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youtu.be/X6ZJKwcTLow?si=f1d-0H78o0HdPFBx
한 수 위 마태복음 9장 9-13절
오늘 읽은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잘 읽다보면 경험적으로 낯선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라는 세관원을 보시고 나를 따라오너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근데 마태가 일어나서 예수를 따릅니다. 예수님의 모습도 마태의 선택도 매우 이례적입니다.
여러분 매일 아침에 일어나면 텃밭도 가고 운동도 하고 하는 사람에게 운동하러 가자고 했을 때 그래 운동하러 가자하는 건 매우 자연스럽고 익숙한 일입니다. 그런데 절대 움직이는 것도 싫어하고 운동하는 건 더 싫어하고 심지어 운동하면 병이 나는 사람에게 그래서 움직이는 걸 극도로 힘들어하고 싫어하는 사람에게 운동하러 가자고 말을 꺼내는 것도 어렵지만(제는 운동 지긋지긋하게 싫어한다는 편견이 있으면 운동하자고 않해요) 어렵게어렵게 꺼냈는데 그래 운동하러갈까 하는 대답을 듣는 건 매우 낯설고 이례적이고 신기한 일입니다.
본문에 보면 마태는 세리였습니다. 당시 세리는 부패의 온상을 연상하기에 충분한 직업군에 속했습니다. 레위인을 먹여살려야 하니 십일조 내죠. 만 20세의 모든 유대인에게 부과하는 성전세 따로 내야죠. 게다가 식민지 백성으로 로마에 내는 인두세라고 만 12세 이상 되는 모든 성인에게 붙는 세금이 있었습니다. 워낙에 내야하는 세금이 많으니 잘 걷히겠습니까? 안 걷히겠지요. 그러니까 세금을 걷으러 다니던 세리들이 있었겠지요. 이런 거 외에도 통행세 같은 게 있는데 부르는 게 값이었다는 거죠. 왜냐하면 로마에서는 세리를 고용할 때 입찰식으로 가장 많이 걷어오겠다는 사람을 입찰방식으로 선정하면 이 사람은 다양한 방식으로 세금을 걷어 약속한 것만 채워주고 나머지는 자기 호주머니로 들어갔다고 합니다. 그러다보니 횡포가 심했겠지요. 게다가 세리들은 고리대금업까지 했다고 합니다. 돈을 많이 만지다보니 돈을 굴리고 나중에 이자를 이용해 토지나 가축까지 빼앗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당시 세리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민족 반역자에, 합법을 가장한 착취자, 율법을 어긴 부정한 사람들이라는 종교적 낙인이 찍힌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면 일제 강점기에 친일파와 같은 사람들인 거죠. 호시탐탐 일본 욕하는 사람들 착출 해서 일러바치고, 시키지도 않은 돈까지 걷어다가 알아서 충성해주고, 감시하고 빼앗고 괴롭힘을 일삼던 사람에게 지금 예수님께서 “독립 운동하러 가자” 그런 제안을 한 거구요. 세리도 그 제안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인 겁니다. 놀라운 거죠. 세리 안에도 눈에 보이는 것과 전혀 다른 세계에 대한 고민과 갈등과 열정이 있었던 거죠.
이 한 구절이 우리 삶에 던져주는 화두가 있습니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닐 수 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 경험치, 선입견, 자기 판단 안에 타자를 가두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신영복 선생님이 쓰신 <여럿이 함께 숲으로 가는 길>이란 책에 보면 그분의 감옥 생활이 나옵니다. 그는 감옥을 자기 인생의 큰 배움을 준 대학이라고 부릅니다. 감옥에서 함께 생활하는 사람의 이름에 관한 이야깁니다. 감방 식구 중에 대의라는 사람이 있었답니다. 대의 큰 뜻이라는 의미로 생각했답니다. 그래서 혼잣말로 야 저 사람은 부모님께서 이름도 저렇게 훌륭하게 지어주셨는데 이렇게 감옥을 들락날락거리니 부모님 속도 속이 아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름값도 못하고 사는 놈이라는 이미지를 덮어 씌운 거죠. 그런데 어느 날 우연한 계기를 통해 그 대의의 뜻을 알게 됩니다. 돌도 되기 전에 광주에 가면 도청 근처에 대의동 파출소가 있다는 겁니다. 거기에 버려진 겁니다.. 그래서 이름도 모르고 성도 모르고 어떤 정보도 없으니까 대의파출소앞에서 발견했다고 해서 대의라고 지었다는 겁니다. 세상에 부모님 속이나 썩히는 불효막심한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부모도 없이 세상 어느 곳 하나 마음 둘 곳 없이 살아온 사람이었던 겁니다. 순간 너무 창피하더라는 겁니다. 자기 문맥에 갇혀서 전혀 딴 생각을 하면서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을 정죄하고 있더라는 거죠. 그래서 그는 감옥생활이 자기가 얼마나 갇혀있는 존재인가를 배우는 시간이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자기 문맥, 갇힌 자기 세계를 넘어서끊임없이 변화()하려는 노력이 결국 자기 구원의 과정이었노라고 고백합니다.
만약에 그가 자기 문맥에 갇혀서 속에서 일어나는 생각과 감정대로 계속해서 그 사람을 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예이 이름값도 못하는 놈, 불효 막심한 놈, 부모의 은혜도 모르는 자는 버러지만도 못한 인생이야 하면서 함부로 대하고 업신여기고 사람대접하지 않았으면 그 사람은 영문도 모르고 여기 저기 얻어터지다가 도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이러지 하면서 갈등이 고조화되었겠지요. 눈에 보이는 세계안에만 갇혀 삶을 살아 보면 삶의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해서 반복될 가능성이 크다는 겁니다.
겉으로 매국노처럼 보이는 세리안에도 밤마다 불을 끄고 자신의 처지를 생각해보면 그럴려고 그런게 아닌데 내가 이런 인생을 살려고 이 길에 접어든건 아닌데 온갖 후회와 낙심과 절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덜먹어도 배고파도 스스로 자신에게 당당하고 떳떳한 그래서 정말 두다리 쭉뻗고 잠 잘 수 있는 그런 인생을 살고픈 마음이 세리인들 왜 없었겠습니까? 그 지점을 만나려는 노력을 예수님은 어떻게 하셨을까요? 자기 문맥, 갇힐 수 있는 자기 세계, 보여지는 세계에 갇히지 않기 위해 변화()하려는 노력을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하셨을까요? 이게 오늘 본문의 뒷이야기입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도 순간순간 자기 문맥에 갇히셨던 적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게 수로보니게 여인의 이야기입니다. 마가복음 7장에 보면 귀신들린 딸(마음이 아픈 딸)을 살려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하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리스 사람으로 수로보니게(두로와 시돈 지역) 여인입니다. 이방여인입니다. 그랬더니 예수님께서 아이들에게 줄 것을 개에게 줄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이방인인 너는 개라는 표현입니다. 순간 말씀을 하셔놓고는 아차 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물러서지를 않습니다. 그래 나는 개지 하면서 주눅들어서 쭈그려져 있지를 않습니다. 상아래 있는 개들도 아이들이 흘리는 부스러기를 얻어먹고 살지 않습니까 하면서 따집니다. 개도 살아야하는 생명아니냐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한방 먹으신 겁니다. 바로 꼬리 내리십니다. “그래 니 말이 맞다. 그래 가보자”
오늘 본문의 이야기를 잘 보십시오. 예수님이라고 왜 사람이 아니셨겠어요. 실수하고 함부로 자기중심적으로 판단하고 보여지는 세상 안에 갇히고 자기 생각에 갇혀서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을 놓치고 그런 부분이 왜 없으셨겠어요. 예수님에게도 이런 흔적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흔적보다 그렇지 않은 흔적들이 훨씬 많습니다. 어떻게 그런 한계들을 넘어셨을까요?
오늘 본문에 보면 예수님께서 집에서 음식을 드셨다고 나옵니다. 삭개오의 집이기도 하고 마태의 집일 수도 있어요. 그 집에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의 일행과 자리를 함께 했다고 나옵니다. 여러분 이웃집에 손님이 오는데 불편한 사람 같으면 가요? 안가요? 아무리 옆집에 살아도 불편하면 “아이고 약속이 있어서”하고 안갑니다. 근데 제가 홍목사님댁에 갔더니 전에 저희 교회 다니셨던 홍목사님 동생분이 바로 찾아오셨어요. 반갑고 좋아하니까 오신 거예요. 예수님이 어느 집에 가실때마다 세리와 죄인들이 들끓어요. 그들과 잘 통하는 분이셨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기 문맥을 넘어서려면 타자안으로 들어가든지, 타자를 내 안으로 초대해야합니다. 성서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네 집에 찾아가 밤새 마시고 놀고 머무십니다. 마태의 집에서도 그랬는지 모릅니다. 집에 가셔서 먹고 마시면서 뭘 하셨겠어요. 어떻게 사는지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사는지 어떤 아픔이 있는지, 어떤 바램이 있는지, 어떤 트라우마가 삶을 괴롭히는지, 세리를 하면서 어떤 상처가 있는지, 비록 세리 직업이지만 어떤 삶을 꿈꾸는지... 실제 타자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의 진짜이야기, 고뇌와 아픔의 이야기 까지 내 안으로 초대합니다.
얼마 전에 아는 지인에게 전화가 왔는데 뭔가 엄청 억울해요. 그러면서 이혼할 거라고 하면서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막 씩씩대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씩 물어봤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래서 자네 마음은 어떤지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말할 때는 그렇게 분노하고 화내고 씩씩대는데 그래서 마음이 어땠는지를 물으면서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그랬구나 그런 마음이었구나 하면서 감정에 공감을 하니까 그때부터 그냥 막 우는 거예요. 그렇게 실컷 울고 그분은 아직까지 이혼하지 않고 열심히 일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원 – 한수 위 / 에드윈 마크햄
그는 원을 그려 나를 밖으로 밀어냈다.
나에게 온갖 비난을 퍼부으면서.
그러나 나에게는
사랑과 극복할 수 있는 지혜가 있었다.
나는 더 큰 원을 그려 그를 안으로 초대했다.
살다보면 세상에서는 별의별 사람을 다 만나고 살아갑니다. 모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환경과 처지에서 선하게 좋은 사람이 되어서 열심히 잘 살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산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서로 다른 기질과 다른 처지와 다른 생각속에서 보여지는 모습들이 때로 불편하고 힘들고 때때로 아프게도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먼저 내 판단에 그를 가두기 전에 “그래 그래서 니 마음은 어때? 너 안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서 그런 행동을 하는 거니?”말하며 상대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내안으로 초대하는 일, 그는 나를 원밖으로 밀어내지만 더 큰 원을 그려 내 안으로 초대하는 일, 한수 위의 정수를 보여주시는 예수님! 정죄와 심판, 나의 선입견과 편견에 상대를 가두기 전에 먼저 상대의 마음을 물어봐주고 초대하는 일은 우리의 삶을 전혀 예기치 않은 신비로 이끌어가는 힘이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한 주간 동안도 이런 신비로운 삶의 경험들이 여러분과 함께 하시길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