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조선 초기의 신분제와 경제 활동
1. 신분제와 생활 모습
신분제
조선 왕조의 사회 계급은 고려 시대 때부터 내려오는 사회적 기반 위에 조선 왕조의 중앙집권적인 봉건 체제가 확립되고 교육 제도와 과거 제도 등이 정비되자 점차로 사회 계급이 뚜렷하게 구분된 것이었다. 조선 시대에는 신분 제도가 매우 엄격하여 신분에 따라 그의 사회적 지위나 직업이 달랐으며, 의복· 혼인· 거주지 등과 같은 일상 생활에서도 신분에 따라 제약이 있었다.
조선 시대의 신분은 법제적으로는 양인(良人)과 천인(賤人)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양인은 직업 ·가문 ·거주지 등에 따라 양반· 중인(中人)· 상민으로 나누어 졌다. 양인은 과거 응시, 관료의 진출이 허용되는 자유민으로서, 조세· 군역 등의 의무를 지녔다. 천인은 부자유민으로서 개인이나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천역(賤役: 비천한 일)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신분은 실제로는 지배층(支配層)과 피지배층(被支配層)으로 나누어졌다. 지배층은 양반과 중인으로 이루어졌고, 피지배층은 상민(常民)과 천인(賤人)으로 이루어졌다.
동반(東班)
양반 ----------- 서반(西班)
---------------지배 계급
향리(鄕吏)
중인 ------------서리(胥吏)
군교(軍校)
농민(農民)
상민(常民)------- 공장(工匠)
상인(商人)
--------------피지배 계급
노비(奴婢)
천인(賤人) -------무당(巫堂)
광대(廣大)
승려(僧侶)
백정(白丁)
양반
양반은 고려· 조선 시대의 지배 신분층으로 처음에는 관제상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국왕이 조회(朝會)를 받을 때, 남향한 국왕에 대하여 동쪽에 서는 반열을 동반(東班: 문반), 서쪽에 서는 반열을 서반(西班: 무반)이라 하였는데, 이 두 반열을 통칭하여 양반(兩班)이라고 하였다.
본디 양반은 문·무반직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만을 의미했다. 그러나 명실상부한 양반관료체제가 정비된 조선초기에 이르러 양반관료의 가족과 친족도 양반으로 불리게 되었다. 양반은 자신들이 양반 신분을 획득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교육의 기회와 관직을 차지하려고 유형·무형의 법제(法制)를 만들려고 했을 뿐 아니라, 유학의 덕목을 갖추려고 했다.
양반 신분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관료에 진출하여 관인이 되어야 하는데 관인이 되는 길은 과거를 통해서였다. 최소한 4, 5대에 걸쳐 과거를 통해 현직에 나가는 자가 배출되어야 양반 가문으로 남을 수 있었다. 즉 과거 합격자의 배출은 양반 지위를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현직을 보장받는 대과(大科)는 말할 것도 없이 적어도 ㅅ애원 진사의 소과 합격자를 배출해야 양반의 지위를 유지될 수 있었다.
―이범직, 「신분의 구분」,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25: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국사편찬위원회 (탐구당 번각 발행), 2013, p.35.
양반은 등급에 따라 옷을 달리 입고 계급 질서가 엄격하여 차별이 심하였다. 양반은 나라에서 과전(科田) 혹은 공신전(功臣田)을 받아 농민들에게 땅을 빌려 주고 세금을 받았다. 양반은 사대부(士大夫)· 사족(士族) ·사류(士類) ·사림(士林)이라고 불리기도 하였다. 조선 왕조 사회를 정치·사회·문화적으로 움직여나간 것은 양반이었다. 토지와 노비를 소유한 지주(地主)가 대부분이었던 양반은 여러 교육 기관에 독점적으로 입학하여 교육을 받았으며 학문을 독점한 지식 계급이었다.
중인
조선 시대 양반과 상민의 중간 신분 계급의 사람인 중인(中人)은 기술관 및 향리(鄕吏: 한 고을에서 세습으로 내려오던 아전), 서리(胥吏), 토관(土官), 군교(軍校), 역리(驛吏: 역참에 딸린 구실아치) 등 경외(京外: 서울과 지방) 아전직(衙前職) 등 관청에서 일하는 사람과 양반에서 격하된 서얼(庶孼: 서자와 그 자손) 등을 지칭한다. 문무 하급 관리인 서리는 대대로 세습되면서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여러 가지 행정 실무를 맡았다. 중인은 육조(六曹: 이조 ·호조 ·예조·병조·형조·공조)와 삼사(三司: 사헌부·사간원 ·홍문관) 등의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상민
상민(常民)은 농민· 공장(工匠) · 상인 등 백성들의 대분을 차지하는 평민(平民: 벼슬이 없는 일반인. 양민)을 말한다. 농업에 종사하는 농민은 백성들의 절대적인 다수를 차지하였다. 이들은 원칙적으로 출세에 법적 제한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대대로 흙에 얽매여 생활해야 했으므로 교육을 받을 기회가 거의 없어 무식하였기 때문에 관료로의 진출이 불가능하였다. 양반과는 정반대로 국가에 대하여 조세· 부역(賦役)· 군역(軍役)· 공납(貢納) 등 여러 가지 의무를 지고 있었다. 공장과 상인들은 농민보다 더 천시되었으나 그 수는 농민에 비하여 아주 적었다.
천인
천인(賤人: 신분이 가장 낮은 사람)의 대부분은 노비(奴婢)였다. 노(奴)는 사내종, 비(婢)는 계집종을 뜻한다. 노비는 국가 기관에 속한 공노비(公奴婢)와 개인에게 속해 있는 사노비(私奴婢)가 있었다. 이들은 인권(人權)이 없어서 사노비의 경우에는 매매, 양도, 상속, 공출(供出)의 대상이었다. 노비의 자손은 반드시 노비가 되었음은 물론 설사 한쪽이 노비가 아닌 신분의 사람과 결혼하여 낳은 자식이라도 노비가 되었다. 한편 한 가호(家戶)의 노비가 그들 주인집에 가족의 일원으로 같이 살거나 주인집 근처에 살고 있으면서 직접적인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으면 솔거노비(率居奴婢) 또는 가내노비(家內奴婢)라 하고, 그 주인집으로부터 독립한 가호와 가계를 유지하면서 생활하고 있으면 외거노비(外居奴婢)라 했다.
조선 시대의 노비는 재산권의 주체로서 전답(田畓)이나 가사(家舍)는 물론 자신의 노비를 소유하고 상속시킬 수 있는 권리가 공인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국가로부터 일정한 신체·생명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단순히 생명을 지닌 재물에 불과한 존재는 아니었으며 경제학사상(經濟學史上)의 노예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없다는 점이 일찍부터 주목되어 왔다.
―유승원, 『조선초기 신분제 연구』, 을유문화사, 1988, p.55.
양인(良人)과 달리 노비는 소유주에 의해 인신적으로 구속되어 있었으나 노예는 아니었다.
2. 경제 정책과 경제 활동
농업 정책과 농업 활동
조선 왕조의 관료 조직의 경제적 기반은 토지 제도에 있었다. 고려 공양왕 때, 국가 재정의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이성계·조준 등이 주동이 되어 실시하던 토지 제도인 과전법(科田法)에 기반을 둔 조선 왕조의 토지 제도는 고려 후기에 누적된 토지 제도의 모순을 일단 해결한 조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권문 세족(權門勢族)이 축적한 토지를 몰수하여 재분배함으로써 조선 왕조를 건국한 신진 사대부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준 것에 불과했다.
과전법의 시행
과전법은 토지 국유제(國有制)를 원칙으로 하였고, 국가가 수조권(收租權: 토지에서 일정량의 곡식을 세금으로 징수할 수 있는 권리)을 가지는 공전(公田: 국유의 논밭)과 개인에게 수조권을 나누어 준 사전(私田)으로 나누었다. 사전은 다시 현직 또는 퇴직 문무 관리들에게 그들의 관직의 등급에 따라 경기도 내의 토지로 나누어 준 과전(科田), 태조의 창업을 도운 개국 공신을 위시한 여러 공신들에게 준 토지인 공신전(功臣田), 사신으로서 공로를 세운 사람 등에게 급여한 토지인 별사전(別賜田), 중앙 관부와 지방 관아에 지급된 토지인 공해전(公廨田), 성균관· 향교 등 교육 기관에 지급된 토지인 학전(學田)), 사원에 지급된 토지로 면세·면역(免役)되었던 사원전(寺院田) 등으로 구분된다.
과전법의 시행을 통해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벼슬아치들에게 관직에서 일한 것에 대한 경제적인 기반을 보장하였다. 벼슬아치가 죽으면 과전은 국가에 도로 돌려주도록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과전을 받은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의 아내가 그 토지를 받아 계속 수조하게 한 토지인 수신전(守信田) ·과전을 받은 벼슬아치 및 그 부인이 죽었을 때 그 미성년 자녀에게 과전 전부를 물려 주던 토지인 휼양전(恤養田) · 과전 외에 공신에게 주는 토지인 공신전(功臣田) 등은 세습이 가능하였다.
공전(公田)
과전(科田)
토지- ---- 공신전(功臣田)
사전(私田)-----별사전(別賜田)
공해전(公廨田)
사원전(寺院田)
(그림 토지 소유의 구분)
직전법과 관수 관급제
벼슬아치의 수와 세습하는 토지의 면적이 늘어나자 새로 벼슬아치가 되는 사람들에게 지급할 토지가 부족해졌다. 세조 12년(1466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세조(재위 1455년~1468년)는 과전법을, 현직에 있는 벼슬아치에게만 수조지(收租地)를 나눠주는 직전법(職田法)으로 바꿨다.
성종 원년(1470년), 성종(재위 1469년∼1494년)은 토지의 세습과 겸병(兼倂: 둘 이상을 한데 합쳐 소유함) 및 벼슬아치들이 농민들로부터 토지를 강제로 빼앗거나 수조권을 함부로 써 너무 많게 거두어들여서 가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해 관수관급제(官收官給制)를 실시하여 국가(지방 관청)에서 그 해의 생산량을 조사하여 농민들로부터 직접 조(租: 논밭에 부과하는 조세)를 거둬들여 벼슬아치들에게 현물(現物)의 녹봉(祿俸)을 지급하였다. 그 결과 벼슬아치가 수조권을 통해 토지를 지배하는 방식은 사라졌지만, 토지의 개인 소유가 늘어나 벼슬아치들의 경제적 기반이 확대되었다.
농본주의 정책과 농업 기술의 발달
태조는 조선을 건국한 후 민생 안정을 위해 농업을 중시하는 중농주의(重農主義)를 내세우면서 농본주의(農本主義 : 농업을 국가 산업의 기본으로 하고, 농민과 농촌을 사회 조직의 기초로 삼으려는 이론) 경제 정책을 폈다. 조선 정부는 토지를 개간하는 것을 장려하고, 토지의 경계를 확인하고 세금 부과의 원천이 되는 소득이나 재산을 확보하기 위해 토지 소유자 및 조세 부담자를 조사하는 양전 사업(量田事業)을 실시했다. 토지 개간 사업과 양전 사업으로 토지 면적이 늘어났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농서(農書: 농사에 관한 책) 가운데 정초· 변효문 등이 세종의 명을 받들어 편찬한 『농사직설(農事直說)』과 쌍벽을 이루는 농서로 개인이 편찬한 『금양잡록(衿陽雜錄)』도 주목할 만하다. 성종 6년(1475년)에 강희맹이 금양현(지금의 경기도 시흥시·광명시와 서울시 금천구 지역)에서 은거하는 동안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경험한 사실과 듣고 본 것을 기술한 것이 『금양잡록』이다.
조선 초기 조· 보리 등을 재배하는 전작(田作: 밭농사)에서는 2년 3작이 널리 행해졌고, 도작(稻作: 벼농사)에서는 남부 지방 일부에서 모내기가 실시되었다. 그리고 같은 경작지에서 1년에 두 번 작물을 재배하는 방법인 이모작(二毛作)이 행해졌는데, 벼-보리의 이모작이 가장 많았다. 여러 종류의 비료 개량과 쟁기· 낫 등 농기구의 개량을 바탕으로 농업 생산력이 향상되었다. 또한 거름주기 방법이 발달하여 경작지를 묵히지 않고 계속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농사직설』의 간행
농사는 나라의 큰 바탕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던 세종(재위 1418년∼1450년)은 농서(農書)를 펴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정초(鄭招)를 어전(御殿: 임금이 있는 전각)으로 불렀다. 정초는 태종 5년(1405년) 문과에 급제하고, 태종 7년(1407년) 중시(重試: 당하관 이하의 문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던 시험)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들어선 후 이조판서와 대제학(大提學: 홍문관·예문관의 정이품의 으뜸 벼슬)을 지냈다.
“중국에서도 농서가 있어서 우리나라에도 전해오지만, 중국과 우리나라는 풍토가 다르기 때문에 그대로 우리나라 농사에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많다. 여러 지방의 경험이 많은 농부들의 농사 경험과 기술을 조사하여 농서를 편찬하여 농민들에게 반포하는 것이 좋겠다.”
세종이 말했다.
“곧 지방의 경험 많은 농민들을 찾아서 면밀하게 조사하여 농서를 편찬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초가 머리를 조아렸다.
어전에서 물러나온 정초는 팔도(八道)의 감사(監司: 관찰사)와 주(州)•부(府)•군(郡)•현(縣)의 수령에게 전하의 뜻을 받들어 지방마다 경험이 많은 농민들을 불러 물어보거나 찾아가서 그들의 경험과 기술을 조사하여 적어 올리게 했다. 이렇게 하여 팔도의 감사와 수령들이 보내온 자료를 바탕삼아, 일 년 동안 농민들의 농사 경험과 기술을 정리해 『농사직설(農事直說)』의 원고를 탈고했다.
『농사직설(農事直說)』에는 씨앗을 비축해두는 방법과 씨앗 뿌리는 시기, 논과 밭을 가는 방법, 벼의 재배 방법, 조· 기장 ·수수의 재배 방법, 콩· 팥 ·녹두의 재배 방법, 보리와 밀의 재배 방법, 참깨의 재배 방법, 메밀의 재배 방법 등 10항목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농사직설』을 통하여 당시의 농업 기술을 살펴보면 우선 벼의 재배법으로 직파법(直播法: 논에 볍씨를 뿌려 그대로 키워 거두는 방식), 건답법(乾畓法: 밭벼식으로 파종하여 키우다가 장마 이후로는 물을 담은 채 논벼로 기르는 방법), 묘종법(苗種法; 못자리에서 키운 벼의 모를 논에 옮겨 심어 재배하는 이식법으로 요사이 실시하는 벼 재배법)이 기술되어 있다. 한편 밭 작물의 파종법으로는 조파(條播: 줄 뿌리기), 살파(撒播; 막 뿌리기), 혼파(混播: 몇몇 다른 종류의 씨를 섞어 뿌림) 등이 기술되어 있다. 그리고 농사에 적당하고 적당하지 못한 토질, 비바람에 대한 주의, 가뭄과 장마에 대한 대책, 해충· 우박·서리 등 재앙의 예방 및 대책, 수확의 시기 등에 대한 것도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제 이 책이 발간된다면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곧 간행해서 각 도의 감사와 주· 부· 군· 현의 수령들에게 널리 나누어 주도록 하라.”
세종은 원고를 펼쳐보고 매우 기뻐했다.
“명을 받들어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정초(鄭招)는 변효문 등과 함께 편찬한 『농사직설』을 간행해, 나라 안에 널리 반포했다.
『농사직설』은 지방에 따라 적절한 농사법을 수록하여 우리나라 실정과는 거리가 있는 중국 농사법에서 탈피하는 좋은 계기를 만들었다. 『농사직설』에 기술되어 있는 수도작법(水稻作法), 즉 벼의 재배법은 다음과 같았다.
벼 품종(稻種도종)에는 이른 벼(早種조종)와 늦벼(晩種만종)가 있다. 경종법(耕種法)에는 물갈이[鄕名(향명)은 무삶이(水沙彌수사미)], 마른갈이[향명은 건삶이(乾沙彌건사미)]와 모종법[향명은 묘종(苗種)]이 있다. 제초(除草)하는 법은 대체로 같다.
―정초· 변효문 외, 『농사직설』, 「종도(種稻)」 부조도(附旱稻)
『농사직설』에 의하면 조선초기에는 벼품종으로 이른 벼(早種조종)와 늦벼(晩種만종)가 있었다. 그리고 벼의 재배법으로는 물갈이 즉, 무삶이(水沙彌수사미)와 마른갈이 즉, 건삶이(乾沙彌건사미), 그리고 모종법 즉, 묘종(苗種)이 있었다. 조선초기에는 고려시대 후기와 같이 물을 댄 논에 씨를 뿌려 벼를 재배하는 직파법(直播法), 그 중에서도 물갈이 즉, 무삶이(水沙彌수사미)이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리고 『농사직설』은 당시 조선의 남부 지방 일부에서 행해지고 있던 이앙법(移秧法: 벼농사에서 못자리의 모를 논에 옮겨 재배하는 방법)을 기술하고 있어 주목된다.
조선 전기의 수도작법(水稻作法: 벼농사법)으로는 조도(早稻: 올벼)의 수경법(水耕法: 물갈이)이 제일 많이 권장되는 기술되었는데 이 재배법은 가장 비옥한 수리안전답(水利安全畓: 수리·관개 시설이 잘되어 가뭄에도 안전하게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논)에만 행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대에는 보다 넓은 면적의 수리(水利: 농사에 필요한 물을 끌어 논밭에 대기 위해 물을 이용하는 일) 불안전한 열등지가 널리 존재하고 있었고 여기에서는 만도(晩稻: 늦벼)의 수경법(水耕法: 물갈이)과 건경법(乾耕法: 마른갈이)이 권장되고 있었다.
-이호철, 『조선전기 농업경제사』, 한길사, 1986, p.754.
위의 인용문은 조선전기의 벼농사법에 대해 잘 요약하고 있다.
3. 수취 체제의 확립
수취 제도
수취(收取)는 정부가 수행하고자 하는 목적을 위해 필요한 재원을 조달하는 행위를 말한다. 조선 초기 정부는 토지와 인구를 정확히 파악하여 토지 대장인 양안(量案)과 호구 장부인 호적(戶籍)을 만들었으며, 이를 근거로 조세(租稅)· 공납(貢納)· 군역 (軍役)과 요역(徭役) 등을 부과하는 수취 제도를 두어 국가 재정의 토대로 삼았다.
조세
국가에서 지급한 토지를 소유한 사람은 국가에 조세, 즉 조(租)와 세(稅)를 납부할 의무가 있었다. 수조권자(收租權者: 조세를 받을 권리를 가진 사람)가 경작자(耕作者: 논밭을 갈아 직접 농사를 짓는 사람)로부터 소작료에 해당하는 조(租)를 받았다. 공전(公田: 국유의 논밭)의 경우에는 국가가, 사전(私田: 개인이 소유하는 논밭)의 경우에는 수조권(收租權: 조세를 받을 권리)을 위임받은 개인이나 기관이 조를 받았다. 논(沓답)에서 생산한 쌀 1결(結)에 대하여 쌀(米미) 30두(斗), 즉 2석(石)을, 밭(旱田한전)에서는 1결에 대하여 잡곡 30두(斗)를 받았다. 당시 1결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의 최대 수확량이 20석(300두)이었으므로 조(租)의 비율은 대략 10분의 1에 해당한다.
한편 1결의 넓이는 토지의 등급과 시기에 따라 차이가 있었는데 세종 26년(1444년) 기준으로 1등급 전(田) ‘1결’의 넓이는 9천 8백 59.7제곱 미터였다. ‘두(斗)’는 곡식·액체·가루 종류의 물질의 분량을 측정하는 그릇 및 양제 단위(量制單位)로 ‘말’이라고도 하는데, 세종 때 기준으로 1두(斗)는 5천 9백 64세제곱 센티미터였다. 다시 말해 세종 26년(1444년) 당시 1두(말)의 용량은 2018년 기준으로 대략 1말(18리터)의 3분의 1정도라고 볼 수 있다.
군(郡)•현(縣)에서 필요한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국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돈인 조세(租稅)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漕倉: 조세를 배로 경창으로 옮길 곡식을 쌓아 두던 곳집)으로 운반하였다. 황해도· 전라도· 충청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는 선박에 의하여 바닷길로 운송하였다. 그리고, 강원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는 한강을 통해 물길로, 경상도에서 거두어들인 조세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통해 물길로 마포와 용산에 있는 경창(京倉)까지 운송하였다.
전분 6등법과 연분 9등법
해마다 땅의 걸고 기름진 정도나 풍작과 흉작의 정도에 따라 농산물의 수확량에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토지로부터 고정된 조세를 거두어 들이는 것은 불합리하였다. 세종은 조세 제도를 좀 더 체계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땅의 걸고 기름진 정도나 풍작과 흉작의 정도에 따라 차등을 두어 조세를 거두어들여 농민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전분 6등법· 연분 9등법으로 바꾸었다.
전분 6등법(田分六等法)은 전국의 토지를 땅의 걸고 기름진 정도와 땅이 몹시 메마르고 기름지지 못한 정도에 따라 면적을 1둥전(一等田)에서 6등전(六等田)으로 나누어 조세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그리고 연분 9등법(年分九等法)은 해마다 생산한 농산물의 수확량을 풍작과 흉작에 따라서 상상년(上上年)과 하하년(下下年)까지 9등분으로 나누어 조세의 기준을 정한 것이다. 풍년이면 그만큼 조세를 더 내고, 흉년이면 그만큼 조세를 적게 내게 해, 조세 액수를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를 내게 했다.
지대의 변화
남의 토지를 이용하는 사람이 땅 주인에게 무는 셋돈인 지대(地代)는 지주전호제(地主佃戶制),
타조법(打租法), 도조법(賭租法), 그리고 금납제(金納制)가 있다. 지주전호제는 지주(地主, 대토지 소유자)가 전호(佃戶, 소작농)를 고용하여 경작하는 소작제 농업경영 형태이다. 지주 전호제가 일반화되어 가면서 경작자인 전호는 소작료의 부담을 줄이고자 시도하였다. 그리고 타조법은 소작료의 액수를 미리 정하지 않고 분배율만 정했다가 생산물을 그 비율에 따라 분배하던 소작 관행의 한 형태이다. 소작인이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바치는 것이었다. 소작인 입장에서 볼 때 전세와 종자, 그리고 농기구를 농민이 부담하게 되어 불리한 조건이었다. 또한 도조법은 지주와 소작인 사이에 미리 협정된 소작료를 매년 수확량에 관계없이 징수하는 방법이다. 대개 수확량의 약 3분의 1을 지주에게 바쳤기 때문에, 소작인의 입장에서 볼 때 타조법보다 다소 유리하였다. 끝으로 금납제는 조세 따위를 돈으로 바치는 제도이다. 소작인의 입장에서 볼 때 소작인이 농사를 짓는 것을 자유롭게 해 주는 기반이 되었다.
공납(貢納)
공납은 각 지방에서 산출되는 토산품(土產品: 그 지방 특유의 물품)을 궁중이나 나라에 바치는 일이나 조세에 관한 제도를 이르던 말이다. 대체로 각 지방의 토산품을 조사하여 중앙의 관아(官衙: 벼슬아치들이 모여 나랏일을 보던 곳)에서 군·현에 물품과 액수를 할당하면, 각 군·현은 각 가호(家戶: 호적 상의 집)에게 다시 할당하여 거두었다. 각 지방에서 궁중이나 나라에 바치던 토산품을 공물(貢物)이라고 하는데, 중앙 재정의 중요한 근간을 이루었다. 공물에는 수공업 제품· 광물 ·수산물 ·모피 ·과실 ·약재(藥材) 등이 있었다. 그러나 공물의 생산량이 점차 감소하거나 생산지가 변화함에 따라 납부 기준에 맞추어 공물을 바치기가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공물은 바치는 과정이 번거럽고 부담도 전세보다 그 부담이 훨씬 컸다. 한편 공납의 종류는 해마다 그 지역에 배당된 공물의 품목을 일정하게 바치는 상공(常貢)과 특산품을 수시로 중앙에 바치는 별공(別貢)으로 구분할 수 있다.
역(役)
역(役)은 군역(軍役)과 요역(徭役)으로 구분된다. 16세 이상의 양인(良人) 정남(丁男: 장정)에게는 군역과 요역의 의무가 있었다. 군역에는 일정 기간 군사 복무를 교대로 근무하는 정군(正軍)과 정군이 복무하는 데에 드는 비용을 보조하는 보인(保人)이 있었다. 정군은 보인에게서 매달 면포 1필(폭 32.8 센티미터이고, 길이 16미터 38센티미터)을 받았다. 양반· 서리 ·향리 등은 관아에서 일하기 때문에 군역에 복무하지 않았다. 그리고 국가가 필요에 따라 정기적·부정기적으로 농민의 노동력을 강제로 모으는 요역은 각각의 가호를 기준으로 정남을 뽑아서, 왕릉· 성곽·관아건물·도로·제방· 저수지 등의 건축과 수리, 공물의 운반에 동원하는 방식으로 운용되었다. 성종(재위 1469년∼1494년) 때 경작하는 토지 8결을 기준으로 한 사람씩 동원하고, 1년 중에 동원할 수 있는 날도 6일 이내로 제한하도록 규정을 바꾸었으나, 제한이 없이 마음대로 징발하는 경우가 많았다. 요역의 과도한 부담은 조세· 공납(貢納)· 군역(軍役)과 더불어 조선 초기 자신이 직접 농업을 경영하는 자영농민의 몰락과 해체를 촉진시켰다.
4. 수공업 생산 활동
관영 수공업
조선 초기에는 손과 간단한 도구를 사용하여 생산하는 소규모의 공업인 수공업이 발달했다. 관영 수공업은 관청에 등록된 전문기술자에게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여 공급하도록 하는 수공업 체제이다. 관청에 등록된 장인(匠人: 관장)들은 관청의 수요를 위하여 국가의 통제하에 의류·그릇 · 화약 ·무기· 활자·문방구 등을 제조하여 납부했다. 공장(工匠)이라고도 하는 장인들은 근무하는 동안에 먹는 데 드는 비용 정도만 지급받았다. 따라서 자신의 책임량을 초과해서 생산한 물품은 세금을 내고 판매하여 생계를 이어갔다. 관장(官匠)들은 그 신분이 양민(良民)인 사람도 있었으나, 대개 공노비였다.
민영 수공업
민영 수공업은 대개 농민들이 가내 수공업 형태로 자신들이 필요한 것을 생산하여 충당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무명 ·모시 ·명주 ·삼베 등을 가족 단위로 생산하는 일이 많았다. 한편 민영 수공업자들은 주로 농민들을 상대로 호미·낫 곡괭이· 쇠스랑 같은 농기구 등의 물품을 만들어 판매했고, 양반들의 사치품도 제작해 판매했다.
5. 상업 활동
육의전과 경시서
조선 정부는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종로 거리에 상점가를 만들었다. 개성에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는 시전(市廛: 시장거리의 가게)이 있었다. 조선 정부는 개경의 시전을 모방하여 종로 네거리를 중심으로 행랑(行廊)이라는 건물을 지어 상인들에게 점포세를 받고 빌려주어 상점의 문을 열게 했다. 이것이 새로 생겨난 시전이었다. 시전 상인들은 왕실이나 관청에 물품을 공급하는 대신에 특정 상품에 대한 독점 판매권(금난전권)을 부여받았다. 그 후 시전은 발전하여 육의전(六矣廛)이 나타나게 되었다. 육의전은 선전(線廛: 비단 상점) 면포전(綿布廛: 무명 상점) 면주전(綿紬廛: 명주 상점) 저포전(苧布廛: 모시 상점) 지전(紙廛:종이 상점) 어물전(魚物廛: 물고기 상점) 등 6가지 상점을 말한다. 한편 시전을 관리하고, 불법적인 상행위를 감독하기 위해 경시서(京市署)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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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시
15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장시(場市)는 향시(鄕市)라고도 하는데, 일정한 장소에서 상인들 또는 주민들이 물건을 사고 파는 곳을 말한다. 장시는 서울 근교와 지방에서 농업 생산력이 발달하자, 증가하였다. 지방에는 오랫동안 나타나지 않다가 성종 초에 전라도에서 흉년으로 먹을 양식이 없어 굶주리게 된 것을 계기로 하여 자연발생적으로 출현했다. 조선 정부는 농민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으로 몰릴 것을 우려해 장시를 억눌러서 하지 못하게 했으나 나중에는 묵과하였다. 일부 장시는 한 달에 6회 열게 되는 정기 시장으로 정착해 갔다.
6. 무역 활동
조선 정부는 기본적으로 주변 국가와의 무역을 통제했다. 명나라·일본 ·여진 등과 조공 등의 형태로 행해지는 공무역(公貿易)과 의주· 평양· 안주· 개성 등지의 상인들이 명나라 상인들과 거래하는 사무역(私貿易)이 행해졌다. 여진과의 무역은 경성과 경원 등지의 국경 지역에 설치한 무역소를 통하여 교역을 하였으며, 일본과는 동래에 설치한 왜관(倭館)을 중심으로 무역이 행해졌다.
공무역과 사무역을 통해 조선에서 수출된 것은 금·은· 인삼· 수달피 가죽 ·종이· 모시 등이었고 수입한 것은 비단· 옷·서적·약재·자기 등이었다. 국경 부근에서 이루어진 사무역은 주로 무명과 식량을 거래했는데, 엄격하게 감시를 받았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및 고려대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에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대학원 강사, 고려대학교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