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두운동회
- 임철우
대표적인 ‘5월 작가’. 1980년 5·18 당시 전남대 영문과 4학년으로 ‘광대’라는 문화운동 단체 회원이던 임철우는 광주항쟁 기간 동안 가까운 선후배와 벗들이 혹은 죽고 혹은 다치고 하는 가운데 ‘짱돌 몇 개밖에 던지지 못 했던’ 멍에를 문학으로 승화하여 풀어 왔다.
임철우 문학의 동력은 특별난 역사적 배경을 가진 고향, 남다른 청소년기, 그리고 광주의 경험으로 요약될 수 있다.
남해안 낙도에서 태어난 임철우는 면에서 단 세 명뿐인 대학 교육 이수자 중의 한 사람을 아버지로, 다른 한 사람을 당숙으로 두었다.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아버지와 당숙은 해방을 전후하여 좌익에 합류한 후, 학교를 작파하고 고향에 내려와 좌익 청년단을 조직했다.
부친은 도중에 발을 뺐으나 당숙은 청년단장을 맡아 활동하다 6·25 때 인민군에 합류하여 지리산 빨치산이 되었다. 토벌대에 붙잡힌 당숙은 1982년에야 출감했고, 형은 부친의 과거 때문에 승진에서 탈락한다.
뚜렷한 전선도 없이 점령군이 인민군에서 국군으로 혹은 그 반대로 수시로 바뀌면서 그 때마다 무수한 주민들이 희생되었던 고향 마을의 역사는 임철우의 문학에도 주요한 소재로 등장한다.
특히 후퇴하던 경찰부대가 인민군으로 위장하고 나타나서는 무작정 환영 나올 수밖에 없었던 주민들을 쏘아 죽인 ‘나주부대 사건’은, 후에 영화화까지 된 임철우의『그 섬에 가고 싶다』를 통해 비로소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임철우 일가는 광주로 이사했지만, 전기도 없는 마을에서 올라온 ‘촌놈’은 도시 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세 살 때부터 사업상 떨어져 살았던 부모님의 무관심까지 겹쳐, 임철우는 초등학교 3학년 이래 수없이 반복되는 가출을 감행하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장롱 자물쇠를 망치로 부수고 돈을 훔쳐 가출하는가 하면, 중학교 때는 퇴학을 당했다가 교감 선생님이 아버지 친구였던 덕분에 복학되기도 했다. 급기야 가족들에 의해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던 임철우는 거기서 대오각성, ‘내 삶은 내 몫일 수밖에 없다’는 깨우침을 얻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갑자기 ‘철이 들어’ 무섭게 공부에 매달렸으나, 한밤중에 모범생이던 형과 함께 공부를 하고 있으면, ‘형 공부 방해되게 안 자고 뭐하냐’ 는 소리나 들었다고 한다.
‘못된 자식’에 대한 냉대는 대입 시험 날까지 계속돼, 점심시간에 홀로 옥상에 올라가 다른 수험생들이 가족들과 북적거리는 모습을 보며 울고 있다가, 뒤늦게 그 대학에 다니던 형이 사온 빵과 콜라를 우겨넣고 트림을 해가면서 시험을 치렀다.
1980년 5·18이 터졌을 때 그는 전남대 영문과 4학년에 다니다 한 달 전에 휴학한 상태였다. 5월 18일 아침까지만 해도 황석영의「한씨 연대기」를 각색하여 연습 중이던 ‘광대’ 단원들은 계엄령이 내린 후 피신하게 되었다.
친척집으로 피신했던 임철우는 곧 거리로 나와 당시의 ‘일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벌어진 시위의 참가 인원, 시각, 사망자수, 심지어 그 시각 텔레비전을 통해 한가하게 중계되던 야구 경기의 스코어까지.
그러나 임철우는 사람들이 총을 들 때 ‘이 총으로 죽여야 할 적이 누군가?’라는 번민 끝에 총을 들지 않았으며, 계엄군이 도청으로 진주해 들어올 때는 친척집 다락방에 숨음으로써 ‘살아남은 자’가 되었다.
등단 이후 임철우는 줄기차게 광주의 5월을 담은 작품들을 내놨으며, 끝내는 5월 광주에 대한 다섯 권짜리 기록문학『봄날』을 써냄으로써 광주에 대한 마음의 빚을 얼마 만큼이나마 씻어냈다.
<소설 지문>
정오였다.
단상 위에 우뚝 서 있던 매부리코 장교는 시계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러더니 그는 불현듯 하늘을 향하여 두 팔을 번쩍 펼쳐 올리는 것이었다. 목사의 눈에 그것은 악마의 신탁(神託)을 받고 있는 모습으로 보였고,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가 무엇인가 하늘을 향해 소리치려 하고 있는 것처럼 여겨졌다.
그러나 그것이 사실은 이날 행사의 클라이맥스를 알리는 운명의 신호였음을 사람들은 그때까지도 까맣게 몰랐다.
애애애애……앵.
매부리코 적군 장교의 치켜올린 팔이 내려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느닷없이 요란한 사이렌 소리가 사람들의 고막을 갈가리 찢어 대기 시작했다.
뜻밖에도 사이렌 소리는 학교 담 너머로부터 날아 들어오고 있었다. 운동장에 모인 모두의 눈이 - 왼쪽도, 오른쪽도, 완장 패거리들과 적군 제복 차림의 병사들까지도 - 일제히 교문을 향하여 집중했다. 그리고 똑같이 주민들은 경악했다. 거기엔 지금 막 실로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벌어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들 저마다의 눈을 의심했다. 새끼줄의 왼쪽도, 오른쪽도, 완장 패거리들도, 아이들과 노인네들도 모조리 딸각 호흡이 멎어 버렸다.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
한 대.
두 대.
세 대.
모두 세 대였다. 트럭의 뒤 칸마다엔 무장한 병사들이 가득가득 타고 있었다.
이, 이럴 수가……
지켜보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눈알이 금방 뒤집히는 것만 같았다.
아군이었다. 눈에 익은 청색 깃발을 펄럭이며 들어오고 있는 그들은 분명 바로 어제 저녁까지 읍사무소에 주둔해 있던 그 아군 병사들의 모습이었다. 트럭에서 내린 그들은 저벅저벅 군화 소리를 내며 마을 사람들을 두 쪽으로 갈라놓고 있는 그 중앙의 공간을 가로질러 유유히 행진해 들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그 배불뚝이 아군 부대장과 매부리코 적군 장교가 자신들의 바로 눈앞에서 만나 힘차게 악수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사람들은 똑똑히 지켜보았다.
"아니야아. 거짓말이야. 모조리 속임수란 말이야앗!"
어디선가 날카로운 비명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누군가 창고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고함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 창고 건물의 모퉁이를 돌아 나오며 고함을 치고 있는 게 보였다. 온몸이 꽁꽁 묶인 채 끌려 나오고 있는 그 사내가 바로 이날 내내 종적이 묘연하던 그 약방 집 둘째 아들이라는 사실을 사람들은 깨달았다. 아이쿠 속았구나. 소금 장수와 푸줏간 집 곰보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았고 대장장이는 서 있는 채로 바지에다 쭐쭐 오줌을 누고 말았다.
"허허허헛. 자아, 이제야 모두 끝났나 봅니다. 허헛. 본의 아니게도 죄 없는 여러분들이 십 년 감수하셨겠소이다. 우리 몇 사람은 사실 처음부터 빤히 다 알고 있었지만 일부러 모르는 척했었지요. 우리인들 어쩌겠소. 허허허. 이렇게 해야만 숨어 있는 불순분자들을 하나 남김없이 깡그리 그것도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나오도록 할 수가 있다고들 하니 말입니다. 허헛. 그래서 우리 관리들 몇은 어젯밤부터 모두 집에 들어가지도 못 하고 할 수 없이 각본대로 연극을 좀 해 봤지 뭡니까. 저분들이 사실 ○시(市)의 아군 부대 병사들이랍니다. 반란군 놈들의 옷으로 갈아입고 감쪽같이 그럴듯하게 적군 행세를 한 거지요. 읍사무소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는 이웃 마을에 잠시 철수해 있다가 낮 열두 시 정각에 돌아오기로 약속이 돼 있었다는군요. 허허헛. 어떻습니까. 아주 기막힌 아이디어가 아닙니까. 힘 하나 안 들이고 놈들을 모조리 잡아들일 수 있는 거죠. 허허. 벌써 다른 마을에서도 이런 방법을 써 보았더니 그 효과가 썩 좋았다지 뭡니까. 으허허헛."
그때까지 고개를 떨어뜨린 채 꿇어앉아 있던 읍장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면서 대단히 재미있는 놀이였다는 양 그렇게 설명을 해 주고는 한바탕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채로 그저 한결같이 입만 따악 벌리고 서 있었을 따름이었다.
"어이구. 여러분들께서 고생들 하셨습니다. 더구나 우리 읍장님과 조합장님은 아주 연기가 그럴듯하던데요. 하하."
"아유. 뭘입쇼. 하지만 이거, 아까 저놈에게 얻어맞은 자리가 아직도 욱신거리는구먼요. 허헛."
배불뚝이 부대장과 적군 제복을 입은 매부리코 장교가 새끼줄 오른쪽 칸으로 다가와서 읍장과 몇몇 관리인들에게 치하를 했을 때도 여전히 사람들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느낌이었다.
소금 장수와 대장장이, 애꾸눈 구두 수선공과 푸줏간 집 곰보 사내를 포함한 삼십여 명의 완장 패거리들은 신호가 떨어지자마자 적군 제복 차림의 병사들에게 꼼짝없이 붙잡혀서 한꺼번에 새끼줄의 왼쪽 칸 안으로 쫓겨 들어갔다. 뒤이어 묶여 온 약방 집 둘째 아들도 거기에 합류했다. 이번에 그들이 오히려 머리 위에 두 손바닥을 얹은 채 무릎을 꿇려 앉혀졌다. 눈 깜짝할 사이에 모든 상황이 물구나무서기를 해 버린 셈이었다.
"어때. 이 반란군 놈들아. 감쪽같이 속아 넘어간 기분이? 이제야 말로 너희들이 제 발로 스스로 걸어 나왔으니 입이 백 개라도 할 말이 없을 테지. 안 그래? 킬킬킬킬."
적군 제복 차림의 병사 하나가 불쑥 총구를 그들 앞에 겨누며 이죽거렸다. 킬킬킬킬킬…… 소금 장수와 약방 집 둘째 아들과, 구두 수선공과, 푸줏간 집 곰보와 대장장이는 눈앞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그 시커먼 총구를, 눈도 코도 없이 동그랗게 입만 달려 길길길길길 웃고 있는 그 총의 웃음소리를 꿈속처럼 아스라이 먼 곳으로부터 듣고 있었다.
만세, 만세애, 만만세애……
드디어 이번에는 느티나무 쪽으로부터 엄청난 만세 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읍장과 우체국장, 그리고 정미소 집 주인 사내와 읍장의 뚱뚱보 아내를 비롯한 느티나무 쪽 사람들은 마치도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듯한 그 기막힌 환희와 감격을 도저히 주체할 길이 없어 장대 같은 눈물 줄기를 쭐쭐 흘려 대며 미친 듯 발을 구르고, 서로 부둥켜안고 펄쩍펄쩍 뛰어오르며 목이 터져라 손바닥이 부서져라 만세를 부르고 박수를 쳐대고 있었다. 그들은 바로 일순간 전까지 자신들의 머리 위에 드리워져 있던 죽음의 그림자를, 그 소름 끼치는 공포와 처참한 고통의 기억을 까아맣게 잊어버리고 다만 기쁨으로 전율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자신들의 육체와 영혼 모두를 그토록 엄청난 힘으로 얽어매어 짓누르고 있던 그 죽음의 족쇄를 참으로 자연스럽게 새끼줄 너머 저쪽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는 것으로 통쾌한 복수를 실현시킴으로써, 가슴 벅찬 희열과 통쾌한 감격을 감당키 어려운 지경으로 만들었다.
<줄거리>
남한군이 점령하고 있던 어느 마을에 어느 날 북한군이 진주한다. 그들은 학교운동장을 새끼줄로 분할한 다음 몇몇 농민들을 선동하여 악질 반동들을 색출해 낸다. 우편과 좌편을 가르는 과정 중에 좌편에 서게 되는 농민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난다. 마침내 분류가 끝나고 살아남게 된 이편(좌)의 사람들이 곧 죽게 될 저편(우)의 사람들을 손가락질하는 동안 북한군들은 전부 인민군복을 벗는다. 그 속에서 드러난 것은 물론 남한 군복. 애초의 예상과는 달리 저편이 아닌 이편의 사람들이 숙청당하고 이로써 남한군의 빨갱이 소탕 작전은 완벽하게 끝이 난다.
<해설>
한 마을 사람들이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는 상황을 통해 경계의 허구성과 전쟁의 비극성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이다. 좌익과 우익으로 나뉘어 생사의 운명이 권력에 의해 결정되고 또 반전에 의해 뒤바뀌는 상황은 전쟁의 비극성을 더욱 강조한다. 한국전쟁 동안 정권이 세 번이나 바뀌게 된 삼팔 접경의 마을에서 점령군이 바뀔 때마다 잔인한 소탕작전이 벌어지는 이청준의 <소문의 벽>과 유사한 내용이다.
곡두운동회 vs 그 섬에 가고 싶다 (영화소설비교)
소설 <곡두 운동회>와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는 몇몇 인물이나 소소한 사건이 비슷하게 구성되었지만 주요사건과 이를 진행하는 방식이 매우 다르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를 놓고 비교분석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과 영화에서 말하려는 것, 즉 한국전쟁이라는 여전히 종전되지 않은 채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의 아픈 과거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소설과 영화에서 이런 저런 사건들이 있기는 하지만 평화롭게 살던 섬마을 사람들은 섬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마을 운동장에 강제로 집합된다. 그리고 그들을 도와 마을 사람을 좌파와 우파로 가려낼 사람을 선정하고 주민들을 선을 중심으로 가려낸다. 그러나 이것은 인민군으로 변장을 한 국군이 마을 운동장에 강제 집합시킨 마을 사람들을 좌파와 우파로 갈라놓고 소위 반동분자라고 일컬어지는 사람들을 소탈하기 위한 작전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대부분의 섬마을 사람들이 좌파 혹은 우파적 사상에 물들어 있기는커녕, 바다에 나타난 군함에 서 있는 군인이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조차 구분하지 못하고 그저 만세를 외칠 정도로 이념적 순수함을 지닌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개인의 자유의지조차 표현할 수 없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단지 살아남기 위해 조금 전 까지만 해도 같은 섬마을 이웃이었고 가족같이 얽혀 있던 사람들에게 잔인해 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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