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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과 문화

55-마비정 남평문씨세기지

작성자芝山|작성시간18.03.25|조회수324 목록 댓글 2

55-20180321 수목원 마비정 문씨세거지 -지산

춘분일에 흰 눈이 펑펑 쏟아지는 것은 그리 흔한 일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도 신발 끈을 단단히 메고 오늘 가는 산행길을 나선다. 눈이 와 미끄러운 길이 미리 걱정이 되어 몇 사람이 계획을 바꾼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20여명이 참석하였다. 수목원 주차장에 모여서 수목원 안쪽에 있는 전통 정원까지 가는 길은 내리는 눈으로 장관을 이루었다. 대구 식물원 주차장에서 올라오는 계단 바로 옆에 일찍 꽃망울을 터트린 홍매에 함박눈이 내려 꽃송이에 쌓이니 홍과 백의 절묘한 조화가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안쪽에 자리한 세코이야의 기근이 하얀 눈 속에서 울뚝 불뚝 솟아올라 보는 사람들에게 기묘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매에도 흰 눈이 쌓여 눈인지 매화꽃인지 구분이 되지 않으나 꽃과 눈이 뒤섞인 모양 또한 환각의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다. 이제 막 꽃대가 올라와 꽃송이를 피우고 있는 서양양귀비 꽃 위에 눈이 내려 노랑, 빨강, 흰색이 모자익 처럼 아름답게 보인다. 일찍 온 숲과 문화반 회원들이 전통 정원에 모여 산수유 노란꽃 동백의 빨간꽃에 눈내리는 모습에 혼들이 나가있는 것 같았다. 많은 사람들이 사진기로 그리고 휴대폰으로 연신 사진을 찍기에 바쁘게 보였다.
 



 
신발이 부실하고 가파른 산길에 부담이 되는 세사람은 식물원 구경하기로하고 17사람은 11시에 출발하여 수목원 쪽문으로 나가 산길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먼저 간 팀은 문씨세거지-마비정 표시가 있는 곳에서 앞서 간 산행대장을 따라 마비정 쪽으로 향했고 뒤에 반장을 따라 온 팀은 남평문씨 세거지로 향했다. 남평문씨 세거지로 내려가는 길이 경사가 완만하여 가기 쉬운 길이라고 한다. 산길에는 작은 나무다리가 몇 군데씩 있고 미끄러운 곳도 한두 군데 있어서 쉬운 길은 아니다. 그러나 쉬엄쉬엄 눈 내리는 산길을 자연의 품속에 안긴 듯 기쁨에 젖어 즐거운 마음으로 내려왔다. 숲을 나와 보니 여전히 내리는 함박눈으로 산천이 백설로 가득차 있다. 이 풍광을 보니 김명국이가 서편제에서 부르던 판소리 사철가에 가사가 생각이 난다. “낙목한천(落木寒天) 찬바람에 백설만 펄펄 휘날리어 은 세계가 되고 보면은 月白 雪白 天地白허니 모두가 백발이 벗이로구나“  입춘이지나고 춘분인 오늘 펄펄 내리는 백설을 보니 계절을 잃어버리는 것 같다.
 



문씨 세거지에서 자동차 길을 따라 올라온 팀과 같이 만나 마비정 벽화마을에 들어섰다.  
입구에 넓은 마당에는 두 마리의 말을 철사조각으로 만들어 놓았다. 아마도 비무와 백희인 것 같았다. 지붕에 눈이 소복이 쌓이고 옛 생각을 나게 하는 백화들이 그려져 있었다. 돌배나무와 느티의 연리지도 보고 미비정 우물과 마비정 앞에서 단체사진을 찍고 내려오니 2시가 넘은 시간 2시7분에 떠난다는 하루에 두서너 번 밖에 다니지 않는다는 달성2 시내버스를 타고 문씨세거지 옆에 있는 손칼수집에 가서 삼겹살과 미나리 그리고 된장에 공기밥을 맛있게 먹었다. 보통 점심시간보다 늦게 먹어서있지 맛있게 먹고 문씨 세거지로 향했다. 눈발이 잦아들기는 했으나 여전히 눈이 내리는 길이다.
 
 


 



잘 가꾸어진 문씨 세거지에서 이영환선생의 소개로 문태갑 전장관를 만났다. 금년 89세의 나이라고 하는데 여전히 정정하다. 中谷이라는 호를 단 중곡서각을 문을 열어 보여주었다. 자기가 보았던 모든 책을 모아 놓았는데 약 5000권쯤 된다고 했다. 매화를 많이 심었다고 하면서 자기가 읽은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책을 소개하여주었다. 바로 앞에 전 대구시장을 지낸 문희갑씨 문패가 붙어있는 집이 있는데 대문에 “얻었다 한들 본래 있던 것, 잃었다 한들 본래 없던 것” 思竹軒 문희갑 이라는 글자가 붙어있었다. 대문이 닫혀있고 조용한 적막이 감도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뒤에 들으니 몇 달 전에 부인이 작고를 했다고 한다.







이야길 잘 듣고 마을 앞에 심어진 미선나무(꽃이 한껏 피어있었다), 보호수로 지정해 놓은 회화나무도 보고 마을 뒤편에 있는 텃밭에 심어놓은 매화도 보고 다시 수목월으로 넘어 왔다. 마을 뒤편에 한솔 이효상 선생의 공적비가 세워져 있어서 생경하게 보였다. 이곳이 한솔 선생과 무슨 인연이 있는 곳 인지?
눈도 개이고 진눈깨비가 내리는 오후 처음 출발했던 곳에서 해산을 하였다.
즐겁고 재미있는 산행이었다.

오늘 산행 후에 이영환선생이 좋은 시를 보내주었다.
이 시를 접하니 우리가 걷던 산세와 춘분절에 눈내리는 풍광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같은 느낌이 들었다.


     春分雪- 이영환
三月六花飜飜飛 삼월에 눈이 펄펄내리니
◐●○◐●○
雲林春入素更衣 숲속 봄이 왔는데도 나무들은 흰 옷 입었고
◑○◐●●○○
乾坤銀色衆僊蝶 하늘 가득 백설 나비가 떼로 춤추는 것아
◑○◐●○○●
踏雪山行心幼歸 눈 속 산행 동심으로 돌아가네
◐●○◐●○
韻()통을 上平 微통에서 飛. 衣, 歸를 취하고, 仄起(月)식


<마비정>
먼옛날 이 마을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비무라는 수말과 백희라는 아름다운 암말이 대나무 숲에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비무가 꽃과 약초를 구하러 멀리 떠나고 백희 만 남아 대나무 밭에 혼자 있을 때 전쟁터로 떠나는 마고담이라는 장수가 이곳을 지나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천리마가 있으면 전쟁에 이길수있다는 생각에 대나무 밭에 있던 백희를 비무로 착각하여 전쟁터로 나갈 것을 제안하며 천리마 비무의 실력을 보길 원했습니다. 이말을 들은 백희는 비무가 전쟁터에 나가 죽을 지도 모른다는생각에 비무인척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마고담은 "천리마는 화살보다 빨리 달린다고 하니 너의 실력을 봐야 되겠다." 하고 바위에 올라 건너편을 향해 화살을 날렸습니다. 백희는 힘껏 달렸지만 화살을 따라 잡을 수 없었습니다. 화가난 마고담은 백희를단숨에 베어 버렸고 백마는 피를 흘리며 쓰러져 죽었습니다. 이때 백희의 먹이를 구하러간 비무가 돌아와 백희의 죽음을 보고 슬픔에 겨워 구슬피 울었습니다.  그후로 사람들은 비무를 보지 못하고 비무의 울음소리만 들을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백희의 무덤에 꽃과 약초가 끊임없이 놓여있는 것으로 비무가 다녀간 것을 알수있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온 나라에 역병이 돌아 사람들이 죽어 갔지만 이 마을은 백희의 무덤에 놓인 약초로 인하여 역병도 돌지 않았다고 전해 내려옵니다.  그리고 마고담은 잘못을 빌고자 그곳에 정자를 짓고 일생을 마쳤습니다. 그 정자가 마비정이고 이후 이 마을은 마비정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2012년 마비정 마을이 농촌 체험 마을 사업을 통해 벽하 마을로 조성되었습니다. 마비정 벽화 마을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본리리의 산간 마을에 위치합니다.  마을 전체가 토다과 벽담을 활용하여 마비정 문지기, 오누이, 누렁이와 지게, 장독대와 메주 등의 1960~1970대의 정겨운 농촌 풍경을 벽화로 꾸몄으며 흙담과 골목길 등 토속적 자연환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습니다.  농촌체험전시장, 물레방아와 옛 우물, 주말체험농장, 느림보 웇체통 등 전통문화와 볼거리 , 체험거리, 먹을거리 등을 제공하고 있으며 마비정 누리길이 마비정 벽화마을과 연계도어 조성되어 있습니다. <참고 네이버 지식백과>





<남평문씨 세거지>
남평 문씨의 시조 문다성(文多省)은 고려 삼한벽상공신 남평백(南平伯)에 봉해지고 무성(武成)의 시호를 받았다고 한다.

문다성은 갓난 아기 때 백제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의 장자못이라는 연못가의 높은 바위 위에서 발견되었다는 전설이 있으며,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의 장자못가에 문암(文巖)이라는 전설 속의 바위가 남아 있다.[1]

전설에 따르면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남평 동쪽에 장자지란 못이 있고 그 못가에 천길 높이의 바위가 솟아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서 놀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에 오색구름이 감돌면서 갓난아이의 울음 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왔다. 신기하게 여긴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오게 하여 바위 위에 올라가 보니 석함이 놓여 있었고, 그 속에는 피부가 옥설같이 맑고 용모가 아름다운 갓난아이가 들어 있어 기이하게 생각하며 군주가 거두어 길렀다. 나이 5세에 문사에 스스로 통달하고 무략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총명하여 사물의 이치를 스스로 깨닫는지라 성을 문으로 하고 이름을 다성이라 칭했다고 한다. 그후 삼중대광 벽상공신으로 남평백에 봉해지고 98세까지 살았다고 하여 후손들이 남평을 본관으로 하게 되었다.

대종회에서는 472년(백제 개로왕 18년) 탄생은 고려 개국공신이라는 역사 기록과 맞지 않아 통일신라 말기로 정정하였다.

문다성의 아들 문탁(倬) 이후의 세계(世系)가 불분명하여 1731년 장흥 월천서원에서 발간한 남평문씨 최초의 족보인 신해보에서 문익(文翼)을 1세조로 하였고 이후 최초의 합의된 대동보에서도 중시조인 문익을 1세로 하여 세계를 정리하였으며 최신의 대동보도 이를 따르고 있다.

중시조 문익(文翼)은 1098년(숙종 3) 좌찬선대부·급사중으로 임명되었으며, 1099년 요(遼)나라에 가서 원자(元子)의 책명(冊命)을 받아와 직문하성(直門下省)으로 승진되었다. 1102년 서북면병마사(西北面兵馬使)를 역임하였고, 1103년 우산기상시(右散騎常侍)를 지냈다. 시호(諡號)는 경절(敬節)이다.

문익의 아들인 문공인(文公仁)과 문공유(文公裕)가 문과에 급제하여 판상서병부사(判尙書兵部事)와 형부상서(刑部尙書)에 이르렀고,[2] 손자 문극겸(文克謙)은 권판상서이부사(權判尙書吏部事)에 이르렀다.[3]

남평 문씨는 조선시대 문과 급제자 38명을 배출하였다.[4]

남평문씨 집성촌 전라남도 나주, 화순, 보성, 장흥, 영암, 담양 및 함경도 함흥, 대구 달성)배출인물 문익점(1331-1400), 문익환(1918-1994), 문선명(1920-2012통일교주), 문희상(1945 의정부정치인), 문정인(1951 대통령보좌관), 문규연(아주그릅회장), 문희갑(대구시장),, 문재인(1953- 대통령) , 문성근(19553- 문익환목사아들), 문무일(1961- 검찰총장)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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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최준혁 | 작성시간 18.03.26 문제적 사람도 많군요,,,익환 성근,정인,
  • 작성자두산동영감 | 작성시간 18.03.26 졸작을 芝山선생님께서 제목과 3구를 推敲와 修飾을 하셔서 더욱 韻致가 있는 合作詩가 되었습니다.
    * 雪中登山을 ‘春分雪’ 로
    * 3구 離禽失所廻啼谷 새들은 집을 잃은듯 울면서 돌아다니는데‘를
    ‘乾坤銀色衆僊蝶’ 하늘 가득 백설 나비가 떼로 춤추는 것 같아 로
    지산 선생님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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