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보의 문학론과 시 세계
김종성(소설가, 전 고려대 세종캠퍼스 문화창의학부 교수)
Ⅰ. 서 론
고려를 건국한 세력은 장수(將帥) 세력이었다. 그들은 광종 때 과거제도를 실시하고, 성종 때 유교주의 정치를 채택했다. 그 이후 고려는 학문과 법령으로서 세상을 다스리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표방하여 문신 귀족 사회를 형성했다. 이러한 문신 중심의 사회가 전개됨에 따라 문신의 지위는 높아지고 무신의 지위는 낮아져, 무신의 사회적인 몰락을 가져왔다. 다같은 관제면에서 볼 때 귀족이면서도 문신은 정2품 이상의 고위직에 오를 수 있었으나, 무반은 무반의 최고위직인 정3품 상장군까지밖에 오를 수 없었다. 따라서 전시과(田柴科)에 의한 토지 지급이나 녹봉 체제에 의한 현물 지급도 문신에 미치지 못하였다. 무신은 정치적으로 문신보다 낮은 위치에 처해 있었고, 경제적으로도 문신보다 낮은 위치에 처해 있는 형편이었다. 이와 같이 천대받는 상황 아래에서 무신은 군지휘관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전쟁이 일어나면 자신들이 가져야 할 특권인 군사지휘권마저 문신들에게 빼앗기게 되었다. 무신은 문신의 뒤치닥거리나 하는 존재로 떨어졌던 것이다. 무신은 문신의 천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마치 노비처럼 취급되었다. 여기에서 무신의 문신에 대한 불평이 높아지고 갈등의 골이 깊게 파이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하급 무신들과 고위직의 무신들 간에 갈등이 심각했다.
인종 24년(1146년) 3월, 23년 동안이나 고려를 다스리던 인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의종(재위 1146년~1170년)이 2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타고 난 성격이 나약하고 섬세하였으나 무능하지는 않았던 의종은 격구(擊毬)와 음악을 좋아하고 시를 짓고 글을 쓰는데 탁월한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거둥이 잦았고 자주 문신 및 환관들과 놀이판과 잔치판을 벌였던 의종의 실정(失政)을 무신정변이 일어나게 된 원인의 하나로 든 김갑동은 “그런 와중에서 통치 체제가 이완되어 백성들의 부담은 가중되고 무신 및 군인들에 대한 천대는 더욱 심화하였다. 그 결과 결국은 무신들의 정변을 초래하였던 것이다.”(김갑동, 『고려시대사개론』, 혜안, 2013, p.78.)라고 말했다.
의종 24년(1170년) 정중부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무신정권을 수립하자, 왕위에 오른 명종(재위 1170년∼1197년)은 정중부· 이고·이의방을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하고 대사령을 내리는 등 흩어진 민심 수습에 나섰다. 그러나 명종은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나랏일의 처리는 중방(重房)에서 이루어졌다. 중방은 원래 군사상의 최고의결 기관이었는데, 정중부가 권력을 잡고부터 중방을 중심으로 정치가 이루어졌다. 중방은 한낱 무신들의 회의 기관이 아니라 천하를 뒤흔들 수 있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중방에서 내린 명령은 곧 왕의 명령이었고, 중방에서 결정된 것이 곧 조정에서 결정된 것이나 진배없었다. 중방정치가 시작된 것이었다.
정중부 등이 무신정권을 수립한 이후 무신들 사이에 극심한 권력 투쟁이 일어났다. 이고는 이의방에게, 이의방은 정중부에게, 정중부는 경대승에게 각각 피살됐다. 경대승이 젊은 나이에 죽자, 이의민이 잠시 권력을 잡았다가 명종 26년(1196년)에 최충헌에게 피살되었다.
천하의 대권을 혼자 독차지하게 된 최충헌은 명종 26년(1196년) 이의민 정권의 실정(失政)을 열거함으로써 자신이 이의민을 제거한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왕에게 10개 조의 개혁안인 「봉사10조」를 올렸다. 이에 대해 최충헌이 「봉사10조」에서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은 개혁의지를 가지고 있었다거나, 이를 정책에 반영시키려 했다고는 보지 않는 견해(임윤경, 「최충헌정권의 성립과 그 성격」, 『이대사원』, 20, 1983, p.165 참조.)도 있다. 한편 천민들의 반란은 최충헌의 무신 정권의 기초를 뒤흔들었다. 그는 천민의 반란을 진압하는데 두 가지 방법을 썼다. 한편으로는 무력으로 토벌하는 동시에,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벼슬자리를 주기도 하고, 부곡 ·향· 소 등의 천민을 해방시키기도 하였다.
반란 음모가 잇달아 일어나자, 최충헌은 항상 마음을 놓지 못하였다. 그는 경대승이 죽자 해체되었던 도방(都房)을 다시 설치했다. 힘쎄고 날랜 사람들을 모아 6부대로 편성하여 교대로 그의 집을 지키도록 했는데, 이것을 도방이라고 불렀다. 개인 호위대인 도방을 편성한 것도 권력 독점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었다. 최씨무신정권은 도방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새로운 기구를 설치하기도 했다.
최씨집권기에는 새로운 기구가 설치되기도 하였다. 최씨집권기에 새로이 설치된 기구로는 교정도감(敎定都監)과 정방(政房), 그리고 도방(都房), 서방(書房)이 있었다. 또한 야별초(夜別抄)와 신의군(神義軍)도 최씨가 조직한 부대였다. 한편 최씨는 최충헌이 진강부(晋康府), 최이가 진양부(晋陽府)를 설치하였다. 그런데 부(府)는 최씨만이 설치한 것이 아니었다. 최씨 이전은 물론이고 이후에도 부를 세운 관료들은 존재하였던 것이다.
⎯김당택, 「최씨무신정권의 성격」, 국사편찬위원회 편, 『한국사 18 ·고려 무신정권』, 탐구당(번각 발행), 2013, p.89.
최충헌은 도방에 들어앉아 나랏일을 처리했다. 그리고 마치 궁궐이 도방으로 옮겨진 듯 모든 벼슬아치들이 도방으로 모여들어 나랏을 일을 의논했다. 이것을 도방 정치(都房政治)라고 부른다. 정중부, 경대승 등 무인집권자들은 다른 무인들과 권력을 공유했으나. 최충헌은 문무의 전권을 장악하고 왕을 폐위시키는 등 권력을 마구 휘둘렀다. 3천 명 이상의 사병을 거느리고 있던 최충헌은 잇달아 일어나는 승려·농민·천민들의 반란을 진압했다. 1198년 5월 만적이 난을 일으킨 것을 필두로 신종 2년(1199년) 황주 목사 김준거와 그의 아우 김준광의 반란 음모가 있었다. 1203년 흥왕사의 승려들이 최충헌을 몰아내려고 모의하였으나, 미리 발각되었다. 그들은 모두 최충헌에게 죽임을 당하거나 멀리 귀양가고 말았다. 그 당시 사원(寺院)들은 왕 및 문신 세력의 세력과 연결하는 무력(武力)을 갖고 있었다. 최충헌은 이 승려 세력들의 대항을 무너뜨리고, 드디어 사원 세력을 자기의 지배 아래에 두게 되었다.
최충헌→최우→최항→최의 4대 62년간에 걸친 최씨 세습 정권(1196년~1258년)은 최의가 정변으로 죽으면서 마감되었고, 이어 김준과 임연→임유무 부자가 잇따라 권력을 잡았다. 임유무는 대몽(對蒙) 항쟁 당시 친몽파인 원종(元宗, 재위 1259년~1274년)이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환도하려 하자, 이를 저지하다 원종에 의해 제거되었다. 이로써 무신 정권 시대는 막을 내리고 왕정(王政)이 회복되었다. . 승려·농민·천민들의 반란을 진압해 통치력을 회복하려고 애쓴 최충헌은 이규보 등 문인들을 등용하여 문운(文運)의 진흥을 꾀하기도 했다. 본고에서는 엄혹환 무인정권 시대를 살아가면서 문필 활동을 한 이규보의 문학론과 시 세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본론
1. 이규보의 생애
이규보(李奎報, 1168년∼1241년)는 황려(黃驢: 지금의 경기도 여주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황려가 그의 본관을 말하는 것인지, 그가 태어난 곳을 말하는 것인지 확실하지 않다. 국문학계에서는 대체로 『동국이상국집』 연보에 황려 사람이라고 씌어져 있는 것(字春卿黃驪縣人也)(『동국이상국집』 연보)을 근거로, 그가 태어난 곳을 황려로 보고 있다. 그러나 김현룡은 이규보가 의종 22년(1168년) 12월 16일 개성에서 출생한 것으로 추정했다(김현룡, 「이규보론」, 황패강· 소재영· 진동혁 공편, 『한국문학작가론 Ⅰ』, 형설출판사, 1994, p.75.) 아무튼 황려에는 그의 집안 사람들인 이씨 일족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대개 호장(戶長)·교위(校尉) 같은 향직(鄕職) 노릇을 했고, 농토도 갖고 있었다. 이 호장·교위 등은 지방 토착 세력을 대표하는 계층이었다.
호부시랑(戶部侍郎)을 지낸 이윤수(李允綏)를 아버지로 김씨부인을 어머니로 하여 의종 22년(1168년) 태어난 이규보의 자(字)는 춘경(春卿)이고, 초명(初名)은 이인저(李仁氐)였다. 이규보의 아버지는 개경에서 관직 생활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나, 자세하지 않다. 그는 개경에 살면서 황려에 약간의 토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태어난 지 석 달 만에 나쁜 종기가 온 몸에 퍼져, 여러 가지 약을 써도 잘 낫지 않아 고통을 겪었던 이규보는 아버지가 개경에서 벼슬아치 생활을 하였기 때문에 소년 시절을 개경에서 보냈다. 9세가 되었을 때, 그는 중국의 고전들을 두루 읽기 시작했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을 잘 지었다.
이규보가 11세 되던 해였다. 직문하성(直門下省) 직위에 있던 이부(李富)가 그를 불렀다. 이규보의 숙부인 그는 여러 친지들에게 이규보의 글재주를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이부가 준 지(紙)자 연구(聯句)에 “종이 위의 먼 길에 모학사(붓)가 가고, 술잔 속에 항상 국선생(누룩)이 들어 있네(紙路長行毛學士, 盃心常在麴先生).”라고 대답하여 친지들을 놀라게 하였다.
12세 되던 해, 이규보는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에 적을 두고, 성명재(誠明齋)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그는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성명재의 하과(夏課)에서 시를 빨리 지어 선배 문인들로부터 장래가 촉망된다는 칭찬을 들었다. 그리고 해마다 시를 짓는 시험에서 일등으로 뽑혀 주위의 선망을 받았다. 그는 문장을 한 번 읽으면 바로 기억하고 시와 문장을 짓더라도 옛사람들의 틀에 얽매이지 않았고, 지엽적 형식주의에 젖어 있는 과거 시험의 글은 하찮은 소인배들이나 배우는 글로 멸시하였다.
16세 때 명종 13년(1183년) 아버지가 수주(水州)의 원으로 나갔지만, 이규보는 개경에 머무르며 사마시(司馬試)에 응시하였으나 낙방하고 가을에 수주로 가 아버지를 모셨다.
18세가 되자, 이규보는 다시 개경으로 돌아와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고 가을에 다시 아버지가 계신 수주로 돌아갔다.
20세 때인 명종 17년(1187년) 이규보는 다시 사마시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다. “이때까지 그는 4~5년 동안 술을 즐기며 멋대로 놀면서 마음을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짓기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아서 계속 응시하여도 합격하지 못했다(公自四五年來, 使酒放曠不自檢, 唯以風月爲事, 略不習科擧之文, 故連赴試不中)”. (『동국이상국집』 연보)
16세부터 20세 때까지 이규보는 4·5년간 자유분방하게 지내며 기성문인들인 강좌칠현(江左七賢)의 시회(詩會)에 출입하였다. 이인로(李仁老)·오세재(吳世才)·임춘(林椿)·조통(趙通)·황보항(皇甫抗)·함순(咸淳)·이담지(李湛之) 같은 문인들이 무인정권이 수립된 이후 현실 정치를 떠나 산림에 은거하거나 의탁하면서 사부(辭賦)를 창작하거나 술을 즐겨 마셔 이들을 중국 진나라 때의 죽림7현에 빗대어 강좌7현이라 불렀다. 이들 가운데 이인로·오세재는 뒤에 무인정권에서 관로(官路)에 올랐다.
이규보는 22세 때인 명종 19년(1189년) 유공권(柳公權)이 좌수(座首)가 되어 실시한 국자감시(國子監試)에 응시하여 수석으로 합격하였다.그 이듬해 지공거(知貢擧) 정당문학(政堂文學) 이지명(李知命), 동지공거(同知貢擧) 좌승선(左承宣) 임유(任濡) 등이 주관한 예부시(禮部試)에 응시하여 동진사(同進士)에 뽑혔다. 그러나 낮은 등급으로 뽑힌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아 크게 낙심하였다. 그는 과거에 합격하고도 관직을 받지 못하고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나 불우한 생활이 그의 문학을 위해서는 오히려 좋은 기회가 되었다.
24세 때인 명종 21년(1191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천마산(天摩山)에 들어가서 이규보는 자신의 호를 백운거사(白雲居士)라고 자칭하고 시 창작에 힘쓰며 장자(莊子)의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 어떠한 인위도 없는 자연 그대로의 낙토)의 경지를 동경하기도 하는 등 세상을 관조하며 지냈다. 25세 되던 해에 이규보는 「백운거사어록(白雲居士語錄)」,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을 지었다.
26세 때인 명종 23년(1193년) 이규보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읽고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의 사실(事實)을 보고 감동하여, 영웅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창작해 그 특이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규보의 나이가 30세가 되던 해인 명종 27년(1197년) 조영인(趙永仁)·임유·최선(崔詵) 등 최충헌(崔忠獻) 정권에서 요직을 맡고 있는 유력한 선배들에게 지방관리라도 취관 시켜줄 것을 진정하는 편지를 썼다. 선배들이 그를 관직에 추천했으나 방해하는 사람이 있어 관직에 나갈 수 없었다. 그 무렵 그는 황려로 돌아갈 생각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이 무렵 그는 「망남가음(望南家吟)」 등 농촌과 농민에 소재를 둔 시를 여러 편 발표했다.
어느덧 이규보의 나이도 32세가 되었다. 사방으로 떠도는 사이 10여 년의 세월이 훌쩍 흘러간 것이다. 최충헌(崔忠獻, 1149년~1219년)이 그의 집에서 여러 문인들을 불러 꽃을 완상하고 시를 지으며 술을 마시는 자리를 마련했다. 그 자리에는 이인로(李仁老)·이담지(李湛之)·함순(咸淳) 같은 문인들이 불려갔는데, 이규보도 끼게 되었다. 이규보는 그 자리에서 최충헌을 국가적으로 큰 공로를 세운 사람으로 칭송하는 시를 지어 최충헌의 환심을 샀다. 이것이 그가 최충헌 일문을 드나들게 된 시초였다. 그후 이규보는 최충헌, 최이(崔怡, 1166년~1249년) 부자에게 적극 협조하여, 마침내 최충헌의 눈에 들게 되었다. 32세 되던 해 6월 과거에 급제한지 10년 만에 이규보는 사록겸장서기(司錄兼掌書記)로서 전주목(全州牧)에 부임하여 이문화국(以文華國)의 꿈을 실현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동료의 비방을 받아 1년 4개월 만에 관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이규보가 40세 되던 무렵 최충헌은 새로 모정(茅亭; 지붕을 띠로 덮은 정자)을 지어놓고, 이인로· 이원로(李元老)·이윤보(李允甫)· 이규보를 불러 모아 「모정기(茅亭記)」를 짓도록 했다. 이때 이규보의 작품이 1등으로 뽑혀 모정의 벽에 걸어 놓게 되어, 최충헌의 눈에 들게 되었다. 덕분에 그는 겨우 직한림(直翰林)이란 낮은 관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는 초입한림시(初入翰林詩) 2수를 짓고 「지지헌기(止止軒記)」도 지었다. 그러나 그의 벼슬살이는 순탄하지 못했다. 그는 계속 하급 관직에 머물렀다. 그러던 그에게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 46세 되던 해인 강종 2년(1213년) 최충헌의 아들인 상국(相國) 최우(崔瑀, 미상∼1249년)가 야연(夜宴)을 베풀고, 고관(高官)을 불러모았다. 홀로 8품(八品) 미관(微官)으로 부름을 받고 참석했던 이규보는 금상국(琴相國)이 불러주는 40여 운(韻)에 맞추어 공작을 시제(詩題)로 삼아 최우와 최충헌 앞에서 잠시도 붓을 멈추지 않고 시 짓는 솜씨를 뽐냈다. 최충헌이 “자네가 만약 벼슬을 원한다면 뜻대로 이야기하라.”고 말하자, 이규보는 “제가 지금 8품(八品)에 있으니 7품만 제수하면 됩니다.”라고 대답했다. 한 단계의 승급을 바라는 겸손한 모습을 보여, 그는 더 높은 관직을 얻게 되었다.
그후 이규보는 팔관회 잔치에서 오해를 받아 삭탈관직(削奪官職)을 당하고 위도로 귀양을 가는 등 굴곡이 있었으나, 69세 때인 고종 23년(1236년) 지공거(知貢擧)가 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올랐다. 그 이듬해인 고종 24년(1237년)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수태보문하시랑평장사 수문전대학사 감수국사 판예부사 한림원사 태자대보(守太保門下侍郞平章事修文殿大學士監修國史判禮部事翰林院事太子大保)라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 해에 대장경각판(大藏經刻板)에 대한 군신기고문(君臣祈告文)을 지었다.
고종 28년(1241년) 74세를 일기로 이규보는 세상을 떠났다. 주호찬은 이규보의 삶의 지향이 유가적 입신행도(立身行道)라는 현실적 목표에 집중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규보의 생애는 유교적(儒敎的) 입신주의로 일관되어 삶의 지향이 유가적 입신행도(立身行道)라는 현실적 목표에 집중되었고, 전체적으로 보아 자신이 목표했던 바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삶을 영위하였다.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그에게 현실적인 고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젊은 시절에는 과거 급제에 비해서 그의 출사(出仕)는 매우 늦은 편이었던 까닭에 자신의 재능에 대한 자부와는 달리 그에 상응하다고 여길 만한 벼슬이 주어지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과 그로 인한 방황이 떠나질 않았었다. 또한 출사(出仕) 이후 노년의 치사(致仕)에 이르기까지는 비록 득의(得意)의 시절이기는 하였지만 영욕의 정치 현실을 헤쳐나가면서 현실적인 고뇌로부터 자유로울 수만은 없었다.
-주호찬, 『이규보의 불교인식과 시』, 보고사, 2006, p.119.
유교적 입신주의로 일관된 삶을 지향했던 이규보는 시·거문고·술을 좋아하여 삼혹호선생(三酷好先生)이라고 불렸다 하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무척 술을 좋아했다. 그의 젊은 시절의 작품을 보면 ‘시의 즐거움’과 함께 ‘술의 즐거움’이 항상 따라 다녔다. 젊은 시절부터 술을 좋아하고 과거의 글을 하찮게 여기던 그가 과거에 떨어진 것은 당연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인들에 의해 귀족정치가 무너지고 새로운 신분 질서를 형성하는 역사의 갈림김에서 그가 관직에 나갈 수 있는 길은 과거에 합격하는 길뿐이었다. 음보(蔭補)로 그가 관직에 나간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이규보의 대표적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전 53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동국이상국집』은 시(詩)·부(賦)·서(序)·발(跋)·명(銘)·잠(箴)·설(說)·논(論)·문답(門答)·전(傳) 등 여러 유형의 문학 양식으로 씌어져 있다. 그 가운데 전집 권20에 수록된 「국선생전(麴先生傳)」과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은 가전체 문학(假傳體文學) 작품이다. 가전체문학은 설화에서 한걸음 나아가 우화적(寓話的) 수법과 의인화(擬人化) 수법으로 쓴 전기체(傳記體) 문학 형태이다. 다시 말해, 가전체문학은 의인화(擬人化)의 수법을 쓰고 있으므로 전기가 갖고 있는 경험적 성격과 허구적 성격을 갖는 점은 실제의 전기와 다름이 없다. 술, 돈, 지팡이, 대나무, 거북이 등 사물을 의인화 하여 『사기(史記』의 열전 형식을 흉내낸 글이다. 사회를 비판하고 풍자하면서 교훈을 주고자 하는 목적으로 쓴 문학으로 순수한 개인 창작물이다. 이 가전체 문학은 소설의 성격을 내포한 것으로, 설화와 소설의 징검다리 구실을 한다. 「국선생전」은 술을 의인화하여 술과 인간과의 미묘한 관계를 재미있는 이야기로 엮은, 군자(君子)의 처신을 경계한 작품이고, 「청강사자현부전」은 신령스러운 동물이라는 거북을 의인화 하여 작아서 알기 어려운 것을 미리 살펴 방비하는 데에는 성인도 간혹 실수가 있을 수 있음을 지적하여 매사에 삼갈 것을 말하는 작품이다. 그리고 「백운거사전(白雲居士傳)」과 「노극청전(盧克淸傳)」은 이규보가 지은 실전(實傳) 작품으로 앞의 작품은 이규보 자신의 전기로 청빈한 생활, 소탈하고 구애받지 않는 성격, 우주를 좁게 여기며 살아가는 모습은 도연명(陶淵明)을 방불케 한다고 스스로 평하고 있는 것이고, 뒤의 작품은 노극청이란 사람의 이익을 탐내지 않는, 맑고 깨끗한 일화를 기록한 것이다. 한편 『백운소설(白雲小說)』은 홍만종(洪萬宗, 1643년∼1725년)이 편찬한 『시화총림(詩話叢林)』에 28편이 수록되어 전하는 것으로 시화(詩話) 및 잡기(雜記)를 모은 패관문학작품집이다. 소설이라는 명칭을 쓰고 있으나, 사실은 소설이 아니다. 단순히 하잘것없는 이야기 즉 조그마한 이야기라는 뜻으로 쓴 것 같다.
2. 이규보의 문학론
이규보의 시문 창작론의 핵심적인 글은 『동국이상국집』의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시 가운데 있는 은미한 뜻을 논한 약언)」과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 전리지의 논문에 회답하는 편지)」이다. 이 두 편의 글은 홍만종(洪萬宗)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詩話)로 재편집하여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실었다.
무인정권 시기에 활동했던 문인 가운데 이인로는 작품을 창작할 때 용사(用事)에 능했고, 이규보는 신의(新意)의 창출(創出)에 능했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이규보의 문학론 연구에 주종(主宗)을 이루는 것은 신의론(新意論)이며, 이인로의 용사론(用事論)에 대응되었던 것으로 논의되었다(조종업), 그후 이를 귀족의 용사론 대 신흥사대부의 신의론으로 심화 확대하여 전개한 연구(조동일)와 『동국이상국집』을 텍스트로 하여 역사주의적 시각으로 신의론을 한층 심화한 연구(김시업)에 이어 김진영은 신의(新意)와 신어(新語)를 합하여 어의(語意) 창신론(創新論)을 주창했다.
기실(其實) 이규보(李奎報)의 경우도 그 자신은 창신(創新)을 중시하는 자신의 시세계(詩世界)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새로운 체격(體格)이나 신어(新語)의 사용을 내세웠고, 시상(詩想)에서의 의경(意境)의 설정이 그 시(詩)의 성패(成敗)를 일차적(一次的)으로 좌우(左右)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을 강조하였으나, 그에 그치지 않고 시상(詩想) 단계로부터 발표(發表) 단계까지의 전체(全體) 창작(創作)의 과정상의 제문제(諸問題)에 대하여 두루 주도 면밀한 관심과 안목을 가졌던 시인(詩人)이요 체험(體驗)에 바탕을 둔 이론가(理論家)였다. 그리하여 시(詩) 창작(創作)의 방법론(方法論)을 세워 놓음으로써 후진들의 시(詩) 공부(工夫)에 큰 기여를 하였던 것이다.
―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8, p. 83.
1980년대에 들어 이규보문학의 문학론 연구에서 신의론을 하위 개념으로서 부분적으로 긍정하는 연구(심호택)와 신의란 단어가 『백운소설』에 나오지 않는다면서 전면부정하는 연구(민병수)가 나타나는 등 비판론이 제기되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에 대해 정요일은 이인로가 ”정절(精切)한 용사(用事)의 방법에 관심이 많았으며 또 실제로 용사(用事)에 능했고”, 이규보가 “부득불 ‘신의(新意)’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밝혔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신의(新意)의 창출(創出)에 능했던” 것으로 평가하면서 “신의는 이규보 한 개인의 전유물일 수 없는 것이기에 ‘신의의 창출’은 누구나 목표로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라”(정요일, 『한문학비평론』, 집문당, 1994, p.259)고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신의(新意)를 창출(創出)해내거나 신의(新意)를 중히여기는 것이 작자의 역사의식 또는 현실인식 등 작자의 의식이나 사상과 결코 무관한 일은 아닐 것이므로, 문장가로서만이 아니라 사상가로서 위대한 문인(文人)을 신의(新意)와 관련지어 논한다는 것은 분명 의의있는 연구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신의(新意)는, 남이 미처 보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한 점을 표현해 낸 새로운 의경(意境)이라는 점에서, 시에 관해 말하자면 싯구 표현에 있어서 시법(詩法)·시안(詩案)에 말미암는 ‘새롭고도 알찬 뜻으로 문자상(文字上)의 문제이므로, 신의(新意)가 반드시 모든 문인(文人)의 의식이나 사상과 결부시켜 논의될 사항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정요일, 『한문학비평론』, 집문당, 1994, p.260.
이규보를 신의론자로만 볼 수 없다는 것을 그의 문학론인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시창작에 있어서 천분적(天分的) 재질(才質)을 중시하였던 이규보는 ‘설의(設意)’ 다음으로 철사(綴辭)의 문제도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신의(新意)와 신어(新語)를 합하여 어의(語意) 창신론(創新論)을 주창했던 김진영의 견해대로 이규보의 문학론의 주된 요소로 신의(新意)와 신어(新語)를 빼놓고 논할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무릇 시는 뜻(意)으로써 으뜸(主)으로 삼는다. 의의(意義)를 세우는 것이 가장 어렵고, 문사(文辭)를 엮어 나가는 것은 그 다음이다. 뜻(意)은 또한 기(氣)로써 으뜸(主)을 삼는 것이니, 기(氣)의 우열에 따라 뜻(意)의 깊고 얕음의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기란 천성(天性)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어서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기가 졸렬한 사람은 문장을 수식하는 것만을 능사(能事)로 여기고 뜻(意)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대체로 문장을 다듬고 문구를 화려하게 꾸미면 아름다운 것은 틀림이 없다. 그러나 문구 속에 심오한 뜻(意)이 함축되어 있지 않으면 처음에 읽어볼 때는 그럴 듯하나 다시 음미할 때면 벌써 그 맛이 없어지고 만 것을 느낀다. 재차 음미할 때에는 벌써 그 맛이 없어지고 만다. 그렇기는 하지만 먼저 압운(押韻)을 해 봐서 뜻(意)을 나타내는 데에 해가 될 것 같으면 운자를 고치는 것이 옳다. 오직 남의 시(詩)를 화답할 때에 험한 운(韻)이 있으면 먼저 운(韻)을 달 자리를 생각한 연후에 뜻(意)을 안배해야 한다. 이때에는 차라리 그 뜻을 다음으로 할지언정 운자는 안치하지 않을 수 없다. 글귀 중에 대구(對句)를 만들기에 어려운 것이 있으면 한참 생각하여 보다가 쉽게 얻어질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되면 곧 그 글귀는 버려버리고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좋다. 왜냐하면 그 글귀의 대를 맞추는 시간에 혹 전편(全篇)을 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어찌 한 글귀 때문에 1편이 지체되게 해서야 되겠는가? 그때에 막 당하여 촉박하게 지으면 군색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시를 구상할 적에 생각이 깊고 궁벽(窮僻)하면 거기에 빠지게 되고, 빠져버리면 고착하게 되고, 고착하게 되면 미혹(迷惑)하게 되며, 미혹하게 되면, 집착하게 되어 융통성이 없게 되는 폐단이 생긴다. 오직 그 드나들고 오가는 데 있어 좌우전후로 두루 생각하여 변화를 자유롭고 거침이 없이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게 한 후에야 원숙(圓熟)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 때로는 뒷 구(句)로 앞 구(句)의 폐단을 구제할 수도 있고, 한 글자로써 한 글귀의 완전함을 돕기도 하는 것이니, 이 점은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순전히 청초(淸楚)하고 고삽(苦澁)하게 쓰는 것을 시체(詩體)로 삼은 것이 산인(山人)의 격(格)이다. 오로지 곱고 화려한 것만으로 시를 꾸미는 것은 궁정(宮庭)의 격이다. 오직 청고하고 웅호(雄豪)하고 곱고 화려하고 화평하고 아담한 것을 섞어 쓸 수 있게 된 연후라야 체(體)와 격(格)이 갖추어져서 사람이 능히 한 가지 체로 이름 짓지 못하게 된다.
시(詩)에는 아홉 가지 마땅하지 않은 체(不宜體)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깨달아 얻은 것이다. 1편 안에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은 바로 재귀영거체(載鬼盈車體)요, 옛사람의 뜻(意)을따라 쓰는 것으로 잘 절취하여 쓴다 해도 불가한데, 잘 되어 있지 못한 것을 절취한다면, 이는 바로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다. 그리고 근거없이 강운(强韻)을 내어 쓰는 것은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요, 자기 재주를 헤아리지 않고 압운이 지나치게 어긋난 것은 음주과량체(飮酒過量體)요, 험한 글자를 써서 사람으로 하여금 의혹되기 쉽도록 하는 것은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요, 말이 순하지 못한데 억지로 인용하는 것은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요, 상스러운 말을 많이 쓰는 것은 촌부회담체(村父會談體)요, 맹공을 범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바로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요, 수사가 거칠어도 산삭(删削)하지 않는 것은 낭유만전체(莨莠滿田體)다. 이러한 좋지 못한 체들을 면할 수 있는 연후에야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자기 시의 문제점을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정말 기쁜 일이다. 그가 말해준 바가 옳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렇지 않다면 자기의 생각대로 할 것이다. 어찌 듣기를 싫어하기를 마치 임금이 간언을 막고 끝내 자기 잘못을 모르는 것과 같이 하여 마침내 그 허물을 알지 못하고 넘길 필요가 있겠는가? 대체로 시가 완성되면 되풀이해서 그 시를 읽어보고 전연 자기가 지은 것으로는 보지 말고 다른 사람이나 평생 깊이 미워한 사람의 시를 보는 것 같이 하여 그 흠과 실수를 열심히 찾아도 오히려 흠과 실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연후에 비로소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
무릇 논의한 것은 시뿐만 아니라, 문장 또한 그러하다. 더군다나 고시(古詩) 중에 아름다운 구절에 운자를 단 것을 좋다고 여겼지 않은가? 뜻은 이미 넉넉하고 한가롭고 말도 자유로워서 구속받는 점이 없다. 그렇다면 시와 문장은 역시 한 법칙일 것이다.
夫詩以意爲主, 設意尤難, 綴辭次之, 意亦以氣爲主, 由氣之優劣, 乃有深淺耳, 然氣本乎天, 不可學得, 故氣之劣者, 以雕文爲工, 未嘗以意爲先也, 蓋雕鏤其文, 丹靑其句, 信麗矣, 然中無含蓄深厚之意, 則初若可觀, 至再嚼則味已窮矣, 雖然, 凡自先押韻似若妨意, 則改之可也, 唯於和人之詩也, 若有險韻, 則先思韻之所安然後措意也, 至此寧且後其意耳, 韻不可不安置也, 句有難於對者, 沈吟良久, 想不能易得, 則卽割棄不惜宜也, 何者, 計其間儻足得全篇, 而豈可以一句之故, 有及時備急則窘矣, 方其搆思也, 深入不出則陷, 陷則着, 着則迷, 迷則有所執而不通也, 惟其出入往來, 左之右之瞻前顧後, 變化自在, 而後無所礙, 而達于圓熟也, 或有以後句, 救前句之弊, 以一字, 助一句之安, 此不可不思也. 純用淸苦爲體, 山人之格也, 全以姸麗裝篇, 宮掖之格也, 唯能雜用淸警雄豪姸麗平淡然後備而人不能以一體名之也. 詩有九不宜體, 是余之所深思而自得之者也, 一篇內多用古人之名, 是, 載鬼盈車體也, 攘取古人之意, 善盜猶不可, 盜亦不善, 是, 拙盜易擒體也, 押強韻无根據, 是, 挽弩不勝體也, 木揆其才, 押韻過差羌, 是, 飮酒過量體也, 好用險字, 使人易惑, 是, 設坑導盲體也, 語未順而勉引用之, 是, 強人從己體也, 多用常語, 是, 村父會談體也, 好犯丘軻, 是, 凌犯尊貴體也, 詞荒不删, 是, 莨莠滿田體也, 能免此不宜體格而後可與言詩矣, 人有言詩病者, 在所可喜, 所可言則從之, 否則, 在吾意耳, 何必惡聞, 如人君拒諫, 終不知其過耶, 凡詩成, 反覆視之, 略不以己之所著觀之, 如見他人及平生深嫉者之詩, 好覓其疵失, 猶不知之, 然後行之也. 凡所論, 不獨詩也, 文亦幾矣, 況古詩者, 如以美文句斷押韻者佳矣, 意旣優閑, 語亦自在, 得不至局束也, 然則詩與文, 亦一揆歟.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卷)22,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
개성과 독창성을 중시하였던 이규보는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 ① ‘시는 뜻(意)으로써 으뜸(主)으로 삼는다(詩以意爲主)’, ② ‘시의 체격(體格)’, ③ ‘시에는 9가지의 마땅하지 않은 체(體)가 있다(詩有九不宜體)’, ④ ‘시의 탁마(琢磨)’에 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첫째, 시는 뜻(意)으로써 으뜸(主)으로 삼는다(詩以意爲主). 여기서 ‘뜻(意)’이라고 번역한 것은 원문에 ‘의(意)’로 되어 있다. 김진영은 ‘의(意)’를 ‘의경(意境)’이라고 번역했으며(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8, p. 77.), 신용호는 ‘의(意)’를 ‘뜻’이라고 번역했다(신용호, 『이규보의 의식세계와 문학론 연구』, 국학자료원, 1990, p. 190). 그리고 이규보는 시(詩)의 본질적 요소로 뜻(意)을 중히 여기면서한 편의 시를 쓸 때 무엇보다도 ‘설의(設意)’를 으뜸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뜻(意)’은 기(氣)로써 으뜸(主)으로 삼아야 되는데, 그것은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천성(天性)에 근본을 두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는 좋은 시가 될 수 있느냐는 시구 속에 심오한 뜻(意)이 함축되어 있느냐의 여부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시를 구상할 적에 집착하게 되면 융통성이 없게 되는 폐단이 생기므로 변화를 자유롭고 거침이 없이 자기의 뜻대로 할 수 있게 한 후에야 원숙(圓熟)의 경지에 도달하게 된다고 말했다.
둘째, 시의 여러 체격(體格)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시를 쓸 때 청고하고 웅호(雄豪)하고 곱고 화려하고 화평하고 아담한 것을 적절하게 섞어 쓸 수 있게 된 연후라야 체(體)와 격(格)이 갖추어져 뛰어난 시인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또한 천부적인 재질을 바탕으로 기상이 높은 경지와 후천적인 노력에 따른 세련된 격조가 서로 관계를 맺고 합쳐서 하나가 되었을 때 빼어난 시를 쓸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셋째, 시에는 9가지의 마땅하지 않은 체(體), 즉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를 기술하고 있다. 시 창작의 다양성을 주장한 이규보는 시를 창작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기술한 것이다. 용사론(用事論)으로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쓴 것인 재귀용거체(載鬼盈車體), 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한 것인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공자와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인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 등이 있고, 환골탈태론으로는 고인의 뜻을 훔친 기교가 부족한 것인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성률론으로 근거없이 억지 운을 쓴 것인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 수사론으로 험자(險字)를 써 미혹하게 하는 것인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① 용사를 지나치게 많이 구사하지 말 것, ② 환골탈태를 할 것, ③ 근거 없이 강운(强韻)을 쓰지 말 것. ④압운을 지나치게 어긋나게 구사하지 말 것, ⑤ 수사에 있어 험자(險字)를 피할 것, ⑥ 수사에 있어 상말을 피할 것, ⑦ 말이 순조롭지 못한 것을 억지로 인용하지 말 것, ⑧ 기휘(忌諱)하는 말을 쓰기를 좋아하지 말 것, ⑨ 수사가 거칠면 산삭(删削)할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넷째, 시 창작 과정에서 탁마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다.
이규보는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글은 제각기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한다며 개성있는 글쓰기를 주장했다.
아무 달 아무 날에 아무개는 족하(足下: 같은 또래에서, 편지 받는 사람의 이름 밑에 써서 존칭어로 쓰는 말) 이지(履之)에게 돈수(頓首: 편지의 처음이나 끝에 경의를 표하기 위해 쓰는 말)합니다. 얼마간 보지 못하여 목마르게 사모함이 깊었던 차에 갑작스레 여러 폭의 수교(手敎: 상대방의 편지를 높이는 말)를 저에게 보내주셔서 잘 받았습니다. 손으로 받들어 읽어보다가 아직까지 내려놓지 못하고 있습니다. 문채(文彩)가 빛날 뿐만 아니라, 문장의 이익과 병폐(病弊)를 예리하게 논한 것이 정간(精簡)하고 격절(激切)하여 바로 시속의 병폐를 찔러, 장차 무너져 내리게 된 문장을 붙잡았습니다. 매우 훌륭하고도 훌륭한 일입니다. 다만 수교 안에 나를 칭찬함이 과하여 이백(李白)과 두보(杜甫)에게 비교하기까지 하였으니 내가 어찌 감히 감당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족하가 생각하기를, “세상이 분분(紛紛)하게 동파(東坡: 당나라 시인 소식의 호)를 모방하여 따라가지 못한 사람들은 말할 것도못 됩니다. 비록 시로 문명이 난 몇몇 사람들도 모두 동파를 모방하기를 면하지 못하여 그의 어구(語句)를 도용(盜用)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 뜻까지도 낚아채어 스스로 시를 잘 쓰는 체합니다. 그러나 오자(吾子: 그대. 아주 친한 친구의 호칭)만이 홀로 옛 사람의 것을 답습하지 않고 조어(造語: 새로 말을 만듦. 또는 그 말)가 모두 새로운 뜻으로 되어, 넉넉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만하니, 요사이 세상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하여, 이로써 칭찬하며 나를 구소(九霄: 높은 하늘) 위로 추어올리니, 이것이 과분한 칭찬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 가운데 이른바 “어의(語意)를 창조했다.”라고 말한 것은 진실로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스로 옛사람과 다르게 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사세가 부득이 해서 그렇게 된 것입니다. 왜 그렇게밖에 할 수 없었는가 하면, 무릇 옛 사람의 시체(詩體)를 모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시(詩)를 습독(習讀)하여 소화한 뒤에 빌어와야 그 경지에 도달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데서 빌어오는 것이 자신이 창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됩니다. 비유하자면 도둑이 먼저 부잣집을 살펴 보고 그 집 문호(門戶)와 담장이 익숙해진 후에야, 그 집에 잘 들어가서 남의 것을 훔쳐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주머니를 찾아 보고 상자를 열어보고 하는 식으로 하면 탄로가 나서 반드시 붙잡히고 말 것입니다. 나는 어려서부터 철없이 굴고 찬찬치 않아서 독서한 것이 그다지 정밀하지 못했습니다. 비록 육경(六經:역경·서경·시경·춘추·예기·주례)과 자사(子史: 제가의 글과 역사서)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섭렵(涉獵)했을 뿐이지 그 본원(本源)을 궁구하는 데까지에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하물며 제(諸家)의 장구(章句)를 다룬 글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 글에 익숙하지 못하면서 그 체(體)를 본뜨고 그 어구를 훔칠 수 있겠습니까? 이러므로 부득이하게 신어(新語)를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또한 세속의 배우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과장(科場)의 과거에 필요한 글만을 익히느라 풍월(風月)을 읊을 겨를이 없습니다. 과거에 급제한 뒤에야 시 짓기를 배우게 되는데, 더욱 동파의 시를 즐겨 읽으므로 해마다 급제자의 방(枋)이 나붙게 되면 사람들은 "금년에도 30명의 동파가 나왔다."고 하게 되는 것이지요. 족하가 말한 이른바 '세속의 동파를 본받기에 분분(紛紛)한 사람들'이라고 한 사람들은 그만두고라도 그 중의 두서너 사람만 보더라도 동파를 모방하여 따라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이들 역시 동파인 것이니, 동파를 보는 듯이 그를 공경하는 것이 옳은 것이지, 어찌 꼭 비방하겠습니까? 동파는 근세 이래로 부유하고 넉넉하며 호방하고 매진하여 시(詩)가 뛰어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의 문장은 마치 부잣집에 금옥(金玉)과 전패(錢貝: 돈과 패물)가 창고에 가득차 한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비록 도둑이 훔쳐 가더라도 끝내 가난해지지는 않는 것과 같으니, 표절한들 어찌 동파를 해롭게 하겠습니까?
또한 맹자(孟子)는 공자(孔子)에 미치지 못하고, 순자(荀子)와 양자(揚子)는 맹자에 미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공자 이후로 공자와 똑같은 사람이 없이 유독 맹자가 그를 본받아 거의 공자에 달(達)했습니다. 맹자 이후로 맹자와 같은 사람은 없었고, 순자와 양자가 가까웠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세에 어떤 사람은 공자와 맹자라 말하고, 어떤 사람은 맹자와 양자라 말합니다. 순자와 맹자라 하는 것은, 그를 본받아 거의 달했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한 두서너 사람들도 비록 동파와 똑같다고는 할 수 없지만, 또한 그를 본받아 거의 달했습니다. 그러니 어찌 후세에 동파와 같이 일컫게 될지 모르는데, 오자(吾子)가 거절함이 이다지도 심한 것입니까? 그러나 오자(吾子)의 말이 또한 어찌 간직한 것도 없이 경솔하게 언급한 것이겠습니까? 짐짓 나를 추어줌으로써 장차 요즈음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려고 한 것이라 여겨집니다.
옛날 이고(李翶)가 말하기를, “육경(六經)의 문사는 창의(創意)나 조언(造言)을 모두 서로 모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춘추(春秋)』를 읽을 적에는 일찍이 『시경(詩經)』이 있지 않은 것만 같고, 『시경』을 읽을 적에는 일찍이 『역경(易經: 주역)』이 있지 않은 것만 같고, 『역경』을 읽을 적에는 일찍이 『서경(書經)』이 있지 않은 것만 같다. 그것은 마치 산에는 항산(恒山: 중국의 다섯 영산의 하나)과 화산(華山: 중국의 다섯 영산의 하나)이 있으며, 물길에는 회수(淮水: 중국 고대 4대 강의 하나)와 제수(濟水: 중국 고대 4대 강의 하나)가 있는 것과 같다. ”고 하였습니다. 무릇 육경이란 것은 말을 화려하게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 귀추(歸趨)를 요약하면 거개 다 왕도(王道)와 패도(覇道)를 말하고 도덕을 논하며, 정교(政敎)와 풍속,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의 근원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사의(辭意: 말이나 글의 주된 뜻)가 마땅히 서로 답습(踏襲)되었을 것 같지만, 그 같지 않음이 이와 같습니다. 이른바 요즘 사람의 시라는 것은 비록 그 근원이 『모시(毛詩: 시경)』에서 나온 것이지만, 점차로 다시금 성병(聲病: 평측을 맞춤) ·여우(儷偶: 문장 수사법의 한 가지. 대우)ㆍ의운(依韻: 운자를 맞춤)·차운(次韻: 상대방이 지은 시의 운자를 맞춤)· 쌍운(双韻: 두 글자로 된 숙어의 위 아래 글자의 발음이 다같이 자음으로 되는 쌍성과, 숙어 두 글자가 다 같은 운으로 어미뿐만 아니라 위 글자도 또한 동운으로 되는 예의 첩운인 듯하다.)의 격식이 있어서 조각(雕刻)과 천착(穿鑿)을 힘쓰느라 사람으로 하여금 속박되어 뜻대로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짓는 것이 더욱 어렵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제약된 가운데 나아가 신의(新意)를 창작해내고 극히 미묘한 경지에 이르고자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만약 옛 사람이 이미 쓴 어구(語句)만 낚아챈다면, 무슨 공부가 되겠습니까?
청컨대, 성률(聲律: 한자의 발음)이 운위된 이래, 근고(近古)의 시인(詩人)을 논한다면, 당대(唐代)의 진자앙(陳子昻)·이백(李白)·두보(杜甫)·이한(李翰)·이옹(李邕)과 양형(揚炯)·왕발(王勃)·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의 무리는 멋대로 행동하고 맘껏 노닐지 않음이 없어 하회(河淮: 황하와 회수)를 기울이고 큰바다(瀛海)를 넘어뜨린 듯 그 호탕하고 사나운 기운을 구사하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한 사람도 그의 선배 아무의 체(體)를 본받아, 그 골수(骨髓)를 빼어 먹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그 후에 또 한유(韓愈)·황보식(皇甫湜)·이고(李翶)·이관(李觀)·여온(呂溫)·노동(盧同)·장적(張籍)·맹교(孟郊)나 유우석(劉禹錫)·유종원(柳宗元)·원진(元稹)·백거이(白居易)의 무리가 말재갈과 고삐를 나란히 하여 일시에 달려 모여 천고(千古)에 높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진자앙이나 이백·두보·양형·왕발을 모방하여 그의 살과 고기를 베어 먹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송대(宋代)에 이르러서는 또한 왕안석(王安石)·사마광(司馬光)·구양수(歐陽修)·소자미(蘇子美)·매성유(梅聖兪)·황노직(黃魯直)과 소자첨(蘇子瞻) 형제의 무리가 있어 또한 우뢰를 헤치고 달을 찢어발기듯 한 시대를 떨치고 빛냈지만, 그들이 한씨(韓氏: 한유를 뜻함)와 황보씨(皇甫氏)를 모방했습니까? 유우석·유종원·원진·백거이를 모방했습니까? 나는 그들이 빼어 먹거나 베어 먹은 자취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제각기 일가(一家)를 이룩하여 배와 귤(橘)이 맛이 다르나 입에 맞지 않는 것이 없는 것과 같았습니다.
대개 편집(編集)한 책이 점차 많아짐은 후학(後學)에 보탬이 되고자 해서입니다. 만약 서로 답습만을 일삼는다면 이는 답본(沓本)을 하는 것이라 한갓 종이와 먹을 허비할 따름이니, 그대가 신의(新意)를 귀하게 여기는 것은 아마도 이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옛 시인은 비록 조의(造意)한 뜻이 특히 새로와도 그 어구가 원숙(圓熟)하지 않은 것이 없었던 것은 대개 경사(經史)·백가(白家)와 옛 성현(聖賢)의 말씀을 마음에 훈도(薰陶)시켜 세련되지 않은 것이 없고, 입에 익숙하지 아니한 것이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부(賦)를 읊을 즈음에는 참조하고 헤아려 생각하여 왼편의 것을 뽑으며, 오른편의 것은 취하여 밑천으로 삼아 쓰기를 도와서입니다. 그러므로 시(詩)와 문(文)은 비록 같지 않으나, 말을 만들고 글자를 사용하는데 있어 한결 같을 것이니, 어구가 어찌 원숙(圓熟)함에 이르지 않겠습니까?.
나는 이와 달라 이미 옛 성현의 말에 익숙하지 못하고, 옛 시인의 체를 모방하기를 부끄러워했습니다. 만일 부득이하거나 급작스럽게 부(賦)를 읊어야 될 적에 생각해봐도 가져다가 쓸 말이 없을 때는 반드시 신어(新語)를 특별히 만들었기 때문에 어구가 생소하고 까다로운 것이 많으니 웃을 만했던 것입니다. 옛 시인들은 뜻을 창조하였지 어구를 창조하지 않았습니다마는 나는 어의(語意)를 아울러 창조하고도 아무런 부끄러움이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세상의 시인들이 눈을 부릅뜨고 배격을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도 어찌 그대 홀로 이같이 근근하게 과찬을 합니까?
아아, 요즘 세상 사람들은 그 현혹(眩惑)됨이 더욱 심하여, 비록 남의 것을 도둑한 물건이라도 눈에 드는 것이 있으면 탐하여 완상(玩賞)하려 드니, 누가 알아보고 그 유래를 따지겠습니까. 백세(百世) 뒤라도 만일 족하와 같은 사람이 있어서 그 참과 거짓을 판별하는 사람이 있다면 비록 표절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반드시 잡히게 될 것인 데, 나의 생소하고 깔깔한 말이 도리어 찬미를 받게 되는 것이 마치 지금 족하가 오늘 칭찬한 것과 같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말은 오래 되어야 증험하게 될 것입니다. 다 말하지 못하고 아무개는 재배(再拜: 편지 끝에 쓰는 말)합니다.
月日, 某頓首, 履之足下. 間闊未覿, 方深渴仰, 忽蒙辱損手敎累幅, 奉翫在手, 尙未釋去, 不惟文彩之曄然, 其論文利病, 可謂精簡激切, 直觸時病, 扶文之將墮者已, 甚善甚善, 但書中譽僕過當, 至況以李杜, 僕安敢受之. 足下以爲世之紛紛效東坡而未至者, 已不足導也, 雖詩鳴如某某輩數四君者, 皆未免效東坡, 非特盜其語, 兼攘取其意, 以自爲工, 獨吾子不襲蹈古人, 其造語皆出新意, 足以驚人耳目, 非今世人比, 以此見褒抗僕於九霄之上, 玆非過當之譽耶, 獨其中所謂之創造語意者, 信然矣, 然此非欲自異於古人而爲之者也, 勢有不得已而然耳, 何則, 凡效古人之體者, 必先習讀其詩, 然後效而能至也, 否則剽掠猶難, 譬之盜者, 先窺諜富人之家, 習熟其門戶墻籬, 然後善入其室, 奪人所有, 爲己之有, 而使人不知也, 不爾, 未及探囊胠篋, 必見捕捉矣, 財可奪乎, 僕自少放浪無檢, 讀書不甚精, 雖六經子史之文, 涉獵而已, 不至窮源, 況諸家章句之文哉, 旣不熟其文, 其可效其體盜其語乎, 是新語所不得已而作也, 且世之學者, 初習場屋科擧之文, 不暇事風月, 及得科第, 然後方學爲詩, 則尤嗜讀東坡詩, 故每歲榜出之後, 人人以爲今年又三十東坡出矣, 足下所謂世之紛紛者是已, 其若數四君者, 效而能至者也. 然則是亦東坡也, 如見東坡而敬之可也, 何必非哉, 東坡, 近世以來, 富贍豪邁, 詩之雄者也, 其文如富者之家金玉錢貝, 盈帑溢藏, 無有紀極, 雖爲寇盜者所嘗攘取而有之, 終不至於貧也, 盜之何傷耶, 且孟子不及孔子, 荀楊不及孟子. 然孔子之後, 無大類孔子者, 而獨孟子效之而庶幾矣, 孟子之後, 無類孟子者, 而荀楊近之, 故後世或稱孔孟, 或稱軻雄荀孟者, 以效之而庶幾故也, 向之數四輩, 雖不得大類東坡, 亦效之而庶幾者也, 焉知後世不與東坡同稱, 而吾子何拒之甚耶, 然吾子之言, 亦豈無所蓄而輕及哉, 姑籍譽僕, 將有激於今之人耳, 昔李翺曰, 六經之詞, 創意造言, 皆不相師, 故其讀春秋也, 如未嘗有詩, 其讀詩也, 如未嘗有易, 其讀易也, 如未嘗有書, 若山有恒華, 瀆有淮濟, 夫六經者, 非欲夸衒詞華, 要其歸率皆談王霸論道德與夫政敎風俗興亡理亂之源者也, 其辭意宜若有相襲, 而其不同如此, 所謂今人之詩, 雖源出於毛詩, 漸復有聲病儷偶依韻次韻雙韻之制, 務爲雕刻穿鑿, 令人局束不得肆意, 故作之愈難矣. 就此繩檢中, 莫不欲創新意臻妙極, 而若攘取古人已導之語, 則有許底功夫耶, 請以聲律以來近古詩人言之, 有若唐之陳子昂·李白·杜甫·李翰·李邕·楊·王·盧·駱之輩, 莫不汪洋閎肆, 傾河淮倒瀛海, 騁其豪猛者也, 未聞有一人效前輩某人之體, 刲剝其骨髓者, 其後又有韓愈·皇甫湜·李翺·李觀·呂温·盧同·張籍·孟郊·劉·柳·元·白之輩, 聯鏕竝轡, 馳驟一時, 高視千古. 亦未聞效陳子昂若李杜楊王而屠割其膚肉者, 至宋又有王安石·司馬光·歐陽脩·蘇子美·梅聖兪·黃魯直·蘇子贍兄弟之輩, 亦無不撑雷裂月, 震耀一代. 其效韓氏皇甫氏乎, 效劉柳元白乎, 吾未見其刲剝屠割之迹也, 然各成一家. 梨橘異味, 無有不可於口者. 夫編集之漸增, 蓋欲有補於後學. 若皆相襲, 是沓本也, 徒耗費楮墨爲耳, 吾子所以貴新意者蓋此也, 然古之詩人, 雖造意特新也, 其語未不圓熟者, 蓋力讀經史百家古聖賢之說, 未嘗不熏鍊於心, 熟習於口, 及賦詠之際, 參會商酌, 左抽右取, 以相資用, 故詩與文雖不同, 其屬辭使字, 一也, 語豈不至圓熟耶, 僕則異於是, 旣不熟於古聖賢之說, 又恥效古詩人之體, 如有不得已及倉卒臨賦詠之際, 顧乾涸無可以費用, 則必特造新語, 故語多生澁可笑, 古之詩人, 造意不造語, 僕則兼造語意無愧矣, 由是, 世之詩人, 橫目而排之者衆矣, 何吾子獨過美若是之勤勤耶, 嗚呼, 今世之人, 眩惑滋甚. 雖盜者之物, 有可以悅目, 則第貪翫耳, 孰認而詰其所由來哉, 至百世之下, 若有人如足下者, 判別其眞贗, 則雖善盜者, 必被擒捕, 而僕之生澁之語, 反見褒美, 類足下今日之譽, 亦所未知也, 吾子之言, 久當驗焉, 不宣, 某再拜.
⎯이규보(李奎報),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26,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
전리지(全履之)가 “비록 시로 문명이 난 몇몇 사람들이 모두 동파[소동파]를 모방하기를 면하지 못하여 그의 어구(語句)를 도용(盜用)했을 뿐만 아니라 아울러 그 뜻까지도 낚아채어 스스로 시를 잘 쓰는 체합니다. 그러나 오자(吾子)[이규보]만이 홀로 옛 사람의 것을 도습(蹈襲)하지 않고 신어(新語)를 지어내거나 신어(新意)를 창출해내어, 넉넉히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놀라게 할 만하니, 요사이 세상 사람들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라고 이규보를 칭찬했다. 전리지가 비판한 대로 당대(當代)의 고려(高麗) 문학계(文學界)에서 많은 문인들이 다른 문인들이 창작한 글을 도습(蹈襲)하는 것이 일상화 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규보는 당대의 문풍(文風)에서 벗어나고자 신어(新語)를 지어내거나 신의(新意)를 창출해내어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했다. 이규보는 옛 사람의 시체(詩體)를 모방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토로하고 있다. “무릇 옛 사람의 시체(詩體)를 모방할 때는 반드시 먼저 그 시(詩)를 습독(習讀)하여 소화한 뒤에 빌어와야 그 경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다른 데서 빌어오는 것이 자신이 창작하는 것보다 더 어렵게 됩니다.”라고 말하면서 비유해서 말하기를 “도둑이 먼저 부잣집을 살펴보고 그 집 문호(門戶)와 담장이 익숙해진 후에야, 그 집에 잘 들어가서 남의 것을 훔쳐 자기의 것으로 할 수 있는 것이지, 그렇지 않고서 주머니를 찾아 보고 상자를 열어보고 하는 식으로 하면 탄로가 나서 반드시 붙잡히고 말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 시(詩)를 숙독하지 하지 않아 익숙하지 못한 데 그 시체(詩體)를 빌어올 수있겠으며 그 말을 훔쳐올 수 있겠느냐고 비판하면서 그 자신이 신어(新語)를 짓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을 토로했다.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글은 제각기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한다며 “배와 귤이 맛이 다르지만 입에 딱 맞는다”라고 주장한 이규보는 “자신의 시어(詩語)와 시체(詩體)에 대하여 당대(當代) 문사(文士)들이 온고미(溫古美)가 부족(不足)하다는 논평(論評)에 대한 변해(辨解)요 자기 옹호의 말
”(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8, p. 80.)을 진술했던 것이다.
당대의 고려문학계(高麗文學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규보는 신어론(新語論)과 신의론(新意論)으로 대표되는 작시론(作詩論)을 내세워 도습(蹈襲)이나 표절(剽竊)이 만연한 고려 문단을 비판하면서 문풍(文風)을 쇄신하고자 노력했다. 5언 289의 장편 오언시(五言詩)로, 웅대한 스케일을 가진 「동명왕편(東明王篇)」 같은 서사시로 서사문학(敍事文學)의 세계를 확충하였고, 「망남가음(望南家吟)」 같은 리얼리즘 시를 다수 발표해 한국 문학사상 새로운 전기(轉機)를 가져왔다.
시로 쓴 시론 「시벽(詩癖)」
시로 쓴 시론(詩論)이라고 볼 수 있는 「시벽(詩癖)」에서 이규보는 시 창작의 괴로움을 토로하고 있다. 시벽(詩癖)은 시 창작을 좋아하는 몸에 박힌 좋지 않은 버릇이고, 시마(詩魔)는 시를 창작하고자 하는 생각을 일으키는 일종의 마력을 말한다.
年已涉縱心 나이 이미 칠십을 넘었고
位亦登台司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 .
始可放雕篆 이제는 시 짓는 일 벗을 만하건만
胡爲不能辭 어찌해서 그만두지 못하는가 .
朝吟類蜻蟀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暮嘯如鳶鴟 저녁에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 .
無奈有魔者 어찌할 수 없는 시마(詩魔)란 놈
夙夜潛相隨 아침저녁으로 몰래 따라다니네.
一着不暫捨 한번 몸에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使我至於斯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 .
日日剝心肝 날이면 날마다 심간(心肝)을 도려내어
汁出幾篇詩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고 있네.
滋膏與脂液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不復留膚肌 살조차 남아 있지 않네 .
骨立苦吟哦 뼈만 남아 괴롭게 읊조리니
此狀良可嗤 이 모습 참으로 가소롭구나.
亦無驚人語 깜짝 놀랄 만한 시를 지어서
足爲千載貽 천년 뒤에 남길 것도 없다네 .
撫掌自大笑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笑罷復吟之 웃음 그치고 다시 읊조려 보네.
生死必由是 살고 죽는 것이 여기에 달렸으니
此病醫難醫 이 병은 의원도 고치기 어려워라 .
⎯이규보, 『동국이상국후집(東國李相國後集)』, 권(卷)1, 고율시(古律詩), 「시벽(詩癖)」
이규보의 ‘시벽(詩癖)’이 잘 드러나 있는 시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지위 또한 정승에 올랐네(位亦登台司)”에서 경제적으로도 넉넉하고, 문명을 떨치고 있는 시적화자는 시 창작하는 일을 그만두어도 될 만한 상황이라는 것을 묘사하고 있고, “아침에는 귀뚜라미처럼 읊조리고, 저녁에는 올빼미인 양 노래하네(朝吟類蜻蟀, 暮嘯如鳶鴟)”에서 한시도 그치지 않는 시 창작 활동을 비유하고 있다. “한번 몸에 붙으면 잠시도 놓아주지 않아, 나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네(一着不暫捨, 使我至於斯)”에서 시적 화자는 창작에 대한 집착이 일상화 되어서 시 창작하는 일을 그만두지 못한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리고 “날이면 날마다 마음을 깍아 내, 몇 편의 시를 쥐어짜내고 있네(日日剝心肝, 汁出幾篇詩)”에서 혼신의 노력을 다하는 시 창작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또한 “기름기와 진액은 다 빠지고, 살조차 남아 있지 않네(滋膏與脂液, 不復留膚肌).”에서 시 창작의 괴로움을 묘사하고 있다. 이규보의 「시벽」에 대해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시벽(詩癖)」에 나타나 있는 이규보의 시론을 조동일은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첫째로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고 했다. 물(物)에서 흥을 느끼니 들뜰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둘째로, 시는 숨은 비밀을 캐낸다고 했다. 물에서 그 본질을 캐내고자 하니 그런 비난을 들을 만하다는 말이다. 셋째로, 시는 자부심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 들떠서 비밀을 캐내면서 그 짓을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말이다. 넷째로, 시는 비판을 한다고 했다. 물의 올바른 상태를 따지자니 잘못된 것을 비판하지 않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섯째로 시는 상심을 하게 한다고 했다. 시가 쉽사리 이루어지지 않으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지식산업사, 2000, pp.46∼47.
귀뚜라미, 올빼미 등 다양한 소재가 등장하는 「시벽」은 이규보가 창작한 5언 배율(五言排律)의 한시로 문인으로서 자신의 명망을 높였던 그가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시 창작을 그만둘 수 없는 데서 오는 심적 부담감을 솔직하고 반성적인 어조로 묘사한 작품이다. 시 창작을 좋아하는 자신의 성향을 ‘병’으로, 시 창작을 그만두지 못하는 자신의 마음을 ‘시마(詩魔)’라는 반어적 표현을 통해 시 창작을 좋아하는 마음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면서 “손바닥 부비며 혼자 크게 웃다가, 웃음 그치고 다시 읊조려 보네(撫掌自大笑 笑罷復吟之).”라며 자족(自足)하는 정도일 뿐 뛰어난 작품을 창작한 것은 아니라며 겸손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Ⅲ. 이규보의 시 세계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된 시작(詩作)의 수수(首數)만 하더라도 여조(麗朝) 제일인자(一人者)”(김사엽, 『국문학사』, 정음사, 1954, p. 214)로 평가받는 이규보는 평생에 7천∼8천 수에 이르는 시를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게는 작가 신변의 물건으로부터 작가 집 주위의 구체적인 물상에 이르기까지 새·짐승·초목·자연 그 자체를 제재로 하여 읊은 영물시(詠物詩)에서 “모든 존재의 굴레가 영원히 돌아가며 그 커다란 틀속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실상을 통해 관조된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자세를 이야기했고”(김동욱, 「동국이상국집 해제」, 『국역 동국이상국집』, 민족문화추진회, 1984, p.10), 한국 서사시의 한 좌표를 이룬 「동명왕편」을 통해 당시 중화 중심(中華中心)의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동명왕의 사적을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한편 몽골족의 침략에 대한 항거정신을 묘사했다.
망남가음(望南家吟)
-남쪽집을 바라보고 짓다
南家富東家貧 남쪽 집은 부유하고 동쪽 집은 가난한데
南家歌舞東家哭남쪽 집에서는 춤추고 노래하나 동쪽 집에선 곡하는 소리만 애절하네.
歌舞何最樂 노래하며 춤추는 것이 어찌 저리도 즐거운가
貧客盈當酒萬斛 손님이 집에 가득하고 술도 풍성하네.
哭聲何最悲 우는 소리가 어찌 저리도 슬픈가
寒廚七日無烟綠 찬 기운 감도는 부엌에는 이레 동안 연기 한 오라기 안 오르네.
東家之子望南家 동쪽 집 아이가 남쪽 집을 바라보니
大嚼一聲如裂竹 고기 씹는 소리 마치 대나무 쪼개는 소리 같네.
君不見石將軍日 그대는 알지 못하는가,
擁紅粧醉金谷 석장군이 날마다 미인을 끼고 금곡에서 취해 지냈건만
不若首山餓夫淸名千古獨 수양산의 굶어죽은 이들의 이름 천고에 빛남과 같지 못한 것을.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卷)1, 고율시(古律詩), 「망남가음(望南家吟)」
「망남가음(望南家吟)」은 남쪽집과 동쪽집을 대조하여 부유함과 가난함의 현격한 차이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시인은 부유함을 부러워하지 않고 절개를 지키며 가난하게 살아, 그 이름이 오래 기억되는 것이 더 가치있는 일임을 잘 표현하고 있다. 「망남가음(望南家吟)」에서 용사가 구사된 “석장군이 날마다 미인을 끼고 금곡에서 취해 지냈건만(擁紅粧醉金谷)”은 중국 진(晉)나라에서 첫째 가는 부자인 석숭(石崇)의 옛일을 인용한 것이다. 그는 금곡원(金谷園)에서 많은 손님을 초청하여 술잔치를 베풀었는데, 기생들이 손님들에게 술을 취하도록 권하지 않으면 기생을 죽이기까지 했다고 한다(『세설신어(世說新語)』, 「태치(汰侈)」). 무신 정권 아래의 사회적 모순을 격심한 빈부차를 통해 나타낸, 사회고발적인 작품이다. 지식인으로서의 이규보의 태도가 분명히 표현된 작품이다. 이러한 민중적 시각의 작품에 대해 김진영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이규보(李奎報)는 치자(治者)의 위치에 있을 때에 남달리 백성들의 삶을 걱정하고, 농민(農民)의 소중(所重)함을 강조하는 많은 작품을 남기고 있다. 한국한문학사상(韓國漢文學史上) 이규보(李奎報) 이전시대(以前時代)에 찾아보기 어려웠던 민중적(民衆的) 시각(視覺)의 작품들이 그에게 있어서 상당히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음은 결코 우연한 결과라고 하기 어려운 것이다. 출신가계(出身家系)부터가 민중적(民衆的) 기반(基盤)을 가졌던 그는 민생(民生)과 국력(國力)이 직결(直結)된다는 신념(信念)에 따라 백성들의 삶에 고통을 주는 것이면 국령(國令)조차도 비판(批判)하고 나섰음을 볼 수 있다.
―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8, pp.203∼204.
비록 이규보가 적극적으로 무신정권(武臣政權) 아래로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여 신진관료층(新進官僚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문학적 재능을 무신정권을 찬양하는데 바친 것이 아니었다. 이규보는 “유사(儒士)의 존재가치(存在價値)를 치국택민(治國澤民)에 두고 스스로 실천(實踐)에 옮긴 인물(김진영, 앞의 책, p.202)이었다.
하일즉사(夏日卽事)
-여름날
輕衫小簟臥風欞 홑적삼에 대자리를 깔고 바람 스며드는 마루에 누웠다가
夢斷啼鶯三兩聲 꾀꼬리 지저귀는 소리에 꿈이 깨었네.
密葉翳花春後在 빽빽한 잎이 꽃을 가려 봄이 지나도 남아 있고
薄雲漏日雨中明 엷은 구름에서 햇살이 새어나와 빗속에서도 밝구나.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卷)2, 고율시(古律詩), 「하일즉사(夏日卽事)」
”형식론을 배격하고 창조적인 생각과 경험을 중시하던 시인이었던“ 이규보는 ”용사(用事)보다는 새로운 착상을 중요하게 여겼던 사람이다“(윤용식· 손종흠, 『한국한문고전강독』,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4, pp.65∼66). 칠언절구(七言絶句) 2수로, 『동국이상국집』 권2에 수록되어 있는 「하일즉사(夏日卽事)」는 초여름의 정경을 스케치한 작품이다. 2수 가운데, 『동문선』 권20에는 ‘하일(夏日)’이라는 제목으로 둘째 수만 실려 있다. 대단히 기교가 뛰어난 시로 시인의 서정을 묘사하기 위해 객관물을 통해 묘사하고 있다. 파격이 주는 멋과 기교성이 잘 어울려 애송되는 한시이다.
위의 시[하일즉사(夏日卽事)]는 여름날의 권태로움과 한가로움을 노래하면서 자신의 모습과 처지를 그속에 숨겨서 표현한 작품이다.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대청 마루에 홑적삼으로 누워 낮잠을 자는데 꾀꼬리가 울어서 잠을 깨운다. 봄은 이미 갔는데, 무성하게 우거진 나뭇잎 사이에 늦게 핀 꽃이 살그머니 고개를 내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자신의 모습을 그렇게 나타낸 것이다. 늦게 핀 꽃처럼 자신은 세상에 크게 쓰이지는 못했지만 빛나는 꽃송이 같다는 것이다. 또한 시인은 비가 오는 가운데 짧게 비치는 여우 햇살과 같다.
-윤용식· 손종흠, 『한국한문고전강독』, 한국방송대학교출판부, 1994, p.66.
서거정이 『동인시화(東人詩話)』에서 이규보의 「하일즉사」에 대하여 “깨끗하고 산뜻하며 빼어나고 훌륭하며, 한가하고 그윽한 맛이 있다(淸新幻妙, 閑遠有味).”고 하였고, 허균은 『성수시화(惺叟詩話)』에서 “읽으면 기분이 상쾌해진다(讀之爽然).”라고 평가했다.
요화백로(蓼花白鷺)
-여뀌꽃 핀 언덕에 흰 해오라비
前灘富魚蝦 앞 여울에 물고기와 새우가 풍부하여
有意劈波入 백로는 물을 가르고 들어가려 하네.
見人忽驚起 사람을 보자 홀연히 놀라 일어나
蓼岸還飛集 여뀌꽃 언덕으로 날아 돌아와 앉네.
翹頸待人歸 목을 빼고 사람 가길 기다리느라
細雨毛衣濕 가랑비에 깃털이 다 젖는구나.
心猶在灘魚 마음은 아직도 여울의 물고기에 있는데
人道忘機立 사람들은 백로가 기심(機心)을 잊고 서 있다고 말하네.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卷)2, 고율시(古律詩), 「요화백로(蓼花白鷺)」
이규보는 대상의 특징이나 생태를 면밀히 관찰하여 읊은 시인 영물시(詠物詩)를 잘 지었다. 이규보는 오언율시인 「요화백로(蓼花白鷺)」에서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는 것과 실제 마음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흰 해오라비를 통해 나타내고 있다. 그 당시 고결한 척하며 무신(武臣)을 비판하면서도 실제로 벼슬을 하고 싶어하는 지식인을 풍자하고 있는 풍자시이다. 「요화백로」에서 ‘기심(機心)은 ‘의도적인 마음의 상태’라는 뜻이다.
동명왕편 병서(東明王篇幷序)
세상에서 동명왕의 신이(神異)한 일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한다. 비록 어리석은 남녀들도 흔히 그 일을 말한다. 나도 일찍이 그 이야기를 들었다.
“선사(先師)이신 중니(仲尼)께서 말하기를, ‘괴력난신(怪力亂神)을 말씀하지 않았는데, 이 동명왕의 일은 실로 황당하고 괴이하여 우리들이 이야기할 것이 못된다.’라고 하였다.”
내가 웃으며 말했다.
그 뒤에 나는 『위서(魏書)』와 『통전(通典)』을 읽어보게 되었다. 역시 그 일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간략하고 자세하지 못하였다. 나라 안의 것은 자세히 하고 나라 밖의 것은 소략히 하려는 뜻인지 모른다.
지난 계축년 4월에 나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얻어 「동명왕본기」를 읽어 보았다. 그 신이한 사적이 세상에서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했다. 그러나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귀(鬼)라고 생각했다. 환(幻)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 거푸 읽었다. 차츰차츰 그 근원에 이르렀다. 환(幻)이 아니었다. 성(聖)이었다. 귀(鬼)가 아니었다. 신(神)이었다.
하물며 국사(國史)는 사실 그대로 쓴 글이 아닌가. 어찌 허탄한 것을 전하였으랴. 김공부식(金公富軾)이 국사를 중찬(重撰)할 때 자못 그 일을 생략했다. 이것은 그가 국사는 세상을 바로잡는 글이니 크게 이상한 일은 후세에 보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여 생략한 것이 아닌가?
『당현종본기(唐玄宗本紀)』와 『양귀비전(楊貴妃傳)』에는 방사(方士)가 하늘에 오르고 땅에 들어갔다는 일이 없다. 오직 시인 백락천(白樂天)이 그 일이 흔적도 없이 모조리 없어질 것을 두려워하여 노래를 지어 기록했다. 그것은 실로 황당하고 음란하고 기괴하고 허탄한 일인데도, 오히려 노래로 지어 후세에 보였다. 더구나 동명왕의 일은 그 변화가 신이(神異)한 것으로 여러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것이 아니고, 실로 나라를 처음 일으킨 신성한 업적이다. 이것을 기술하지 않으면 후세 사람들이 장차 무엇을 볼 것인가. 그러므로 시를 지어 이를 기념하여 우리나라는 실로 성인(聖人)이 세운 나라라는 것을 천하에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世多說東明王神異之事, 雖愚夫騃婦, 亦頗能說其事, 僕嘗聞之, 笑曰, 先師仲尼, 不語怪力亂神, 此實荒唐寄詭之事, 非吾曹所說, 及讀魏書通典, 亦載其事, 然略而夫詳, 豈詳內略外之意耶, 越癸丑四月, 得舊三國史, 見東明王本紀, 其神異之迹, 踰世之所說者, 然亦初不能信之, 意以爲鬼幻, 及三復耽味 , 漸涉其源, 非幻也, 乃聖也, 非鬼也, 乃神也, 況國史直筆之書, 豈妄傳之哉, 金公富軾重撰國史, 頗略其事, 意者公以爲國史矯世之書, 不可以大異之事爲示於後世而略之耶, 按唐玄宗本紀楊貴妃傳, 竝無方士升天入地之事, 唯詩人白藥天恐其事淪沒, 作歌以志之, 彼實荒淫奇誕之事, 猶且詠之, 以示于後, 矧東明之事, 非以變化神異眩惑衆目, 乃實創國之神迹, 則此而不述, 後將何觀. 是用作詩以記之, 欲使夫天下知我國本聖人之都耳.
―『東國李相國集(동국이상국집)』 卷(권)3, 古律詩(고율시), ‘東明王篇 幷序(동명왕편 병서)’
元氣判𣳎渾 한 덩어리로 뭉친 원기 갈라져서
天皇地皇氏 천황씨 지황씨가 되었고
十三十一頭 머리가 열셋, 열하나
體貌多奇異 그 모습 너무도 기이함이 많았다.
其餘聖帝王 그 나머지 성스러운 제왕들도
亦備載經史 경서와 사서에 실려 전하니
女節感大星 여절은 큰 별에 감응되어
乃生大昊摯 소호금천씨 지를 낳았으며,
女樞生顓頊 여추는 전욱을 낳을 때도
亦感瑤光暐 그도 역시 북두성의 광채에 감응되었다.
伏羲制牲犧 복희씨는 희생 제도를 마련하였고,
燧人始鑽燧 수인씨는 나무를 비벼 불을 만들었다.
生蓂高帝祥 명협이 난 것은 요 임금의 상서요,
雨粟神農瑞 씨앗을 내린 것은 신농씨의 상서다.
靑天女媧補 푸른 하늘은 여와씨가 기웠고
洪水大禹理 우임금은 대홍수를 다스렸다.
黃帝將升天 황제 헌원씨가 하늘에 오르려 할 적에
胡髥龍自至 턱에 수염 난 용이 스스로 내려왔다.
太古淳朴時 멀고먼 아득한 옛적 인심이 순박할 때는
靈聖難備記 신령하고 성스러운 사적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後世漸澆漓 후세에 인정이 점차 경박해지고
風俗例汰侈 풍속이 분에 넘쳐 사치해져서
成人間或生 성인이 가끔 나기는 하였으나
神迹少所示 신령한 자취를 보인 때가 드물어졌다.
漢神雀三年 한 나라 신작 삼년
孟夏斗立巳 첫여름 북두성이 동남쪽을 가리킬 때
海東海慕漱 탄생한 해동의 해모수는
眞是天之子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었다.
<本紀云. 夫余王解夫婁老無子, 祭山川求嗣, 所御馬至鯤淵, 見大石流淚, 王怪之, 使人轉其石, 有小兒金色蛙形, 王曰, 此天錫我令 乎, 乃收養之, 名曰金蛙, 立爲太子, 其相阿蘭弗曰, 日者天降我曰, 將使吾子孫, 立國於此, 汝其避之, 東海之濱有地, 號迦葉原, 土宜五穀, 可都也, 阿蘭弗勸王移都, 號東夫余, 於舊都, 解慕漱爲天帝子來都(본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부여왕 해부루는 늙도록 아들이 없자, 산천에 제사를 지내어 아들 낳기를 빌러 가는데, 타고 가던 말이 곤연에 이르자 그 곳에 있는 큰 돌을 보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이 괴이하게 생각하고 사람을 시켜 그 돌을 굴리게 하였다. 그 밑에 금빛 나는 개구리를 닮은 작은 아이가 있었다. 왕이 말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내게 내려주신 아들이다. ”고 하며 거두어 길러 금와(金蛙)라 이름짓고 태자로 삼았다. 그때 재상 아란불이 말하기를 “며칠 전에 천제가 저에게 내려와서, ‘장차 내 자손으로 하여금 이 곳에 나라를 세우려 하니 너희는 피하거라' 하였습니다. 동해 바닷가에 가섭원이라는 땅이 있는데, 오곡이 잘되니 도읍할 만합니다."라고 하여 왕에게 권하여 도읍을 옮기게 하고 동부여라 하였다. 옛 도읍터에는 해모수가 천제의 아들이 되어 와서 도읍하였다).>
初從空中下 처음 공중에서 내려오는데
身乘五龍軌 자신은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를 타고
從者百餘人 따르는 사람 100여 인은
騎鵠紛襂襹 고니를 타고 깃털 옷을 화려하게 입었다.
淸樂動鏘洋 맑은 풍악 소리 쟁쟁하게 울리고
彩雲浮旖旎 채색 구름은 뭉게뭉게 떴다.
<漢神雀三年壬戌歲, 天帝遣太子降遊扶余王古都, 號解慕漱, 從天而下, 乘五龍車, 從者百餘人, 皆騎白鵠, 彩雲浮於上, 音樂動雲中, 止熊心山, 經十餘日始下, 首戴烏羽之冠, 腰帶龍光之劍(한 나라 신작 3년인 임술년에 천제가 태자를 보내어 부여왕의 옛도읍에 내려와 놀았는데 이름이 해모수였다. 해모수는 오룡거를 타고 신하 100여 명을 거느리고 웅심산 아래로 내려왔다. 부하들은 각기 흰 따오기를 타고 왔다. 하늘에는 빛깔있는 구름이 펼쳐져 있었고, 장엄한 풍악소리가 온 누리에 가득했다. 웅심산에 머물렀다가 10여 일이 지나 내려오는데, 머리에 가마귀 털로 만든 관인 오우관을 썼고, 허리에는 황룡 조각이 새겨진 황룡검을 차고 있었다).>
自古受命君 예로부터 천명을 받은 임금치고
何是非天賜 어찌 하늘에서 내려주지 않은 게 있던가
白日下靑冥 대낮 푸른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從昔所未視 예로부터 보지 못한 일이다.
朝居人世中 아침에는 인간 세상에서 살고
暮反天宮裏 저녁에는 하늘궁전으로 돌아갔다.
<朝則聽事, 暮卽升天, 世謂之天王卽(아침에는 정치적인 일에 대하여 듣고, 저물면 하늘로 올라가니, 세상에서 천왕랑이라 일컬었다).>.
吾聞於古人 내 옛사람에게 들으니
蒼穹之去地 하늘에서 땅까지 거리가
二億萬八千 2억 1만 하고도 8천
七百八十里 7백 8십 리라 하니
梯棧躡難升 사다리로도 오르기 어렵고
羽翮飛易瘁 날개 치며 날아도 쉽게 지치건만
朝夕恣升降 아침저녁 마음대로 오르내리니
此理復何爾 그 조화가 어찌하여 그러한가?
城北有靑河 성 북쪽에 청하가 흐르는데
河伯三女美 하백(河伯)의 어여쁜 세 딸 아름다왔다.
<靑河今鴨綠江也, 長曰柳花, 次曰萱花, 季曰葦花(청하는 지금의 압록강이다. 맏딸의 이름은 유화, 둘째 딸은 훤화, 막내딸은 위화라 하였다).>
擘出鴨頭波 압록강 물결을 헤치고 나와
往遊熊心涘 웅심 물가에서 노닐곤 하였다.
<自靑河出遊熊心淵上(청하에서 나와 웅심의 물가에서 놀았다)>.
鏘琅佩玉鳴 그때마다 쟁그랑 패옥 울리니
綽約顔花媚 부드럽고 가냘픈 모습 아름다왔다.
<神姿艶麗, 雜佩鏘洋, 與漢皐無異(자태가 곱고 아름다웠는데 여러 가지 패옥이 쟁그랑거려 한고의 여인들과 다름없었다).>
初疑漢皐濱 처음에는 한고(漢皐)의 물가인가 의심하고
復想洛水沚 아니면 낙수(洛水)의 모래톱을 연상하였다.
王因出獵見 때마침 사냥 나온 왕이 보고
目送頗留意 눈짓을 보내며 마음에 두었으니,
玆非悅紛華 곱고 아름다운 것을 탐내서가 아니라
誠急生繼嗣 뒤이을 아들을 보려 함이었다.
<王謂左右曰, 得而爲妃, 可有後(왕이 좌우의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들을 왕비로 삼으면 대를 잇는 아들을 얻을 수 있다." 하였다).>
三女見君來 세 처녀는 왕이 다가오는 것을 보고
入水尋相避 물 속으로 들어가 몸을 피하였다.
擬將作宮殿 신하들이 아뢰기를, ”궁전을 지어
潛候同來戱 잠시 기다리면 놀러 나오리라.“
馬撾一畫地 말채찍으로 땅을 한번 그으니
銅室欻然峙 홀연히 구리 궁전이 우뚝 세워졌다.
錦席鋪絢明 눈부신 비단 자리 깔아 놓고서
金樽置淳旨 황금술잔에 맛있는 술 차려 놓으니
蹁躚果自入 처녀들이 스스로들 찾아 들어와
對酌還徑醉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其女見王卽入水, 左右曰, 大王何不作宮殿, 俟女入室, 當戶遮之, 王以爲然, 以馬鞭畫地, 銅室俄成壯麗, 於室中, 設三席置樽酒, 其女各坐其席, 相勸飮酒大醉云云(그 여자들이 왕을 보자 곧 물 속으로 들어갔다. 좌우의 신하들이 말하기를, "대왕께서는 왜 궁전을 마련하지 아니하옵니까? 여자들이 궁전에 들어가기를 기다렸다가 못 나가게 문을 막지 않으십니까?"라고 했다. 왕이 그렇게 하리라 하고는, 말채찍으로 땅을 그으니 으리으리한 구리집이 한 채 갑자기 이루어졌다. 방안에 자리 셋을 마련하고 술상을 차려 놓았다. 그 여자들이 그 자리에 저마다 그 자리에 앉아 서로 술을 권하며 마시더니, 술이 크게 취하였다).>
王時出橫遮 왕이 바로 나가 가로 막으니
驚走僅顚躓 놀라 달아나다 엎어지고 넘어졌다.
<王俟三女大醉急出, 遮女等驚走, 長女柳花, 爲王所止(왕이 세 여자가 몹시 취하기를 기다렸다가 재빨리 나가 막았다. 여자들이 놀라서 달아나다가 맏딸 유화가 왕에게 붙잡혔다).>
長女曰柳花 맏딸 이름은 유화라 하였는데
是爲王所止 왕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河伯大怒嗔 하백이 크게 노하여
遣使急且徙 사자를 보내 급히 달려가서
告云渠何人 고하기를, ”너는 대관절 어떤 사람이기에
乃敢放輕肆 이처럼 방자하게 구는 것이냐?“
報云天帝子 회보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이온데
高族請相累 높은 집안과 혼인하기를 청합니다.“ 하고
指天降龍馭 하늘을 가리키자 용수레가 내려와
徑到海宮邃 바다 깊은 궁궐에 이르렀다.
<河伯大怒, 遣使告曰, 汝是何人, 留我女乎, 王報云, 我是天帝之子, 今欲與河伯結婚, 河伯又使告曰, 汝若天帝之子, 於我有求昏者, 當使媒云云, 今輒留我女, 何其失禮, 王慙之, 將往見河伯, 不能入室, 欲放其女, 女間與王定情, 不肯離去, 乃勸王曰, 如有龍車, 可到河伯之國, 王指天而告, 俄而五龍車從空而下, 王與女乘車, 風雲忽起, 至其宮(하백이 크게 노하여 사자를 보내어 "너는 어떠한 사람이기에 내 딸을 잡아 두었는가?"하였다. 왕이 대답하기를, "나는 천제의 아들인데 지금 하백의 영애에게 구혼하고자 합니다."고 하였다. 하백이 또 사자를 보내어 이르기를, "그대가 만일 천제의 아들이고, 내게 구혼할 생각이 있다면 마땅히 중매를 통하여 말할 것이지, 지금 문득 내 딸을 잡아두고 있으니 이건 실례가 너무 심한 게 아닌가?"라 하였다. 왕이 매우 부끄러워 하며 하백을 직접 만나보려 하였다. 그러나 그의 궁실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유화를 돌려 보내고자 생각하였으나 그 여자는 이미 왕과 정이 깊어져 떠나려 하지 않았다. 도리어 유화가 왕에게 권하기를 "만일 용수레가 있으면 하백의 나라에 갈 수 있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하늘을 향가리키며 외치니, 곧 다섯 마리의 용이 끄는 수레가 공중에서 내려왔다. 왕이 여자와 함께 수레에 오르자 바람과 구름이 홀연히 일어나 하백의 궁궐에 이르렀다).>
河伯乃謂王 하백이 왕에게 이르기를
婚姻是大事 ”혼인은 큰 일인지라
媒贄有通法 중매와 폐백의 법도 있거늘
胡奈得自恣 어째서 이토록 방자한 짓을 하는가?
<河伯備禮迎之, 坐定, 謂曰, 婚姻之道, 天下之通規, 何爲失禮, 辱我門宗云云(하백이 예를 갖추어 그를 맞이하였다. 자리에 앉은 뒤에 말하기를, "혼인의 도는 천하의 공통된 규범이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실례되는 짓을 하여 내 가문을 욕되게 하는가?"라 하였다).>
君是上帝胤 그대가 상제의 아들이라면
神變請可試 신통한 도술을 시험하여 보자." 하고
漣漪碧波中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 속에서
河伯化作鯉 하백이 잉어가 되자
王尋變爲獺 왕은 곧 수달로 변하여
立捕不待跬 선 자리에서 이내 잡았다.
又復生兩翼 이번에는 두 날개가 돋아
翩然化爲雉 꿩이 되어 훌쩍 날아가니
王又化神鷹 왕은 또한 신령한 매가 되어
摶擊何大鷙 쫒아가 치는 것이 어찌 그리 날쌘가.
彼爲鹿而走 저편이 사슴이 되어 달아나면
我爲豺而趨 이 편은 승냥이가 되어 쫓아갔다.
河伯知有神 하백도 신통한 재주 있음을 알고
置酒相燕喜 술자리 벌려 잔치를 베풀고 기뻐하였다.
伺醉載革輿 술에 취한 틈을 타서 가죽수레에 싣고
幷置女於車 유화도 가죽수레에 함께 태웠는데
<車傍曰車奇(수레의 옆을 기(輢)라 한다).>
意令與其女 그 뜻은 유화도 같이
天上同騰轡 천상으로 오르도록 하려 함이었다.
其車未出水 수레가 물 밖에 나오기도 전에
酒醒忽驚起 술이 깬 왕은 놀라 일어나
<河伯之酒, 七日乃醒(하백이 술에 취해, 7일 만에 깨어났다).>
取女黃金釵 유화의 황금비녀 뽑아 쥐고는
刺革從竅出 가죽 뚫고 그 틈으로 빠져 나와서
.
<出, 叶韻(출(出)은 협운(叶韻)이다).>
獨乘赤霄上 하늘 위의 구름을 홀로 탄 뒤에
寂寞不廻騎 소식 없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河伯曰, 王是天帝之子, 有何神異, 王曰, 唯在所試, 於是, 河伯於庭前水, 化爲鯉, 隨浪而遊, 王化爲獺而捕之, 河伯又化爲鹿而走, 王化爲豺逐之, 河伯化爲雉, 王化爲鷹擊之, 河伯以爲誠是天帝之子, 以禮成婚, 恐王無將女之心, 張樂置酒, 勸王大醉, 與女入於小革輿中, 載以龍車, 欲令升天.其車未出水, 王卽酒醒, 取女黃金釵, 刺革輿, 從孔獨出升天(하백이 묻기를, "그대가 진실로 천제의 아들이라면 무슨 신통하고 기이한 재주가 있는가?"라 하였다. 왕이, "무엇이든지 시험하여보소서."라 하였다. 이에 하백이 뜰 앞의 물에서 잉어로 변하여 물결 속에서 노닐자 왕이 수달이 되어 그를 잡았다. 하백이 또 사슴이 되어 달아나니 왕은 승냥이가 되어 쫓았다. 하백이 꿩으로 변하니, 왕이 매가 되어 그를 덮쳤다. 하백은 그제야 그가 천제의 아들이라 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백은 혼인의 예를 치르고 나서 왕이 그의 딸을 데려갈 마음이 없을까 두려워하였다. 그래서 풍악을 베풀고 술을 내어 왕을 크게 취하게 만들었다. 딸과 함께 작은 가죽 수레에 넣어 용수레에 실었다. 이는 딸과 함께 하늘에 오르게 하려고 한 것이었다. 용수레가 미처 물 속에서 바깥 세상으로 나오기 전에 왕은 술이 깨었다. 왕은 여자의 황금비녀를 뽑아 쥐고는 가죽 수레를 뚫고 그 구멍으로 혼자 나와서 하늘로 올라갔다.
河伯責厥女 하백이 그 딸을 책망하여
挽吻三尺弛 입술을 잡아당겨 석 자나 늘여 놓고
乃貶優渤中 우발수로 내쫓아 버리고는
唯與婢僕二 오직 비복 두 사람만 딸려 주었다.
<河伯大怒, 其女曰, 汝不從我訓, 終辱我門, 令左右絞挽女口, 其唇吻長三尺, 唯與奴婢二人, 貶於優渤水中, 優渤澤名, 今在太伯山南(하백이 그 딸에게 노하여 말하기를, "너는 내 훈계를 따르지 않아서 마침내 우리 가문을 욕되게 하였다."고 하였다. 좌우 신하들을 시켜 딸의 입을 잡아당겨 입술의 길이가 석 자나 되게 늘여 놓았다. 그리고 비복 두 사람만을 주어 우발수 가운데로 내쫒았다. 우발은 연못 이름인데, 지금 태백산 남쪽에 있다).>
漁師觀波中 어부가 물 속을 살피다가
奇獸行𩣚騃 괴이안 짐승이 돌아다니기에
乃告王金蛙 금와왕에게 아뢰어
鐵網投湀湀 쇠그물을 물 속에 깊숙이 던졌다.
引得坐石女 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끌어당겨 얻었는데
姿貌甚堪畏 얼굴 모양이 매우 이상하였다.
脣長不能言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기에
三截乃啓齒 세 번이나 잘라 준 뒤에야 입을 열었다.
<漁師强力扶鄒告曰, 近有盜梁中魚而將去者, 未知何獸也, 王乃使魚師以網引之, 其網破裂, 更造鐵網引之, 始 一女, 坐石而出, 其女唇長不能言, 令三截其唇乃言(어부 강력부추가 아뢰기를, "요즘 고기 통발 속의 고기를 도둑질해 가는 놈이 있는데, 무슨 짐승인지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금와왕이 어부를 시켜 그물로 끌어올리게 하자 그물이 찢어졌다. 그래서 쇠그물을 만들어 돌에 앉아 있는 여자를 끌어올렸다. 그 여자는 입술이 길어 말을 못하기에 그 입술을 세 번이나 잘라낸 뒤에야 말을 하였다).>
王知慕漱妃 왕이 해모수의 왕비인 것을 알고
仍以別室寘 이내 별궁에다 두었더니
懷日生朱蒙 햇빛으로 회임하여 주몽을 낳았으니
是歲歲在癸 이 해가 계해년이었다.
骨表諒最奇 골상이 참으로 기이하고
啼聲亦甚偉 울음 소리가 또한 우렁찼다.
初生卵如升 처음에 됫박만한 알을 낳으니
觀者皆驚悸 보는 이들이 모두 놀랐다.
王以爲不祥 왕은 상서롭지 못하다 여겨
比豈人之類 이것이 어찌 사람의 종류인가 하고
置之馬牧中 마구간 던져 두었더니
群馬皆不履 여러 말들이 모두 밟지 않고
棄之深山中 깊은 산 속에 버렸더니
百獸皆擁衛 온갖 짐승이 모두 옹위하였다.
<王知天帝子妃, 以別宮置之, 其女懷中日曜, 因以有娠, 神雀四年癸亥歲夏四月, 生朱蒙, 啼聲甚偉, 骨表英奇, 初生左腋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怪之曰, 人生鳥卵, 可爲不祥, 使人置之馬牧, 羣馬不踐, 棄於深山, 百獸皆護, 雲陰之日, 卵上恒有日光, 王取卵送母養之, 卵終乃開得一男, 生未經月, 言語並實(금와왕은 천제 아들의 왕비임을 알고 별궁(別宮)에 두었다. 그 여자의 품 속에 햇빛이 비치자 이로 인하여 회임했다. 신작 4년 계해년 여름 4월에 주몽을 낳았다. 주몽은 울음소리가 아주 크고 골격이 영특하고 기이하였다. 처음 태어날 때 왼쪽 겨드랑이로 알을 낳았는데 크기가 닷 되들이쯤 되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사람이 새알을 낳았으니 불길한 일이다.”라고 말하고, 사람을 시켜 말우리에 던져두게 했더니 말들이 밟지 않았다. 깊은 산 속에 버리게 했더니 온갖 짐승들이 모두 보호했다. 구름이 끼고 음침한 날에도 알 위로 항상 햇빛이 비쳤다. 금와왕은 알을 도로 가져다가 어미에게 보내어 기르게 했다. 알이 마침내 갈라져서 한 사내아이 얻었는데 낳은 지 한 달도 지나지 아니하여 언어가 정확했다).>
母姑擧而養 어미가 거두어 기르니
經月言語始 달포 되니 말하기 시작하였다.
自言蠅噆目 스스로 말하기를, “파리가 눈을 빨아서
臥不能安睡 누워도 편히 잘 수 없네요.” 라고 하였다.
母爲作弓矢 어머니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니
其弓不虛掎 활을 쏘면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謂母曰, 羣蠅噆目, 不能睡, 母爲我作弓矢, 其母以蓽作弓矢與之, 自射紡車上蠅, 發矢卽中, 扶余謂善射曰朱蒙(아이가 그 어머니께 말하기를, “파리들이 눈을 빨아서 누워도 편안하게 잘 수 없으니 어머니께서는 나를 위하여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세요.”라고 하였다. 어머니가 사립문의 나무로 활과 화살을 만들어 주었더니 스스로 물레 위의 파리를 쏘는데 쏘는 족족 명중했다. 부여에서는 활을 잘 쏘는 이를 일러 주몽이라 한다).>
年至漸長大 나이가 점차 많아지매,
才能日漸備 재능도 날로 점차 갖추어졌다.
扶余王太子 부여왕의 태자가
其心生妬忌 그 마음에 투기가 생겼다.
乃言朱蒙者 말하기를, "주몽이란 자는
此必非常士 반드시 비상한 사람이니
若不早自圖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其患誠未已 후환이 끝없으리라." 하였다.
<年至長大, 才能並備, 金蛙有子七人, 常共朱蒙遊獵, 王子及從者四十餘人, 唯獲一鹿, 朱蒙射鹿至多, 王子妬之, 乃執朱蒙縛樹, 奪鹿而去, 朱蒙拔樹而去, 太子帶素言於王曰, 朱蒙者, 神勇之士, 瞻視非常, 若不早圖, 必有後患(나이가 들자 재능도 갖추어졌다. 금와왕은 일곱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항상 주몽과 함께 놀며 사냥했다. 일곱 왕자들과 따르는 종자 40여 명이 겨우 사슴 한 마리를 잡았다. 주몽은 사슴을 훨씬 더 많이 잡았다. 일곱 왕자들이 시기하여 주몽을 붙잡아 나무에 묶어 놓고 사슴을 빼앗아 가버렸다. 주몽은 나무 뿌리를 뽑아버리고 그곳을 벗어났다. 태자 대소가 금와왕에게 말하기를, “주몽이란 자는 신통력을 지닌 용맹한 장사로 안목도 비상하니 만일 일찍 도모하지 않으면 반드시 뒷날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王令往牧馬 왕이 가서 말을 기르게 하니
欲以試厥志 그 뜻을 시험하고자 함이었다.
自思天之孫 스스로 생각하니 천제의 손자가
厮牧良可恥 말 기르는 천한 일은 참으로 부끄러워
捫心常竊導 가슴을 어루만지며 항상 혼자 탄식하기를,
吾生不如死 "사는 것이 죽는 것만 못하다.
意將往南土 마음 같아서는 장차 남쪽 땅에 가서
立國立城市 나라도 세우고 성시도 세우고자 하나
爲緣慈母在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에
離別誠未易 이별이 참으로 쉽지 않다."
<王使朱蒙牧馬, 欲試其意, 朱蒙內自懷恨, 謂母曰, 我是天帝之孫, 爲人牧馬, 生不如死, 欲往南土造國家, 母在不敢自專, 其母云云(금와왕이 주몽에게 말을 기르게 하여 주몽의 뜻을 시험하고자 했다. 주몽은 마음 속에 한을 품고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저는 천제의 손자로 남을 위하여 말을 먹이고 있으니, 사는 것이 죽는 것만도 못한 노릇이니 남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고자 합니다. 하지만 어머니가 계셔서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
其母聞此言 그 어머니 이 말을 듣고
潛然抆淸淚 가만히 흐르는 눈물 씻으며,
汝幸勿爲念 "너는 내 걱정을 하지 말아라.
我亦常痛痞 나도 항상 가슴이 답답했다.
士之涉長途 장부가 장도에 오를 땐
須必憑騄駬 반드시 준마가 필요하다."
相將往馬閑 아들을 데리고 마굿간에 가서
卽以長鞭捶 곧 긴 채찍으로 말을 후려치니
群馬皆突走 여러 말은 모두 달아나는데
一馬騂色斐 붉은 빛이 얼룩진 말 한 필이
跳過二丈欄 두 길 되는 난간을 뛰어 넘으니
始覺是駿驥 준마임을 인 줄 비로소 알아차렸다.
<通典云, 朱蒙所乘, 皆果下也(『통전』에 주몽이 타던 말을 모두 과하마라 하였다).>
潛以針刺舌 남 몰래 바늘을 혓바닥에 꽂아 두니
酸痛不受飼 쓰리고 아파 먹지 못하였다.
不日形甚癯 며칠 안 돼 모습이 몹시 야위어
却與駑駘似 도리어 둔마와 다름없었다.
爾後王巡觀 이후에 왕이 돌아보고
予馬此卽是 바로 이 말을 주었다.
得之始抽針 이 마을 얻어 비로소 바늘을 뽑고
日夜屢加餧 밤낮으로 잘 먹였다.
<其母曰, 此吾之所以日夜腐心也, 吾聞士之涉長途者, 須憑駿足, 吾能擇馬矣, 遂往馬牧, 卽以長鞭亂捷, 羣馬皆驚走, 一騂馬跳過二丈之欄, 朱蒙知馬駿逸, 潛以針捷馬舌根, 其馬舌痛, 不食水草, 甚瘦悴, 王巡行馬牧, 見羣馬悉肥大喜, 仍以瘦錫朱蒙, 朱蒙得之, 拔其針加餧云(그 어머니가 말하기를, “이것은 내가 밤낮으로 고심하던 것이다. 내가 듣기로는 장사가 먼 길을 떠날 때는 꼭 준마가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말을 고를 수 있다."고 했다. 드디어 목마장으로 가서 긴 채찍으로 마구 때리니 여러 말들이 모두 놀라 달아나는데 붉은 말 한 마리가 두 길이나 되는 난간을 뛰어 넘었다. 주몽은 이 말이 준마임을 알고 몰래 바늘을 혓바닥 밑에 꽂아 두었다. 그 말은 혀가 아파 물과 풀을 먹지 못하여 몹시 야위었다. 왕은 목마장을 순시하다가 말들이 모두 살찐 것을 보고 크게 기뻐하여 야윈 말을 주몽에게 주었다. 주몽은 이 말을 얻어 그 바늘을 뽑고 나서 도로 먹였다 한다).>
暗結三賢友 가만히 어진 세 분 벗이 되니
<烏伊, 摩離, 陜父等三人(오이·마리·협부 등 세 사람이었다).>
其人共多智 그 사람들 모두 지혜가 많았다.
南行至淹滯 남행하여 엄체수에 이르러
<一名盖斯水, 在今鴨綠東北(일명 개사수인데 지금의 합록강 동북쪽에 있다).>
欲渡無舟艤 건너려 하여도 배가 없었다.
<欲渡無舟, 恐追兵奄及, 迺以策指天, 慨然嘆曰, 我天帝之孫, 河伯之甥, 今避難至此, 皇天后土, 憐我孤子, 速致舟橋, 言訖, 以弓打水, 魚鼈浮出成橋, 朱蒙乃得渡, 良久追兵至(건너려 하여도 배가 없고 추격하여 오는 군사들이 곧 이를 것을 두려워하여 채찍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한숨 짓고 탄식하여 말했다. ”나는 천제의 손자요 하백의 외손자인데 지금 난을 피하여 여기까지 왔습니다. 황천과 후토는 이 고자를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배와 다리를 마련해 주소서.“ 말을 마치고 활로 강물을 치니 고기와 자라들이 떠올라 다리를 이루어 주몽이 건널 수 있었다. 얼마 후 추격해 오는 군사들이 이르렀다).>
秉策指彼蒼 채찍을 잡고 저 하늘을 가리키며
慨然發長喟 개연히 긴 탄식을 내뱉었다.
天孫河伯甥 "천제의 손자 하백의 외손이
避難至於此 난을 피하여 이곳에 이르렀소
哀哀孤子心 불쌍한 고자의 마음을
天地其忍棄 하늘과 땅이 어찌 차마 버리시나요."
操弓打河水 활을 잡아 강물을 치니
魚鼈騈首尾 물고기와 자라가 머리와 꼬리를 나란히 하여
屹然成橋梯 높직이 다리를 만들어
始乃得渡矣 비로소 건널 수 있었다.
俄爾追兵至 조금 뒤에 추격하는 병사가 이르러
上橋橋旋圮 다리를 건너다가 곧 다리가 무너졌다.
<追兵至河, 魚鼈橋卽滅, 已上橋者, 皆沒死(추격하는 병사들이 강에 이르자 물고기와 자라가 이룬 다리가 곧 없어지니 이미 다리에 오른 자들은 모두 강물에 빠져 죽었다).>
雙鳩含麥飛 보리 물고 날아 온 한 쌍의 비둘기
來作神母使 신모의 사자가 되어 왔다.
<朱蒙臨別, 不忍睽違, 其母曰, 汝勿以一母爲念, 乃裏五穀種以送之, 朱蒙自切生別之心, 忘其麥子, 朱蒙息大樹之下, 有雙鳩來集, 朱蒙曰, 應是神母使送麥子, 乃引弓射之, 一矢俱擧, 開喉得麥子, 以水噴鳩, 更蘇而飛去云云(주몽이 이별할 때 차마 떠나지 못하니, 어머니가 말하기를, “어미 걱정을 하지 말아다오.”하고는 오곡 종자를 싸 주었다. 주몽은 생이별의 아픔으로 애태우다가 그만 그 보리 종자를 잊어버리고 왔다. 주몽이 큰 나무 밑에서 쉬고 있는데 비둘기 한 쌍이 날아들었다. 주몽이 말하기를, “아마도 신모께서 보리 종자를 보내신 것이다.”하고 활을 당겨 쏘아 한 화살에 모두 떨어뜨렸다. 목구멍을 열어 보리 종자를 꺼내고 나서 물을 비둘기에 뿜었다. 비둘기가 다시 소생하여 날아갔다).>
形勝開王都 형세 좋은 땅에 왕도를 여니
山川鬱嶵巋 산천이 울창하고 험준했다.
自坐第蕝上 스스로 띠자리 위에 앉아서
略定君臣位 군신의 자리를 대략 정했다.
<王自坐茀蕝之上, 畧定君臣之位(왕이 스스로 띠자리에 앉아 대강 임금과 신하의 위차를 정하였다).>
咄哉沸流王 어리석다, 비류왕(沸流王)이여.
何奈不自揆 어째서 스스로 헤아리지 못하고
苦矜仙人後 신선의 후예인 것만 굳이 자긍하며
未識帝孫貴 천제의 손자 존귀함을 알지 못하였다.
徒欲爲附庸 한갓 부용국(附庸國)으로 삼으려 하여
出語不愼葸 말을 삼가거나 겁낼 줄 몰랐다.
未中畫鹿臍 그림 사슴의 배꼽도 맞히지 못하다가
驚我倒玉指 옷가락지 깨는 것에 놀랐다.
<沸流王松讓出獵, 見王容貌非常, 引而與坐曰, 僻在海隅, 未曾得見君子, 今日邂逅, 何其幸乎, 君是何人, 從何而至, 王曰, 寡人, 天帝之孫, 西國之王也, 敢問君王繼誰之後, 讓曰, 予是仙人之後, 累世爲王, 今地方至小, 不可分爲兩王, 君造國日淺, 爲我附庸可乎, 王曰, 寡人, 繼天之後, 今主非神之胄, 强號爲王, 若不歸我, 天必殛之, 松讓以王累稱天孫, 內自懷疑, 欲試其才, 乃曰願與王射矣, 以畫鹿置百步內射之, 其矢不入鹿臍, 猶如倒手, 王使人以玉指環, 懸於百步之外射之, 破如瓦解, 松讓大驚云云(비류왕 송양이 나와서 사냥을 하다가 왕의 용모가 비상함을 보고 이끌어 함께 앉아서, “나는 바다 한쪽에 치우쳐 있어 일찍이 군자를 만나보지 못하였는데, 오늘 우연히 만났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그대는 어떠한 사람이며 어느 곳에서 왔는가?”하니, 왕이 대답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손자요 서국의 왕이다. 감히 묻노니, 군왕은 누구의 후손인가?”라 하였다. 송양이 말하기를, “나는 선인의 후손인데 여러 대 왕 노릇을 하였다. 지금 이곳은 땅이 대단히 작아서 나누어 두 왕이 될 수 없다. 그대는 나라를 만든 지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나의 부용국이 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고 하였다. 왕이 답하기를, “과인은 천제의 뒤를 이었지마는 지금 왕은 신의 자손도 아니면서 억지로 왕이라 호칭하니, 만일 내게 복종하지 않으면 하늘이 반드시 죽일 것이다.”고 하였다. 송양은 왕이 여러 번 천제의 손자라고 자칭하는 것을 듣고 마음에 의심을 품었다. 그 재주를 시험하고자 하여, “왕과 활쏘기를 원하노라.”고 하였다. 사슴 그림을 1백 보 안에 놓고 쏘았는데, 그 화살이 사슴 배꼽에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힘에 겨워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 옥가락지를 가져다가 1백 보 밖에 달아매고 쏘았다. 기왓장 부서지듯 깨지니 송양이 크게 놀랐다).>
來觀鼓角變 와서 고각이 변색한 것을 보고
不敢稱我器 감히 내 것이라 말하지 못하였다.
王曰, 以國業新造, 未有鼓角威儀, 沸流使者往來, 我不能以王禮迎送, 所以輕我也, 從臣扶芬奴進曰, 臣爲大王取沸流鼓角, 王曰, 他國藏物, 汝何取乎, 對曰, 此天之與物, 何爲不取乎, 夫大王困於扶余, 誰謂大王能至於此, 今大王奮身於萬死之危, 揚名於遼左, 此天帝命而爲之, 何事不成, 於是扶芬奴等三人 往沸流取鼓而來, 沸流王遣使告曰云云, 王恐來觀鼓角, 色暗如故, 松讓不敢爭而去, 來觀屋柱故, 咋舌還自愧, 松讓欲以立都, 先後爲附庸, 王造宮室, 以朽木爲柱, 故如千歲, 松讓來見, 竟不敢爭立都先後(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기틀이 새로 세워지기 때문에 북과 나팔의 위의가 없어서 비류국의 사자가 왕래할 때에 내가 왕의 예로 맞고 보내지 못하니 그 까닭으로 나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다.” 고 하였다. 모시고 서 있던 신하 부분노가 앞으로 나와, “신이 대왕을 위하여 비류국의 북을 가져오겠습니다.”고 하였다. 왕이 묻기를, “다른 나라의 감추어 둔 물건을 네가 어떻게 가져오려 하느냐?”고 하니, 부분노가 대답하기를, “이것은 하늘이 준 물건이니 어찌 가져오지 못하겠습니까? 대왕이 부여에서 곤욕을 당할 때에 누가 대왕이 이곳까지 이르리라고 생각하였겠습니까? 지금 대왕이 만 번 죽음을 당할 위태한 땅에서 몸을 빼쳐 나와 요좌에 이름을 날리니 이것은 천제가 명령하여 하는 것이라 무슨 일인들 이루지 못하겠습니까?” 하였다. 에 부분노 등 세 사람이 비류에 가서 북을 가져오니 비류왕이 사자를 보내어 고하였다. 왕이 비류에서 와서 고각을 볼까 두려워하여 빛깔을 오래된 것처럼 검게 만들어 놓으니 송양이 감히 다투지 못하고 돌아갔다).>
來觀屋柱故 집 기둥이 묵은 것을 와서 보고
咋舌還自愧 말도 못하고 도리어 부끄러워했다.
<松讓欲以立都, 先後爲附庸, 王造宮室, 以朽木爲柱, 故如千歲, 松讓來見, 竟不敢爭立都先後(송양이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져 부용국을 삼고자 했다. 왕이 궁실을 지을 때 썩은 나무로 기둥을 세워 천 년 묵은 것처럼 했다. 송양이 와서 보고 마침내 감히 도읍을 세운 선후를 따지지 못하였다).>
東明西狩時 동명이 서쪽으로 순수할 때
偶獲雪色麂 우연히 눈빛 고라니를 얻었다.
<大鹿曰麂(큰 사슴을 고라니라 한다).>
倒懸蟹原上 해원 위에 거꾸로 매달아서
敢自呪而謂 감히 스스로 저주하여 이르기를,
天不雨沸流 “하늘이 비류국에 비를 내려
漂沒其都鄙 도성과 변방을 물바다로 만들지 않으면
我固不汝放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터이니
汝可助我憤 너는 나의 분을 풀어다오.”
鹿鳴聲甚哀 사슴의 울음소리 몹시 슬퍼
上徹天之耳 위로 천제의 귀에까지 사무쳤다.
霖雨注七日 장맛비가 이레 동안 퍼부어
霈若傾淮泗 강물 넘치고 홍수를 이루었다.
松讓甚憂懼 송양이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沿流謾橫葦 흐름을 따라 부질없이 갈대 밧줄을 늘이니
士民競來攀 온 백성이 다투어 와서 밧줄에 매달려
流汗相𥈭眙 아우성치며 버둥대는지라
東明卽以鞭 동명왕이 즉시 채찍을 들어
劃水水停沸 물결을 가르니 이내 물이 줄어들었다.
松讓擧國降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고
是後莫予訾 그후로는 우리를 헐뜯지 못하였다.
<西狩獲白鹿, 倒懸於蟹原, 呪曰, 天若不雨而漂沒沸流王都者, 我固不汝放矣, 欲免斯難, 汝能訴天, 其鹿哀鳴, 聲徹于天, 霖雨七日, 漂沒松讓都, 王以葦索橫流, 乘鴨馬, 百姓皆執其索, 朱蒙以鞭畫水, 水卽減, 六月, 松讓擧國來降云云(서쪽을 순행하다가 사슴 한 마리를 얻었는데 해원에 거꾸로 달아매고 저주하기를, “하늘이 만일 비를 내려 비류왕의 도읍을 표몰(漂沒)시키지 않는다면 내가 너를 놓아주지 않을 것이니, 이 곤란을 면하려거든 네가 하늘에 호소하라.” 하였다. 그 사슴이 슬피 울어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니 장마비가 이레를 퍼부어 송양의 도읍을 표몰시켰다, 송양왕이 갈대 밧줄로 흐르는 물을 횡단하고 오리 말을 타고 백성들은 모두 그 밧줄을 잡아당겼다. 주몽이 채찍으로 물을 긋자 물이 곧 줄어들었다. 6월에 송양이 나라를 들어 항복하였다 한다).>
玄雲羃鶻嶺 검은 구름이 골령을 덮어
不見山邐迤 온 산이 캄캄하게 가려 보이지 않고
有人數千許 수천 명의 사람들의 소리가 들려
斵木聲髣髴 나무 찍어내는 소리와 방불하였다.
王曰天爲我 왕이 말하기를, “하늘이 나를 위해
築城於其趾 이 터에 성을 쌓아 주는구나.”
忽然雲霧散 홀연히 구름이 흩어지니
宮闕高㠥嵬 궁궐이 우뚝 솟아났다.
<七月, 玄雲起鶻嶺, 人不見其山, 唯聞數千人聲以起土功, 王曰, 天爲我築城, 七日, 雲霧自散, 城郭宮臺自然成, 王拜皇天就居(7월에 검은 구름이 골령에 일어나서 사람들이 그 산은 보지 못하고 오직 수천 명 사람의 소리가 토목 공사를 하는 것같이 들렸다. 왕이, “하늘이 나를 위하여 성을 쌓는 것이다.” 하였다. 7일 만에 운무가 걷히니 성곽과 궁실 누대가 저절로 이루어졌다. 왕이 황천께 절하여 감사하고 나아가 살았다).>
在位十九年 나라를 다스린지 19년만에
升天不下莅 하늘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았다.
<秋九月, 王升天不下, 時年四十, 太子以所遺玉鞭, 葬於龍山云云(가을 9월에 왕이 하늘에 오르고 내려오지 않으니 이때 나이 40이었다. 태자가 왕이 남긴 옥채찍을 대신 용산에 장사하였다 한다).>
俶儻有奇節 포부가 크고 기이한 재주를 가지니
元子曰類利 원자의 이름은 유리이다.
得劒繼父位 칼을 찾아 부왕의 위를 이었고
塞盆止人詈 물동이 구멍 막아 남의 꾸지람을 그쳤다.
<類利少有奇節云云, 少以彈雀爲業, 見一婦戴水盆, 彈破之, 其女怒而詈曰, 無父之兒, 彈破我盆, 類利大慙, 以泥丸彈之, 塞盆孔如故, 歸家問母曰, 我父是誰, 母以類利年少戱之曰, 汝無定父, 類利泣曰, 人無定父, 將何面目見人乎, 遂欲自刎, 母大驚止之曰, 前言戱耳, 汝父是天帝孫, 河伯甥, 怨爲扶餘之臣, 逃往南土, 始造國家, 汝往見之乎, 對曰, 父爲人君, 子爲人臣, 吾雖不才, 豈不愧乎, 母曰, 汝父去時有遺言, 吾有藏物七嶺七谷石上之松, 能得此者, 乃我之子也, 類利自往山谷, 搜求不得, 疲倦而還, 類利聞堂柱有悲聲, 其柱乃石上之松木, 體有七稜, 類利自解之曰, 七嶺七谷者,七稜也, 石上松者, 柱也, 起而就視之, 柱上有孔, 得毀劒一片, 大喜, 前漢鴻嘉四年夏四月, 奔高句麗, 以劒一片, 奉之於王, 王出所有毀劒一片合之, 血出連爲一劍, 王謂類利曰, 汝實我子, 有何神聖乎, 類利應聲, 擧身聳空, 乘牖中日, 示其神聖之異, 王大悅, 立爲太子(유리가 어려서부터 기이한 기절이 있었다 한다. 소년 때에 참새 쏘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한 부인이 물동이를 이고 가는 것을 보고 쏘아서 뚫었다. 그 여자가 노하여 욕하기를, “아비도 없는 자식이 내 물동이를 쏘아 뚫었다.” 하였다. 유리가 크게 부끄러워하여 진흙 탄환으로 쏘아서 동이 구멍을 막아 전과 같이 만들고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에게, “내 아버지가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다. 어머니는 유리가 나이 어리기 때문에 희롱 삼아 말하기를, “너는 일정한 아버지가 없다.” 하였다. 유리가 울며, “사람이 일정한 아버지가 없으면 장차 무슨 면목으로 남을 보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스스로 목을 찌르려 하였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말리며, “아까 한 말은 희롱 삼아 한 말이다. 너의 아버지는 천제의 손자이고 하백의 외손인데 부여의 신하되는 것을 원망하다가 도망하여 남쪽 땅에 가서 국가를 창건하였단다. 네가 가보겠느냐?“ 하였다. 대답하기를, “아버지는 임금이 되었는데 아들은 남의 신하가 되었으니 내가 비록 재주 없으나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어머니가, “너의 아버지가 갈 때 말을 남기기를 ‘내가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 돌 위 소나무에 물건을 감추어 둔 것이 있으니 이것을 찾아 얻는 자는 내 자식이다.’ 하였다.” 했다. 유리가 산골짜기에 가서 찾다가 얻지 못하고 지쳐 돌아왔다. 유리가 당(堂) 기둥에서 슬픈 소리가 나는 것을 들었는데 그 기둥은 돌 위의 소나무이고 나무 모양이 일곱 모서리였다. 유리가 스스로 해득하기를, “일곱 고개 일곱 골짜기라는 것은 일곱 모서리이고, 돌 위 소나무라는 것은 기둥이다.” 하고 일어나 가 보니 기둥 위에 구멍이 있었다. 그 구멍에서 부러진 칼 한 조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전한 홍가 4년 여름 4월에 고구려로 달아나서 칼 한 조각을 왕께 받들어 올렸다. 왕이 가지고 있는 부러진 칼 한 조각을 내어 합하니 피가 나면서 이어져 한 칼이 되었다. 왕이 유리에게, “네가 실로 내 자식이라면 무슨 신성함이 있느냐?” 하니, 유리가 즉시 몸을 날리어 공중에 솟구쳐 창구멍으로 새어 드는 햇빛을 막아 기이한 신성을 보이니 왕이 크게 기뻐하여 태자로 삼았다).>
我性本質木 내 성품 본래 질박하여
性不喜奇詭 기이하고 괴상한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初看東明事 동명왕의 사적을 처음 보고
疑幻又疑鬼 황당하고 괴이하다 의심하였다.
徐徐漸相涉 차차로 서로 간섭하여 보니
變化難擬議 변화가 추측하여 의논하기 어렵다.
況是直筆文 하물며 이것은 직필(直筆)로 쓴 글이라
一字無虛字 한 글자도 헛된 글자 없다.
神哉又神哉 신이(神異)하고 신이하구나
萬世之所韙 만세(萬世)에 길이 빛날 일이다.
因思草創君 생각컨대 창업하는 임금이
非聖卽何以 성스럽지 않으면 어찌 이룰 수 있으랴.
劉媼息大澤 유온(劉媼)은 큰 못에서 쉴 때
遇神於夢寐 신인(神人)을 꿈속에서 만났네
雷電塞晦暝 우뢰 번개에 천지가 캄캄하고
蛟龍盤怪傀 괴이하고 위대한 교룡이 구비쳐 내려왔다.
因之卽有娠 그때부터 태기가 있어
乃生聖劉季 성스러운 유 계(劉季)를 낳았다.
是惟赤帝子 이 분이 적제(赤帝)의 아들이니
其興多殊祚 일어날 때 길조(吉兆)가 많았다.
世祖始生時 세조(世祖) 광무황제가 처음 태어날 때도
滿室光炳煒 광명한 빛이 방안에 가득하였네
自應赤伏符 절로 적복부(赤伏符) 응하여
掃除黃巾僞 황건적(黃巾賊)을 소탕하였다.
自古帝王興 자고로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도
徵瑞紛蔚蔚 상서로운 징조가 많았거늘
末嗣多怠荒 후손들이 게으르고 거칠어져
共絶先王祀 선왕(先王)의 제사를 끊어뜨렸다.
乃知守成君 이제야 알았노라, 수성(守成)하는 임금은
集蓼戒小毖 어려움 당할수록 삼가고 경계하였음을.
守位以寬仁 임금은 언제나 너그럽고 어질어
化民由禮義 예와 의로써 백성을 교화하여
永永傳子孫 길이길이 자손에게 전하고
御國多年紀 오래도록 나라를 다스렸다.
―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권(卷) 3
「동명왕편(東明王篇)」에서 이규보는 서사시가 전개되는 과정 중에 『구삼국사』 「동명왕본기」에서 주석으로 인용한 것을 별도(< >로 표시한 부분)로 적어두고 있다.
「동명왕편」은 5언 289의 장편 오언시로, 웅대한 스케일을 가진 영웅서사시이다. 부여로부터 남쪽으로 내려온 주몽(朱夢) 집단이 압록강의 물줄기인 동가강 유역 졸본(卒本)에다 기원전 37년에 세운 나라가 고구려이다. 성이 고씨인 주몽은 동명성왕(東明聖王)이라고 불린다. 이 동명성왕과 그 아들인 유리의 이야기를 서사시로 쓴 「동명왕편」은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권3에 수록되어 있다.
해모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동명왕 탄생 이전에 있었던 일을 밝힌 서장(序章), 동명왕의 탄생으로부터 시련과 투쟁을 거쳐 나라를 세우기까지의 과정을 다룬 본장(本章), 그리고 동명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아들 유리왕의 경력과 작가의 느낌을 적은 종장(終章)으로 구성되어 있다. 만주의 넓은 지역과 한반도, 그리고 천상, 지상, 수중 세계를 공간적 배경으로 한 「동명왕편」에는 해모수(解慕漱)·동명왕·하백(河伯)·송양(松讓)·유리(琉璃) 등 영웅들과 유화(柳花)·위화(韋花) 같은 미녀들이 등장한다.
"동명왕은 강고한 의지와 확고한 신념에 차 있는 민족의 영웅으로서 생동감 있게 그려져 있는"(인권환 외 편저, 『한국고전산문선』, 태학사, 1996, p.43.) 「동명왕편」에 붙인 서문은 『삼국사기』에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내용을 상세하게 알 수 없는 동명왕 고주몽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쓰고자 하는 이규보의 생각을 정연하게 설명한 것이다. 즉 동명왕에 관한 이야기는 황당한 이야기처럼 느껴지나 자세히 읽어보면 그 기원이 성스러운 것임을 알 수 있으므로 이를 자세히 기록하여 후손에게까지 전하고자 한다는 자주적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
「동명왕편」의 창작 의도에 대해 장덕순은 "멀리 북방(北方)의 웅국(雄國) 고구려(高句麗)와의 정신적(精神的) 유대(紐帶)<고려(高麗)는 고구려(高句麗)의 계승이라는>를 강조하는 고려인(高麗人)들의 자부심(自負心)에도 있고, 가까이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가 신이(神異)한 사실(事實)의 대부분을 생략(省略)했기 때문에 이 창국(創國)의 신적(神迹)이 후세(後世)에 전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장덕순, 『국문학통론』, 신구문화사, 1960, p.139) 「동명왕편」을 썼다고 보았다. 그리고 인권환 등은 「동명왕편」의 창작 의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작자는 「동명왕편」의 서문에서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이 이룩한 나라'임을 알리고자 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대한 자부심과 긍지의 표현으로 이해된다. 작자 자신이 밝히고 있는 이같은 창작 의도는 몽골과의 기나긴 전쟁을 겪고 있었던 당시의 암담한 현실에 기초한 것이다. 고려인들의 대몽 항전은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민족을 수호하고 야만인의 파괴로부터 문명을 지킨다'는 의식의 발로였다. 몽골족에 의한 민족적 수난과 그에 대한 저항이 고조되었던 당대 현실 속에서 작자는 민족 전체의 운명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으며, 그같은 공동운명체로서의 집단 의식을 결집해 내고자 신이한 영웅으로서의 활동상을 새롭게 부각시켰다.
―인권환 외 편저, 앞의 책, p.43.
그리고 신용호는 「동명왕편」의 창작 의도에 대해 “고려는 성인이 세운 나라를 계승했으므로 지방의 민란을 진압하고 수호해야할 나라이며 성인지국(聖人之國) 국민으로서의 긍지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신용호, 『이규보의 의식세계와 문학론연구』, 국학자료원, 1990, p. 152 )라고 기술하고 있다. 한편 이우성은 "「동명왕편」이 한 개의 영웅시로서 성공적인 작품이었으나 한 걸음 나아가 민족서사시라는 견지에서 본다면 더 높은 차원이 요구된다."(이우성, 「고려중기의 민족서사시」, 이우성·강만길편, 『한국의 역사인식 상』, 창작과비평사, 1976, pp. 175∼176.)면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동명왕이 '고구려의 계승자를 자처하는 고려인'에게는 창국(創國)의 영웅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의 입장에서 본다면 고구려족이라는 한 부족의 족장일 따름이요, 민족의 공동의 시조는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명왕설화는 엄밀한 의미에 있어서 부족적 지역적 성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었다.
―이우성, 「고려중기의 민족서사시」, 이우성·강만길편, 앞의 책, p. 175.
이우성은 「동명왕편」 같은 부족적·지역적 설화에서 벗어나, 민족의 공동 시조를 발견하고 민족 활동의 전과정을 기술한 것은 이승휴의 『제왕운기』에 이르러 가능했다고 보았다. 그밖에 「동명왕편」은 당시의 중화 중심(中華中心)의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구삼국사(舊三國史)』에서 소재를 취하여 쓴 것이며, 우리의 민족적 우월성 및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천추만대에 전하겠다는 의도에서 쓰여진 것으로, 작자의 국가관과 민족에 대한 자부심, 그리고 외적에 대한 항거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작품이다라는 견해와 무신란을 겪고 귀족 문화의 기반이 무너지자, 이규보는 그 기회에 의식에서의 질곡을 깨고 민족적 전통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자는 결단을 문학 작품으로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자신의 호를 시금주삼혹호선생(詩琴酒三酷好先生)이라고 자칭한 이규보는 평생에 7천∼8천 수에 이르는 시를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작게는 작가 신변의 물건으로부터 작가 집 주위의 구체적인 물상에 이르기까지 새·짐승·초목·자연 그 자체를 제재로 하여 읊은 영물시(詠物詩)에서 “ 모든 존재의 굴레가 영원히 돌아가며 그 커다란 틀속에 인간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우주의 실상을 통해 관조된 삶을 이룩하고자 하는 자세를 이야기했고”(김동욱, 「동국이상국집 해제」, 『국역 동국이상국집』, 민족문화추진회, 1984, p.10), 한국 서사시의 한 좌표를 이룬 「동명왕편」을 통해 당시 중화중심(中華中心)의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동명왕의 사적을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한편 몽골족의 침략에 대한 항거정신을 묘사했다.
시 창작의 다양성을 주장한 이규보는 『백운소설(白雲小說)』에서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라는 시창작론을 주장했다. 한시를 짓는 데 피해야 할 체격과 시정신인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는 용사론으로 고인의 이름을 많이 쓴 것인 재귀용거체(載鬼盈車體), 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한 것인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공자와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인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 등이 있고, 환골탈태론으로는 고인의 뜻을 훔친 기교가 부족한 것인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성률론으로 근거없이 억지 운을 쓴 것인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 수사론으로 험자(險字)를 써 미혹하게 하는 것인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을 종합하면, ① 용사를 지나치게 사용하지 말 것, ② 환골탈태를 피할 것, ③ 압운법에 집착하지 말되, 지나치게 벗어나지 말 것, ④ 수사에 있어 험자(險字)와 상말을 피할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김동욱, 「동국이상국집 해제 」,
앞의 책, 1984, pp, 14∼15).
이규보 문학에 대해 김진영은 다음과 같이 평했다.
당대(當代)의 고려(高麗) 문학계(文學界)에서 주도적(主導的) 역할(役割)을 담당했던 이규보(李奎報)는 고려문학(高麗文學)에 서사문학(敍事文學)의 세계(世界)를 확충하였고, 사실적(寫實的) 작풍(作風)을 수립(樹立)함으로써 문학사상(文學史上) 새로운 전기(轉機)를 가져왔으며, 중국문학(中國文學)의 수용(受容)에 있어서도 특히 민중적(民衆的) 시인(詩人)이었던 백거이(白居易)를 배웠고, 문학사상(文學思想)에 있어서도 기존(旣存)의 것을 그대로 수용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나름으로 개신(改新)해 나갔다.
―김진영, 『이규보문학연구』, 집문당, 1988, p. 204.
이규보의 대표적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전 53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동국이상국집』은 시(詩)·부(賦)·서(序)·발(跋)·명(銘)·잠(箴)·설(說)·논(論)·문답(門答)·전(傳) 등 여러 유형의 문학 양식으로 씌어져 있다. 그 가운데 전집 권20권에 수록된 「국선생전(麴先生傳)」과 「청강사자현부전(淸江使者玄夫傳)」은 가전체 문학(假傳體文學) 작품이다.
Ⅳ. 결론
무인정권 시기에 활동했던 문인 가운데 이인로는 작품을 창작할 때 용사(用事)에 능했고, 이규보는 신어(新語)와 신의(新意)의 창출(創出)에 능했던 문인으로 알려져 있다.
시 창작의 다양성을 주장한 이규보의 시문 창작론의 핵심적인 글은 『동국이상국집』의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과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이다. 이 두 편의 글은 홍만종(洪萬宗, 1643년∼1725년)이 『시화총림(詩話叢林)』을 편찬할 때 시화(詩話)로 재편집하여 『백운소설(白雲小說)』에 실었다.
이규보의 문학론 연구에 주종(主宗)을 이루는 것은 신의론(新意論)이며, 이인로의 용사론(用事論)에 대응되었던 것으로 논의되었다. 이규보는 「논시중미지략언(論詩中微旨略言)」에서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라는 시창작론을 주장했다. 시에는 9가지의 마땅하지 않은 체(體), 즉 ‘시유구불의체(詩有九不宜體)’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다. 시 창작의 다양성을 주장한 이규보는 시를 창작할 때 나타나는 문제점들을 기술한 것이다. 용사론(用事論)으로 옛사람의 이름을 많이 쓴 것인 재귀용거체(載鬼盈車體), 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한 것인 강인종기체(强人從己體), 공자와 맹자를 범하기 좋아하는 것인 능범존귀체(凌犯尊貴體) 등이 있고, 환골탈태론으로는 고인의 뜻을 훔친 기교가 부족한 것인 졸도이금체(拙盜易擒體), 성률론으로 근거없이 억지 운을 쓴 것인 만노불승체(挽弩不勝體), 수사론으로 험자(險字)를 써 미혹하게 하는 것인 설갱도맹체(設坑導盲體) 등으로 분류할 수 있다. 이것을 요약하면, ① 용사를 지나치게 많이 구사하지 말 것, ② 환골탈태를 할 것, ③ 근거 없이 강운(强韻)을 쓰지 말 것. ④압운을 지나치게 어긋나게 구사하지 말 것, ⑤ 수사에 있어 험자(險字)를 피할 것, ⑥ 수사에 있어 상말을 피할 것, ⑦ 말이 순조롭지 못한 것을 억지로 인용하지 말 것, ⑧ 기휘(忌諱)하는 말을 쓰기를 좋아하지 말 것, ⑨ 수사가 거칠면 산삭(删削)할 것 등으로 요약할 수 있다.
당대의 문풍에서 벗어나고자 신어(新語)를 지어내거나 신어(新意)를 창출해내어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했던 이규보는 옛 사람의 시체(詩體)를 모방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라고 「답전리지논문서(答全履之論文書)」에서 글은 제각기 일가(一家)를 이루어야 한다며 “배와 귤이 맛이 다르지만 입에 딱 맞는다(梨橘異味 無有不可於口者)”라고 주장한 이규보는 자신의 시어(詩語)와 시체(詩體)에 대하여 당대(當代) 문사(文士)들이 온고미(溫古美)가 부족(不足)하다는 논평(論評)에 대한 변해(辨解)요 자기 옹호의 말을 진술했던 것이다. 당대의 고려문학계(高麗文學界)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던 이규보는 신어론과 신의론으로 대표되는 작시론을 내세워 도습이나 표절이 만연한 고려문인들을 비판하면서 문풍(文風)을 쇄신하고자 노력했다.
이규보는 평생에 7천∼8천 수에 이르는 시를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화백로(蓼花白鷺)」와 같은 영물시(詠物詩)와 「망남가음(望南家吟)」 같은 리얼리즘 시를 다수 발표해 한국 문학사상 새로운 전기(轉機)를 가져왔다. 그리고 웅대한 스케일을 가진 「동명왕편(東明王篇)」 같은 서사시를 통해 당시 중화중심(中華中心)의 역사의식에서 탈피하여 고려가 위대한 고구려를 계승하고 있다는 고려인의 자부심을 고취하고 동명왕의 사적을 우리 민족에게 영원히 전하겠다는 의도를 드러내는 한편 몽골족의 침략에 대한 항거정신을 묘사해 서사문학(敍事文學)의 세계를 확충했다.
이규보의 대표적 저서에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 있다. 전 53권 13책으로 되어 있는 『동국이상국집』은 시(詩)·부(賦)·서(序)·발(跋)·명(銘)·잠(箴)·설(說)·논(論)·문답(門答)·전(傳) 등 여러 유형의 문학 양식으로 씌어져 있다.
비록 이규보가 적극적으로 무신정권(武臣政權) 아래로 들어가 정치에 참여하여 신진관료층(新進官僚層)의 대표적 인물이 되었지만, 그는 문학적 재능을 무신정권을 찬양하는데 바친 것은 아니었다. 이규보는 문사(文士)의 존재 가치를 치국택민(治國澤民)에 두고 스스로 실천에 옮긴 인물이었다.
-출처, 김종성, 「이규보의 문학론과 시 세계」, 『용인문학』, 2021년 하반기호(37호), pp.292∼328. 2021년 11월 19일 증보.
필자 소개
김종성(金鍾星) 소설가.
강원도 평창에서 출생하여 삼척군 장성읍(지금의 태백시)에서 성장.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국어국문학과 졸업.
경희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 국어국문학과 및 고려대 대학원 박사과정 국어국문학과 졸업.
2004년 「한국현대소설의 생태의식연구」로 고려대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84년 제8회 방송대문학상 단편소설 「괴탄」 당선.
1986년 제1회 월간 『동서문학』 신인문학상에 중편소설 「검은 땅 비탈 위」 당선.
2006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으로 제19회 경희문학상 소설 부문 수상.
2024년 연작소설집 『 가야를 찾아서 』 로 제17회 이병주국제문학상 대상 수상;
연작소설집 『 가야를 찾아서 』(서연비람, 2024), 『마을』(실천문학사, 2009), 『탄(炭)』(미래사, 1988) 출간. 중단편집 『연리지가 있는 풍경』(문이당, 2005), 『말 없는 놀이꾼들』(풀빛, 1996), 『금지된 문』(풀빛, 1993) 등 출간. 『한국환경생태소설연구』(서정시학, 2012), 『글쓰기와 서사의 방법』(서정시학, 2016), 『한국어어휘와표현Ⅰ:파생어ㆍ합성어ㆍ신체어ㆍ친족어ㆍ속담』(서정시학, 2014), 『한국어 어휘와 표현Ⅱ:관용어ㆍ한자성어ㆍ산업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Ⅲ:고유어』(서정시학, 2015), 『한국어 어휘와 표현Ⅳ:한자어』(서정시학, 2016), 『글쓰기의 원리와 방법』(서연비람, 2018) 등 출간. 『인물한국사 이야기 전 8권』(문예마당, 2004년) 출간.
'김종성 한국사총서 전 5권' 『한국고대사』(미출간), 『고려시대사』(미출간), 『조선시대사Ⅰ』(미출간), 『조선시대사Ⅱ』(미출간), 『한국근현대사』(미출간), ‘김종성 한국문학사 총서 전 5권’ 『한국문학사 Ⅰ』(미출간),『한국문학사 Ⅱ』(미출간), 『한국문학사 Ⅲ』(미출간), 『한국문학사 Ⅳ』(미출간), 『한국문학사 Ⅴ』(미출간).
도서출판 한벗 편집주간, 도서출판 집문당 기획실장 , 고려대출판부 소설어사전편찬실장, 고려대 국문과 강사, 장안대 문예창작과 겸임교수, 경희대 국문과 겸임교수, 경기대 문예창작과 및 동 대학원 강사, 고려대 세종캠퍼스 문화창의학부 교수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