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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홍빈(洪彬)

작성자무한|작성시간26.06.07|조회수18 목록 댓글 0

 

홍빈(洪彬)은 자가 문야(文野)이며 남양(南陽) 사람인데, 그의 선조는 연경(燕京)에서 살았다. 홍빈은 내정(內庭)에서 숙위하면서 공로를 쌓아서 장관(長官)의 천거로 대도로패주동지(大都路覇州同知)로 임명되었다. 송강부판관(松江府判官)과 도수감경력(都水監經歷), 대상예의원경력(大常禮儀院經歷)을 역임하였다.

 

충숙왕이 참소를 당하여 원에 머무르고 있을 때 홍빈은 왕을 위하여 사력을 다해 그 굴욕을 호소하여 특별히 밝혀내었다. 왕이 복위(復位)하여 고려로 환국할 때 홍빈이 호종하였는데, 왕은 홍빈의 공을 생각하여 장차 본국에 머무르게 하려고 황제에게정동행성이문소(征東行省理問所)의 관리를 제수해 달라고 아뢰고, 도첨의찬성사 판군부사(都僉議贊成事 判軍簿事)에 임명하였다. 충숙왕이 훙서(薨逝)할 때 유언으로 홍빈을 권정동성사(權征東省事)로 임명하였다.

 

당시 조적(曹頔)이 난을 일으켜서 홍빈과 정동행성의 관리 등을 거느리고 충혜왕(忠惠王)의 궁궐을 습격하였다. 조적이 패하여 죽고 나머지 일당들은 모두 순군(巡軍)에 붙잡혔는데 홍빈과 정동행성의 관리들만 용서를 받았다. 원이 조적 일당의 호소를 듣고 사신을 보내 충혜왕과 홍빈 등을 잡아 돌아가서, 왕을 형부(刑部)에 가두고 홍빈 등을 형틀에 묶어 감옥에 가두고 중서성(中書省추밀원(樞密院어사대(御史臺종정부(宗正府한림원(翰林院)이 함께 신문을 하였다. 그러나충혜왕이 스스로 해명하지 못하여 사태가 위태로웠는데 홍빈이 말하기를, “조적은 왕의 종인데, 종이 자기 주인을 해치려고 하였으니 왕법으로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인데도, 왕의 죄는 아직 경감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선왕(先王)의 유언으로 권행성사(權行省事)가 되었으니 일이 국법에 저촉되었으면 제가 마땅히 감당해야 할 것이며, 왕이 죄를 받아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그 말투가 비분강개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홍빈이 위태로워질까 걱정하였으나 홍빈이 말하기를, “내가 모셨던 임금님의 왕자이신데 내가 바로 잡지 못하면 어찌 지하에서 선왕을 뵙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왕이 복위하자 공훈을1등으로 책훈하고 당성군(唐城君)으로 봉하여 부()를 설치하게 하고, 원에아뢰어 홍빈을 행성낭중(行省郞中)으로 삼았다.

 

충혜왕이 원으로 체포되어 가자 홍빈은 덕성군(德城君) 기철(奇轍)과 함께 정동성(征東省)을 임시로 맡아서 기철·채하중(蔡河中) 등과 함께 내탕고(內帑庫)를 봉하였다. 처음에 대언(代言) 인당(印璫)이 내탕고를 봉하려고 원에서 급히 말을 달려오느라고 역마가 죽어버렸는데, 홍빈이 인당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온다기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들 삼한(三韓)이 이제 다시 바로 서겠거니 했는데, 이제 와서 단지 부고(府庫)를 봉하기만 한단 말인가?”하며 소매를 뿌리치고 나가버리니, 그 뒤로부터 병을 핑계 대고 일을 보지 않았다.

 

충목왕(忠穆王)이 왕위를 계승하였을 때, 허정(許政)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중원(中原) 사람으로 홍빈을 무고하여 말하기를, “인당이 왕명을 받들고 왔을 때 홍빈이 손을 들고 성난 모양으로 말하기를, ‘황제께서 8살짜리 어린 아이에게 나라를 다스리게 하였으니 나라의 안위를 알 만하다.’라고 하고 가버리고는 이틀 동안 조회에 나오지 않았습니다.”라며 하고는 채하중을 데려다 증언하게 하였다. 이 일이 보고되자 원 중서성에서 사람을 파견하여 와서 국문하였는데, 두 사람의 말이 마침내 서로 어긋나 도리어 허정이죄를 입게 되었다. 홍빈이 말하기를, “나는 여기에 오래 있지 못하겠다.” 하고는 마침내 원으로 갔다. 흥국로총관(興國路摠管)이 되었다가 뒤에 환국하였다.

 

공민왕(恭愍王)이 즉위하자 우정승(右政丞)으로 임명하고 추성익재동덕협의보리공신(推誠翊戴同德協義輔理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며 당성부원군(唐城府院君)으로 봉하였다. 홍언박(洪彦博이공수(李公遂)와 함께 정방(政房)의 제조(提調)가 되었다가 얼마 후에 사직하였는데 왕이 내인(內人)을 보내어 다시 불렀으나 홍빈이 두문불출하자 재추(宰樞)들이 그의 집에 모여 간청하자 그제야 나왔다가 얼마 후 다시 사직하였는데 죽으니 나이 66살이었다. 시호는 강경(康敬)인데, 아들 홍수산(洪壽山)은 벼슬이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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