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철의 사설시조 '장진주사'<2002 대수능 출제 >
- <청구영언> <송강가사 이선본>
한 잔(盞) 먹새그려. 또 한잔 먹새그려. 곶 것거 산(算) 노코 무진무진(無盡無盡) 먹사이다.
이 몸 주근 후면 지게 우희 거적 더퍼 주리혀 매여 가나, 유소보장(流蘇寶帳)의 만인(萬人)이 우러 녜나, 어욱새 속새 덥가나무 백양(白楊) 수페 가기곳 가면, 누른 해, 흰 달, 비, 굴근 눈, 쇼쇼리 바람 불 제 뉘 한잔 먹쟈할고.
하믈며 무덤 우희 잔나비 휘파람 불제 뉘우친달 엇더리
* -새그려: 청유·권유를 나타내는 종결어미
* 유소보장(流蘇寶帳): ‘유소(流蘇)’는 상여를 꾸밀 때 다는 오색실이고, 보장(寶帳)은 화려한 포장을 말함. 즉 아름답고 화려하게 꾸민 상여를 말함
● 전문풀이
술 한 잔 먹읍시다. 또 한 잔 먹읍시다. 꽃나무 가지 꺾어 수를 헤아리면서 무진무진 먹읍시다.
이 몸이 죽은 후에는 지게 위에 거적을 덮어 줄로 졸라 동여매어 갔다 버리나(초라하게 죽어나), 아름답게 꾸민 상여에 많은 사람이 울며 따라 가거나(호화롭게 죽어나), 억새풀과 속새풀 우거지고, 떡갈나무와 백양 숲 속에 가기만 하면, 누런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에 쓸쓸한 바람이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고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잔나비들이 휘파람을 불며 놀 때 가서야 뉘우친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 소용이 없지 않은가?
● 핵심정리
▶종류 : 사설시조
▶성격 : 허무적, 무상적, 퇴폐적
▶의의 : 사설시조 형태상 최초의 작품
▶제재 : 술
▶주제 : 인생무상과 권주(勸酒)
▶구성 :
초장-술을 권함
중장-죽고 나면 술을 마실 수 없음
종장-죽은 뒤에 술 마시지 못한 것을 후회해도 소용없음
● 이해와 감상
‘장진주사’는 사설시조의 효시(嚆矢)가 되는 작품이다. 견해에 따라 사설시조로 보지 않고 그냥 장가(長歌)로 처리하기도 한다.
이 시는 술을 권하는 권주가(勸酒歌)로, 인생의 허무함을 느끼며 그 허무감을 술로 달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특히 사람이 죽은 뒤의 쓸쓸하고 처량한 무덤 주위 풍경의 묘사는 인생의 무상감(無常感)을 북돋우는 뛰어난 표현이다. 인생무상과 허무감을 술로 해소하려는 발상은 이 작품이 퇴폐적인 성격을 띠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 작품은 당나라 시인 이백, 두보의 <장진주>의 영향을 받았으나 모방작은 아니다. 종장에 나오는 ‘잔나비’로 보아 중국 시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잔나비 람 불 제”는 <두시언해>의 <등고>에 나오는 “나 되라미 슬프니”라는 구절에서 영향을 받았음을 추측케 한다. 한편 “곳 것거 산(算)노코 수(數)노코 먹으리라.”와 유사한 표현은 정극인의 <상춘곡>에 나오는 “곳나모 가지 것거 수(數)노코 먹으리라.”라는 구절을 들 수 있는데, 이와 같은 고급스런 풍류는 이 두 작품의 작가가 양반 계층임을 시사한다.
● 연세대학교 96학년도 논술문제
* 다음 글을 읽고 밑줄 친 '원숭이 정서'라는 개념에 맞추어 400자 이내로 요약하시오.(200점)
한 사람의 독자로서 송강을 생각할 때 그의 가사와 시조는 무엇보다 한글로 씌어져 있고, 자신의 심성을 자신의 흥과 목소리로 노래했다는 점에서 큰 매력을 느낀다. 그의 시가 「사미인곡」처럼 봉건 사회의 이데올로기에 얽매인 모습에서는 어쩔 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지만 「장진주사」에 이르러서는 호쾌한 낭만과 분출하는 정서의 발산으로 인하여 밉지 않은 허무적 도피라는 생각도 든다. 한 잔 먹세그려, 또 한 잔 먹세그려 /꽃 꺾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그려로 시작하는 「장진주사」에는 자연의 움직임을 받아들이고 그 생동감에 동참하는 분방함이 잘 드러나고 있다. 이 분방함이야말로 바로 우리를 괴로움도 쓸쓸함도 없는 세계로 깊숙이 빠져들게 하는 풍류이다. 이러한 낭만과 호기라면 한 번쫌 가져 볼 만하지 않겠는가. 그렇다 하더라도 나는「장진주사」를 무작정 좋아만 하지는 않는다.
내게는 그럴 만한 풍류도 허무도 얹기 때문이다. 특히 마지막 구절 쌀쌀한 바람 불 때/누가 한 잔 먹자 할꼬/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에서의 '원숭이 휘파람'이라는 표현은 아주 못마땅하다. 송강은 원숭이를 본 적도 없었을 뿐더러 동시대 독자인들 그런 이국의 짐승을 알 리 만무한데 왜, 그것도 마지막 구절에 집어 넣었는가? 만약에 '송장메뚜기 뛰놀 때'라고 했으면 확연히 그 의미가 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여기에서 송강과 송강 시대 지식인의 단편을 본다. 모든 것을 자기 정서에 내맡기지 못하는 불안감, 뭔가 남 모를 유식한 끼가 있어야 차원이 높아 보이고, 이국적인 냄새도 약간 풍겨야 촌스러움을 벗어날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는 자신감의 상실증인 것이다. 나는 송강의 이 허구성을 우리 시대의 민족 문학, 민족 예술에서도 수없이 보아 왔다. 평론, 시, 그림, 음악, 연극 모든 분야에서 부질없이 유식한 체하기도 하고 모더니즘 냄새를 풍기고, 인용하지 않아도 좋을 명저의 구절을 인용하고.......이것은 또한 1950년대와 1960년대 지식인들이 해외를 경험하지도 않고 서구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왠지 지적으로 불안해 했던 현상과 같다. 그래서 당시의 지식인들은 해외를 경험하지 못했을 때. 열등감 아니면 거소한 불안감을 지녔던 것이다. 그러나 세계 어느 나라 역사를 보아도 문화에는 기복이 있어 왔다. 침체, 새로운 준비. 새로운 일깨움, 찬란한 창조. 매너리즘과 과소비 현상, 문화적 가치의 대혼란, 그리하여 다시 침체, 새로운 준비로 흘러가는 문과의 생장과 소멸이라는 도도한 흐름이 있어 온 것이다. 우리 역사 속에도 문화적 열등감이 깊이 침윤되어 있던 시기도 있었고, 문화적 자신감을 당당히 표출하며 찬란한 창조를 이룩하던 시기도 있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7세기 전반기, 진평왕과 선덕여왕 시절의 신라 문화는 송강 시대의 문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그 시기의 문화는 모든 것을 남이 아니라 자신의 입장에서 창조하고 소비할 수 있는 자신감에 충만한 것이었다. 인근 지역. 백제, 고구려, 중국의 문화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주체적으로 소화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익히 아는 바와 같이 원효 대사는 당나라 유학을 중도에 포기하고 스스로 일종을 이루어 내었다. 다시 말해서 이제는 굳이 유학하지 않아도 알 것은 다 알 수 있다는 문화적 자신감이 그 시대에 형성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은 외래문화를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을 만큼 문화적으로 성숙하였음을 의미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우리 사회에서 외국 유학을 결코 필수나 만능으로 생각하지 않게 된 것도 같은 맥락에서 볼 수 있다. 자국의 현실 속에서 부딪치며 현실을 영원한 스승으로 삼아 자신의 삶과 학문을 실천적으로 구현하는 것이 올바른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송강이 성리학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사물을 인식한 것은 당시의 그가 넘기에는 너무 어려운 성벽 안쪽의 일이었음을 용인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의 '원숭이 정서'만은 받아들이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