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안교회 토요큐티 (2013. 11. 23)
작은 예수로 살아가는 삶 – 옥한흠 목사
우리는 각기 다른 모양의 십자가를 지고 가지만, 목적지는 같다. 목적지가 같은 만큼 우리에게는 많은 길동무들이 있다. 같은 모습으로 닮아 가는 자매와 형제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스칠 때 예수님의 향기를 맡는다. 우리는 작은 예수다.
예수님은 복 있는 자가 되려면 마음을 비우고, 슬퍼할 줄 알며, 온유하며, 남을 불쌍히 여기며, 마음이 깨끗하고, 화평케 하며, 의를 위해 굶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마 5:3-12). 예수님을 닮기 사모하는 사람은 날마다 이 교훈의 거울에 자기를 비춰 보면서 순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우리들의 이미지는 너무 참담하다. 그들의 눈에 우리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자들과 전혀 다를 게 없다. 성경을 들고 있다고 해서 우리를 특별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쩌다 이 지경까지 이르렀을까. 예수님을 닮아가야 한다는 거룩한 목표를 상실했기 때문이다.
‘너무 비현실적인 목표야. 이대로 사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는데 …’하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으면서 예수님을 닮는 우리의 목표를 마치 응접실에 걸어 놓은 액자처럼 쳐다만 보며 신앙생활 하는 데 그 원인이 있다.
예수님의 복 있는 사람의 조건에 대한 메시지는 분명하다. 예수님의 제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온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에서 부름 받은 제자는 땅에서부터 예수님을 닮는 것을 목표로 삼아 열심히 오르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내세의 구원을 외치는 자는 많지만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고 외치는 자는 많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이러한 현실을 잘 설명하고 있지 않은가. 흠이 없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가 오를 정상이 어디인지를 분명히 하자는 것이다. 그 정상은 ‘작은 예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고 흉내라도 내야 한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약2:26).
영국의 어떤 술집 주인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전도집회에서 복음을 듣고는 마음의 변화를 얻어 ‘나 예수 믿겠습니다’하고 벌떡 일어나 앞에 나가서 무릎 꿇고 기도하고 돌아갔다. 그리고는 곧바로 자기 술집 앞에 간판을 하나 붙였는데, “나 엊저녁에 예수 믿었소’오늘부터 술집 영업 안 합니다.”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이것이 믿음이다. 어제와 오늘이 완전히 바뀌는 것이 믿음이다. 이것은 기적처럼 저절로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우리의 의지를 통해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의 과정이다.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약2:18).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게 된 데에는 그의 마음속 믿음뿐 아니라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을 하나님이 보셨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아들을 주신 이가 죽은 아들을 능히 살리실 수도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늘그막에 얻은 아들을 바침으로 아들보다 하나님이 자신의 우선순위에 있음을 행동으로 증명했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신앙의 뿌리이며 믿음의 조상이자 하나님의 친구로 일컬음을 받았다.
제자로 산다는 것은 제자처럼 생각하거나 제자처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이 사신 모습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훈련의 핵심이다. 그러나 현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님처럼 변하는 것은 점진성을 가지고 마지막 날에나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만 강조하여, “우리는 모두 인간인데 … ”하며 눈감아 주는 현실주의에 곤두박질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한국 교회에 냄새가 진동하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작은 예수가 되라는 명령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믿는 자에게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표준이다. 멕스 루케이도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은 당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신다. 그러나 그대로 두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당신이 예수님처럼 되기를 원하신다.” 헨리 나우엔은 더 강하게 이야기한다. “진정한 구원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진정한 구원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마지막 날에 얻게 될 변화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있는 자리에서 우리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이것이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수준이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명령도 부담스러워하는 우리에게 주님은 온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이 명령에 따르려면 몸부림치지 않는 한 우리가 배우고 외우는 말씀들은 결국 우리 입에서 맴도는 메마른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출처 : 『평신도를 위한 제자훈련 입문 길』국제제자 훈련원, 옥한흠, 52-5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