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전지(朴全之)는 죽주(竹州) 사람이다. 그의 부친 박휘(朴暉)는 관직이 전법판서(典法判書)에 이르렀다. 박전지는 약관(弱冠)이 못되는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여 사한(史翰)을 역임하였다.
충렬왕(忠烈王) 5년(1279)에 원(元)의 세조가 조칙을 내려 관리들의 자제[衣冠子弟]들을 선발하여 원에 입시(入侍)하게 하였는데 박전지가 거기에 참여하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원에 머물면서 중원(中原)의 명사(名士)들과 교유하며 고금의 역사를 상고하고 산천(山川)과 풍토(風土)에 대하여 손바닥을 들여다보듯 알게 되었으므로 왕은 그를 중하게 여겼으며 원에서는 정동행성도사(征東行省都事)로 임명하였다. 환국하자 이부(吏部)와 병부(兵部)의 시랑(侍郞)으로 임명되었으나 젊은 나이에 벼슬이 높았으므로 글을 올려 사퇴하고 안동(安東)의 수령으로 나갔다. 왕이 그의 재주를 아꼈으므로 불러서 전중윤 지제교(殿中尹 知製敎)로 임명하였다. 그때 충선왕(忠宣王)이 세자(世子)가 되자 〈박전지에게〉 명하여 시강(侍講)하게 하였으므로 보좌하고 학문으로 인도한 바가 많았다. 또 세자를 시종하여 원으로 가서는 어렵고 험한 것을 꺼리지 않았다. 세자가 왕위를 선위(禪位)받아 사림원(詞林院)을 설치하고 박전지와 최참(崔旵)·오한경(吳漢卿)·이진(李瑱)을 학사(學士)로 삼아 전주(銓注)를 관장하게 하였다. 〈그리고〉 박전지 등에게 명하여 즉위 교서를 짓게 하고 능(綾)·견(絹)·주(紬)·저포(苧布) 각 15필씩과 상승국(尙乘局)의 안장을 갖춘 말을 하사하였다. 뒤에 또 박전지·오한경·이진·권영(權永)에게 붉은 띠[紅鞓]를 하사하였다.
〈충선〉왕은 늘 주변 사람들을 물리치고 사림원(詞林院)에 행차하여 박전지 등과 함께 다스리는 이치에 대하여 의논하고 손수 술과 음식을 하사하면서 조용하게 하루를 보내기도 하였으며, 혹은 한밤 중까지 같이 있다가 궁궐의 초[燭]를 하사하여 그 집으로 보내주기도 하니, 총애가 비할 데가 없었다. 〈박전지는〉 곧이어 삼사좌사 사림학사승지(三司左使 詞林學士承旨)로 임명되었다가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옮기고 중경유수(中京留守)로 임명되었다. 충렬왕이 복위하자 참소를 당하여 파직되었으나, 충선왕이 복위(復位)하자 동궁(東宮)에 속했던 옛 관료라 하여 연흥군(延興君)으로 봉하였다. 충숙왕(忠肅王) 8년(1321)에 수첨의찬성사(守僉議贊成事)로서 치사(致仕)하였는데, 당시에 심왕(瀋王)의 일당이 왕을 죄로 무고하여 〈원(元)의〉 도성(都省)에 상서(上書)하면서 박전지에게 서명하라고 다그치니, 박전지가 분연히 말하기를, “개 같은 놈이 감히 나를 더럽히려느냐?”라고 하고는 드디어 아들 박원(朴瑗)을 〈원에〉 보내 왕의 처소에 〈그 소식을〉 알렸다. 왕이 환국하게 되자 박원을 우부대언(右副大言)으로 임명하여 관리의 전선(銓選)을 담당하게 하고 박전지를 다시 불러 일을 보게 하였으나 나이가 많다고 굳이 사양하였다. 그러자 〈박전지를〉 정승(政丞)으로 임명하여 치사하게 하고 추성찬화공신(推誠贊化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으며 녹봉은 예전처럼 주었다. 〈충숙왕〉 12년(1325)에 죽으니 나이는 76살이었으며, 시호는 문광(文匡)이다.
〈박전지는〉 사람됨이 온화하고 자애로웠으며, 일을 당하면 강직함과 과단성이 적었다. 어려서 강보에 싸여 있을 때 외조부인 이장용(李藏用)이 그를 보고 말하기를, “이 아이는 반드시 집안을 일으킬 것이니 잘 길러라.”라고 하였다. 장성하자 경전과 사서(史書)에 통달하였고 술수(術數)를 연구하여, 사람들을 깨우치는데 게으르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사귈 때에는 모나지 않으니, 이장용이 자기 집안에서 보배로 여기던 서적들을 모두 전해 주었다. 충선왕이 일찍이 불러서 내전에 들어갔더니 광평군(廣平君)과 강릉군(江陵君)이 왕을 모시고 있었다. 왕이 각자 이름을 쓰게 하고 보여주면서 이르기를, “누가 나라를 물려받을 자냐?”라고 하였는데, 박전지가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더니 왕이 굳이 대답을 요구하자 한참 뒤에 자리를 피하면서 말하기를, “두 군(君)마마의 필적을 살펴보니 아군(亞君)이 왕위[當璧]를 이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몇 개월도 되지 않아서 광평군이 죽고 강릉군이 과연 후계자가 되었으니 그의 식견이 이와 같았다.
아들 박원(朴遠)의 초명(初名)은 박원(朴瑗)이다.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은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이르렀다. 충숙왕의 총애를 받아서 오랫동안 정권[政柄]을 맡았다. 성품은 어질고 부드러웠지만 청렴하지 못하다[簠簋]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