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지(裴廷芝)는 자가 서한(瑞漢)이며, 초명(初名)은 배공윤(裵公允)으로 대구현(大丘縣) 사람이다. 겨우 열 살 되었을 때 금위(禁衛)에 소속되어 도지(都知)가 되었다. 원종(元宗) 11년(1270) 개경(開京)으로 환도할 때 배정지는 나이 열한 살이었는데 충성을 다하여 왕을 호종했으므로 그 공으로 대정(隊正)에 보임되었다. 충렬왕(忠烈王) 때 별장(別將)으로서 만호(萬戶) 인후(印侯)를 따라 연기(燕岐)에서 합단(哈丹, 카단)을 공격하였다. 그가 칼을 뽑아 들고 말을 달려 향하는 곳마다 적병이 쓰러졌으나, 날아온 화살이 그의 턱뼈[輔車]를 꿰뚫었으나 상처를 싸매고 다시 싸워서 적의 머리를 숱하게 베어서 〈그 공으로〉 중랑장(中郞將)으로 직급을 올려서 임명하였다. 인후가 그를 데리고 원(元)으로 갔더니 황제가 불러 보고 말하기를, “용사로다!”라고 하고 백금(白金) 50냥을 하사하였다.
뒤에 양부(兩府)의 천거로 충청도(忠淸道)와 전라도(全羅道)의 찰방(察訪)이 되었는데, 간교한 자들을 억누르고 고아와 자식없는 늙은이들을 보살펴서 그 일대가 평온해졌다. 충선왕(忠宣王)이 왕위를 선양받은 뒤 호군(護軍)으로 임명하였다. 왕은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데는 농업보다 우선 할 것이 없다고 하면서 전농사(典農司)와 유비창(有備倉)을 설치하고 배정지가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5년(1318), 탐라(耽羅)에서 적의 괴수 김성(金成) 등이 반란을 일으키자 배정지를 존무사(存撫使)로 삼아 그들을 토벌케 하였다. 귀환하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8년(1321)에 당쟁으로 옥사가 일어났을 때 그를 곤장 친 후 죽림방호(竹林防護)로 유배보내었는데, 그의 아들 배천경(裵天慶)이 〈아버지〉 대신 유배를 가겠다고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고 함께 유배 보냈다. 〈유배지에서〉 돌아오자 문을 닫아걸고 병을 칭탁하고는 매일 거문고를 타거나 바둑을 두면서 스스로 즐겼다. 이듬해에 죽으니, 나이는 64세였다.
〈배정지는〉 사람됨이 수염이 많고[于思] 희며 몸집이 아주 컸다. 사람들은 모두 그에게 무인의 재략(才略)이 있다고 인정하였으나 행정사무에 재능이 있는 줄은 알지 못하였다. 그는 이익에 대한 말을 입 밖에 내지 않았으며 집에는 조금의 돈도 없었다. 아들은 배성경(裵成慶), 배천경(裵天慶), 배함경(裵咸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