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토요일 맑다. 퇴계와 율곡 왕복서에 대한 책을
오후에는 다시 이광호 교수의 《퇴계와 율곡, 생각을 다투다》와 권오봉 교수의 《퇴계서 집성》을 가지고 양현兩賢이 주고 받은 편지의 원문과 번역, 해설 등을 좀 읽었다. 두 분이 서로 받았다는 편지도 역시 퇴계 문집에는 9통이나 전하나, 율곡전서에는 5통 밖에는 없다.
11월 2일 일요일 맑다. 허물어진 산성 터를 따라서
오전에 집 사람이 혼자서 원불교 교당에 갔다가 김밥을 사와서 점심을 먹었다. 오후에는 같이 나가서 북한상성의 수문 터를 지나 북쪽으로 흐르는 계곡을 따라 올라갔다. 늘 다니던 길인데도 물이 흐르고 고기가 노는 것을 보는 것이 좋아서 늘 이 길로 들어간다.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기복이 심하여 처음에 다닐 때는 좀 힘들었지만 자주 다니니 집 사람도 별 불평이 없이 따라 다닌다.
북산동유물관 앞에 이르러 커피를 한잔씩 뽑아 마시고 쉬다가 올라오던 계곡 서쪽에 있는 덕암사 라는 바위 속에 대성전을 마련한 산 중턱 절을 통과하여, 그 절에서 북쪽으로 한 10여분 더 가서 역시 산중턱에 설치된 나지막한 암문暗門까지 나아갔다. 거기서 바로 북쪽으로 [호랑이가 옛날 서울의 어느 효자가 여기까지 성묘하러 다닐 때 늘 업고 다녔다는] 효자동까지 직진하는 것이 바른 길이나, 그 암문에서 동북쪽으로 이어진 옛 산성 터를 따라서 난 희미한, 발자취가 보일 듯 말 듯 한 소삽한 오솔 길을 따라서 내려왔는데, 이 길은 나도 처음 밟아보는 것이다.
성벽이 더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하여서인지 이쪽으로는 길 안내 표시가 없지만, 그쪽으로 내려가는 사람도 있어, 그 길을 따라가 보았는데 매우 호젓하여 신비한 생각까지 들었다. 이런 성벽이 몇 백년을 견디어 오다니? 서울시에 속한 북한산성의 남쪽 성벽들은 대개 고약하고 엉성하게나마 중수를 하여 두었는데, 인적이 드문 경기도 쪽에 속한 이쪽 성터는 그대로 있는 것을 보니 매우 대조가 된다. 고약하게 손을 대고 관광객들을 불러들이게 하는 것 보다는 그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만, 군데군데 조금씩 허물어 진 것을 보니 매우 애처롭고 안타까운 생각도 들었다.
또 이러한 적적한 산마루에 이만한 성벽을 쌓자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의 피와 땀이 쏟아졌겠는가? 그 때 많은 중들도 승군僧軍이라는 이름으로 동원 되었다고 하니, 그들의 노고도 얼마나 컸겠는가? 이런 저런 생각을 하면서 걷자니 그런 사람들의 아우성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서 처연하여 진다.
이 길로 다 내려오니 늘 보던 전주 이씨 묘역이 나오고, 바로 그 앞으로 난 "내시묘역 구간"에 속하는 북한산 둘레 길과 만났다. 그 길을 따라서 또 서쪽으로 수 10분 계속하여 걸어가는데 이미 해는 기울고 동천에 보이던 반달이 밝아지기 시작하였다. 자주 가던 갈비사골탕 집에 가서 반시간 쯤 기다린 뒤에야 겨우 들어가서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
달빛을 받으면서 집까지 두어 정거장 구간을 걸으면서 오는 데 광주에 가서 있는 아들과 손전화로 통화를 좀 하였다. 몇일 뒤에 생일이니 생각이 났다. 얼마 뒤에 주말에 틈을 보아 올라와서 하루쯤 있으면서 우리 차를 이메일로 팔아주겠다고 한다. 목소리라도 듣게 되니 그래도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