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등(外燈)-전상국
전화벨이 찌륵찌륵 울렸다. 군대에서 쓰던 야전용 전화기가 김 차석 책상 위에 있었던 것이다. 수화기를 든 김 차석이 악을 쓰듯 그렇게 높은 목소리로 받고 있었다. 감이 먼 것으로 미루어 읍에서 면사무소 교환대를 경유해서 이어지는 장거리 전화가 분명했다.
“소장님 받으십시오. 읍에서 온 겁니다.”
수화기를 넘겨 주는 김 차석의 얼굴에 묘한 웃음이 고물고물 떠돌고 있음을 박 경사는 놓치지 않았다. 그는 뒤통수에 화끈한 열기를 느끼면서 전화를 받았다. 생각했던 대로였다. 오도민 씨였다.
“어, 자넨가? 별일 없었지? 딴 얘기가 아니구 말이야. 자네 부친 일에 대해서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 내일모레쯤 한 번 나오게. 어, 뭐라구? 무슨 얘기냐구? 이 사람아, 그런 얘길 어떻게 전화로 한단 말인가. 자네 말이야, 공치사(功致辭) 같지만 내가 자네 부친 일로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지 알고나 있나? 독립투사 하나 만들어 내는 게 그렇게 쉬운 일일 줄 알았다간 큰일나네. 더구나 요즘 이종철 후보가 낙선 분풀이로 아주 까놓고 자네 아버지 이름을 팔고 다닌다 이거야.”
오도민 씨는 감이 먼 전화 속에서 더 길게 너스레를 떤 다음,
“그건 그렇고 말일세. 오늘 거기 우리 산판 차 일곱 대 들어갔지? 응, 그래그래, 안 나왔을 거야. 이따가 말이야, 우리 차 거기 나오거든 말이야, 그 차주 중에 심씨라고 있어. 그래, 내가 쓰고 있는 사람인데 말이야. 그 심씨한테 읍에 나오거든 나를 꼭 보고 가라고 하란 말이야. 다른 게 아니고 말이야, 경기도경에서 선거가 끝난 뒤에 단속이 강화됐다는 거야. 오늘 밤에 비상이 걸렸다 그거야. 그러니까 그냥 올라가지 말고 나한테 먼저 들러야 한다고 하란 말이야. 이봐, 자네 뭔 얘긴지 알겠나? 꼭 전해야 하네. 내 청평 지서에두 연락해 놓겠지만 말이야.”
▶오도민으로부터 압력성 청탁
박 경사는 수화기를 던지듯 내려놓고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가슴이 답답했다. 이젠 만들어 하는 트림마저 나오지 않았다. 그는 현관의 외등에 모여든 날벌레를 바라보면서 심한 혐오감을 느꼈다. 외등이 밝힌 아주 작은 공간을 찾아 저처럼 무의미한 난무를 벌이는 그들 하루살이의 생리가 싫었다. 외등 저쪽 무한한 어둠 속에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날벌레들의 보이지 않는 그 외로운 비상을 생각할 때 그는 가슴이 눌린 듯 암울하고 삭연(索然)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는 보이지 않는 어둠 속 벌레가 갖는 외로움을 느꼈다.
아버지. 그는 마음속 깊은 데서부터 아버지를 살려 올리고 있었다. 아버지를 만지고 싶었다. 그것이 실상이든 가상이든 그분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만지고 싶었다. 아버지 그분만은 이 암울한 늪에 빠져 허덕이는 자신을 건져 올릴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가슴에 싹터 올랐던 것이다. ▶박 경사의 고뇌
<중략>
박 경사는 더 견딜 수가 없었다. 가슴을 주먹으로 쿵쿵 쳐보았지만 헛일이었다.
“또 소화가 안 되시는 모양이죠?”
정 순경이 물었다.
“정 순경, 아까 낮에 산판에 차 몇 대 들어갔지?”
“거기 일지에 체크했잖아요. 모두 일곱 대 들어갔어요. 전부 수작골 산판으로 간다데요.”
“됐어. 혹시 나 없을 때 그 차 나오거든 붙잡아 둬. 나 집에 들어가 약 좀 먹고 나올 거니까 말이야.”
“네?”
정 순경과 김 차석이 동시에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절대 통과시키지 마라.”▶박 경사가 결단을 내림
그는 현관을 나와 어둠 속으로 들어섰다. 멀리 장거리 쪽 불빛이 어둠의 눈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서자 그런대로 밤바람이 얼굴에 괜찮게 스쳤다. 장거리 어둠 속에서 개 짖는 소리가 시골의 여름밤을 흔들고 있었다.
“어디 아파 그러세요?”
집에 들어서자 그의 아내가 놀란 얼굴로 쳐다보았다. 박 경사의 얼굴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편쟁이가 그렇듯 집안 여기저기를 서둘러 뒤지기 시작했다. 읍에 나갈 때마다 약방에서 소화제를 사다가 먹었던 것이다. 그러나 소화제는 어느 곳에고 보이지 않았다.
“여기 뒀던 약 어디다 치웠어?” / 그가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어제 보니까 빈 통만 있던데요. 그래서 버렸는걸요. 또 소화가 안 되는가 보죠? 아까 저녁에 밀국수 잡순 게 좋지 않았나 봐요. 아이 속상해 죽겠네, 요즘 좀 웬만하시더니…….”
그의 아내가 징징 우는 소리로 말하며 탑골 한약방에 가 약을 사오겠다고 일어섰다. 그는 아내를 나가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아내 앞에 손을 내밀었다. 그의 아내가 익숙한 솜씨로 엄지와 검지 사이를 눌러 주무르는 지압을 시작했다. 기분이겠지만 그렇게 하면 가슴에 좀 시원한 느낌이 왔다. 박 경사는 아내의 생활에 쪼들린 그 얼굴을 쳐다봤다. 남처럼 많은 것을 갖지 못해 안달하거나 남이 가진 것을 시샘할 줄 모르는 소박한 여자였다. 월급 외의 돈을 들여가면 그것을 받아들고 얼굴을 붉히며 가슴을 떨었다. 몇 달이 지나도 그 돈에 손을 대지 못한 채 그것으로 해 아예 괴로워하는 여자였다. 지서 소장 부인이라고 이웃들이 따돌림할 것이 두려워 항상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남의 집 허드렛일까지 거들어 주고 싶어 하는 아내 - 박 경사는 손을 주무르는 그네의 얼굴을 쳐다보면서 가슴에 잔잔한 감동을 받았다. 그것은 새삼 고마움을 느낄 때 갖는 그런 감동이었다. 그는 문득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내에게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되었다. 그는 그것이 뭔지 몰라도 아내를 붙잡고 한없이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을 받았다. 가톨릭 신자가 고해를 하기 위해 신부를 찾는 심경이 이해될 것 같았다. 뭔가 자기의 삶에 끼어들어 삐거덕거리는 것을 엄마가 아이들 이를 뽑듯 그렇게 매몰차게 제거해 줄 신비와 사랑을 가진 손을 그는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마디가 굵고 거친 아내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 순간 아주 거침없는 트림이 크게 터져 나왔다. 그처럼 가슴이 시원할 수가 없었다.▶아내로부터 힘을 얻어 갈등과 고뇌에서 시원하게 벗어남
▶주졔: 부정과 불의에 대한 개인의 저항
☞ ‘트림’의 의미
박 경사는 그동안 오도민 씨의 부정에 소극적이나마 협조해 주고 있어서 항상 가슴이 답답해 있었다. 그러다가 소박하고 양심적인 아내의 모습을 보고 힘을 얻어서 아내의 지압에 ‘트림’을 하게 된다. 따라서 이때의 ‘트림’은 정의롭지 못한 비양심적인 삶으로부터 벗어났음을 상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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