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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김종성 지음 『한국문학사 Ⅴ』(미출간).암흑기(1940년∼1945년)의 소설과 수필

작성자dbhosu|작성시간21.04.14|조회수808 목록 댓글 0

『한국문학사 Ⅴ』

 

3) 암흑기의 소설

 

 한국문학사에서 암흑기라 부르는 1940년부터 1945년 사이에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폐간(1940년)된 데 이어, 1939년 2월에 창간되었던 『문장』이 1941년 4월 통권 25호(1939년 7월 임시 중간호 포함 26호)로 폐간되었다. 일제는 1940년 국민총력연맹을 결성하여 한국인들에게 황국신민화운동을 강요했다. 일제의 무단적인 강압과 통제 체제 아래에서 황순원 등은 “근원적이거나 토착적인 것, 단순하고 순진한 것 또는 차라리 우둔한 삶의 양식과의 화해를 이루거나 비정치적인 순수성을 유지함으써 어둠의 고비를 견디며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을 선택하기도 하여”(이재선, 『한국현대소설사』, 홍성사, 1979, p.464) 창작 활동을 힘겹게 이어나갔다. 이 시기에 발표된 주요 작품으로 이태준의 「밤길」(『문장』, 1940년 7월), 황순원의 「별」(『인문평론』, 1940년 2월), 계용묵의 「신기루(蜃氣樓)」(『조광』, 1940년 1월), 곽하신의 「신작로」(『문장』, 1941년 2월), 김동리의 「동구앞길」(『문장』, 1940년 2월)·「혼구(昏衢)-제1장의 윤리」(『인문평론』, 1940년 2월)·「다음 항구」(『문장』, 1940년 9월), 김정한의 「낙일홍」(『조광』, 1940년 4월)·「추산당과 곁사람들」(『문장』, 1940년 10월)·「월광한(月光恨)」(『문장』.1940년 1월), 최명익의 「장삼이사」(『문장』, 1941년 4월) 등이 있다.

 “일제하에서 침묵을 지키면서도 읽혀지지도 출간되지도 않는 작품을 은밀하게 쓰면서 모국어를 지킨”(김종회, 「문학의 순수성과 완결성, 또는 문학적 삶의 큰 모범」, 황순원 학회 편, 『황순원 연구 총서 1』, 국학자료원, 2013, p.367.) 황순원은 1915년 평안남도 대동군에서 태어났다. 시 「나의 꿈」(『동광』, 1931년 7월)을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그는 첫 시집 『방가(放歌)』(동경학생예술좌, 1934년)와 제2시집 『골동품(骨董品)』(동경학생예술좌, 1936년)을 상자한 뒤, 단편소설 「거리의 부사」(『창작』제3집)를 발표하면서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40년 첫 단편집 『황순원단편집(개제 늪)』(한성도서주식회사, 1940년)을 내면서부터 소설에 전념하게 된다.

 어머니를 여윈 외로운 어린아이의 누이에 대한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 「별」(『인문평론』, 1940년 2월)의 대단원 부분이다. “당나귀가 더 날뛸수록 아이의, 왜 쥑엔! 왜 쥑엔! 하는 지름소리가 더 커갔다. 그러다가 아이는 문득 골목 밖에서 누이의, 데런! 하는 부르짖음을 들은 거로 착각하면서, 부러 당나귀 등에서 떨어져 굴렀다.”라는 대목에서 당대의 어린아이들이 갖고 있는 통념과는 다른 행동을 하고 있다. 이 소설의 플롯을 잘 살펴보면 아이가 왜 이런 언행을 하는지 수긍이 간다. 아이는 스스로 다치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보통 아이들은 날뛰는 당나귀 등에서 스스로 떨어지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이 장면을 플롯의 단층 구조상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핍진성이 없는 행위이다. 그러나「별」의 플롯 구조를 살펴보면 아이의 이런 행위는 핍진성을 갖는다. 플롯의 단층 구조상 다른 부분들과의 상관성 속에서 동기화되었기 때문이다. 누이가 죽은 아이는 누이에 대한 애증 때문에 당나귀에 올라타 고함소리를 지르다가 당나귀에서 떨어져 다친 적이 있다.

어머니의 모습이 지금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하는 아이는 어머니와 누이가 닮았다는 말을 듣고, 누이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아이는 누이가 만들어준 인형을 땅 속에 묻는다. 그뿐만이 아니라 누이를 죽이고 싶은 충동마저 느낀다. 그런 아이가 누이를 미워하기 시작하고부터 누이가 죽은 후 인형을 찾으러 가기까지 겪은 사건들과 심리적 갈등이 아이의 태도를 동기화 하고 있다. 한 편의 이야기가 보다 그럴듯하고 흥미진진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서 그럴 듯하지 않은 요소를 그럴 듯하게 만드는 방식을 동기부여(motivation)라고 한다. 어린아이가 누이를 미워하는 것은 사실은 누이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가 죽은 어머니를 몹시 그리워한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시집을 간 누이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모성으로부터 벗어나 살아있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에 대한 인식이 성숙하게 되는 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는 「별」은 “현실(現實)에의 자기 조정과 성숙(成熟) 이전의 인간의 삶의 근본문제(根本問題)를 다루고자 한”(이재선, 『한국현대소설사』, 홍성사, 1979, p.474) 성장소설(initiation story)이다.

 징병제의 실시(1943년)와 학병제의 시행(1944년) 등으로  한국의 젊은이들을 전쟁터에 끌고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일제는 그 사전 정지 작업의 일환으로 조선문인협회 결성(1939년), 창씨제도의 실시(1940년), 국민총력 조선 연맹 결성(1940년) 등을 펼쳐, 한국인의 반일 감정을 무마하고 한국인의 황민화(皇民化)를 위해 한국인과 일본인은 역사적으로 한 민족임을 내세우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정책을 펼쳤다. 이 정책을 적극 수용하여 문학작품으로 이를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효석의 「아자미의 장(蘇の章)」(『국민문학』 1941년 11월) , 정인택의 「부상관(枎桑館)의 봄」(『춘추』, 1941년 7월) ·「껍질」(『녹기』, 1942년 1월), 이광수의 「가가와교장(加川校長)」(『국민문학』, 1943년 10월) 등이 있다. 그리고 징병을 독려한 소설로는 정인택의 「뒤돌아보지 않으리」(『국민문학』, 1943년10월), 최정희의 「야국초(野菊草)」(『국민문학』, 1942년 11월)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작품이다.

 한편 개척민의 삶을 다룬 소설로는 안수길의 「목축기(牧畜記)」(『춘추』, 1943년 4월) 등이 거론된다. 만주(둥베이지구)를 공간적 배경으로 하여 일본과 만주는 하나라는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만주이주개척민의 삶을 다룬 대표적인 소설인 「목축기(牧畜記)」는 1931년 일제가 만주 사변 직후부터 만주 지역에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滿洲國)의 농업건설과 부합되는 가축을 사육하는 과정을 그렸다. 『춘추』(1943년 4월)에 ‘만주개척민창작특집’ 중의 1편으로 게재된 「목축기」는 작가 자신은 망명문학작품이라고 주장했지만, 국문학자 가운데 친일작품으로 보는 학자도 있다.

 '민족협회 정신을 고무하고 재만 조선계의 국민적 자각을 강화하여 조선계의 황민화 촉진에 적극적인 참여'를 내걸고 창간된「만선일보(滿鮮日報)」에서 활동한 작가나 그 지면에 작품을 발표한 작가들의 친일 문제는 아직 학계의 연구가 미진하다. 암흑기에 발표된 소설 가운데 앞에서 거론한 작품 외에 친일소설 작품으로 평가되는 작품으로 이광수의 「대동아(大東亞)」(『신반도문학선집·국민문학작품집 제2집』, 인문사, 1944년 12월)·「두 사람」(『방송지우』1944년 8월)·「원술(元述)의 출정(出征)」(『신시대』1944년 6월), 이무영의  『청기와집(靑瓦の家)』(「부산일보」 1942년 9월 8일∼1943년 2월 7일)·「정열(情熱)의 서(書)」(『정열의 서』, 동도서적, 1944년 4월) ·「역전(驛前)」(『조광』1943년 9월)·「모(母)」(『정열의 서』, 동도서적, 1944년 4월)·「용답(龍沓)」(『반도(半島)의 광(光)』 1943년 8월)·「화굴이야기(花窟物語)」(『국민총력』1944년 4월)·『향가(鄕歌)』(「매일신보」1943년 5월 3일∼1943년 9월 6일), 채만식의「혈전(血戰)」(『신시대』 1941년 7월)·『아름다운 새벽』(「매일신보」1942년 2월 10일∼7월 10일)·『여인전기(女人戰記)』(「매일신보」 1944년 10월 5일∼1945년 5월 15일)·「이상적 신부」(『방송지우』 1944년 3월), 정인택의 「검은 흙과 흰 얼굴」(『조광』 1942년 11월)· 「농무(濃霧)」(『국민문학』 1942년 11월)·「청향구(淸鄕區)」(『방송소설명작선』, 조선출판사, 1943년 12월)·「아름다운 이야기」(『청량리 일대(淸涼里界限)』, 조선도서출판주식회사, 1944년 12월)·「각서」(『국민문학』, 1944년 7월)·「갑종합격」(『문화조선』, 1944년 12월 1일)·「불초(不肖)의 자식들」(『조광』, 1943년 9월), 조용만의 「배 안에서」(『국민문학』1942년 7월)·「고향」(『녹기(綠旗)』, 1942년 12월)·「모리(森)군 부부와 나와」(『국민문학』, 1942년 12월)· 「광산(礦山)의 밤」(『국민문학』, 1944년 11월)·「불국사의 여관」(『국민총력』 1943년 10월), 이석훈의 「동으로의 여행」(『녹기』, 1942년 5월)· 「고요한 폭풍」(『고요한 폭풍』, 매일신보사, 1943년 6월)·「북으로의 여행」(『국민문학』 1943년 6월)·「최후(最後)의 가보(家寶)」(『신시대』 , 1943년 8월) , 최정희의 「환영(幻影)의 병사(兵士)」(『국민총력』, 1941년 2월)· 「징용열차」(『반도(半島)의 광(光)』, 1945년 2월)· 「2월 15일 밤」(『신시대』, 1942년 4월), 김문집의 「검게 물든 혈서(血書)」(『총동원』, 1939년 10월), 김성민의 『녹기연맹(綠旗聯盟)』(우전서점, 1940년 6월), 김동인의「남경조약」(『방송소설명작선』, 조선출판사, 1943년 12월), 최재서의 「보도연습반」(『국민문학』, 1943년 7월)·「부싯돌(燧石)」(『국민문학』, 1944년 1월) , 정비석의 「어머니의 말씀」(『조광』, 1943년 9월) , 장덕조의 「재생」(『방송지우』, 1944년 2월)·「우후청천(雨後晴天)」(『방송소설명작선』, 조선출판사, 1943년 12월), 장혁주의「새로운 출발」(『국민총력』, 1943년 6월 15일∼9월 15일) 등이 있다.

 수양동우회사건을 계기로 변절의 길을 걷게 된 이광수는 1939년 11월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해 회장에 선출되었다. 그는「매일신보」(1940년 2월 20일) 에 게재한 「창씨(創氏)와 나」를 통해 그 자신의 이름을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郞)으로 창씨개명한 이유를 밝히고, 일제의 창씨개명 정책을 지지하기도 하였다. 이어서 그는「매일신보」(1941년 9월 3∼5일)에 일본의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지지하는 내용의 「반도민중의 애국운동」을 게재했다. 그 후 그는 1942년 11월 도쿄에서 열린 제1차 대동아 문학자대회 참가했고, 1943년 4월 조선문인보국회 이사로 선출되었다. 그는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평의원, 결전태세즉응(決戰態勢卽應) 재선(在鮮) 문학자 총궐기대회 의장을 맡는 등 8·15 해방 직전까지 친일행적을 이어갔다.

이광수의 친일작품으로 판단되는 시작품에 「가끔씩 부른 노래」(『동양지광』, 1939년 2월),「지원병장행가」(『삼천리』, 1939년 12월), 「싱가폴 함락하다」(『신시대』1942년 3월), 「진주만(眞珠灣)의 구군신(九軍神)」(『신시대』1942년 4월), 「모든 것을 바치리」(「매일신보」1945년 1월 18일) 등이 있고, 논설에 「내선일체와 조선 문학」(『조선』1940년 4월 ), 「심적 신체제와 조선문화의 진로」(「매일신보」 1940년 9월 5일∼12일),「지원병 훈련소의 하루」(『국민 총력』1940년 11월), 「반도 민중의 애국운동」(「매일신보」 1941년 9월 3일∼ 5일),「대동아 일주년을 맞는 나의 결의」(『국민 문학』1942년 12월), 「폐하의 성업에」( 『춘추』1943년 2월) 등이 있다.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일제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우며 신라의 화랑도(花郞道)를 전거로 삼아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국가 총동원체제의 수립과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요했다. 이광수의「원술(元述)의 출정(出征)」(『신시대』, 1944년 6월)은 미나미(南次郞) 총독이 주장했던 전시동원체제의 지령과도 부합하는 단편소설로 역사적 사실까지 왜곡하고 있다.

 「국민국가와 ‘화랑도’ - 애국계몽기~대한민국 건국기의‘화랑’담론과 활용 양상을 중심으로」에서 이광수의 「원술(元述)의 출정」이 “학병들에게는 ‘임전무퇴’의 항목을, ‘조선반도’ 여인들에게는 지소부인처럼 상무적 교양을 갖춘 군국의 어머니’, 혹은 ‘화랑의 아내’ 아좌희처럼 자식과 남편을 전쟁터로 내보내고 총력전에 가담하는 총후부인이 될 것을 독려하는 서사”(정종현, 「국민국가와 ‘화랑도’ - 애국계몽기~대한민국 건국기의‘화랑’담론과 활용양상을 중심으로」, 『정신문화연구』 2006년 겨울호 제29권 제4호(통권 105호) , pp.192∼193)라고 본 정종현은 조선인이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바치기 위해 중일전쟁에 나서야 할 필요성을 역사를 통해 진실로 합리화시키는데 화랑과 관련한 고사가 전거로 활용되었고, 그 일에 사학자들도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진술하고 있다.

 이광수는 1922년 5월『개벽』에 조선 민족에 대한 전면적 개조의 필요성을 강조한 「민족개조론」을 발표한지 20년 뒤인 1941년 9월「매일신보」에 평론「반도 민중의 애국운동」을 발표했다.  이광수는 「반도민중의 애국운동」(「매일신보」, 1941년 9월 3일∼5일)에서 “생활의 황민화라는 것은 사상, 감정, 풍습, 습관 중에 비일본적인 것을 제거하고 일본적인 것을 대입(代入) 순화(醇化)하는 것이다. 예(例)하면 혼상예의(婚喪禮儀)의 일본화, 가족 친척 관념의 일본화, 경신숭조(敬神崇祖) 천황 중심의 생활의 신건설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조선인의 일본화‘ 주장이 단편소설「원술(元述)의 출정」 등을 통해 표출된 것이다. 이광수의 친일사상은 “당대적인 차원에 머문 것이 아니라 전민족사를 통틀어 이를 일본화시키려고 한”(임헌영, 「이광수-민족개조를 부르짖은 변절 지식인의 대명사」, 『친일파 99인』, 3, 돌베개, 1993, p.31.)것이었다.

 「중외일보」(1930년 1월 11일∼16일)에 단편소설 「준비(準備)」를 발표하여 문단에 나온 정인택은「촉루(觸髏)」(『중앙』, 1936년 6월)·「준동(蠢動)」(『문장』, 1939년 10월)·「헛된 우상」(『여성』, 1940년 8월) ·「연련기(戀戀記)」(「동아일보」, 1940년 3월 7일~4월 3일)·「착한 사람들」(『삼천리』, 1940년 12월) ·「여수(旅愁)」(『문장』, 1941년 1월)·「단장(短章)」(『문장』, 1941년 2월) 등을 발표했다. 1인칭 화자를 내세워 주인공인 '나'가 자기의 체험을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사소설을 심리주의적 수법으로 주로 썼다. 조선문인협회 상임간사와 조선문인보국회 간사장으로 활동한 정인택은 1945년 제3회 ‘고꾸고(國語)’문예총독상을 수상했다.

“’정성어린‘ 친일소설의 경지에 도달해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라는”(심원섭, 「총동원체제하의 한국 문예」,『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XVI·문예작품을 통해 본 친일협력』,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p.23) 평가를 받고 있는 「각서」를 비롯해 많은 친일소설을 쓴 정인택의 「갑종합격(甲種合格)」은 손자의 지원병 합격을 비는 금촌(金村) 노인의 기원을 그린 작품이다.

 이무영은 1942년 9월 조선문인협회 상임간사로 활동하면서부터 친일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같은 해 12월 26일부터 1943년 1월까지 조선문인협회 파견으로 만주국 간도성 조선인 개척촌을 시찰하고, 「간도성시찰작가단보고」(『녹기』, 1943년 2월)를 발표했다. 1944년 6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간사장으로 임명되었고, 유진오· 사토신(佐藤淸) 등과 함께 반도 대표로 ‘일본문학자 총궐기대회'에 파견되었다. 1945년 8월 조선문인보국회 소설부회 회장에 선임되었다. 이무영의 친일논설로는「대동아전쟁에 의해서 무엇을 배웠는가」(『국민문학』, 1942년 2월), 「이날이 되어」(『경성일보』, 1942년 12월 16일), 「국어문제회담」(『국민문학』, 1943년 1월), 「결전문학 수립을 위하여」(『문학보국』, 1944년 8월), 「소개산 전훈 2」(『매일신보』, 1945년 5월 5일) 등이 있다. 그밖에 이태준과 공저로 『대동아전기(大東亞戰記)』(이무영·이태준 공저, 인문사, 1943년 1월)를 펴냈다.

 일제의 전시식민정책에 협력하는 작품을 발표했던 이무영은 뛰어난 일본어 구사 능력을 발휘해 일본어로 소설을 써서 '국어[일본어] 소설'의 선구자가 되었다. 그가 일본어로 쓴 『청기와집(靑瓦の家)』은 2009년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에서 간행한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XVI·문예작품을 통해 본 친일협력』에 한국어로 번역되어 수록되었다.

 1942년 9월 8일부터 1943년 2월 7일까지 부산에서 발행된 일본어 신문「부산일보」에 연재한 장편소설 『청기와집(靑瓦の家)』은 ’한국‘에서 ’한국인‘ 작가가 '일본어'로 쓴 최초의 일간신문 연재소설이다. 이 소설은 ‘청기와집’이라 불리는 양반 가문인 권 대감 집안을 무대로 하여 여주인공 안미연을 둘러싼 남녀 관계를 중심으로 서사구조가 짜여져 있다. 전통과 구습을 지키고자 하는 권 대감, ‘영미 제일주의’를 신봉하는 권 대감의 아들 수봉,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가치관을 비판하면서 일제의 신민(臣民)으로 충성을 다할 것을 주장하는 수봉의 아들 인철, 이들 삼대(三代)의 갈등구조로 서사가 전개되고 있다.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뒤 일본의 홍콩 점령까지를 시간적 배경으로 한 『청기와집』은 안미연· 유해성· 권인철 등이 일제의 충용한 신민이 되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이 소설[『청기와 집(靑瓦の家)』]의 의도에 대해서는, 이무영이 작자의 말에서 이 작품에서 “하나의 커다란 시사(示唆)를 독자에게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황민으로서 조선 동포가 가야 할 역사적인 도정(道程)이라고도 할 만한 것”(「부산일보」, 1943년 9월 4일)이라고 언급했고, 추천자의 한 사람인 가토 다케오가 더 솔직하게, “징병제 시행에 의해 내선일체와 황민화의 의미가 더욱 견고해졌다. 이무영 군의 소설이 본지에 게재된 것은 이를 기념하는 취지에서도이기도 하다”(「『청기와 집(靑瓦の家)』의 작자」, 1943년 9월 6일)라고 쓰고 있는 데서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

― 호테이 도시히로(布袋敏博),「이무영 ‘청기와집(靑瓦の家)’에 대해서(해설)」,『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XVI·문예작품을 통해 본 친일협력』, 대통령 소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 2009년, p.547.

 

 1943년 4월 이무영(1908년∼1960년)은 『청기와 집(靑瓦の家)』으로 일본의 신태양사가 주관하는 제4회 조선예술상을 수상했고, 같은 해 9월 29일 『청기와 집(靑瓦の家)』을 일본의 신태양사에서 간행했다. 해방후 이무영은 『향가』(동방문화사, 1947년)·『무영농민문학선집 제1권』(민중서관, 1949년)·『세기(世紀)의 딸』(동진문화사, 1949년)·『산가(山家)』(민중서관, 1949년)·『B녀의 소묘(素描)』(문연사, 1951년)·『젊은 사람들』(문연사, 1952년)·『농민』(대한금융조합연합회, 1954년)·『역류』(을유문화사, 1955년)·『삼년』(사상계사, 1956년)·『해전소설집』(해군본부정훈감실, 1957년)·『벽화(壁畵)』(문장사, 1958년) 같은 작품집과 문학이론서 『소설작법』(영문사, 1947년)을 출간하는 등 활발한 작품 활동을 했다.  이무영의 사후  『이무영대표작전집』(전 5권, 신구문화사, 1975년)과  『이무영문학전집』(전 6권, 국학자료원, 2000년)이 출간되었다.

 

4) 암흑기의 수필

 

 1901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난 김교신은 1918년 함흥농업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영어학교(東京正則英語學校)를 거쳐 1927년 도쿄고등사범학교 지리·박물과를 졸업했다. 그는 일본의 군국주의에 반대하며 무교회운동(無敎會運動)을 전개하던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강의를 7년간 청강하고, 그의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1925년부터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 문하의 한국인 유학생들인 김교신·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석 등과 조선성서연구회(朝鮮聖書硏究會)를 조직하여 『성서』를 연구하면서 1927년 7월 동인지 『성서조선(聖書朝鮮)』을 발간하기 시작했다. 1927년 귀국하여 함흥의 영생여자고등보통학교 교사가 된 김교신은 한국의 역사와 한국인의 가슴으로 성경을 읽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갖고 『성서조선』발간 사무를 그 자신이 맡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양정고등보통학교로 직장을 옮겼다. 그는『성서조선』에「산상수훈연구(山上垂訓硏究)」(1933년)을 비롯하여 성서연구, 성서해설, 인생론, 신앙론, 시사평, 교육평 등 많은 글을 실었다. “우리 근세사에 이런 모세 같은 인물을 찾는다면 만해(萬海) 한용운(韓龍運)과 그리고 그 흔한 호(號) 하나 없던 민중의 평교사(平敎師) 김교신(金敎臣)이 될”( 김정환, 『김교신』, 한국신학연구소, 1980, p.18) 것이라고 평가받는 김교신이 활동한 시기는 일본제국주의의 압력이 가중될 때였다. 그 시기 안창호로 대표되는 지식인의 준비론과 별도로 일제의 억압에 정비례하여 분출한 민족의식의 하나가 예언자적 지성이다.

 피압박민족의 해방투쟁사의 복음주의적 변형인 속죄양(贖罪羊· Scape goats) 의식은 지식인을 예언자로 만들며, 역사를 종말론적으로 인식하게 만든다. 기원전 13세기경의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 모세(Moses)만이 다만 ‘피기운 있는 사람(민족주의자)’으로서 민족의 상호 불신을 깨달은 자로 여긴 김교신은 모세를 이상적인 인물로 내세웠다. 모세의 사명감으로 한국을 구원하려했던 그는 조국의 해방만이 이스라엘 민족사에 합일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 그에게 이 아픔은 예언자적 죄의식의 전파와 함께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안창호 사상 및 흥사단의 줄기와도 연결되는 실천적 영역을 동반케 한다(김윤식 ·김현, 『한국문학사』, 민음사, 1999, pp. 277∼285 참조). 1930년대 일제 강점기 식민지 치하에서 속죄양의식이 대두될 때 개신교의 정신사적 위치의 중심에 서 있던 인물이 김교신이다. 그가 『성서조선』에 발표한 글들에 흐르고 있는 사상은 한마디로 민족적 기독교 이념이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외국의 선교사업비에 의해서 유지되는 교회는 진정한 우리의 교회가 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 국적이 뚜렷하지 못하고 민중의 가슴과 생활에 파고 들지 못하는 기독교는 우리의 기독교가 될 수 없다는 것이요, 셋째, 성서를 통하여 민족의 혼을 일깨워 앞날의 진정한 독립의 정신적 기틀을 만드는 것이 진정한 민족교육(民族敎育)이라는 것이다.

                                                                                          ─김정환, 『김교신』, 한국신학연구소, 1980, p.25.

 

 창씨 개명과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한민족(韓民族)의 구제와 독립정신의 계몽에 힘썼던 김교신은 『성서조선』(1942년 3월호)의 권두언으로 「조와(弔蛙)」를 발표했다.

 

작년(昨年) 늦가을 이래로 새로운 기도터가 생겼었다. 층암(層巖)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가느다란 폭포 밑에 작은 담(潭)을 형성한 곳에 평탄한 반석(磐石) 하나가 담(潭) 속에 솟아나서 한 사람이 꿇어 앉아서 기도하기에는 천성(天成)의 성전(聖殿)이다.

 이 반상(磐上)에서 혹은 가늘게 혹은 크게 기구(祈求)하며 또한 찬송하고 보면 전후(前後) 좌우(左右)로 엉금엉금 기어오는 것은 담(潭) 속에서 암색(岩色)에 적응하여 보호색을 이룬 개구리들이다. 산중(山中)에 대변사(大變事)나 생겼다는 표정(表情)으로 신래(新來)의 객(客)에 접근하는 친구 와군(蛙君)들 때로는 5, 6마리, 때로는 7, 8마리.

 늦은 가을도 지나서 담상(潭上)에 엷은 얼음이 붙기 시작함에 따라서 와군(蛙君)들의 기동(起動)이 일부일(日復日) 완만하여지다가, 나중에 두꺼운 얼음이 투명(透明)을 가리운 후로는 기도와 찬송의 음파(音波)가 저들의 이막(耳膜)에 닿는지 안 닿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이렇게 격조(隔阻)하기 무릇 수개월여(數個月餘)!

 봄비 쏟아지던 날 새벽, 이 바위틈의 빙괴(氷塊)도 드디어 풀리는 날이 왔다. 오래간만에 친구 와군(蛙君)들의 안부를 살피고자 담(潭) 속을 구부려서 찾았더니 오호라, 개구리의 시체 두세 마리 담(潭) 꼬리에 부유(浮遊)하고 있지 않은가!

짐작컨대 지난 겨울의 비상한 흑한(酷寒)에 작은 담수(潭水)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慘事)가 생긴 모양이다. 예년(例年)에는 얼지 않았던 데까지 얼어 붙은 까닭인 듯, 동사(凍死)한 개구리 시체를 모아 매장하여 주고 보니 담저(潭低)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다닌다. 아, 전멸(全滅)은 면했나보다!(1942년 3월)

                                                             ─ 김교신, 「조와(弔蛙)」, 노평구 편, 『김교신전집』 제2권, 1975, pp.39∼40.

 

 「조와(弔蛙)」는 일제말(日帝末) 태평양전쟁 중 한국인이 겪어야 했던 시련을 그린 수필이다. 일본의 억압으로 고통받는 한국인을 개구리에 빗대어 한국인의 영혼을 찬양했다고 본 조선총독부는 『성서조선』을 불온잡지로 지목해 강제로 폐간했다. 일제는 그동안 발간된 『성서조선』을 압수하여 폐기하고, 김교신· 함석헌·송두용·유달영 등 13명을 검속했다. 이들 가운데 김교신 등은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것이 ‘성서조선사건(聖書朝鮮事件)’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 김교신은 고향 근처인 함경남도 흥남 질소비료 공장에 취업해 노동자의 교육·후생·주택 등의 문제를 보살펴주다가 발진티푸스에 감염되어 노동자숙소에서 1945년 4월 4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한국 신문학사상 최초의 창작 현대시조집인 『백팔번뇌(百八煩惱)』(1926년)와 역대의 가집(歌集)에서 고시조 1,405수를 뽑아 정리한 『시조유취(時調類聚)』(1928년)를 펴내 시조의 현대적 계승과 발전에 힘쓴 최남선은「반순성기(半巡城記)」(『소년(少年)』. 1909년 8월∼10월)·「심춘순례(尋春巡禮)」(1926년)·「백두산근참기(白頭山勤參記)」(1927년)·「금강예찬(金剛禮讚)」(1928년) 등의 기행수필에서 조선의 자연은 조선정신을 드러낸 모습이라고 묘사했다.

1928년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촉탁이 되면서 친일의 길로 들어섰던 최남선은 1944년 중추원 참의에 임명되었다. 1938년 만주로 가서 「만몽일보(滿蒙日報)』의 고문이 되었던 최남선은 그 이듬해,  일제가 만주 일대를 점령하고 수립한 괴뢰 정권인  만주국(滿洲國)에 세운 건국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다.  최남선의 「아세아의 해방」은 그의 「성전(聖戰)의 설문(說文)」(『신시대』 , 1944년 2월)과 함께 태평양전쟁을 미국과 영국의 동아(東亞) 침략에 맞선 동아 해방(東亞解放)의 성전(聖戰)으로 미화시킨 일본제국주의의 ‘성전론(聖戰論)’과 같은 계열의 ‘성전론’이다.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강원도 평창 출생.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2004).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1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2024년 연작소설집 『가야를 찾아서』(서연비람, 2024)로 제17회 이병주 국제문학상 대상 수상.

연작소설집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가야를 찾아서』(서연비람, 2024)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 전 5권’ 『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강사,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고려대 세종캠퍼스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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