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등사죽루죽기(月燈寺竹樓竹記) / 이인로
화산 월등사 서남쪽에 죽루라는 누각이 있다. 이 누각의 서편 언덕에 대나무 수천 그루가 자라는데, 절의 후면을 에워싸고 울창하게 솟아 있는 것이 볼 만하다. 주장 노승인 대선후(大禪侯)는 일찍이 이 대나무를 매우 사랑했다.
하루는 노승이 누각에 손님들을 모아 놓고 대나무를 가리키며 말했다.
"여러분들이 대나무의 좋은 점을 각자 말씀해 주신다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월등사 죽루에서 노승(대선후)이 대나무의 좋은 점을 물음
그러자 어떤 사람이 말했다.
"대나무의 순은 좋은 먹거리입니다. 죽순이 쑥쑥 자랄 때 마디는 촘촘하고 대 속은 살이 올라 꽉 차게 됩니다. 이때 도끼로 찍고 칼로 다듬어서 솥에 삶아 내거나 풍로에 구워 놓으면 향기가 좋고 맛이 연하여 입에는 기름이 돌고 배는 살이 찝니다. 쇠고기나 양고기보다 맛있고, 노린내나는 산짐승 고기와는 비교도 되지 않습니다. 이른 아침에 먹어도 질리지 않으니, 대의 맛이 이러합니다."
▷손의 대답1-죽순의 맛이 좋기 때문에 좋음
어떤 이가 또 말했다.
"대가 단단해 보이지만 그런 것만은 아니고, 유약해 보이지만 그런 것만도 아니어서, 사람이 여러 가지로 활용하기 좋습니다. 휘어서 만들면 광주리와 상자가 되고, 가늘게 쪼개 엮으면 문을 가리는 발이 되며, 엷게 쪼개서 짜면 마루에 펴는 자리가 되고, 또 쪼개서 다듬으면 고리짝과 도시락과 술을 거르는 용수는 물론, 소와 말을 먹이는 여물통과 대그릇과 조리 따위가 됩니다. 이것이 모두 대로 만드는 것이니, 대의 성질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손의 대답2-생필품의 재료가 되기 때문에 좋음
다른 사람이 말했다.
"대가 솟아날 때에는 무더기로 솟는데 작은 것, 큰 것, 먼저 난 것, 나중 난 것이 순서를 다툽니다. 처음에는 약하게 나오고 얼마 후에는 가늘게 자랍니다. 그러다가 바닷거북의 등 같은 두꺼운 껍질이 벗겨지고 옥 기둥 같은 줄기가 자라나면 흰 가루는 없어지고 껍질이 단단해지면서 흰 마디가 뚜렷해집니다. 푸른 연기가 흩어지지 않고 바람 소리가 저절로 납니다. 쇄쇄하는 소리와 두터운 그늘과 저녁의 그림자는 달빛을 희롱하며, 차가운 모습으로 눈에 덮여 있습니다.대나무는 이럴 때가 가장 아름답습니다. 봄에서부터 섣달 그믐 때까지 날마다 여기서 시를 읊을 수 있고, 근심 걱정을 잊을 수 있으며, 기분을 돋을 수 있습니다. 대의 운치란 이런 것입니다." ▷손의 대답3-좋은 경치를 이루기 때문에 좋음
또 다른 이가 말했다.
"대의 키가 천 길이 되는 것을 '심'이라 하고, 둘레가 두어 길이 되는 것은 '불'이라 하며, 그 머리에 무늬가 있는 것은 '집'이라 하고, 그 바탕이 검은 것은 '유'라 하며, 가시가 돋힌 것은 '파'라 하며, 털이 있는 것은 '공'이라 합니다. 공주에서 나는 '공', 기주에서 나는 '적', 강한에서 나는 '미', 파유에서 나는 '도', 여포에서 나는 '포', 원상에서 나는 '반죽'.'운당'.'막야'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 명칭과 모양이 모두 생산되는 지방에 따라 다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다가 얼도록 추워도 잎이 떨어지지 않고, 쇠가 녹도록 더워도 마르지 않습니다. 새파랗고 싱싱하여 사철 변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성인은 대를 숭상하며, 군자는 대를 본받으려 합니다. 때와 장소에 따라 그 뜻을 바꾸지 않으니 대나무의 지조가 바로 이러합니다." ▷손의 대답4-변함없이 푸르고 싱싱하기 때문에 좋음
식영암이 말했다.
"그 맛이나 재목, 혹은 운치나 지조 때문에 이 대를 좋아한다면, 이것은 겉만을 알고 그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대나무가 처음 땅에서 돋아날 때부터 단번에 쑥 자라 버리는 것을 보면 선천적으로 자질을 타고 난 사람이 하루아침에 문득 깨달음이 향상되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대가 늙을수록 더욱 단단해지는 것을 보면 후천적으로 노력한 사람의 힘이 차츰차츰 증진해 나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대가 그 속이 빈 것을 가지고 보면 사람의 마음을 비운 모습인 것을 알 수 있으며, 대가 바깥쪽이 곧은 것을 가지고 보면 사람의 실상이 어떠한지 얘기할 수 있습니다. 대의 뿌리가 용으로 변화하는 것은 부처님이 될 수 있음의 비유가 되며, 열매로 봉황을 먹게 하는 것은 남을 유익하게 하는 행위입니다. 대사가 대를 좋아하는 까닭은 아마도 저런 이유 때문이 아니고, 이런 이유 때문인 듯합니다."
겉모습(맛, 재목, 운치, 지조) 본질, 내면적인 것(식영암이 말한 내용)
▷대나무의 속성이 인간의 속성과 대응되기 때문에 좋음
노승이 말했다.
"정말 의미가 깊도다. 그대의 말이여. 그대야말로 대나무의 유익한 친구입니다."
이제 감히 이것을 문서에 적게 해서 후일에 대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의 본보기가 되게 하려 한다. ▷ 노승의 동의와 이 글을 쓴 이유
-출전 : 동문선
■ 핵심정리
* 연대 : 고려 중기(12세기경)
* 갈래 : 한문 수필
* 성격 : 교훈적, 유추적, 대화체, 문답법, 불교적
* 특징 : 유추를 통해 대상의 가치를 밝히고 있음
* 주제 : 인간의 삶에 비유한 대나무의 다양한 덕성
■ 이해와 감상1
이 글은 대나무가 가진 속성이나 가치에 대하여 여러 인물이 대화를 나눈 내용을 쓰고 있다. 대나무를 좋아하는 노승이 손님들을 청해 대나무의 좋은 점을 묻는데, 어떤 이는 죽순의 맛에 대해, 어떤 이는 대나무의 쓰임에 대해, 어떤 이는 대나무의 운치에 대해, 지조에 대해 말한다. 그러난 식영암은 대나무의 성장과 특성 등을 인간의 삶의 모습에 견주면서 이로부터 대나무의 가치를 찾아내고 있으며, 노승이 이를 칭찬하고 있다.
■ 이해와 감상2
이 작품은 월등사 주시 노승(대선후)의 물음에 다섯 사람이 각각 다른 대답을 하되, 마지막에 식영암이 종합적으로 마무리하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동일한 대상이라도 사람에 따라 다르게 인식, 평가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마지막 대화자 식영암의 말에 노승(대선후)이 동감을 표현함으로써 주제가 확정된다. 식영암은 대나무의 성장 과정을 인간의 삶의 모습과 대응시키고 있다.
■ 이인로 : 호는 쌍명제, 문장에 뛰어안 고려 시대의 대표적 문인, 명종 10년에 급제하여 직사관이 되었고 고종 때는 우관대부를 지냈다. 저서에는 <파한집>와 <쌍명재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