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絲綢之路(실크로드)---富와 文明의 길

작성자가은(佳隱)|작성시간15.11.03|조회수113 목록 댓글 3

 여행은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지나간 과거의 것을 보고 느껴 지금의 우리를 돌아보고 되새기게  한다. 허나 실크로드는 그야말로 길위의 여행이다. "인생은 나그네길" (최희준의 노래) "길"(이태리영화),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윤심덕노래)이런 말들이 계속 입속에서 맴돌았다. 삶은 아름답게 포장된 길이 아닌 이런 고비(戈壁-몽고말 음차한것으로 돌과 자갈이 있는 거친땅)사막을 끝도 없이 걷고 , 낙타를 타고 힘겹게 통과해야 하는 것이란 것을..

  그 길에선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참혹한 전쟁이 무수히 많았다. 玉門關(옥문관-서쪽관문), 陽關(양관-남쪽관문),嘉峪關(가욕관-만리장성의 서쪽끝 관문).  이런 관문들은 기원전부터 중국역사에서 이민족들과 밀고 당기고 했음을 보여주는 곳이다. 흉노(돌궐 몽고등 유목민족들)쪽에서 보기엔 자기들 땅이기에 뺏어야 하는 곳이었으리. 지금의 국경은 청의 강희제때 대부분이 만들어졌다고 하니.

  가도가도 끝없는 고비사막, 사람도 집도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곳을 달리고 또 달렸다, 중국땅이 넓다고 하나 이곳은 그 넓음을 보여주는게 달랐다. 도저히 사진으로도 TV로( 산으로 둘러싸인 우리가 가늠하지 못하는) 상상할 수 없는 광야였고 그 끝에는 만년설이 덮인 기련산맥이 보였다.  중국땅이 우리 남한땅의 96배임을 실감했다. 양관 옥문관에서 올려다본 구름한점 없는 비취빛 하늘, 맑은 공기,곱게 든 단풍,하늘거리는 억새와 갈대, 많은 중국 여행서 처음으로 진정한 가을경치를 봤다. 눈가릴곳 없이 탁트인 이곳에서 가슴이 뻥 뚫렸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명사산과 돈황석굴이다. 명사산은 억겁의 시간을 두고 자연이 만든 위대한 모래사막이다. 그리고 양 모래산 가운데 화룡점정인 월아천이 있다. 모래산속에 어떻게 이런 물이 흐를 수 있는걸까? 지금은 많이 줄어 인위적으로 물을 공급한다고 하나 옛부터 이 반달 호수가 있었다. 오래된 사막에 나무도 한 그루 있어 더욱 신비한 이곳은  느낌으로만 봐야하는 곳이다.  모래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오묘한 분위기 그야말로 物我一體(물아일체)가 되어 현실을 잊고 영원히 머물고 싶었다. 일몰을 보고자 열심히 모래산을 올라 기다리지 못하고 그냥 내려왔지만 크게 소리도 질러보고, 빠지고 미끄러지고 깔깔대며 동심으로 돌아가 자연에 몸을 맡긴 기억들이 실크로드여행의 백미이리라.

   인류문명을 변화시킨 것 두가지가 바로 종교와 전쟁이 아닐까?  돈황은 BC 1세기 한무제가 이곳을 서역진출의 전진기지로 삼은 후로  많은 나라들이 명멸했고  중국의 서안에서부터 서남아시아의 바그다드, 페르샤,인도,터키에서 유럽의 로마까지 이어졌던 옛날의 무역로의 출발지이다. 무역은 물건만 오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도 오가고 문명도 교환하게 된다. 또한 물건들이 오가는 그곳은 아주 번성하게 된다. 실크로드는 독일의 학자가 주로 많이 팔린 물품이 비단이어서 실크로드라 불리게 되었다. 천산남로 천산북로 서역남로 세가지길이 있으며  둔황, 투루판, 우루무치. 쿠차, 카슈카르.호탄,부하라 사마르칸트들의 오아시스 도시들이 번영을 누렸던 곳으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은 곳이 많다.우리는  출발지인 돈황에서 주로 邊塞詩(변새시)에 언급된 곳들에 중점을 두고 둘러봤다. 실크로드의 맛배기여서 앞으로 두번 정도는 더 와야 실크로드 여행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무역로로 장사를 위해 몇년씩 몇달씩 가다보면  위험할때가 많아 이곳에 하나씩 둘식 굴을 뚫어 부처님을 그리고 안녕을 기원하게 되었다. 이런 일이 천년이란 시간동안 지속되었으니 막고굴엔 492개의 석굴과 2400여개의 조소불상이 있다. 막고굴 말고도 서천불동이 있는데 여기는 바로 앞에 물이 흐르고 있어 홍수가 난후 많이 유실되어 17개 정도의 굴만 있는데 우리는 4개 보고 막고굴에선 9개를 봤다.막고굴 역시 1900년대 청나라 말기 어지러울때 영국의 스타인, 프랑스의 펠리오, 일본의 오타니 같은 학자들이 막고굴을 지키던 왕원록이란 도사에게 약간의 사례금을 주고 경전들을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우리나라도 일본이 가져와 해방 후 두고 간것을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펠리오는 중국에 능통한 학자로 그가 가져간 것들로" 돈황학"이란 학문은 프랑스에 가서 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은 1940년이 되어서야 막고굴에 대한 조사와 보호를 하게 되었다.1991년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천년이 넘게 사람들의 수호신이 된 부처님은 시대에 따라 다르게 그려졌다. 북위때 부터 5호16국 수,당,송,원나라때까지 벽과 천장엔 千佛(천불)이 그려졌고 소조로 된 부처님, 가섭, 아난존자의 협시불, 어마어마하게 큰 부처님도 있었다. 특히 당나라때의 부처님은 통통하고 서역의 미녀를 실제모델로 했다는 보살은 그리스의 영향을 받은 인도풍 작품으로 그 당시 많은 문화들이 넘나들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현장법사나 혜초같은 많은 스님들이 이 길로 인도까지 구도의 길을 간 곳이기도 하다.  

 벽에선 많은 경전이 나왔는데 혜초의 왕오천축국전도 여기서 나오고 각 시대별 생활상 당시 태수의 얼굴, 세계 여러나라 사람들, 우리나라 사람이 그려진 석굴도 있었다. 천년넘게 번성하던 이 도시들은 15,6세기 제국들의 바닷길이 열리며 점점 쇠퇴하게 되었다. 20세기초에 비로소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어 세계 미술사가나 불교학을 하는 사람들이 꼭 보고 싶어하는 1000년을 간직한 불교미술관이 되었다. 

  세계를 누비며 장사를 하고, 그들의 더 많은 부와 무사함을 비는 절실함이 종교를 더 키워나갔다. 종교를 위해 인도까지  간 구도자들이 거쳐간 곳, 그곳엔 멈추지 않는 진행형이 있었다. 비단처럼 아름답고 부드러운 길이 아니라 거칠고 힘든 장사길,오직 한달동안 물을 안먹어도 버틴다는 낙타만이 갈 수 있는 실크로드. 우리들은 그곳에서 오케스트라의 아름다운 화음처럼 모두가 하나가 된 마음으로 종교와 인생살이의 장엄함을 가슴에 담아 돌아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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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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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李泳煥 | 작성시간 15.11.03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 작성자沙月 | 작성시간 15.11.04 하일라이트만 모았군요. 개인적인 체험의. 정말 남다른 여행이었지 싶습니다.
  • 작성자시지중닭 | 작성시간 15.11.04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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