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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 건강 섬김

2026. 7. 5. 소책자

작성자기호헌|작성시간26.06.18|조회수39 목록 댓글 0

2026. 7. 5. 소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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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교만의 죄

 

출처 : 영혼을 위한 싸움김다위 / 두란노 2026

 

모든 죄의 뿌리가 되는 교만의 죄

높아진 자아를 성령님께 점검 받으라

신명기 811-18, 야고보서 46-7

 

1) 가장 치명적이고 은밀한 죄, 교만

 

예수 동행을 가로막는 일곱 가지 죄 중에서 가장 치명적인 죄는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모든 죄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교만은 근본적인 악덕이며 다른 모든 악덕을 낳습니다. C. S. 루이스는 교만을 "철저히 반 하나님적인 마음의 상태"라고 했습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자신이 쓴 《부흥론》에서 교만을 "세상에 들어온 최초의 죄이며, 마지막으로 뿌리 뽑힐 죄요, 하나님의 가장 완악한 원수이며, 마귀의 첫 자식"이라고 칭했습니다.

 

본래 교만은 초기 여덟 가지 목록 중에서 가장 마지막에 있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수도사들이 금식하며 탐식을 끊었습니다. 음욕도 피했습니다. 소유를 포기하며 탐욕도 버렸습니다. 열심히 노동하며 나태도 극복했습니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악한 생각과 싸우며 이겨 나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남아서 가장 끈질기게 괴롭히며 교묘하고도 은밀하게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영적 교만이었습니다. 금식하고, 물질도 내려놓고, 음욕도 물리치고, 노동하며 성실하게 살고 났을 때 슬며시 드는 생각이 무엇일까요? '너 참 대단하다. 너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역시 너는 저 사람들과는 달라.' 이것이 바로 영적 교만이요, 영적 우월감입니다. 탐심과 음욕과 분노와 나태의 죄를 다 이긴 것 때문에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오는 죄가 교만입니다. 교만이 얼마나 무서운지, 교만의 반대인 겸손만으로는 교만을 온전히 치유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교만과 겸손의 사다리는 병행한다.” 겸손해질수록 그 겸손함 때문에 교만해질 수 있고, 그로 인해 추락할 위험이 더더욱 커진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겸손에 대한 자부심 때문에 자기 자신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만의 본질은 '자기 자신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그 자신은 그 사실을 잘 알지 못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교만 중에서도 영적 교만이야말로 사탄의 가장 주된 특징이라고 지적합니다. 왜 대천사였던 자가 사탄으로 타락하게 되었습니까? 그가 하나님 바로 옆에서 그분의 얼굴을 뵈었고, 그분과 신적 지식을 가장 많이 알고 경험했다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가깝다는 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그분 바로 곁에서 그분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특권 중에 특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특권과 영적 지식과 경험들이 대천사로 하여금 타락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습니다. 더 높고도 깊은 영적 지식과 경험들이 그를 자고하게 해 자신을 마치 하나님인 양 착각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교만입니다.

 

존 밀턴(John Milton)은 《실낙원》에서 사탄이 어떻게 천국에서 쫓겨나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묘사합니다. 【저 지옥의 뱀, 바로 그 자였다. 그가 질투와 복수심에 불타서 교활한 술수로 인류의 어머니를 속였다. 그 때에 그는 자신의 교만 때문에 자신의 군대인 반역 천사들과 함께 천국으로부터 쫓겨나 있었다. 반역을 일으키기만 한다면, 그들의 도움으로 자신의 동료들보다 더 큰 영광을 얻어서 지존자와 대등해질 것이라고 믿고서, 야망을 품고 하나님의 보좌와 왕권에 대항하여 천국에서 불경스러운 전쟁이자 오만방자한 싸움을 일으켰지만, 그것은 헛된 시도였다. 전능자에게 도전하여 반기를 든 그는 전능하신 분에 의해 불길에 휩싸여서 타들어가는 가운데 영기천으로부터 거꾸로 내던져져서 무저갱으로 끔찍하게 추락하여, 거기에서 금강 사슬에 묶인 채로 형벌의 불 속에서 살게 되었다.】

 

사탄은 '자신의 교만' 때문에 쫓겨났습니다. 왜 교만이 있었습니까? 그는 자신이 지존자, 곧 전능자와 대등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만은 하나님과 가장 가까이 있음으로 일어난 마음입니다. 그래서 《부흥론》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이렇게 말합니다. 【타락한 천사들이 처해 있던 상황 속에는 그들을 겸손하게 만들고 교만을 멀리하게 할 요인들이 많았습니다. … 그러나 깨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의 커다란 명예와 하늘의 특권이 교만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유혹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에게 교만의 습관이 전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성도를 막론하고 아무리 탁월하고 하나님께 가까이 있는 자라 할지라도 스스로 이 위험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스스로 이 위험에서 가장 멀리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는 자야말로 사실은 가장 위험한 자입니다.】

 

교만은 마귀가 우리의 약점이 아니라 강점을 공격하는 죄입니다. 마귀는 자신의 강점 때문에 교만해졌고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마귀는 사람들의 강점을 부추겨서 치켜세웁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결국 추락하게 만듭니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좋은 의도로 포장되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좋은 의도와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강점,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아무리 좋은 의도라도 그것이 목적이 된다면, 그 선한 의도는 얼마든지 지옥으로 가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이 점은 교만이 가진 위험성과 기만성을 보여 줍니다. T. S. 엘리엇(Thomas Stearns Eliot)은 인간의 선행 안에 감추어진 죄의 위험성을 이렇게 경고했습니다.

 

【죄는 선행과 함께 자라오. 하나님의 종은 왕을 섬기는 사람보다 더 큰 죄를 짓고 슬픔에 빠질 위험이 있다오. 더 큰 목적을 위해 섬기는 자들은 그 목적이 자기를 섬기게 할 소지가 있기 때문이오. 옳은 일을 하면서도 말이오.】

 

하나님이 주시는 비전과 꿈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꿈을 가장하여 자신의 꿈을 내세울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와 열방을 섬긴다는 고귀한 목적을 내세우면서 자기의 욕망을 위해 아름답게 선의로 포장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얼마나 섬뜩한 경고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자 했던 이유는 탐식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에 만족하지 않고 그분의 자리에 올라 그분과 같이 되려 했던 오만한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비전과 목적이 거대하고 클수록 행여 선행이라는 명분과 함께 교만의 죄가 은밀하고도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리 내면과 영혼을 성령의 빛과 말씀의 거울에 비추어 면밀히 살펴보아야 합니다.

 

또한 교만은 관계에도 큰 영향을 미칩니다. 조나단 에드워즈에 따르면, 교만한 자는 모든 사람이 자신의 도움을 원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쉽게 의심하고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습니다. 반면 겸손한 자의 특징은, 자신은 모든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아주 회의적이고, 자신의 마음을 세상에서 가장 의심스러운 것으로 여깁니다. 자신을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아주 겸손한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너무나 바쁘며 자기 마음에서 너무 많은 악을 발견하고 그것에 주목하느라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살필 겨를이 별로 없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많이 불평하며 자기 자신의 냉랭함과 은혜 부족을 슬퍼하며 다른 사람들을 자신보다 더 낫게 여깁니다.】

 

교만 중에도 영적 교만이 가장 무서운데, 이 영적 교만은 세상 누구보다 온유했던 모세조차도 이길 수 없었던 죄입니다. 민수기 20장을 보십시오. 그는 지팡이로 반석을 치면서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민 20:10) 하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분명 반석을 향해 명령하면 물이 나온다고 말씀하셨는데, 모세는 반석을 지팡이로 쳤습니다. 마치 자신이 물을 나오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게다가 그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우리라니요? 물은 모세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바로 이것이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이유입니다. 모세도 이기지 못했는데 하물며 우리겠습니까? 조나단 에드워즈는 모세의 이야기를 다루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을 보는 놀라운 체험을 했고 그분과 친밀하고 달콤한 교제를 누리는 특권을 가졌으며 하나님이 자신을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크게 유익을 끼치는 도구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유혹은 그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강했습니다. 이런 유혹을 이기기 위해서는 많은 겸손함과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합니다. 유혹과 위험이 클수록 우리는 더 경성하고 기도하며 자기를 “불신”해야 합니다.】 자신이 영적 교만에 빠지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갖지 말고 불신하라는 것입니다.

 

제 이름은 다윗(한자 때문에 '다위'가 되었습니다)입니다. 그리고 저희 집에는 나단 선지자와 같은 분이 살고 있습니다. 그분은 종정 제가 행한 일에 대해 격려하고 응원해 주지만, 때로는 제가 행한 일에 대해 가차 없이 선지자적 사명을 감당하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교만한 제 자아의 첫 반응은 ‘나를 뭐로 보고 그러지?’ 하는 자기 방어입니다. 그러나 겸손한 영혼의 반응은 시간이 지난 후에 '맞아, 그 말이 맞아. 나를 바로 보았어'입니다. 저는 저와 함께 사는 그분으로 인해 저 자신을 불신하는 일에 큰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다윗은 그의 실상을 드러내 주는 나단이 있었기에 그 다윗이 된 것입니다. 나단도 또 다른 나단의 역할을 감당해 주는 사람이 있었기에 그 나단이 된 것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교만은 죽음과 지옥으로 인도하는 치명적인 죄요, 죄의 뿌리입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누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가장 드러나지 않으며 영혼 전체를 파괴시킬 수 있는 죄입니다. 교만은 단지 성화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서 주님을 더 닮을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교만은 영혼이 죽는 문제입니다. 잠언 18장 12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마음이 오만하면 멸망이 뒤따르지만, 겸손하면 영광이 뒤따른다”(새번역).

 

영혼의 교만은 곧 멸망이요, 죽음입니다. 사망입니다. 그리고 교만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적으로 만드는 것이 교만입니다. 반면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2) 교만한 자의 특징

 

하나님을 잊어버림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 내시고”(신 8:14).

 

우리의 마음이 교만하게 되면 나오는 첫 번째 증상은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루에도, 주 중에도 하나님이 잘 생각나지 않습니다. 오로지 내 일, 내 업무, 내 가족, 내가 하나님보다 사랑하는 그 어떤 것이 생각나지, 하나님은 잊어버립니다. 하나님을 설령 잊지 않았다 해도 사실상 잊어버렸음을 알 수 있는 것은 바로 찬양과 감사가 있는 예배를 통해서입니다. 위대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 하나님이 행하신 위대한 일 때문에 찬양의 고백이 마음에서 우러나 흘러나오는지, 아니면 그냥 형식적으로 찬양하는지를 보십시오. 찬양이 메마르고 감격이 없다면 이미 교만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일 수 있습니다. 교만한 자는 절대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없습니다.

 

또한 교만하면 감사하지 않습니다. 감사하기보다 모든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마땅한 권리라고 여깁니다. 본문인 신명기 8장 12-13절을 보십시오.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이 있고, 소와 양이 번성하여 재산이 증식되는 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완전히 잊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교만해졌기 때문입니다. 교만해진 증거는 바로 입술의 감사가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린다는 것의 의미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무엇인가를 잘한다면 그것이 바로 교만의 증거입니다. 당신은 가정을 돌보거나 자녀를 키우거나 회사에서 일할 때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믿는다면서 그분을 의지하지 않는 것 자체가 교만하다는 증거입니다.

 

저는 묵상하고 기도하지 않으면 말씀 준비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이런 마음이 듭니다. '주님, 저에게 능력을 주셔서 설교 준비라는 해산의 고통을 겪지 않아도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런데 어느 날, 주님이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게 은혜다. 네가 너의 능력으로 말씀을 전하면 넌 절대 나를 의지하지 않을 거야. 넌 교만해질 거야’

 

그때 저는 마지막까지 말씀을 놓고 기도하게 하시는 이 자체가 얼마나 큰 은혜인가를 깨달았습니다. 기도하거나 하나님께 나아가지 않으면서도 말씀을 전하게 된다면, 맡겨진 일을 잘하게 된다면, 그것은 복이 아니라 저주요, 재앙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무엇을 하든지 늘 주님을 생각하고 의지합니까? 교만의 증상은 하나님을 잊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기도하지 않고 타고난 재능과 노력으로 무엇이든 잘 해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 자랑

“그러나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우리가 가진 재물이 얼마든 먹을 것이 있고 입을 것이 있고 잘 곳이 있다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요, 선물입니다. 그런데 교만의 영이 임하면 이것을 우리의 능력과 손의 힘으로 얻은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앞의 말씀에서 '나'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음에 주목하십시오. 교만은 하나님의 위치에 자신을 두는 것입니다. 교만은 결국 자기 영광의 추구요, 자기 숭배입니다.

 

느부갓네살 왕이 바벨론이라는 제국을 이룬 후 왕궁을 거닐며 자화자찬을 합니다. “열두 달이 지난 후에 내가 바벨론 왕궁 지붕에서 거닐새 나 왕이 말하여 이르되 이 큰 바벨론은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였더니”(단 4:29-30).

 

누군가가 교만의 영에 사로잡혀 있다는 증거 중에 하나는 모든 일의 근원을 자신으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해서 그런 거야.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돼.’ 물론 느부갓네살의 바벨론이 그 당시 가장 크고 강력한 제국이었던 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느부갓네살 왕의 능력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다. 다니엘 4장 17절을 보십시오. 그가 그때에 그곳에 세워진 이유는,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는 주께서 당신의 뜻대로 그 나라를 그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권세를 주시지 않으면 어느 누구도 그것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왕은 착각을 하고 자기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내가 능력과 권세로 건설하여 나의 도성으로 삼고 이것으로 내 위엄의 영광을 나타낸 것이 아니냐!”

 

하나님은 이러한 느부갓네살 왕을 바로 치셨습니다. 이처럼 교만은 곧 멸망이요, 사망입니다. 교만은 하나님을 적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당신은 최근에 무엇을 자랑하고 싶었습니까? 우리가 자랑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뿐입니다. 오직 우리는 십자가만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자기 연민

자기 자랑과 자기 연민은 전혀 달라 보여도 사실은 교만에서 나오는 두 가지 열매입니다. 존 파이퍼는 그의 책 『하나님을 기뻐하라』에서 자기 자랑과 자기 연민의 유사점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자랑은 성공에 대한 교만의 반응이다. 자기 연민은 고난에 대한 교만한 반응이다. 자랑은 “내가 이렇게 대단한 것을 성취했으니 나는 존경을 받아 마땅해"라고 말한다. 자기 연민은 "내가 이렇게 많이 희생했으니 나는 존경을 받아 마땅해"라고 말한다. … 자기 연민이 교만으로 보이지 않는 것은 도움이 필요한 듯 보이기 때문이다. … 자기 연민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무력한 자가 아니라 영웅으로 봐 주기를 원한다. 즉 자기 연민이 느끼는 결핍은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생각에서 나오지 않고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자기연민은 갈채 받지 못해 상처 받은 교만의 반응이다.】

 

다시 말해, 자기 연민은 갈채 받지 못한 '교만의 반응'이라는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까지 희생했는데 왜 박수를 안 쳐 주지? 내가 이렇게 노력했는데, 내가 이렇게 유능한데 왜 난 무명인이지? 왜 날 알아주지 않지?' 교만의 또 다른 형태인 이 자기 연민은 아주 교묘하고 기만적이기에 이것이 교만인지 알아차리기란 매우 어렵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가족 및 동료들과 같은 주위 사람들을 통해 칭송받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애쓴 만큼 칭찬과 보상을 받지 못했다고 느낄 때 그 불편한 마음의 반응이 바로 자기 연민이고, 그것이 바로 교만의 한 형태입니다. 자신은 그런 대접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을 잊어버려 감사와 찬양이 점점 사라지고 자기 자랑과 자기 연민에 사로잡혀 사는 사람은 그 안에 이미 교만의 영이 자리 잡고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증상들이 있다면 결코 가만 놔둬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이 결국 우리 영혼을 서서히 죽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정에서 우리의 발목을 잡기 때문입니다.

 

자기 방어

영적 교만의 또 다른 증상은 자기 방어, 영적 경직성입니다. 어떤 일을 판단하는 방식에 있어 자신이 옳고 남들보다 우월하다고 믿기에 자연적으로 타인의 의견이나 견해에 대해 수용적이기보다는 방어적이고 경직된 성향을 보입니다.

 

자기 방어와 자기 우월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물론 본질에 있어서는 타협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영적으로 교만하면 본질이 아닌 부분에 대해서도 의견이나 뜻을 굽히지 않고 자기의 옳음을 끝까지 고집합니다. 그럼으로써 결국 타인과 자신을 분리하고 차별화시키려 합니다. 이것이 더 심해지면 자기와 의견이 다른 이들을 '다름'이 아니라 ‘틀림’으로 규정하고 비난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예수님께서 사람들의 비판에도 그저 잠잠하셨던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또한 다윗이 압살롬의 반역으로 인해 피난을 갈 때, 시므이의 거센 비난 앞에서 자신을 정당화하려 하기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더욱 낮추시려는 뜻으로 여겨 그것을 겸허한 마음으로 수용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 안에 타인의 소리를 경청하지 않고 그저 방어적으로만 대하려는 모습이 없는지를 철저히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3) 교만, 어떻게 싸울 수 있는가

 

생각의 근원을 분별하고 말씀으로 대적하라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마귀가 예수님을 찾아가 유혹했던 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물며 우리 인간이야 어떻겠습니까? 그렇기에 분별하여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그러면 피한다고 했습니다. 마귀를 대적하지 않으면 마귀는 계속해서 그 사람을 생각으로 조종합니다. 처음에는 생각을 던져 주다가, 대적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생각에 둥지를 틀고 자리를 잡습니다. 그리고 견고한 진이 되어 그 사람의 생각과 가치관과 세계관을 사로잡습니다. 그 영혼을 죽음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동행을 가로막는 일곱 가지 죄를 대적하는 시작은 대상을 파악하는 일입니다. 적과 싸우려면 가장 먼저 그 대상을 파악해야 합니다. 적이 누구이며 어떻게 다가오는지, 어떻게 공격하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적의 공격을 막을 수 있고, 그 공격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적이 누구인지 모른다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악한 생각, 악한 영, 곧 죄와의 싸움의 전쟁터는 바로 우리의 '생각'입니다. 이 싸움은 바로 악한 생각과의 싸움이고,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생각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는 것이 기초이고 시작입니다. 우리 안에 있다고 해서 다 우리의 생각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가라지와 같은 생각도 섞여 있습니다. 마귀가 심어 주는 생각입니다.

 

우리의 의지와 행동은 생각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기에 생각에서 악한 영을 처단하지 않으면 이 죄와의 싸움에서 이길 수가 없습니다. 생각의 입구에 파수꾼을 세우고, 이 생각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여호수아 5장에 보면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손에 칼을 들고 서 있었습니다. 그때 여호수아가 이렇게 묻습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우리 원수의 편이냐?” 그의 정체를 분별하기 위해 질문을 던진 것입니다. 그는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의 군대 장관이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생각들을 하나하나 모두 검열해야 합니다.

 

‘너는 우리 편이냐, 원수의 편이냐?’ 우리 머릿속의 생각이 다 우리의 생각은 아닙니다. 우리의 생각도 있겠지만, 그 생각 속에는 가라지가 섞여 있습니다. 서운한 마음, 불평의 마음, 원망의 마음, 바로 이것이 사탄이 몰래 심어 주는 생각입니다. 반드시 이러한 생각들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기준으로 분별하고 마귀를 말씀으로 대적해야 합니다.

 

이에 대한 좋은 예가 있습니다. 에바그리우스를 비롯한 사막의 수도사들이 악한 생각과 영에 대적했던 방법입니다. 어느 날 에바그리우스에게 교만의 영이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당신은 나무랄 데 없고 불순한 생각조차 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 그러자 그는 이 교만의 영에게 맞서서 말씀으로 이렇게 대적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티끌이나 재와 같사오나 감히 주께 아뢰나이다”(창 18:27). 자신을 뭔가 대단한 사람인 양 치켜세우는 교만의 영에게 말씀으로 대적한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도움을 거부하고 승리를 자기 능력으로 돌리려는 교만한 생각이 들자 그는 시편의 말씀으로 응수합니다.

 

“나는 내 활을 의지하지 아니할 것이라 내 칼이 나를 구원하지 못하리이다 오직 주께서 우리를 우리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시고 우리를 미워하는 자로 수치를 당하게 하셨나이다”(시 44:6-7). 이것은 정확히 예수님이 광야에서 사탄을 물리칠 때 쓰셨던 방법입니다.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의 영광을 주겠다며 헛된 영광과 교만을 부추기는 사탄을 주님은 말씀으로 물리치셨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마 4:10).

 

당신의 머릿속에 들어오는 교만하게 하는 생각을 분별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으로 대적하십시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하라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우리가 어떠한 형편에 있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구원을 베푸셨는지를 자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교만의 영과 생각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은 들어올 틈도 없이 다른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과 그분이 행하신 일들입니다. 신명기 8장 14절을 보십시오.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라 여호와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이끌어내시고?”

 

우리가 어떤 형편이었습니까?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죄의 노예였습니다. 무엇을 해도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죄에 찌들어 있던 자들이 우리입니다. 스스로는 그 죄의 사슬을 절대로 끊을 수 없어 죄 중에 망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 바로 우리입니다. 이런 우리를 하나님이 어떻게 이끌어 내셨습니까? 유월절 어린양의 피로 이끌어 내셨습니다. 그래서 여호와를 기억하라고 하는 것입니다(신 8:18). 예수님도 성찬을 베풀면서 “나를 기념하라”(기억하라, 눅 22:19)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현재형으로, 항상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매 순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그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떤 형편에 있었고 얼마나 끔찍한 죄인이었는가를 잊어서는 안 됩니다. 동시에 우리가 얼마나 큰 사랑을 받았는지,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죗값을 탕감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십자가를 볼 때마다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겸손해질 수 있는 길은 십자가로 더욱 가까이 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교만은 그 힘을 잃습니다. 교만이 고개를 드는 이유는 우리가 십자가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십자가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십자가에 더 가까이 가야 합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묵상하라

교만은 인간이 자신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함에서 옵니다. 청교도 신학자인 존 오웬(John Owen)은 그의 책 『신자 안에 내재하는 죄』에서 영혼이 겸손하기 위해서 살펴야 할 두 가지를 언급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성찰'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자신에 대한 적절한 파악'입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영혼이 겸손하기 위해 살펴야 할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한 적절한 성찰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대한 적절한 파악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는 그분의 위대하심, 영광, 거룩하심, 권능, 엄위하심 그리고 권위 등을 적절히 성찰해야 하고,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우리의 비천하고 절망적이며 죄로 얼룩진 상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상태로는 무엇을 하더라도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죄와 싸워 승리하는 목적과 목표를 이룰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의 마음과 본성 속에는 아직도 하나님에 대한 적의의 끔찍한 잔재가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기꺼이 이러한 현실을 인정하고 실상을 파악하기 위해 진리의 말씀의 도움을 받아 말씀이 마음의 은밀한 부분을 살피고 그 안에 어떤 악과 부패함이 들어 있는지 낱낱이 드러낸 것을 기꺼이 인정하는 것은 영혼이 은혜 아래 있음을 보여 주는 결정적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고 말씀을 통해 하나님과 그분의 성품, 그분이 행하신 일들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동시에 인간의 삶이란 잠깐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안개에 지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약 4:14). 목회자로서 장례식을 여러 차례 섬기다 보면 거의 매번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인생은 매우 길어 보이지만, 실상 한순간이라는 사실입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사라질 안개와 같습니다. 아무리 대단한 권력과 부를 누린 자라 하더라도 영원한 육체는 없습니다. 누구나 죽음을 맞이합니다. 인간은 피조물이지 조물주가 아닙니다. 장례 예배를 섬길 때마다 죽음 앞에서 하나님과 저 자신을 제대로 묵상하게 됩니다. 그리고 한없이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은혜를 누립니다. 하나님과 자신을 말씀을 통해 묵상하는 것은 겸손에 큰 유익이 됩니다.

 

고난으로 인한 겸손의 옷을 입으라

시편 119편을 쓴 기자는 자기가 어떻게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질 수 있었는지를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고난을 당하기 전까지는 잘못된 길을 걸었으나,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지킵니다”(시 119:67, 새번역). 이전에는 잘못된 길, 자신의 마음대로 사는 길, 곧 교만의 길을 걸었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고백합니다. 왜입니까? 고난을 겪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교만을 꺾으시는 주요 수단 중 하나는 바로 고난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사실 영적으로 보면 교만을 꺾고 겸손의 뿌리를 주님께 내리게 하는 복이 고난입니다. 그의 계속되는 고백을 보십시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시 119:71, 새번역).

 

고난을 통해 주님의 율례, 곧 주님이 지어 주시는 한계를 배웠다는 것입니다. 율례란 나의 한계, 곧 나의 자리와 위치를 아는 것입니다. 나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임을 아는 것, 나는 빈 그릇이고 그분은 모든 것을 채워 주시는 분임을 아는 것입니다. 이 율례를 알면 자기 비하에 빠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피조물, 곧 하나님이 지극히 사랑하고 기뻐하시는 자녀임을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딸이라!”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 빚어진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작품이요, 그릇임을 아는 사람은 자기 비하나 혐오에 빠지지 않습니다. 또한 율례를 알면 교만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아담처럼 하나님이 되고자 자신의 위치와 자리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은 이성과 감정과 의지에 신적 능력이 내재되어 있습니다. 정말 대단한 잠재력을 갖고 있고, 또한 발휘합니다. 그러나 율례를 아는 자는 그래 봤자 자신이 인간이고 피조물임을 인식합니다.

 

야고보서 4장 6절은 하나님이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말씀합니다. 겸손이라는 단어의 라틴어인 'humilitas'는 땅, 흙이라는 의미인 'humus'라는 단어에서 파생되었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흙에 지나지 않음을 아는 것이 겸손입니다. 화장터에 가면 화장하고 남는 것은 고작 몇 줌의 뼛가루입니다. 이게 우리의 인생입니다. "주님이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주님이 떠나가시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 율례를 배운 자요, 겸손한 사람입니다.

 

2013년 9월, 아내가 병으로 인해 피를 쏟으며 죽어 갈 때 삶의 모든 것을 잃는 것 같았습니다. 사람이 받는 스트레스의 지수를 퍼센트로 하면 100점 만점의 스트레스가 있는데, 그것이 배우자의 죽음이라고 합니다. 죽어 가는 아내를 보며 가정을 이루고 목회를 하고 공부를 할 수 있었던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깨달았습니다. 생명이 주께 있음을 알고 나서 겸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 삶과 사역의 많은 부분에 아내의 도움이 있었고,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 병원 바닥에서 무릎을 꿇고 두 손을 주님께 들었습니다. 그 차디찬 병원 바닥을 느꼈던 그때가 humilitas, 곧 저를 겸손하게 하신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육체의 가시, 곧 질병으로 인해 괴로워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삼층천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그를 자만하지 않게 하려고 그에게 육체의 가시를 주셨습니다. 그 가시가 그를 겸손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입니다. 고난은 교만을 이기고 겸손의 옷을 입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은혜로 교만을 이겨 내십시오. 교만의 영, 교만한 생각을 물리치고 피 흘리기까지 교만의 죄와 싸우십시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감사하며 찬양하십시오. 그렇게 교만의 영, 교만의 죄를 날마다 싸워 이기며 우리에게 주어진 믿음의 경주를 끝까지 완주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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