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고지(原稿紙) -이근삼(李根三)
[등장 인물]
․ 중년 교수(中年敎授) : 본직(本職) 번역
․ 처(妻)
․ 장남(長男)
․ 장녀(長女)
․ 감독관(監督官)
․ 천사(天使)
막(幕)이 오르기 전, 요란스러운 통속(通俗) 음악이 들린다. 음악이 차차 요란해질 무렵, 스포트라이트가 무대 전면(막 앞) 중앙에 서 있는 장녀를 포착한다. 꽉 몸에 낀 화려한 색의 블라우스와 캐프리 팬티를 입고 있다.
무지무지한 젖통이와 뒤로 사정 없이 바그라진 엉덩이에, 관중들은 첫 장면에 위압을 느낀다. 입이 보통 여자의 서너 배는 된다. 빨간 칠을 한 아가리가 전 안면의 삼분의 이는 차지한다. 스포트라이프에 번쩍이는 귀고리, 목걸이, 손목걸이가 관중들 눈에 거슬린다. 나이는 스물셋쯤, 이야기하는 동안 끊임없이 몸을 이리저리 흔든다. 음악이 멎는다.
장녀 : (멋들어지게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바쁘신데 이렇게 많이 모여 주셔서 참 감사합니다. 말씀드리기 전에 제 소개를 먼저 할까요? 여러분들은 저한테 소개할 필요가 없어요.
아까 여러분들이 이 극장(혹은 이 학교, 혹은 이 집) 문을 들어오실 때 저는 옆에서 자세히 여러분들을 보았어요. 죄다 연령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성격이 다르고, 여기 오시기 전에 잡수신 저녁 식사의 찬거리도 다르지 않겠어요. 저는 여러분들을 잘 알아요. 그런데 모든 것이 제각기 다른 여러분들이 이렇게 한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니 누가 누군지 분간을 할 수가 있어야죠. 모두 똑같이 보이는 걸요. 많은 사람들이 한 사람이 되어 버렸어요. 저에겐 여러분들이 한 사람같이 보인단 말입니다. 오늘 여러분을 모신 것은 다름 아니라, 근심, 걱정이 가득 찬 여러분들에게 우리 집 구경을 좀 시켜 드리려고 한 것입니다. 우리 집은 크게 자랑할 만한 것은 못 되지만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습니다. 저는 이 집 첫딸입니다. 장녀란 말입니다. 남동생이 하나 있어요. 곧 소개하겠습니다만, 말이 자꾸 많아져 미안합니다. 그러나 저는 남자가 아닙니다. 말이 짧아지면 무엇으로 제가 여자라는 걸 증명할 수 있겠어요. 저의 아버지는 참 훌륭한 분이에요. 아버지는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수인데, 안 나가는 학교가 없어요. 이름이 나면 저절로 여기저기서 찾는 법인가 보죠? 그 동안 책을 열두 권이나 냈으니 말은 다 했지요. 물론 그 열두 권이 전부 번역 작품입니다만, 열두 권에는 틀림없지요. 아버지의 명성과 돈벌이가 이런데다, 저는 또 이렇게 현대적인 신여성이니 걱정할 게 뭐 있겠어요. 저의 남동생도 매 마찬가집니다. 건강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이 때, 서서히 막이 오른다.)
그럼, 저의 집으로 안내하겠어요.
(장녀, 무대 좌측(左側)으로 걸어간다.)
이것이 응접실입니다.
(장녀, 좌측으로 사라진다.) <중략>
장남 : 전 이 집 장남입니다. 이 쪽 높은 방은 저하고 누이가 함께 생활하는 곳입니다. 아버지를 소개하기 전에, 행복한 가정을 이룰 수 있는 비결을 말씀드리겠어요. 아주 간단합니다. 부모는 자식들에게 맡은 바 책임을 다하면 됩니다. 밥 세 끼도 제대로 못 먹이고, 학비도 제대로 못 주는 부모들이, 아들 딸이 결혼할 때가 되면 아주 귀찮게 간섭을 한단 말입니다. 우리는 이런 버릇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 집이 비교적 행복한 것도 우리 부모님의 열렬한 책임감 때문입니다. (자기 팔뚝 시계를 보며) 지금이 저녁 일곱 시 반이니, 아마 아버지가 곧 돌아오실 겁니다. 아버지는 늘 쾌활한 얼굴에다 발걸음은 참새처럼 가볍지요.
(졸음이 오는 지루한 음악과 더불어 철문(鐵門) 도어가 무겁게 열리며 교수 등장. 아래위 양복이 원고지를 덧붙여 만든 것처럼 이것도 원고지 칸투성이다. 손에는 큼직한 낡은 가방을 들고 있다. 허리에 쇠사슬을 두르고 있는데, 허리를 돌고 남은 줄이 마루에 줄줄 끌려 다닌다. 쇠사슬이 도어 밖까지 나가 있어 끝이 없다. 도어를 닫고 소파에 힘들게 앉는다. 여전히 쇠사슬을 끌고다니면서, 가방은 자기 옆에 놓고 처음으로 전면을 바라본다. 중년에 퍽 마른 얼굴,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고, 찌푸린 얼굴은 돌 모양 변화가 없다. 잠시 후, 피곤하다는 듯이 두 손을 옆으로 뻗치면서 크게 기지개를 한다. ‘아아’ 하고 토하는 큰 하품은 무엇에 두드려 맞아 죽은 비명같이 들려, 오히려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장녀가 플랫폼에 나타난다.)
장녀 : 저의 아버지랍니다. 밖에서 돌아오시면 늘 이렇게 달콤한 하품을 하신답니다.
(교수는 머리를 기대고 잠을 자고 있다. 코를 고는데, 흡사 고양이 우는 소리다.)
인제 어머님이 돌아오세요. 어머님은 늘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세요.
(적당한 곳에서 처가 나타난다. 과거에는 살도 쪘지만, 현재는 몸이 거의 헝클어져 있다. 퇴색한 옷을 입고 있다. 소리를 안 내고 들어와, 잠자는 교수의 주머니를 샅샅이 턴다. 돈을 한 주먹 쥐고, 이어 교수의 가방을 턴다. 돈 부스러기를 몇 장 찾아 내고 그 액수가 적음에 실망을 한다. 잠시 후, 교수를 흔들어 깨운다.)
장녀 : 제 말이 맞았지요? (플랫폼 방 불이 서서히 꺼진다.)
처 : 여보, 여기서 그냥 주무시면 어떡해요, 옷도 안 갈아 입으시고.
교수 : 깜빡 잠이 들었군.(교수 일어선다.)
처 어서 옷을 갈아 입으세요.
(처는 교수 허리에 친친 감긴 철쇄를 풀어 헤치고, 소파 뒤에 긴 막대기에 감겨 있는 또 하나의 굵은 줄을 풀어 교수 허리에 다시 감아 준다.)
옷을 갈아 입으시니 한결 시원하지 않아요?
교수 : 난 잘 모르겠어.
처 : 김 씨 만나 봤어요?
교수 : 아니, 원체 바뻐서.
처 : 그렇지만 김 씨 만나는 일이 제일 바쁘지 않아요? 내일까지 내야 하는데 전 어떡해요?
교수 : 내일 만나, 내일 만나.
처 : 내일 누구가 누구를 만난단 말이요?
교수 : 내가 그 이 씨를 만난다니까.
처 : 이 씨는 또 누구요?
교수 : 당신이 만나라는 출판사 주인 말이야.
처 : 그 주인이 왜 이 씨예요? 김 씨지.
교수 : 그래, 김 씨랬어.
처 : 이름도 못 외고 어떻게 해요?
교수 : (화를 내며) 김 씨면 어떻고 이 씨면 어때? 박 씨면 또 어때? 아닌게 아니라 누가 누군지 분간을 못 하겠어. 누굴 만난다고 찾아가다가 보면 영 딴 사람한테 가게 된단 말이야. (잠시 사이) 거 애들보고 음악이나 한 곡 틀라고 하시오.
처 : (순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옆방을 향하여) 얘들아. (잠시 후) 얘들아.(대답이 없다. 여전히 부드럽게) 얘들아.
장남 : (처의 소리와는 정반대로 호령이나 하듯이) 왜 그래요?
처 : 가벼운 음악이나 한 곡 틀어라. 아버지가 피곤하시단다.
장남 : 알겠어요! (옆방에서 축음기 소리가 난다. 시끄럽고 귀가 아픈 곡이면 어떤 음악이건 상관 없다. 판이 고장이 난 듯, 똑같은 곡이 되풀이 된다. 처는 무표정한 얼굴. 교수는 시끄럽다는 듯이 손으로 귀를 막는다. 참다못해 교수는 손을 흔들며 중지하라는 시늉을 한다. 음악이 멎으며 옆방이 밝아진다. 소파에 앉아 무엇을 처먹고 있는 장남과, 아무렇게나 앉아 화장을 하고 있는 장녀가 보인다.)
교수 : 저런 시끄러운 음악을 무엇 때문에 틀까?
처 : 왜 시끄러워요? 애들이 제일 좋아하는 곡인데.
교수 : 좋건 나쁘건 간에 왜 똑같은 곡을 되풀이하느냐 말이오?
처 : 당신이 음악을 몰라 그래요. 애들은 좋다고 하던데.
교수 : 그 곡 이름이 뭐지?
처 : “찬란한 인생”이라나요.
교수 : 찬란한 인생이라. 찬란한 인생이 자꾸 되풀이된다는 말이군.
처 : 그런가 부죠. (교수가 소파 앞에 굴러 있는 신문지를 집어 본다.)
교수 : (신문을 혼자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의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 참, 지프 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지프 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착취사(搾取社)에서 다시 나왔어. 이 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가 신문지를 한 장 다시 접는다. 날짜를 보더니)
처 : 당신두 참, 그건 옛날 신문이에요. 오늘 것은 여기 있는데.
교수 : (보던 신문 날짜를 읽고) 오라, 삼 년 전 신문을 읽고 있었군. 오늘 신문 이리 주시오. (오늘 신문을 받아 가지고 다시 읽는다.) 참, 비가 많이 왔군. 강원도 쪽에 눈이 굉장한 모양인데. 또 살인이야. 이번에는 두 살 난 애가 자기 애비를 죽였대. 참, 지프 차가 동대문을 들이받아 동대문이 완전히 무너졌군. 지프 차는 도망가 버리구. 이것 봐, 내 ‘개성을 잃은 노동자’라는 번역책이 악마사(惡魔社)에서 다시 나왔어. 이 씨가 또 당선됐군. 신경통에 듣는 한약이 새로 나왔는데. 끔찍해라, 남편이 자기 아내한테 또 매맞았군.
처 : 참, 세상도 무척 변했군요. 삼 년 전만 해도 그런 일이 없었는데. 당신 피곤하시죠?
장녀 : (옆방에서 화장을 하며, 장남에게) 얘, 시계가 좀 늦은데 일어선 김에 밥이나 좀 줘라.(장남, 시계에 밥을 준다.)
처 : 여기 좀 계세요. 저 밥을 좀 지을게요.
교수 : 괜찮어, 밥 먹었어.
처 : 어디서요?
교수 : 여기서 먹었던가? 아니야, 거리서 먹었던 것 같기도 하구.
처 : 언제요?
교수 : 오늘 아침에도 먹었구. 점심두……. 글세…… 그러나 보니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분간을 못 하겠군.
처 : 지금 하시는 번역은 언제 끝나요?
교수 : 지금 하는 번역이 몇 가지나 있지?
처 : 그러니까 밤낮 원고료를 짤리우지요. ‘자존심의 문제’, ‘예술에 있어서의 창조성’, ‘검둥이와 미녀’, ‘어떤 여자의 고백’, ……이렇게 넷뿐인가요?
교수 : 그렇겠지. 아이 피곤해.
처 : 어떤 것이건 빨리 끝내야지, 어떻게 해요. 집도 수리해야겠구, 축음기도 사야겠구, 또 이 달에 아버지 생일도 있잖아요.
교수 : 밤낮 생일을 치르고 있으니 어떻게 된 거요? 어제도 아버지 생일 잔치를 했는데.
처 : 당신두 참! 어제 당신 아버지가 생신이었어요. 이번엔 우리 아버지 생일이구.
교수 : 그저께도 누구 아버지 생일이라구 해서 돈 만 환을 내지 않았소?
처 : 그건 대식이 동생 사촌의 며느리뻘 되는 여자의 아버지 생일이래서 그랬지우.
교수 : 그 바로 전날에도 누구 아버지 생일이라고 해서 돈을 냈는데.
처 : 그건 순자 언니 조카뻘 되는 며느리 시누이의 아버지…….
교수 : 됐어, 됐어.(크게 하품을 하며) 아이 피곤해.
(이 때, 밖에서 시계가 여덟 시를 친다. 교수는 깜짝 놀라 일어선다.)
여덟 시야! 여덟 시! 늦겠군.
처 : 어디 가세요?
교수 : 어디 가긴 어디 가. 나 가는 데 모르시오? 옷 갈아 입어야지.
(전번 모양 철쇄를 졸라 맨다. 이어, 도어 쪽으로 가서 철문 같은 도어를 열고 밖으로 나간다. 잠시 후, 다시 들어온다.)
처 : 왜 또 돌아오세요? 나가시기가 바쁘게.
교수 : 여덟 시를 치기에 아침 여덟 신 줄 알았지. 대학에 강의하러 나간다고 나섰더니 밖이 캄캄하지 않어. 생각해 보니 밤 여덟 시군. (소파에 누우면서) 오늘 밤은 좀 푹 쉬어야겠군.
처 : 공부는 안 하세요?
교수 : 공부?
처 : 아, 번역 말이에요.
교수 : 좀 쉬어야겠어.
<후략>
▶ 작품 줄거리
대학 교수인 주인공은 삼 년 전의 신문을 무심코 읽다가 아내에게 핀잔을 듣고 오늘 신문을 읽는데 그 내용이 삼 년 전의 신문과 거의 비슷하다. 교수는 아내의 돈타령과 원고 독촉 잔소리를 듣다가 저녁 8시를 아침 8시인 줄 알고 출근하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장남과 장녀는 갖가지 용도의 용돈을 요구하고, 감독관은 번역 원고 쓰기를 독촉한다. 천사가 나타나 과거를 회상시키다가 곧 사라지고, 감독관은 또 다시 번역을 독촉하자, 교수는 영자 신문을 기계적으로 번역한다. 장녀에게 용돈을 나누어 주고, 감독관은 계속 번역을 재촉한다.
▣ 핵심 정리
▶지은이 : 이근삼(李根三 1929- ) 극작가. 영문학자.
▶갈래 : 희곡. 단막극. 부조리극
▶성격 : 반사실적. 서사적
▶배경 : 현대의 어느 교수의 가정
▶특징 : 특별한 사건의 전개나 갈등, 위기가 없이 극중 상황만을 전개한 실험적 기법을 활용하였다.
▶제재 : 현대인의 상황
▶주제 : 현대인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비판과 풍자.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에 대한 풍자
▶출전 : <사상계>(1961)
● 등장 인물의 성격
▶교수 : 아버지로서의 의무감에 짓눌려 이성적인 사고 능력을 상실하고, 타성에 의해 살아가는 무성격자이다.
▶처 : ‘교수’와 같은 성격의 인물이다. 타성적인 의무감으로 자식들의 물질적 욕구에 동조한다. 처와 교수 사이에 진정한 인간적 유대감은 없다.
▶장남과 장녀 : 두 인물로 설정되어 있으나 실은 하나이며, 해설자 역할을 동시에 맡고 있다. 육체적으로 건강하고 정신 상태도 겉으로 보기에 멀쩡하다. 그러나 꿈과 이상이 결여되어 있고, 사고의 여유를 가지지 못하며, 오직 즉물적(卽物的)이고 현세적인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현대인의 물질주의적 세계관을 상징한다.
▶감독관․천사 : 관념적․비현실적 인물이다. 감독관은 현실의 압력을, 천사는 꿈과 이상을 상징한다.
● 작품의 특징
▶내용 :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잊어버린 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한 중년 교수의 가정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의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삶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희화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구성 : 전통적인 희곡에서 요구하는 인물의 전형적 성격보다는 주제 의식의 표현에 중점을 두고 있은 부조리극(인생의 무의미, 무목적, 충동성 등을 표현하는 연극의 한 갈래로서, 1950년대 현대인이 처한 절망적인 상황에 대한 고발에서 시작되었다)의 구성 방법을 취하고 있다.
▶표현 : 무대 장치, 분량, 소도구 등은 물론이고 등장인물의 대사와 동작 모두가 짙은 풍자와 반어(反語) 및 희극적 과장의 방법을 쓰고 있다.
● 작품의 구성
* 발단 : 장녀, 장남이 나와서 인물과 집안 소개
* 전개 : 교수가 귀가해서 처와 이야기를 나눔. 교수가 잘못 알고 출근하려다 다시 잠이 듦. 감독관이 나타나 원고 쓰기를 독촉함. 처가 원고를 돈으로 환산하여 챙김
* 절정 : 환상에 잠긴 교수 앞에 천사가 나타남
* 결말 : 다시 아침이 되고 무의미한 생활의 반복이 시작됨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어떤 배경이나 특수한 심리 상태에서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라, 매일매일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일상사 중의 한 토막을 다루어, 갈등을 느낄 수 있는 대상에 대한 갈등의 포기를 그리고 있다. 겉보기에는 근엄한 대학 교수와 그 가정의 이중성을,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소극(笑劇)의 형식으로 처리하여 현대인의 무의미한 일상성과 인간 소외의 문제를 아이러니컬하게 보여 주고 있다. 특정한 사건의 전개나 갈등이 없이 하나의 상황을 희극적으로 과장하는 이 작품의 수법은 20세기의 새로운 연극인 부조리극의 대표적 형식이다. 부조리극에서는 전통극의 인과 관계에 의한 플롯을 거부하고 허구적 과장, 희극적 형상화 등의 수법을 통해 인간의 부조리한 상황을 드러내는 데 주력하며, 극적 몰입을 거부한다.
이 작품에서 유사한 행위가 반복된다든가 무의미한 대사가 반복되는 것은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 무가치함을 반영한다. 또한, 거대한 조직 사회 속에서 개인의 위치가 축소되고, 인간이 소외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드러낸다.
■ 심화 학습
▶ “원고지”의 실험적 성격
이 작품의 인물들은 물질에 대한 욕망과 기계적인 순응만 보일 뿐, 진정한 삶의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인물들이다. 가족들 사이의 진정한 의사 소통이나 연대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은 이처럼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망각한 채 기형화된 삶을 아무런 자각 없이 살아가는 한 가족의 소외된 삶의 모습을 그린 단막 풍자극이다. 무의미한 일상 생활의 모습을 희극적으로 강조하기 위해 사실주의 연극의 극작술(劇作術)과는 전혀 해설을 한다든지 무대 장치와 소도구들을 일부러 비현실적으로 과장한 것도 현대극의 실험적 수법을 활용한 것이다.
이러한 실험극에서는 사실을 충실하게 표현하기보다는 주로 사실에 대한 새로운 개념을 표현하고자 한다. 이것은 결과적으로 반(反)사실적이며, 반(反)표현적이어서 현대인의 정신적 상황을 대변해 주는 현대 희곡의 한 특징이 된다.
▶ “원고지”의 호칭과 그 효과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은 가족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부르는 이름은 고유 명사가 아닌, ‘교수’, ‘처’, ‘장남’, ‘장녀’ 등 보통 명사로 명명되어 있다. 보통 명사로 된 호칭은 가족 안에서 쓰이는 호칭이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객관화된 호칭이다. 이처럼 보통 명사화된 호칭 사용은 등장 인물들이 개성을 가진 개인이 아니라, 그 인물이 속한 집단을 대표하는 유형화된 인물임을 의미한다. 인물들이 한 가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이러한 호칭 사용은 가족 구성원들 간의 유대 관계 상실과 거리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으로 풍자의 범위를 사회 전체로 확대할 수 있게 된다.
▶ 풍자적 수법
작가는 등장 인물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적인 관계보다는 물질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을 강요하는 현대 사회를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풍자를 위하여 작가는 희극적으로 과장된 인물을 제시하고 비사실적인 장치를 동원하였는데, 이들은 곧 규격화된 틀 속에서 무의미하고 통제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 부조리극 형식
부조리극은 195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전위극(前衛劇) 및 그 영향을 강하게 받은 연극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세계 속의 인간의 상황을 부조리로 보고, 그것을 극의 계기로 삼는다. 이 연극들은 통일된 인격을 가진 등장 인물의 행동에 의해 극을 진행시키고, 그 이면에 숨겨진 부조리성을 논리적으로 서서히 설명해 간다. 대표적인 부조리 연극으로는 이오네스코의 ‘대머리 여가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등이 있다.
이 작품은 현대인들이 겪고 있는 일상사 중의 한 토막을 제시하였지만 인물간의 특별한 갈등 없이 극중 상황만을 전개해 가는 실험적 기법을 활용함으로써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잃어버린 현대인을 풍자하고 있다. 이러한 기법은 20세기에 등장한 부조리극의 형식을 실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부조리극이란 인생의 의미․ 무목적․ 충동성 등을 표현하는 연극의 한 갈래로, 특히 이 작품에서 이러한 기법의 사용은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일상적 삶의 무의미함을 드러내기 위한 장치로서의 기능을 하는 암시적인 무대 장치들이나 음향과 조명의 사용, 그리고 유사한 행위나 무의미한 대사의 반복 등은 모두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상징어 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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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쇄 |
사회적 현실의 압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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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 |
가장의 의무→ 가정에서 받는 또 다른 구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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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곡, 신문 |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일상 생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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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고지 무늬로 된 무대 공간 |
규격화된 특 속에서 무의미한 일상을 보내고 있음을 풍자 |
▶ 지문 한눈에 보기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
가족 공동체의 유대감 상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