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익청(曹益淸)은 창녕(昌寧) 사람이다. 충숙왕(忠肅王) 때 중랑장(中郞將)이 되었다.
충혜왕(忠惠王)이 왕위를 이어 원(元)에 있었는데 정승(政丞) 정방길(鄭方吉) 등이 왕의 부자(父子) 사이를 이간질하였다. 그때 조익청이 충혜왕의 처소에서 오자 충숙왕이 불러서 말하기를, “왕이 나를 따르는 신하의 관직을 빼앗은 것은 무엇 때문인가? 비록 심왕(瀋王) 왕고(王暠)가 왕이 된다고 하더라도 어찌 이같이 하겠는가? 내가 원으로 가서 황제께 아뢰고자 하는데 어떻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조익청이 아버지에게서 아들에게로 서로 왕위를 전하는 법에 대하여 힘써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절실하였으므로 충숙왕이 옳다고 여겨 납득하였다.
〈조익청이〉 여러 번 자리를 옮겨서 대호군(大護軍)이 되자 대언(代言) 윤환(尹桓)과 함께 충혜왕이 가까이 하는 간악한 소인배[惡小輩]들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세운 후 송팔랑(宋八郞)과 홍장(洪莊) 등을 잡아 가두고 고문을 심하게 하였다. 홍장이 맺힌 감정을 풀려고 조익청을 참소하였으므로 제주안무사(濟州安撫使)로 폄출되었다. 뒤에 이운(李芸), 기철(奇轍) 등과 함께 원에 있으면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충혜왕이 탐욕스럽고 음란하며 도리에 어긋난다고 극언한 후 〈원 내지(內地)처럼〉 성(省)을 설치하여 백성들을 안정시키라고 요청하였다. 충정왕(忠定王) 때에 찬성사(贊成事)로 임명되었다.
공민왕(恭愍王) 초에 조익청 집안의 노비가 선성(宣城) 달로화적(達魯花赤, 다루가치) 노연상(魯連祥)의 말을 샀었다. 노연상이 반란을 일으키자 재상들이 군사를 동원하여 그를 체포하는 것을 의논하였는데 조익청이 혼자 반대하면서 말하기를, “기병 한 명이면 가히 부를 수 있는데 하필 군대를 동원하려는가?”라고 하였더니 어떤 자가 참소하기를, “조익청이 노연상의 말을 받았다.”라고 하였으므로 감찰사(監察司)가 그 노비를 곤장으로 때리고 국문하였으나 노비가 자복하지 않았다. 감찰사가 다시 조익청이 음사(淫祀)를 지냈으므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청하였으나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뒤에 좌정승(左政丞)으로 임명하였으며 하성부원군(夏城府院君)으로 봉하고 순성직절동덕찬화공신(純誠直節同德贊化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공민왕 2년(1353)에 죽었으며 시호는 양평(襄平)이다. 우왕 2년(1376)에 공민왕의 묘정(廟庭)에 배향(配享)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