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난정서>는 왕희지의 걸작 중의 걸작이다.
동진 영화 9년(기원353년) 3월 3일, 왕희지는 산음(山陰)에 거주하는 일부 문사들과 함께
난정으로 가서 수계(修禊)를 거행했다. 참가한 사람들은 흥이 일어 많은 시편을 썼다.
<<난정서>>는 바로 왕희지가 이 시집의 앞에 쓴 서문의 원고이다.
서문은 당시 남방사족계층이 신봉하던 노장사상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문학사상으로도 일정한 지위를 차지한다.
전문은 모두 28행, 324자이다. 장법, 결구, 필법이 모두 완벽하다. 왕희지의 행서는 당시에
독보적이었으며, 후인들에 의하여도 "우군(왕희지)의 자체는 옛법을 한번 바꾸었다.
그의 웅혼하고 빼어난 기운은 자연스럽다. 그래서 고금이래로 그의 글을 모범으로 삼는다"
역대의 서예가들은 <<난정서>>를 천하제일행서로 추앙했다.
<<난정서>>에 관하여는 세간에 형형색색의 이야기들이 전해지고 있다. 당시 왕희지는
이 글을 쓰고 난 후에 자기의 이 작품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다시 몇 편을 써보았는데,
모두 그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이 천고의 걸작을 가보로 후손에게 전해주었다고 한다. 나중에 당태종의 수중에
들어갔는데, 여기에는 당태종이 소익을 파견해서 난정서를 빼앗았다는 전설이 있다.
당태종은 왕희지의 서법을 추앙해서, 신하 조모, 풍승소 등으로 하여금 임모본을 제작
하게 하였다. 그는 이 임모본 또는 석각탁본을 일부 황족이나 총신에게 하사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당시에 이 "진본보다 한 단계 낮은" 임모본도 낙양의 지가를 높이게
하였다. 이외에 구양순, 저수량, 우세남등의 명가들의 임모본도 후세에 전한다.
그러나, 원적은 전설에 따르면 당태종이 죽을 때 순장품으로 넣어서 영원히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한다. 오늘날 전해지는 소위 <<난정서>>는 당나라때의 임모본을 제외하고,
석각탁본도 매우 진귀하다.
가장 전기적인 색채를 지닌 것은 <<송탁정무난정서>>이다. 임모본이건 탁본이건,
모두 왕희지를 연구하는데 중요하다. 동시에 역대서법을 연구하는데에도 진귀한 자료이다
중국서법전적에는 <<난정서>>에 관한 자료가 아주 많다.
<<난정서>>를 왕희지가 쓴 것인지에 대하여는 역대이래로 논쟁이 많다.
청말과 60년대에는 상당히 격렬한 논쟁도 벌어졌었다.
위의 사진에 나온 것은 풍승소의 임모본으로 세칭 <<신룡반인본난정서>>이다.
그 이유는 신룡이란 인장이 반쪽만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