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진(李瑱)은 자가 온고(溫古)이며, 초명(初名)은 이방연(李方衍)으로, 경주(慶州) 사람이며 삼한공신(三韓功臣) 이금서(李金書)의 후손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백가(百家)에 널리 통하였고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사람들이 간혹 어려운 운[强韻]으로 시험하여도 붓을 들면 바로 지어내니 마치 오랫동안 구상한 것 같았다. 상서(尙書) 이송진(李松縉)이 한 번 보고 기특하게 여겨서 말하기를, “큰 그릇이로다.”라고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여 광주사록(廣州司錄)에 임명되었고 직한림원(直翰林院)으로 선발되었다. 충렬왕이 시부(詩賦)로 친히 문신들을 시험하여 9명을 뽑았는데 이진이 두 번째였다. 기거사신(起居舍人)과 중서사인(中書舍人)을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안동부사(安東府使)가 되어 민폐를 없애고 학교를 일으키는 데에 힘을 쏟았다.
〈이진은〉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군부총랑(軍簿摠郞)이 되었고 우사의대부 사림원학사(右司議大夫 詞林院學士)로 승진하였다가 갑자기 대사성 밀직승지(大司成 密直承旨)로 옮겼으며 전법판서(典法判書)로 고쳤다. 충선왕(忠宣王)이 인종(仁宗)을 받들어 내부의 어려움을 평정하고 고려의 오래된 폐단을 개혁할 때 이진이 상서(上書)하였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전하께서는 황실에 공을 세워서 대우가 나날이 융숭해지지만, 진실로 공이 있어도 자랑하지 말 것이며, 은총 속에 살지만 두려운 듯이 행동하시고 또한 조정의 신하들과는 물과 젖이 섞이는 것처럼 화합하시옵소서. 또한 작위[名器]는 지극히 중요한 것이오니 공이 없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주지 말아야 하는 것인데 하물며 족당에 미쳐서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왕(父王)께서 하사하신 것이라고 사칭하면서 부고(府庫)의 돈과 곡식을 훔치는 자들은 사람들이 모두 미워하고 있으므로 살피시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그 사급(賜給)한 토지 중에서 공이 있는 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거두어들이십시오. 쓸데없는 관직이 있고 관원 수도 많아서 비용과 녹봉으로 허비되고 있으니 6부(部)의 상서(尙書)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병합하고 줄여야 하옵니다. 근년에 가뭄과 흉년이 들어서 민이 모두 먹고살기가 어려우니 마땅히 급하지 않은 부역을 혁파하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왕이 가상히 여겨서 받아들이고 정당문학 상의도첨의사사(政堂文學 商議都僉議司事)로 〈단계를〉 뛰어넘어 임명하였다가 찬성사(贊成事)로 승진시켰다.
충숙왕(忠肅王)이 즉위하자 검교정승 임해군(檢校政丞 臨海君)으로 임명하였다. 〈충숙왕〉 7년(1320)에 아들인 이제현(李齊賢)이 과거를 주관한 후 문생(門生)을 거느리고 〈이진의〉 무병장수를 기원하자 충선왕이 은병(銀甁) 200개와 쌀 500석을 하사하여 그 비용으로 쓰게 하였다. 이진과 그의 아내가 모두 건강하여 병이 없었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그것을 영예롭게 여겼다. 이진이 일찍이 이제현의 세력을 믿고 다른 사람의 노비를 많이 탈취하였으므로 슬프게 하소연하는 사람들이 날마다 그 집 앞에 줄을 서니 교감(校勘) 최면(崔沔)이 이진의 집 문에서 목을 매고 죽었으므로 변위도감(辨違都監)이 〈노비를〉 최면의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판결하였다. 〈충숙왕〉 8년(1321)에 죽으니 나이는 78살이었으며, 시호는 문정(文定)이다. 〈이진은〉 사람됨이 체격이 크고 도량이 넓었지만 조정에 있으면서 건의한 바가 없었다. 관직에서 물러나와 한가로이 지내면서 유자·승려들과 시를 읊고 술을 마시며 소요하였다. 아들은 이관(李綰)·이제현·이지정(李之正)이다. 이제현은 전기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