)과 고립(孤立)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敎會)도 고립(孤立)되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敎會)로서의 사명(使命)을 확실(確實)하게 드러낼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社會)가 정상적(正常的)인 방향(方向)에서 이탈(離脫)하여 나가면 강(强)하게 잘못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하고, 또한 교회(敎會)가 방향(方向)을 잊어버리면 강(剛)하게 말을 하여 방향(方向)을 수정(修正)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敎會)에게 허락(許諾)된 사명(使命)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속성(屬性)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소금이라고 하신 것은 세상(世上)과의 접촉(接觸)에서 작용(作用)을 하라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共同體) 안에 들어가 소금과 같이 적극적(積極的)이고 구체적(具體的)이고 결과(結果) 있는 작용(作用)을 하지 않으면 의미(意味)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敎會)가 소금 노릇의 색깔(色깔)은 늘 한 가지여야 합니다. 그것은 변함없는 색깔(色깔)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때에 따라 오늘은 이 색깔(色깔), 내일(來日)은 저 색깔(色깔)의 변화(變化)를 보여서는 안 됩니다. 소금의 맛이 한 가지의 맛을 가지고 존재(存在) 가치(價値)를 드러내는 것처럼 교회(敎會)도 한 가지의 색깔(色깔)만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은 소금대(臺)로 자기(自己)의 독특(獨特)한 짠맛을 늘 유지(維持)하고 있어서 어디 가든지 맛을 잃지 않고 작용(作用)해서 자기(自己)도 짤 뿐 아니라 접촉(接觸)한 거기도 짜게 만들어 놓고 그로 말미암아 부패(腐敗)를 방지(防止)하는 데에 늘 중요(重要)한 의미(意味)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事實)을 망각(忘却)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敎會)가 어떻게 하면 이 사회(社會)에서 진정(眞正)한 소금 노릇을 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정말로(正말로) 주의(注意)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소위(所謂) 세속화(世俗化)입니다. 오늘의 시대(時代)는 세속주의화(世俗主義化)와 세속화(世俗化)는 다른 것이라고 말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세속화(世俗化)라는 말이 벌써 전(前)에 있던 말인데 왜 하필(何必) 있던 말을 따 가지고 딴 의미(意味)를 붙이느라고 애쓰는지 모르겠습니다. 말도 만들려면 좀 다른 말로 멋있게 조작(造作)을 했으면 나을 텐데 꼭 있던 말, 오해(誤解)하기 쉬운 말을 갖다 써 가지고 애매(曖昧)하게 이것인지 저것인지 모르게 알쏭달쏭하게 만드는 요새 사람들의 방식(方式)이 썩 찬성(贊成)할 만한 일은 못 됩니다.
세속화(世俗化)라는 말은 교회(敎會)가 사회(社會)와 너무 유리(遊離)되어 있으니까 사회(社會)와 직접(直接) 접촉(接觸)해서 적극적(積極的)으로 노력(努力)해서 사회(社會)에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해야겠다는 말입니다. 교회(敎會)가 소금 노릇을 한답시고 소금이라고 자처(自處)하고 들어가서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고 딴 것이 되어 버리면 더 이상(以上) 소금 노릇을 못하는 것입니다. 교회(敎會)가 사회(社會) 참여(參與)를 한다고 사회(社會)에 직접(直接) 관여(關與)해서 사회(社會)에 봉사(奉仕)를 한다거나 정치(政治)에 가담(加擔)해서 정치적(政治的)으로 활동(活動)하고 무엇을 해야겠다고 한다면 그것은 “교회(敎會)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本質的)인 속성(屬性)”을 구체화(具體化)하는 문제(問題)가 아닌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교회(敎會)가 인간(人間)의 편법(便法)을 통해 자기(自己)네의 주장(主張)을 얻기 위해 기독교(基督敎)라는 이름을 자꾸 가지게 만들어 사람의 수(數)만 채우는데 목적(目的)을 둔다면 그것은 진정(眞正)한 싸움이 아닙니다. 이것을 항상(恒常) 주의(注意)해야 할 문제(問題)입니다.
요즘에는 교인(敎人)의 수(數)가 많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교회성장(敎會成長) 주의(注意)라는 이상(異常)한 현상(現象)이 교회(敎會)를 지배(支配)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증거(證據) 하는 정상적(正常的)인 교회(敎會)로 성장(成長)하는 것이야 이루 말할 수 없는 아름다운 모습이지만, 그러나 교회(敎會)의 속성(屬性)을 드러내는 데는 그리스도의 복음(福音)을 떠나서는 결코(決코) 이룰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적(世上的)인 방법(方法)을 사용(使用)하여 사람의 수(數)가 많이 모였다 해서 이것이 저절로 정상적(正常的)인 교회(敎會)가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점(點)을 솔직(率直)하게 인정(認定)하여야 합니다. 사회(社會) 참여(參與)라는 미명(美名)아래 복음(福音)의 떠나, 세상(世上)에 소금이라는 역할(役割)을 망각(忘却)하고 운동권(運動圈)의 사고방식(思考方式)대로 하면 진정(眞正)한 교회(敎會)의 사회참여(社會參與)라고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기독교인(基督敎人)들이 세속화(世俗化)에 빠져 사회(社會)에 참여(參與)하는 모습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교회(敎會)는 하나님의 영광(榮光)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능력(能力)을 표방(標榜)하고 그것에 의존(依存)해서 사회(社會)에 어떤 작용(作用)을 하는 대신(代身) 자기(自己)의 수(數)나 자기(自己)의 교세(敎勢)나 자기(自己)가 가지고 있는 재력(財力)을 의지(依支)해서 활동(活動)하게 된 것이 오늘날의 사회(社會) 참여(參與)라는 이데올로기이고 프로그램입니다. 이런 프로그램에 가담(加擔)한다는 것이 소금 노릇을 하는 것이냐 하면 오히려 소금의 맛을 잃는 행위(行爲)입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요즘 청년(靑年)들이나 지도(指導)한다는 사람들이 ‘교회(敎會)는 사회(社會) 참여(參與)를 해야 한다. 무엇에는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에는 어떻게 해야 한다’고 주장(主張)을 합니다. 그러나 교회(敎會)는 그것보다 더 위대(偉大)한 것, 그것보다 좀 더 본질적(本質的)인 것, 세상(世上)이 줄 수 없는 것을 줄 때 소금이지 한 개(個)의 단체(團體)로서 혹은(或은) 한 개(個)의 종교(宗敎)로서 남들이 다 줄 수 있는 것을 주면서 소금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여간(如干) 오해(誤解)가 아닌 것입니다. 이런 것이 그릇된 생각입니다.
세상(世上)과 접촉(接觸)이 없이 은둔(隱遁)하고 도피(逃避)하는 것은 소금이 아니라고 했지만 소금 노릇을 한답시고 세상(世上)에 들어가서 세상(世上)의 큰 프로그램의 한 부분(部分)이 되어 버리는 것은 소금이 자기(自己)의 맛을 잃어버리는 일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다시 짜게 하겠느냐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금의 맛을 중요히 말씀하셨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萬一)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和睦)하라”(막9:50). 이 말은 너희 속에도 ‘소금을 치라고 하셔서 소금 없는 딴 짓을 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기독교(基督敎)의 본질적(本質的)인 맛을 잃어버린 다른 것을 가지고 기독교인(基督敎人) 줄 알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두 가지 점(點)을 항상(恒常) 우리가 중요히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必要)한 것은 소금의 노릇을 하기 위해 그릇된 세속화(世俗化)에 같이 빠져 드는 것에 삼가 조심(操心)해야 할 것이고, 그리고 내 자신(自身)은 소금의 맛을 잃어버리지 않고 소금 노릇을 정당(正當)하게 하고 있느냐입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 자기(自己)의 성질(性質)을 확보(確保)하고 있어야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이 맛을 잃으면 안 됩니다. 소금이 소금으로서 자기(自己)의 그 독특(獨特)한 성격(性格)을 늘 변함없이(變함없이) 간직하고 있어야 합니다. 소금이 되려면 끝까지 소금답게 자기(自己)의 짠맛을 보존(保存)하고 있어야 합니다.
교회(敎會)가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하려면 “예수님의 제자(弟子)로서 자기(自己)의 확실(確實)한 태도(態度)를 취(取)할 수 있어야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금으로서의 확실(確實)한 자기(自己)의 위치(位置)를 갖게 되는 것이고 역할(役割)을 하는 것입니다. 소금 노릇을 하려면 주님(主님)의 제자(弟子)로서 자기(自己) 전부(全部)를 바치고 주님(主님)이 원(願)하시는 대로 좌우간(左右間) 전진(前進)해 나가야 합니다.
교회(敎會)가 참으로 소금 노릇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 줄 확실히(確實히) 알고 깨달아야 소금 노릇”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소금이 자기(自己)의 본질(本質)을 확실히(確實히) 보유(保有)하여 소금으로서 조건(條件)을 구비(具備)되어야 자기(自己) 본질(本質)을 잃어버리지 않고 소금 노릇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各自)가 소금이 되어서 가는 곳마다 복음(福音)의 맛을 지키고 부패(腐敗)를 막아내는 진정(眞正)한 복음(福音)의 소금이 되시기를 주님(主님)의 이름으로 축원(祝願)합니다.
●목회기도┃
우리에게 주(株)를 의지(依支)하고 순종(順從)하는 자(者)를 충성(忠誠)된 종(種)으로 인정받게 하시는 하나님 아버지! 세상(世上)이 아무리 흔들려도 따라서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믿음 위에 굳게 서서 오직 주님(主님)만 따라가게 하심을 감사(感謝)드립니다. 주님(主님)께 기도(祈禱)하는 모든 자녀(子女)들 위에 축복하사(祝福下士) 믿음이 부족(不足)한 자(者)에게는 강건(强健)한 믿음을 허락(許諾)하여 주시오며, 헌신(獻身)이 필요(必要)한 자(者)에게는 기쁨으로 드릴 수 있는 마음을 허락(許諾)하여 주시옵소서. 무슨 일이 맡겨지든 간(間)에 충성(衷誠)되게 일할 수 있게 하옵소서. 작은 일에 충성하게 하시며 큰 일을 맡으면 충성할 수 있는 능력(能力)과 믿음을 허락(許諾)하여 주시옵소서. 주님(主님)께 헌신(獻身)하고자 하오나 육신(肉身)의 병(病) 때문에, 가정(家庭)의 어려움 때문에, 직장(職場)의 문제(問題) 때문에 주님(主님) 앞에 드려지는 열심(熱心)과 시간(時間)이 적어지지 않게 하옵소서.
주님(主님)께서 세워 주신 저희 교회(敎會)에 속(屬)한 기관(機關)들이 봉사(奉仕)하고 헌신(獻身)할 때 주님(主님) 보시기에 좋았다는 말씀으로 위로 받게 하옵소서. 오늘도 예배(禮拜)하는 저희 무리(無理) 위에 신령(神靈)한 하늘의 불기둥과 구름 기둥이 임(臨)하는 산(山) 제사(祭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소금처럼 살지 않으면 아무 쓸데가 없어서 버려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기억(記憶)하고 깨끗하게 살게 하시옵소서. 주님(主님)께서 너희는 세상(世上)의 빛이라고 말씀하셨으니 어떠한 경우(境遇)에도 어둡게 살지 않게 하시고, 세상(世上)의 죄악(罪惡)을 물리치고 올바르게 살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세상(世上)에서 옳지 못한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게 하시고, 밝게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祈禱)합니다. 아멘
●찬송: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헌금기도
하늘 보좌(補佐) 위에 계셔서 우리를 지켜보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거룩한 주일(週日)에 하나님의 성전(聖殿)에 나와 은혜로운 말씀을 듣고 너무나 감사(感謝)가 넘쳐서 예물(禮物)을 봉헌(奉獻)하게 하심을 감사(感謝)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人生)을 통촉(洞燭)하시고 일일이(一一이) 간섭(干涉)하시는 줄로 믿사오니,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숨기지 않게 하시고, 우리의 가진 것을 모두 드러내놓고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우리가 열심히(熱心히) 일하여 정직(正直)하게 돈을 벌게 하시고, 우리가 소금과 빛처럼 깨끗하게 번 돈 가운데서 정성껏(精誠껏) 예물(禮物)을 구별(區別)하여 봉헌(奉獻)하오니 기쁘게 받아 주시옵소서. 우리가 말씀대로 사람들 앞에서 착한 행실(行實)로 돈을 벌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돌리게 하시옵소서.
주님(主님) 악(惡)속을 믿고 십일조(十一租) 예물(禮物)을 드립니다. 주(州)와 언약(言約)한 작정(作定) 헌금(獻金)이 있습니다. 주(州)의 이름 들고 나간 선교사(宣敎師)를 위해서 드리는 눈물 어린 선교(宣敎) 헌금(獻金)이 있습니다. 바치는 손길 위에 함께하사(下士) 반드시 복(福) 주고 복(福) 주며 번성(蕃盛)케 하고 번성(蕃盛)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축복(祝福)의 말씀이 저희들에게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특히(特히) 일용(日用)할 양식(糧食)을 떼어 성미(性味)로 봉헌(奉獻)하는 적은 손이 있습니다. 그 손으로 만져지는 것마다 주의(注意) 형통(亨通)의 역사(歷史)가 있게 도와주옵소서. 이 헌금(獻金)이 쓰여지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歷史)가 일어나는 불쏘시개가 되어 하나님께는 영광(榮光)을 드릴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물(禮物)을 드린 성도(聖徒)들에게는 하늘의 신령(神靈)한 것으로 베풀어 주시사 하늘의 이슬과 땅의 기름짐으로 풍성(豐盛)케 하옵시고, 가정(家庭)마다 차고 넘치는 백(百) 배(倍)의 보배가 가정(家庭)과 하늘 창고(倉庫)에 쌓이는 감격(感激)을 보는 믿음을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祈禱)합니다. 아멘
●축도
지금(只今)은 영원(永遠)한 생명(生命)으로 인도(引導)하시는 구주(救主)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恩惠)와 흐르는 눈물을 닦아 주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을 기억나게 하시고 가르치게 하시는 성령(聖靈)님의 위로(慰勞)가 예배(禮拜)의 산 제물(祭物)이 되시는 성도(聖徒)들 위에 영원(永遠)토록 함께 계시기를 축원(祝願)하옵나이다. 아멘
●찬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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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순서/26.06.21주일)
●찬송364장 (내 기도하는 그 시간)
●성시교독39. 시편 95편
●회개와 고백의 기도┃
●사도신경┃한목소리로
나는 전능하신 아버지 하나님, 천지의 창조주를 믿습니다.나는 그의 유일하신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아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하늘에 오르시어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나는 성령을 믿으며, 거룩한 공교회와 성도의 교제와 죄를 용서 받는 것과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 아멘.
●설교전:266장 (주의 피로 이룬 샘물)
●기도:맡은이
●성경봉독:마태복음 5장13-16절
●말씀선포
제목;교회는 소금역할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설교후기도
●찬송:419장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봉헌기도
●축 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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