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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윤선좌(尹宣佐)

작성자무한|작성시간26.06.21|조회수17 목록 댓글 0

 

윤선좌(尹宣佐)는 자가 순유(淳臾)이며 시중(侍中) 윤관(尹瓘)7세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남달리 영특하였으며 7살에 능히 글을 지었고 충렬왕(忠烈王) 때 장원급제하고 김해부(金海府)의 장서기(掌書記)를 거쳐 내직으로들어가 비서랑 직문한서(秘書郞 直文翰署)에 보임되었다. 충선왕(忠宣王) 초에 좌정언(左正言)으로 임명되었고 다시 우사보(右思補)로 옮겼으며 거듭 승진해서 내서사인 선부의랑(內書舍人 選部議郞)이 되었다. 전라도안찰사(全羅道按察使)에 있을 때 강직하기로 소문이 났으며 이후도진령(都津令)으로 승진하였다. 충숙왕(忠肅王)이 평소에 그의 이름을 들었으므로 즉위하자 성균좨주(成均祭酒)로 임명하여 부인(符印)을 관장할 것을 명하여 가까이에 두었다. 이후감찰집의(監察執義)로 전임하여서 윤신걸(尹莘傑백원항(白元恒)과 함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진강(進講)하였으나, 얼마 후 어떤 일 때문에 파직되었다가 다시 집의(執義)로 임명되었다.

 

그때 심왕(瀋王) 왕고(王暠)()영종(英宗)에게 총애를 받게 되자, 왕에게 죄가 있다고 무고하여 왕위를 뺏으려고 하였는데, 벼슬을 얻지 못할까 걱정하는 무리들[患得之徒]이 모두 그 편에 붙었다. 권한공(權漢功)과 채홍철(蔡洪哲) 등이 여흥군(驪興君) 민지(閔漬)와 영양군(永陽君) 조호(趙瑚) 등을 불러서 왕고를 왕으로 세울 것을 청하고자, 백관(百官)을 자운사(慈雲寺)에 모이게 하여 원의중서성(中書省)에 올리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독촉하였다. 사람들이 다투어 서명하러 나아갔으나 윤선좌는 홀로 말하기를, “나는 우리 임금님의 잘못을 알지 못한다. 신하로서 임금을 참소하는 짓은 개나 돼지도 하지 않는다.”라고 하고 침을 뱉고 나가 버렸다. 이로 말미암아 대간(臺諫)과 문한(文翰)들은 서명하지 않을 수 있었다. 사태가 진정되어 중서성에서 그 문서를 돌려보냈는데 왕은 서명하지 않은 사람들을 세어보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윤선좌가 헌사(憲司)에 있지 않았다면, 그 외의 일은 알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충숙왕이 원에 머문 지 5년이 되어, 물자와 비용이 부족하였는데, 왕고의 일당이 그 사정을 알고 부고(府庫)를 봉하여 왕에게로 보낼물자의 운송을 막아버렸다. 윤선좌가 찰관(察官) 조관(趙琯)에게 격문을 보내어 주관하는 자를 독촉하고 꾸짖었더니 그제야 물자의 운송이 행하여졌다. 왕이 귀국하자 판전교(判典校)로 임명하고 얼마 뒤에 민부전서(民部典書)로 삼아 한양윤(漢陽尹)으로 나가게 하였다. 얼마 뒤에 왕과 공주(公主)가 용산(龍山)으로 가서 주변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 부윤(府尹)이 청렴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목민관으로 임명하였으니 너희들은 삼가 혼탁한 짓을 하지 말라.”라고 하였다. 충혜왕 원년(1331)에 나이가 들었으므로 치사(致仕)하였다. 충숙왕 후4(1335)왕이친히 수령(守令)을 전주(銓注)하다가 계림윤(鷄林尹)에 이르자 붓을 놓고 생각하기를, “신하들이 조정에 가득하지만 윤 부윤같은 사람이 없도다.”라고 하고는 바로 그의 이름에 점을 찍으니, 그가 왕에게 신임을 받은 것이 이와 같았다. 이듬해에 첨의평리 예문관대제학 감춘추관사(僉議評理 藝文館大提學 監春秋館事)로 임명한 후 그대로 치사하게 하였다.

 

충혜왕 후4(1343) 가벼운 병이 생기자 자녀들을 불러 앞으로 오라하고는 말하기를, “오늘날 형제들이 많이 서로 화목하지 않는 것은 재산다툼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면서 아들 윤찬(尹粲)에게 명하여 문계(文契)를 써서 재산을 고루 나누게[均分] 하였으며, 또 훈계하여 말하기를, “화목하고 다툼이 없다는 것을 너희 자손들에게 훈계하라.”라고 하고, 말을 마친 후 의관을 정제하고 죽으니 나이 79살이었다.

 

윤선좌는평생 가산(家産)을 늘리지 않았으며 성품은 술을 마시지 않고 한 번도 농담이나 가무(歌舞)를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과 교유(交遊)하는 것에 신중을 기하였으며 일을승낙하는 것을 중하게 하였으며 한가하게 거할 때도 오히려 손님을 대하듯이 행동하였으며 오직 경서(經書)와 사서(史書)를 읽는 것으로써 스스로 즐겼다. 만약 질문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때마다 경전에 의거하여 대답하였다. 노장(老莊)과 형명가(刑名家)의 책들도 깊이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배우고자 하는 자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문장이 명료하고 간결해서 당시의 표전(表箋)들이 그의 손에서 작성된 것이 많았다. 아들은 윤체(尹棣), 윤찬(尹粲), 윤음(尹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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