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금강산 - 엄정행(테너)(1961)
천재 시인 이상
꽃나무 / 이상
벌판 한복판에
꽃나무가 하나 있소
근처엔 꽃나무
하나도 없었소
꽃나무는 제가
생각하는 꽃나무를
열심히 생각하는 것처럼
꽃을 피워 가고 있소
거울 / 이상
거울 속에는 소리가 없소
저렇게까지 조용한 세상은 참 없을 것이오
거울 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 말을 못 알아듣는 딱한 귀가 두 개나 있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오
내 악수(握手)를받을줄 모르는 악수(握手)를 모르는 왼손잡이오
거울 때문에 나는 거울 속의 나를 만져보지를 못하는 구료 마는
거울 아니었던 들내가 어찌 거울 속의 나를 만나보기만이라도 했겠소
나는 지금(至今) 거울을 안 가졌소마는 거울 속에는 늘 거울 속의 내가 있소
잘은 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 에골몰 할게요
거울 속의 나는 참 나와는 반대(反對) 요마는 또 꽤 닮았소
나는 거울 속의 나를 근심하고 진찰(診察) 할 수 없으니 퍽 섭섭하오
시인 / 소설가.
본명 : 김해경 (1910~1937)
활동분야 : 문학
출생지 : 서울
주요 작품 : [오감도] [날개] [봉별기]
본명 김해경(金海卿). 서울 출생. 보성고보(普成高普)를 거쳐 경성고공(京城高工)
건축과를 나온 후 총독부의 건축기수가 되었다.
1931년 처녀작으로 시 〈이상한 가역반응(可逆反應)〉〈파편의 경치〉를《조선과 건축》지에 발표하고,
1932년 동인지에 시〈건축무한 육면각체(建築無限六面角體)〉를 처음으로 '이상(李箱)'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했다. 1933년 3월 객혈로 건축기수직을 사임하고 배천온천(白川溫泉)에
들어가 요양을 했다. 이때부터 그는 폐병에서 오는 절망을 이기기 위해
본격적으로 문학을 시작했다.
이상이라는 이름을 쓰게 된 것은 공사장 인부들이 그의 이름을 잘 모르고 '리상(李 씨)'이라고 부르니까
그대로 '이상'이라고 했다지만 학교 때의 별명이라는 설도 있다.
요양지에서 알게 된 기생 금홍과 함께 귀경한 그는 1934년 시 〈오감도(烏瞰圖)〉를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하기 시작했으나 난해하다는 독자들의 빗발치는 항의로 중단했다.
1936년 《조광(朝光)》지에 《날개》를 발표하여 큰 화제를 일으켰고 같은 해에
《동해(童骸)》《봉별기(逢別記)》 등을 발표하고 폐결핵과 싸우다가 갱생(更生)할 뜻으로
도쿄행 [東京行]을 결행하였으나, 불온사상 혐의로 일본경찰에 체포되었다가 병보석으로
풀려 도쿄대학 부속병원에서 병사하였다.
오감도(烏瞰圖)
주요 작품으로는 전기 외에 소설 <지주회시(會豕)> <환시기(幻視記)> <실화(失花)> 등이 있고,
시에는 <이런 시(詩)> <거울> <지비(紙碑)> <정식(正式)> <명경(明鏡)>, 수필에는 <산촌여정(山村餘情)>
1910(1세)
9월 23일(음력 8월 20일) 서울 종로구 사직동에서 부 김영창(金演昌) 사이의 장남으로,
본명은 해경(海卿). 본관은 강릉.
1912(3세)
부모를 떠나 아들이 없던 백부 김연필(金演弼) 댁에서 24세까지 성장.
1917(8세)
4월, 누상동에 있는 신명학교(新明學校) 제1학년에 입학. 이때부터 그림에 재질보임.
1921(12세)
3월, 신명학교 4년 졸업. 백부의 교육열에 힘입어 그해 4월, 조선불교중앙교무원
경영의 동광(東光) 학교에 입학.
1924(15세)
동광학교가 보성고보(普成高普)로 병합, 동교4학년에 편입학.
이 해에 교내미술전람회에 유화 "풍경"입상.
1926(17세)
3월 5일, 보성고보 5학년 졸업. 그해 4월 동숭동에 있는 경성(京城) 고등공업학교
건축과 제1학년에 입학. 미술집착을 가지고 보낸고 공 1여 년 동안 회람지"난파선"의
편집을 주도. 삽화와 시를 발표.
1920년대 경성고 재학당시 교내 화실에서의 이상
그림 그리기를 좋아했던 이상은 화가가 되고 싶어 했다.
건축과 실습실과 미술반 습작실 경성고공 건축과를 수석으로 졸업
1929(20세)
3월. 경성고공 3년에 졸업.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
11월. 관방(官房) 회계과 영선계로 옮긴 후
12월. 조선 건축회지 "조선과 건축"회지 소화 5년도 표지도안 현상모집에 1등과 3등으로 당선.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기념사진. 앞줄 오른쪽 세번째가 이상. /문학사상 제공
시인 이상(1910∼1937)의 경성고등공업학교 졸업 기념사진.
앞줄 왼쪽 세번째가 이상. /문학사상 제공
1931(22세)
7월. 처녀시 "이상한 가역반응", "파편의 경치", "boiteux.boiteuse", "공복"
8월. 일문시"오감도" "삼차각설계도"를 각각 "조선과 건축" 예발표. 이 무렵 꼽추화가
구본웅(具本雄)을 알게 됨. 서양화 "자화상"에 출품, 입선. 이 해에 백부 사망.
1932(23세)
"조선과 건축" 회지 소화 7도 표지도안 현상모집에서 제4석에 당선. 비구(比久)란
익명으로 시"지도의 암실"을 "조선"에 발표. 7월 이상(李箱)이란 필명으로 된 시
"건축무한 육면각체"를 발표.
1933(24세)
3월. 심한 각혈로 총독부 기수직을 사임. 통인동 백부의 유산을 정리하여 효자동에
집을 얻고 21년 만에 친부모형제들을 옮겨옴. 백모는 계동으로 이사.
요양 차간 배천온천에서 기생 금홍과 알게 됨.
7월. 서울 종로 1가에 다방"제비"를 개업. 동거생활 시작. 7월부터 국문으로 시 발표.
"이런 시", "1933.6.1"을 (가톨릭 청년), "거울"발표.
이상이 직접 설계했다는 다방 ‘제비’.
왼쪽부터 이상, 구보 박태원, 시인 김소운
1934(25세)
구인회에 입회 본격적인 문학활동 시작. <매일신보>에 시 "보통기념"을 발표. 시
"오감도"를 (조선중앙일보)에 발표불의가 일어 10회 연재후 중단. (원래는 20편).
8월. 신문소설 "소설과 구보(九甫)씨의 1일"이라는 작품에 하융(河戎)이라는 화명(畵名)으로
삽화를 그림. 시 "소영위제" (중앙)를 발표.
1935(26세)
시 "지비(紙婢)" (가톨릭 청년), "정식" (조선중앙일보) 수필 "신촌여정" (매일신보)을 발표.
9월. 경영난으로 다방 "제비"를 폐문하고 금홍과 헤어짐. 인사동에 카페 "쓰루(鏤)"을 인수해
경영했으나 얼마 못 가 실패, 다방"69"를 설계하나 양도하고, 다방 "무기( )"를 설계, 양도.
계속된 경영 실패로 그의 가족은 신당동 빈민촌으로 이사. 성천, 인천 등지로 여행.
1936(27세)
3월. 창문사에서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을 편집 1집만 내고 창문사 나옴. "지비 1.2.3"(중앙),
"역단" "가톨릭 청년"을 발표. 수필 "선망율도"(조광) "조춘점묘" (매일신보), "가외가전", "여상",
"낙수", "epigram" "매상"등을 발표. 단편 "지주회시", "날계" 등을 발표. 전부터 알았던 이화 여전 출신
변동림과 결혼. 새로운 재기를 위하여 일본동경으로 떠 남(음력 9월 3일).
그곳에서 "공포의 기록", "종생기", "권태", "슬픈 이야기", "환시기" 등을 씀. 시 "위독"(조선일보),
수필 "행복"(여성), "추 등 잡필", "19세기식"(삼사문학)등 발표. 소설 "봉별기"(여성) "동해"(조광),
동화 "황소와 도깨비" (매일신보) 등을 발표.
1937(28세)
2월. 사상 불온혐의로 일본 경찰에 유치.
3월. 건강이 악화되어 보석으로 출감.
4월 17일 오전 4시, 동경제대 부속병원에서 객사. 항년 만 26년 7개월.
그 전날(16일) 부모와 조모 사망. 아내 변동림에 의해 유해는 화장되어 환국하여
미아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후일유실.
5월. "종생기" (조광), "권태" 발표.
1939
"실낙원" (조광), "실화" (문장)등 유고로 발표
시인 이상의 부인이었고,
훗날 김환기 화백과 사랑에 빠져 결혼한 모던 레이디 김향안
이상 시인이 구보 작가의 결혼식에 남긴 방명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