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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과학 이야기 "원자로 건설(1942, 페르미)"

작성자원장쌤|작성시간12.08.10|조회수11 목록 댓글 0

재미있는 과학 이야기

 

원자로 건설(1942, 페르미)

 

발명품들 중 처음에는 군사적 무기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지지 않았으나 전쟁에서 매우 중요하게 사용된 것들이 있다. 다이너마이트(화약)와 비행기가 그러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전쟁 수행의 필요성으로 만들어진 것이 오늘날에는 일상생활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원자로이다.

제2차 세계재전이 한창 벌어지고 있던 1942년, 미국 시카고 대학교의 운동경기장 관중석 지하의 비밀 실험실에서는 이 대학의 교수 페르미(Enrico Fermi, 1901~54)가 이끄는 물리학 팀에 의해 세계 최초의 원자로 ‘시카고 파일(Chicago file)’이 제작되고 있었다. 이것은 미국에서 극비리에 진행 중이던 ‘맨해튼 계획’의 하나였다. 맨해튼 계획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여 유럽 각국으로부터 세계 최고의 과학자들이 모여 진행하고 있던 원자폭탄의 제조 계획이다.

 

이러한 ‘맨해튼 계획’은 독일의 한(Otto Hahn, 1897~1968)과 슈트라스만(Friz Strassmann, 1902~1980)의 발견에 기초하고 있었다. 1938년에 한과 슈트라스만은 질량수 235인 우라늄원자핵(235U)이 느린 중성자를 흡수하면 불안정해져 질량이 거의 같은 2개의 원자핵으로 분열되어 막대한 에너지를 방출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 에너지를 이용한 것이 원자폭탄과 원자로이다.

 

당시에는 원자로라는 용어가 없었기 때문에 페르미는 흑연 덩어리에 우라늄 봉을 꽂아 만든 것을 파일이라고 불렀다. 연료는 안정적인 우라늄 238U과 그것의 동위원소인 불안정한 235U을 14:1의 비율로 섞은 혼합물이었다.

 

즉 느린 중성자 1개가 이 혼합물 중에 있는 235U를 때리게 되면 그 우라늄의 원자핵이 분열되면서 빠른 속력을 가진 여러 개의 중성자가 튀어나오고, 이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하여 이웃한 우라늄 원자핵을 때이게 해 동일한 연쇄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계속적으로 핵분열이 일어나면 엄청난 양의 에너지가 방출되게 된다. 이 거대한 힘을 그대로 파괴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원자로 내의 핵분열 반응의 속도를 제어하지 않은 것이 바로 ‘원자폭탄’이고 반응 속도가 천천히 일어나도록 하여 발생하는 열에너지를 전기를 생산하는데 사용한 것이 ‘동력생산용 원자로’이다.

 

페르미가 처음 만들었던 원자로는 핵분열 반응의 속도를 지속시키기 위해 중성자의 속도를 느리게 하는 감속재인 흑연을 사용한 일면 감속 원자로(오늘날에는 재래식 원자로라고도 부른다)이다. 연쇄반응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부가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제어봉이다. 보통 카드뮴이나 붕소로 만든 것으로 중성자를 흡수하여 반응 속도를 조절한다. 그리하여 원자로 속으로 물을 순환시키면, 이물이 발생하는 열을 흡수하여 고압 수증기가 되어 발전기에 연결된 터빈을 돌려 전기를 생산한다. 따라서 동력 생산용 원자로는 연료(우라늄 등), 감속재(흑연 등), 제어봉(카드뮴, 붕소, 플루오르 등), 냉각제(물, 가스, 액체 금속 등) 등의 네 가지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페르미가 만든 원자로는 실용화되지 못하였다. 연료인 235U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후에는 238U을 가공하여 만든 인공 방사성 원소 플루토늄을 대신 사용하였다.

최근에는 핵공학의 발달로 고속원자로를 사용하고 있다. 고속원자로는 감속재를 사용하여 속도를 감속시키지 않고 그대로 두는 원자로이다. 다시 말해서 핵폭발만을 일으키지 않게 정교하게 안전장치를 마련해 둔 원자폭탄형 원자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다. 또한 이 원자로는 플루토늄이나 토륨을 농축 원료로 사용하고, 특히 감속재를 사용하지 않으므로 저속원자로보다 훨씬 작고 견고하게 만들 수 있다. 따라서 선박용 원자로로 적합하다.

 

1945년 일본에 원자핵폭탄이 사용된 이후, 미국의 아이젠하워(Dwight D. Eisenhower, 1890~69) 대통령의 제안에 의해 1957년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국제 원자력기구가 설립되었다. 이 기구의 합의가 있는 후부터 미국은 1954년 펜실베니아 주 오하이오강에 웨스팅하우스가 건설 책임을 맡아 세계 최초의 원자력 발전소를 세웠고 전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미국 해군에서는 원자력을 동력으로 이용한 원자력 잠수함을 개발하는 등 직접적인 전쟁무기 이외에도 대체 에너지로서의 용도를 찾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리코버(Hyman G. Rickover, 1900~86)에 의해 주도된 원자력 잠수함 생산에는 경수를 감속재로 사용하는 경수 원자로가 쓰였고, 이것은 이후에 제작되는 원자력발전소의 주된 모델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원자력 개발 노력들은 에너지 부족의 필요성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다. 군사적 목적의 원자력 에너지가 없는 국가들로부터 가해지는 국제적 압력에서 벗어나고, 또 기존 핵무기 보유국 외에 다른 국가들에서 이를 만들지 못하게 하기 위한 계획된 노력이었을 뿐이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석탄을 원료로 하는 화력 발전소가 일반화되어 있었고, 높은 신뢰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그 연료인 석탄의 매장량이 많았기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 연료 부족을 염려하지 않아도 되었다. 결론적으로 원자력발전소를 비롯한 원자력 산업은 재래식 에너지원을 대체할 새로운 것을 찾아야 한다는 절실한 요구에서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과정들을 통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게 된 원자력 발전소는 에너지 효율성 면에서는 너무나 유용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그러나 안전성 문제에서는 항상 불안함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불안함이 현실로 드러난 것이 바로 1986년 4월에 있었던 소련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체르노빌 원자력발전소 사건이다. 원자로가 파손된 이 사건은 원자력 발전소 사상 최악의 방사능 누출사고를 일으키며 총 사망자 수가 2천에서 4천 명 정도로 추정되었다. 또한 주민 60만 명이 평생 동안 정기적으로 의료검진을 받아야 하고, 이들의 후손들도 일생 동안 검진을 받아야 한다고 한다. 사건 발생 후 방사능 제거 작업과 오염 방지, 순찰, 건설 작업 등에 종사했던 50만 명 정도의 사람들도 방사능 오염으로 인해 고통 받고 있다. 농토는 최소한 40년에서 50년 이상이 지나야 정상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되었다.

 

이 사건으로 소련에서는 중앙 통제적 공산주의를 포기하는 페레스트로이카 운동이 전개되었고, 전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던 반핵운동을 더욱 촉진하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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