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송 우국시인 陸游의 〈秋思〉
몇 년 전에 우리 동양고전연구회에서 중국 절강성 소흥紹興이라는 도시에 여행을 간 일이 있었다. 그 곳이 노신의 고향이기도 하고, 또 왕희지의 난정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고, 또 육유와 그 첫째 부인과 사이에 애톳한 사랑의 이야기가 담긴 유적도 있어 볼 거리가 참 많았다.
가을 철을 맞아 육유가 지은 가을 노래 1수를 소개하고자한다. 같은 제목의 시가 그 분의 시집에 무려 40 수쯤 나온다. 1만 수에 가까운 다작을 남긴 시인이 되다가 보니, 똑 같은 제목의 시도 많이 있는 것 같다.
그에 관한 개괄적인 소개는 위키 백과에도 자못 소상하게 되어있어 여기에 그대로 전제하나, 그가 연금술에도 대가 였다는 이야기를 내가 딴 데서 읽은 적이 있고, 또 이 점에 대하여 육유 연구의 대가인 경대의 이치수 교수와도 이야기를 좀 나눈 적도 있었는데, 그런 점에 관하여서는 위와 같은 백과에도 나타나지 않으니, 딴 자료를 좀 더 조사하여 보아야할 듯하다.
아래 소개하는 가을 시 1수는 내가 번역하여 보았다.
육유(1125~1210)는 남송의 저명한 애국 시인으로 절강성 산음 사람이다. 남송 사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남송의 시단을 대표하는 시인이며, 북송과 남송의 교체기에 태어나 변함없는 우국의 열정과 신념으로 금에 대한 항전과 중원의 수복을 주장하였던 중국의 대표적인 우국시인이다. 평생 일만 수에 달하는 시를 남기어 중국 최대작가로서의 명성을 지니고 있는 시인이기도 하다.
출생과 유년시절
모친 당씨가 육유를 낳기 전에 꿈을 꿨는데, 송대의 대가인 진관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 의논하여 아들의 이름을 진관의 자인 ‘소유(少遊)’를 따서 육유라고 지었다. 육유의 부친 육재는 당시 병참보급 업무를 담당하는 경서로전운부사로 일하고 있었다. 전란 중에 육씨 일가가 남쪽으로 흩어졌을 때, 육유는 아직 돌도 안된 아기였다. 변경성이 아직 함락되기 전인 정강 원년에 육재는 백명이 넘는 대가족과 함께 남쪽으로 먼저 피난길에 올랐다. 일 년 후 고종이 금의 군사를 피해 도망치듯 강을 건너 남쪽으로 떠날 때 그의 뒤에는 수십만이 넘는 중원의 백성들이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육재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고 회계산 북쪽에 있는 산음을 피난처로 택했다. 성 남쪽에 집을 짓고 청풍명월을 벗 삼아 책을 읽으며 자녀들을 교육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육유는 책과 함께 유년 시절을 보냈다. 『송사』를 보면 육유가 열두 살부터 시문에 능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이나 유년시절의 환경을 통해 육유는 직접 글을 쓰는 것이나 공부하기를 좋아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소년기의 육유는 도연명, 왕유, 잠삼 등의 시에 심취했다.
우국시인의 시작
육유가 열일곱이 되던 해인 1142년, 악비가 황제가 내린 독주를 마시고 죽었다. 온 힘을 다해 나라에 헌신했던 신하이자 백전백승 불패 신화의 주인공인 장군을 어이없게 죽인 것이다. 악비가 이끄는 악가군은 어디서나 백성의 환대를 받았고 장수와 병사들은 악비들을 잘 따랐다. 고종은 자신을 위한 군대가 없다는 사실에 두려워한 나머지 북쪽의 옛 영토를 수복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시점에 악비에게 남으로의 철군을 명령했다. 돌아온 악비는 병권력을 회수 당했는데, 병권을 잃어 더 이상 고종에게는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진회는 악비를 없애고 싶어했다. 금은 진회와의 담판에서 ‘악비를 죽이지 않으면 화친은 없던 일로 하자’고 이야기했기 때문에 진회는 악비에 대한 미움과 금의 협박으로 인해 악비를 잡아들였다. 1142년 악비가 죽기 한달 전, 남송은 금과 체결한 ‘소흥화의’에 따라 동쪽으로는 회하, 서쪽으로는 섬서 대산관을 경계로 북방의 632개 현을 모두 금에게 넘겨주었다. 이 뿐만이 아니라 매년 금에 신하의 예를 갖추어 조공을 바쳐야 했다. 이러한 남송의 비극은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퍼져 육유의 귀에 까지 들어갔고, 육유는 조국의 땅이 적의 손에 넘어가버린 사실과 나라만을 위해 싸운 명장의 비극에 매우 슬퍼했다. 육유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고 이러한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괴로워했다. 열일곱의 육유는 이미 어렸을 때부터 우국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육유의 관료생활
여러 차례 과거 시험에 응시했지만 실패한 육유는 스물아홉에 쇄청시에 응시하여 장원급제 하게 되었다. 그 이듬해에 다시 예부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았지만 진회가 자신의 손자인 진훈을 합격시키기 위해 훼방을 놓아 결국 관직에 나가가지 못했다. 최종 관리 선발에서 탈락한 육유는 산음으로 돌아가 시를 쓰고 병서를 읽으며 지냈다. 문음을 통해 벼슬길로 들어서기가 어려워지자 보천으로 길을 뚫은 육유는 서른 넷에 복주영덕현주부로 임명되면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영덕에서 일 년 있다가 복주로 발령을 받았으나 1160년에는 다시 법령 기초를 담당하는 칙령소산정관으로 부임했다. 1162년, 육유는 추밀원편수관으로 임명되어 각처에서 날아드는 전황 소식을 보고받았으며 1162년에는 전략적 요지였던 진강의 통판으로 승진하였다. 일찍이 육유와 교류가 있었던 장준과 서로 격려해주는 사이가 되었고, 효종 역시 육유의 재능을 인정해주어 일이 잘 풀리나 했던 찰나 고종이 장준을 파면하고 금과 융흥화의를 체결하였다. 악비를 잡아들였던 그 때처럼, 육유는 또 한 번의 고통을 겪어야 했다.
육유의 북벌 지지
육유는 열정적으로 북벌을 지지했다. 1163년, 노장 장준이 북벌군을 모집할 때 육유는 격문초안을 작성하여 중원 인민들에게 분투하여 항전할 것을 호소하였다. 전투의 패배로 인하여 장준은 주화파 대신들에 의해 조정에서 퇴출되었고, 육유 역시 관직이 파면되어 산음의 고향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러 사천성과 섬서성 일대를 책임지고 있던 장수 왕염은 육유의 명성을 듣고 그를 한중으로 불러 항금 전투에 참가하기를 청했다. 육유는 왕염에게 일련의 항금 계책을 건의하였으나 당시 임안의 남송 조정은 북벌 계획이 전혀 없었고, 사천·섬서 일대의 장수들은 교만하고 부패가 극에 달해 왕염은 육유가 제출한 출병 의견을 꺼내지도 못했다. 육유가 가슴 가득 품었던 희망은 결국 물거품이 되고 말았고 20~30년이 지난 후 남성 왕조는 광종 조돈과 영종 조확이 황제의 자리에 올랐지만 여전히 잃어버린 대지를 수복할 결심을 하지 않았다. 육유는 가슴 가득한 애국 열정을 시가 창작에 기탁하여, 일생 동안 부지런히 시를 써 약 일만 수의 시를 남겼다.
육유의 죽음
1210年 85세의 일기로 별세한 애국시인 육유는 임종 시에도 중원 회복에 대한 염원을 잊지 않았다. 그는 아들들을 침상 옆에 불러 앉히고는 폐부로 감동을 느낄만한 <아들들에게示兒>라는 최후의 시를 읊었다. “죽으면 모든게 부질없음을 알고 있으나, 구주통일을 보지 못함이 서글프구나. 왕의 군대가 중원을 수복하여 북쪽을 평정하는 날, 제사 지내 잊지 말고 아비에게 알려다오死去元知萬事空, 但悲不見九州同. 王師北定中原日, 家祭無忘告乃翁.”
여인에 대한 사랑을 노래한 육유
육유는 애국 시인이지만 조국과 관련된 시만을 지었던 것은 아니고 그의 사적인 영역이었던 사랑에 대한 감정을 담은 시도 짓곤 했다. 육유 외숙의 딸이었던 당완은 육유의 연인이었다. 두 집안의 왕래가 잦아지면서 자연스럽게 사랑을 키워온 육유와 당완은 행복한 혼인 생활을 시작하였다. 하지만, 육유의 모친은 혼인 후 당완을 구박하였고 육유는 이러한 상황에서 당완을 위해 따로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이렇게 해서라도 혼인 생활을 유지하고 싶었으나 이마저도 방해를 받았고 결국 당완과 헤어지게 된다. 당완은 조사성이라는 사람에게 개가하고, 육유도 왕씨를 새 아내로 맞이하면서 둘은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는데, 육유는 이루지 못한 사랑에 가슴아파했다. 당완은 육유와 우연히 만난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육유는 당완과 이루지 못한 사랑을 오랫동안 가슴에 안고 살았고 사십년이 넘는 세월이 흘러도 당완에 대한 상심과 자책은 육유에게서 떠날 줄을 몰랐다.
육유의 사詞
육유는 시 뿐만 아니라 사를 짓기도 했다. 사인으로서도 145수 (70조의 144수와 잔구수 1수) 의 작품을 남겼다. 중국에서 가장 많은 시를 남긴 시인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것에 비해, 사의 수는 145수로 매우 적은편이다. 육유가 활동하였던 송대에는, 사가 이전에 비해 문아성이 중시되었지만 여전히 통속적인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저 유희성과 오락성에 집중했던 사대부들과 달리, 육유는 이와 더불어 현실적인 고민까지도 고려했다. 반적인 사에서 주로 나타나는 통속적인 주제나 도가적인 지향에 대한 사를 쓰면서도, 시대 의식을 담은 사를 씀으로써 본인이 세속적으로 변하는 것을 경계하였다고 할 수 있다. 육유가 썼던 사의 주제로는 전원의 한적함을 노래한 사, 남녀간의 사랑을 노래한 사, 교유사, 우국사, 신선의 세계를 추구하는 내용을 담은 유선사, 관리들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 사 등이 있다. 여기서 시와 다른 점은 애국시인이라고 불릴만큼 조국에 관한 시를 많이 쓴 육유는 사에 있어서는 우국사보다 다른 주제의 사를 더 많이 썼다는 점이다.
평가
학사적으로 육유는 북송 이래로 크게 융성했던 강서시파를 계승하였다는 평가와 함께 이후로 그것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죽어서도 조국이 통일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 원했던 육유는 그의 조국에 대한 마음을 작품 속에 잘 녹였고, 애국시인이라는 타이틀이 아깝지 않을만큼 애국심을 표현하였다.
참고문헌
강영매, 오대십국·북송·남송 중국 역사 박물관, 범우사, 2004,
류소천, 중국 문인 열전, 북스넛, 2011,
이치수, 육유사선, 지식을 만드는 지식, 2014,
이치수, 육유시연구, 국립대만대학, 1990, p15~19.
주기평, 육유사, 학고방, 2015
- 이상 위키 백과에서 따옴.
육유가 가을을 노래한 시 〈秋思〉의 나의 번역
利欲驅人萬火牛 이욕구인 만화우 나
江湖浪迹一沙鷗 강호낭적 이사구 라.
日長似歳閑方覺 일장사세 한방각 하고
事大如山醉亦休 사대여산 취역휴 라.
衣杵相望深巷月 의저상망 심항월 하고
井桐揺落故園秋 정동요락 고원추 라.
欲舒老眼無髙處 욕서노안 무고처 하니
安得元龍百尺樓 안득원룡 백척루 리요?
하평성 尤운
*제3구와 제7구의 둘째 자를 고평으로 썼는데, 각각 그 앞에 나오는 첫째 글자가 평성으로 되어야 하는 것을 측성으로 고쳐 사용하여, 이 두 구를 모두 요구로 만들었음.-丘燮友 《新譯 千家詩》(臺灣 三民書局,2014), 508쪽 참고.
[본문 번역]
이익과 욕심 사람들을 내몲이
만 마리의 소꼬리에 불을 붙인 것과 같으나,
강과 호수에 나의 발자취 자유롭게 풀어놓으니
마치 백 사장에서 마음껏 노니는
한 마리의 흰 갈매기 같구나.
하루 해 한 해와 같이 기니
바야흐로 한가함을 깨닫겠고,
할 일 하늘과 같이 많지만
한 번 취하고 보니 정말 모두 잊어버리게 되네.
다듬이 방망이 두드리는 소리
밝은 달 빛 골목 어귀까지
깊이 들어온 뒤에야 시들어 지고,
오동나무 잎 바람에 흔들리며 떨어지니
옛 동산에도 가을이 왔음을 짐작하겠네.
늙은 눈 편안하게 쳐다보고자 하나
높은 곳 별로 없으니,
어떻게 진원룡의 백척루 같은 곳을
얻을 수 있겠는가?
*火牛; 소의 꼬리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들여보냄. 전단(田單)은 전국 때 제(齊) 나라 사람. 연(燕) 나라가 제 나라를 쳐서 제 나라의 70여 성이 함락되고 거(莒)와 즉묵(卽墨)만이 함락되지 않았는데, 전단이 장수가 되어 연 나라의 대장 악의(樂毅)를 반간계(反間計)를 써서 내쫓고 그 대신 다른 장수가 오게 한 다음 밤에 화우(火牛)를 사용하여 공격하여 함락된 70여 성을 회복하였음.
“萬火牛”는 욕심이 사람을 내모는 역량이 꼬리에 불을 딴 소 만 마리가 맹렬하게 달리는 것 보다도 더욱 맹렬하다는 뜻.
*元龍百尺樓: 원룡(元龍)은 삼국 시대 위(魏)나라 진등(陳登)의 자이다. 허사(許汜)가 일찍이 유비(劉備)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던 중, 자기가 한번은 진등을 찾아갔더니, 진등이 손님 대접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주인인 자신은 높은 와상(臥牀)으로 올라가 눕고, 손님인 자기는 아래 와상에 눕게 하더라고 말하자, 유비가 말하기를 “그대는 국사의 명망을 지닌 사람으로, 지금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져서 임금이 처소를 잃은 판이라, 그대가 오직 나라를 걱정하고 자신을 잊어 온 세상을 구제할 뜻이 있기를 바라는 터이거늘, 그대는 전답이나 살 집을 구하고 다닐 뿐, 아무런 채택할 만한 말이 없었으니, 원룡이 이것을 꺼렸던 것이다. 어찌 그대와 말할 가치가 있었겠는가. 나 같았으면 자신은 백척루 위로 올라가 눕고, 그대는 땅바닥에 눕게 했을 것이다. 어찌 와상을 위아래로 구분하여 차별하였을 뿐이겠는가.〔君有國士之名 今天下大亂 帝主失所 望君憂國忘家 有救世之意 而君求田問舍 言無可采 是元龍所諱也 何緣當與君語 如小人 欲臥百尺樓上 臥君於地 何但上下牀之間耶〕”라고 했던 데서 온 말인데, 전하여 여기서는 단지 높은 누각에 올라 풍류를 즐기는 것을 진등의 호기에 빗대서 말한 것이다. 《三國志 卷7 魏書 陳登傳》-한국고전종합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