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의 광부, 처인성의 농민
김종성(소설가, 전 고려대 문화창의학부 교수)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진화는 다양성의 증대와 새로운 가치의 실현을 향한 과정이며, 자연적 실체로서의 생명과 정신 역시 어떤 ‘지향성’을 향해 발전한다고 본다. 그는 "사회적 비판과 사회적 변혁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린 생태주의만이, 자연 그리고 인류에게 유익한 방식으로 사회를 변혁하는 수단을 제공할 수 있음을 명확하게 보여준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자연을 1차자연과 2차자연으로 나누었다. 자연 그대로의 자연을 1차자연이라 한다. 인간에 의해 변형된 2차자연은 위계 질서, 계급, 국가, 사유재산, 경쟁적인 시장 경제 따위에 특성화 되고 있다. 구조화되고 제도화된 2차자연은 1차자연이 진화한 결과이다. 생물권의 미래는 인간의 참여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2차자연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사회 또는 새로운 유기적인 협력체계, 다시 말해 자유로운 자연(free nature)으로 이행할 수 있는가의 여부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고 머레이 북친은 주장한다.
에릭 R. 울프(Wolf, Eric R)는 『농민(Peasants)』에서 농민들은 자기의 필요와 지배자의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지 않을 수 없으므로, 균형을 잡으려고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긴장의 제물이 된다고 말했다. 농민들이 땅 위의 경작자라면 광부들은 땅 밑의 경작자들이다. 역사의 수레바퀴가 회전하여 자본주의 사회가 되자, 농업은 불리한 산업이 되었다. 농민이 생산한 농축산물과 자본가들이 생산한 공산품은 아예 경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선진자본주의 국가들은 농산물 가격정책을 통한 농업 보호와 농민의 소득 보장에 힘써왔다. 그러나 한국정부는 저임금정책과 수출 주도형 정책의 수행을 위해 농민들을 희생시키는 저곡가 정책을 펼쳐왔다. 궁지에 몰린 농민들은 농촌을 떠나 공장지대로, 탄광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땅 위에서 밭을 갈던 농민들은 광부가 되어 두겹 하늘을 이고 수백 미터 땅 밑에서 막장을 갈게 되었다.
해발 650 ∼ 750미터에 자리잡은 강원도 태백시(太白市)는 그 이름을 태백산(太白山)에서 따왔다. 태백산이라는 이름은 '크게 밝은 뫼' 라는 뜻으로 단군신화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보면 “일성이사금 왕 5년 겨울 10월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친히 태백산에서 천제를 올렸다(逸聖尼師今, 五年冬十月, 北巡, 親祀太白山).”[『삼국사기(三國史記)』 ,권1, 「신라본기(新羅本紀)」1, '일성이사금조(逸聖尼師今條)']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태백산은 ' 크게 밝은 산'으로 성스러운 땅이었다. 한국의 산업화· 공업화의 일등 공신은 태백산이었다. 태백산이 석탄과 석회석, 텡스텐을 품고 있다가, 한국인들에게 내주지 않았다면 오늘의 한국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경기도 용인시는 본래의 용인·양지(陽地)·죽산(竹山)의 일부를 합친 것이다. 용인은 고구려 때 구성현(駒城縣)이었고, 신라 경덕왕 때 거서현(巨黍縣)이라 고치고 한주(漢州)에 소속시켰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용구현(龍駒縣)으로 되었으며, 현종 때 광주에 소속 시켰다가, 명종 때 현으로 하고 감무를 두었다. 그리고 조선시대 태종 13년(1413) 처인현(處仁縣)을 합해 용인현이 되었다.
몽골의 10만 대군이 고려를 침략해왔을 때, 처인성 일대 농민들은 승려 김윤후(金允侯)의 지휘 아래 몽골 군대와 맞서서 승리를 이루어냈다. 몽골의 대장군인 살리타이[撒禮塔]가 김윤후가 이끄는 농민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퇴각했다. 고종이 그 공을 가상히 여겨 상장군(上將軍)으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김윤후는 공을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면서 “전투할 때 나는 활이나 화살을 가지고 있지 않았는데 어찌 함부로 무거운 상을 받겠는가?(當戰時, 吾無弓箭, 豈敢虛受重賞). "(『고려사』 「열전」,16 , '김윤후') 라고 말하며 끝까지 사양했다. 그러자 고종은 그를 섭랑장(攝郞將)으로 바꿔 임명하였다. 용인정신의 고향인 처인성이 속해 있던 용인시의 처인구 지역은 산업화· 도시화가 급격하게 진행되고 있는 용인시 수지구· 기흥구 지역에 비해 산업화· 도시화의 진행이 더디다. 따라서 처인구 지역은 2,3차 산업보다 1차산업이 발달되어 있다. 그러나 처인구 지역의 기간산업인 농축산업은 도시화· 산업화의 물결에 휩쓸려 빈사 직전에 있다. 농민들의 입지는 점점 좁아지고 있으며, 경제 논리를 앞세운 자본가들의 자본이 이 지역으로 급속하게 침투되어 옴에 따라 지역 사회 곳곳에서 농촌공동체와 농촌경제가 무너져 가고 있다. 용인시의 처인구 지역 농민들이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지금까지 농민들이 당면했던 문제와는 상당히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고부터 용인시 처인구 지역의 농민들은 생존 자체를 위협당하고 있는 것이다. 용인시 처인구 지역의 농촌은 어메너티(amenity) 상실이라는 커다란 문제에 봉착해 있다.
광부들이 도급제, 검수제와 같은 전근대적인 임금구조 속에서 낮은 임금을 받고 막장에서 일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자본가들의 탐욕과 한국정부의 저곡가(低穀價), 저탄가(低炭價) 정책 때문이었다. 한국정부가 노동자들이 저임금을 받고 수출 전선에서 일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쌀 값을 싸게 하고, 노동자들이 따뜻하게 자고 밥을 끓여 먹는데 필수적인 연탄을 싸게 공급하기 위해 저곡가, 저탄가 정책을 썼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의 하나였던 한국이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루게 된데는 무엇보다도 농민들과 광부들의 피땀 어린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용인시는 산업화·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2차자연화에서 생긴 부작용으로 여러 가지 환경문제가 발생하고 있다. 자본가들에 의한 마구잡이식 광산 개발로 인해 망신창이가 된 태백시와 태백시 광부들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면 용인시도 용인시 자연환경의 2차자연화의 틈새를 노려 황금을 쥐어보려는 자본가들의 제물로 용인시 처인구 지역의 자연과 농민들을 바치는 어리석은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이미 용인시 수지구· 기흥구 지역의 난개발로 전국적으로 오명을 떨친 용인시는 용인시 처인구 지역 농업지대의 농업정책과 환경정책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할 필요가 있다. 그것만이 처인성의 정신을 면면히 이어온 용인시 처인구 지역 농민들과 자연을 자본가들의 탐욕으로부터 지킬 수 있는 방법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