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조년(李兆年)은 자가 원로(元老)이며 경산부(京山府) 사람이다. 부친 이장경(李長庚)은 본래 경산부의 향리였는데 공손하고 검소함으로 위엄이 있어서 고을 사람들이 두려워하였다. 나이가 들어서 집에 있을 때도 부(府)의 관리들이 출입할 때 갈도(喝道)하는 소리를 들으면 반드시 평상(平床)에서 내려와 땅에 엎드렸다가 그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될 때까지 기다린 연후에야 다시 앉았다.
이조년은 젊어서 지조와 절개를 가슴에 품었고 재주와 도량이 있었으며, 학문에 힘쓰고 문장에 능하였다. 나이 스물이 안 되었을 때부터 풍채가 빼어났으므로 초계(草溪) 사람 정윤의(鄭允宜)가 경산부사로 왔을 때 한 번 보고는 특별한 사람인 것을 알고 자기 딸을 시집보냈다.
충렬왕(忠烈王) 20년(1294)에 향공진사(鄕貢進士)로서 과거에 급제하여 안남서기(安南書記)가 되었다. 그 후 여러 번 옮겨 예빈내급사(禮賓內給事)를 지낸 뒤 〈외직으로〉 나가 지합주(知陜州)가 되었고, 〈내직으로〉 들어와서 비서랑(秘書郞)이 되었다. 〈충렬왕〉 32년(1306)에 왕을 따라 원(元)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왕유소(王惟紹)와 송방영(宋邦英)이 왕의 부자(父子)를 이간질하자 시종하던 신하들이 모두 의심을 품고 두려워서 도망가 숨어버렸는데 조적(曹頔)이 가장 먼저 달아났다. 〈그러나〉 오직 이조년은 다른 마음이 없음을 믿고 모든 행동을 신중히 하였지만 예에 따라 멀리 유배되었으며, 돌아와서 고향에서 13년 동안 지내면서도 일찍이 한 번도 자신이 죄가 없음을 말로 드러낸 적이 없었다. 충숙왕(忠肅王)이 원에 억류된 지 5년이 되자, 심왕(瀋王) 왕고(王暠)가 내심 왕위를 노리자 〈왕의〉 좌우 측근 중에서도 배반하는 자들이 많아졌다. 이조년이 분개하여 단신으로 원으로 가서 중서성(中書省)에 글을 올려 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니 〈원의〉 조정에서 그의 행동을 아름답게 여겼다. 충숙왕이 환국하자 감찰장령(監察掌令)으로 제수하였다가 전리총랑(典理摠郞)으로 전임시켜 관동존무사(關東存撫使)로 보냈으며, 곧 다시 불러들여 판전교사(判典校事)로 임명하고 군부판서(軍簿判書)를 더하였다.
충혜왕(忠惠王)이 세자(世子)로서 〈원에〉 입조(入朝)하였을 때 승상(丞相) 연첩목아(燕帖木兒, 엘테무르)가 보고는 크게 기뻐하며 자기 자식처럼 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충숙왕이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자, 황제에게 아뢰어 충혜왕에게 왕위를 계승하라는 명이 내리게 하였는데, 당시 태보(太保) 백안(伯顔, 바얀)은 연첩목아가 권력을 전횡하는 것을 미워하여 충혜왕을 대할 때 예를 갖추지 않았다. 충숙왕이 복위(復位)하고 충혜왕은 〈그대로〉 원에서 숙위(宿衛)하고 있었는데, 그때 연첩목아는 이미 죽었으므로 백안은 더욱 야박하게 충혜왕을 대했다. 충혜왕이 연첩목아의 자제와 위구르[回骨] 소년배들과 술을 마시면서 장난하다가 어떤 위구르 여자를 사랑하게 되어 이따금 숙위하러 가지 않자, 백안이 그를 더욱 미워하여 〈충혜왕을〉 지목하여 발피(撥皮)라고 불렀는데, 민간에서 호협(豪俠)을 발피라고 하였다. 시종하던 신하들은 모두 실망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이조년이 나아가 경계하며 이르기를, “전하께서는 천자(天子)를 섬기면서 마땅히 하루하루를 삼가셔야 할 것인데 어찌하여 예의를 버리고 마음을 방종하게 하여 허물을 빨리 불러들이십니까? 그러나 이것은 전하의 허물이 아니옵니다. 전하께서는 보모[阿保]의 집에서 성장하시어 함께 어울려서 노는 자들 가운데는 무뢰한 자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 뒤에 박중인(朴仲仁)과 이인길(李仁吉)이 실제로 〈전하의〉 곁에 있었으니, 전하께서 누구를 따라서 바른 말을 듣고 바른 일을 볼 수 있었겠습니까? 유학(儒學)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비록 순박하고 서투르지만 모두 경사(經史)를 익혔고 염치를 알고 있는데도, 전하께서는 그들을 지목하여 사개리(沙箇里)라고 하시니 이 무슨 말씀이십니까? 전하께서는 아첨하는 자들을 멀리 하고 유자(儒者)를 가까이 하시어 행동을 고치고 스스로를 경계하시면 아무 일이 없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천자의 위엄이 지척에 있사오니 그것이 엄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왕은 그 말을 견디지 못하고 담을 뛰어 넘어서 달아났다.
조적(曹頔)의 난이 일어나고 충혜왕(忠惠王)이 연경(燕京)으로 붙잡혀가자 이조년(李兆年)이 따라갔다. 백안(伯顔, 바얀)이 묵은 감정을 품고 있었으므로 왕과 조적의 무리를 대질시키자, 이조년이 비분강개하여 이제현에게 말하기를, “내가 승상(丞相) 앞에서 얼굴을 맞대고 호소하면 그의 뜻을 되돌릴 수 있겠지만, 〈군사들이〉 줄지어서 창을 들고 문을 지키고 있으니 그 문 앞에서 부르짖을 수도 없소. 다행이 그가 성의 남쪽으로 사냥을 나가게 된다면 내가 길가에서 글을 올리며 말발굽 아래에서 머리를 깨뜨려 죽음으로써 우리 임금의 일을 밝힐 것이니, 그대는 붓을 잡고 내가 올릴 글을 써 주시오.”라고 하였다. 이어 밤에 일어나서 목욕하고 닭이 울면 가려고 하였는데, 백안이 마침 이날 패하였으므로 글은 끝내 올리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들은 자들은 숙연해지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말하기를, “담이 몸보다 큰 사람은 이공(李公)뿐이다.”라고 하였다.
충혜왕이 왕위를 이어받고 환국하여 공을 녹훈(錄勳)할 때 이조년은 당연히 추밀(樞密)이 될 만하였으나 왕이 말하기를, “이조년은 늙었으나 그 뜻이 가상하다.”라고 하며 정당문학 예문대제학(政堂文學 藝文大提學)으로 임명하고 성산군(星山君)에 봉하였다. 왕이 일찍이 북궁(北宮)에서부터 걸어서 송강(松岡)에 가서 참새를 잡은 적이 있었는데, 이조년이 지름길로 나아가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전하께서는 어찌 〈원에서 고생하시던〉 명이(明夷)의 시절을 잊으십니까? 지금 간악한 소인배들이 〈전하의〉 위엄을 빌어 부녀자들을 겁탈하고 재물을 빼앗으므로 민이 삶을 즐기지 못하나이다. 신(臣)은 조만간에 화가 생길까 두려운데도 이들을 구휼하지 않고 하잘 것 없는 오락을 즐기려고 하시나이까? 전하께서 늙은 신하의 말을 들으시어 아첨꾼들을 제거하시고 현량(賢良)을 등용하여 훌륭한 정치에 힘쓰고 도모하실 것이며 다시 부질없는 놀음을 하지 않으신다면 늙은 신하는 비록 죽더라도 지하에서 눈을 감겠나이다.”라고 하였다.
처음에 상인 임신(林信)의 딸이 단양대군(丹陽大君)의 노비로서 사기(沙器) 그릇 파는 것을 업(業)으로 하고 있었다. 왕이 보고 총애하여 임신을 대호군(大護軍)으로 임명하였다. 하루는 임신이 기륜(奇輪)을 구타하였는데 왕이 임신의 편을 들었으므로 직접 가서 기륜의 집을 부숴버리자 이때 〈이조년이〉 아울러 간언하였다. 또 말하기를, “신은 과분하게 나라의 은혜를 입어 지위가 정당(政堂)까지 이르러 신에게는 만족스러우니 오직 전하의 결정만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크게 노하여 〈간언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얼마 후 따뜻한 말로 사과하고 돌려보내었다. 이조년이 집으로 돌아온 뒤에 탄식하기를, “임금의 연세가 지금 한창 때라 하고 싶은 대로 하시는데, 나는 이미 늙었고 또 돕는 것도 없으니, 떠나지 않으면 반드시 화가 미칠 것이다. 또한 여러 번 간하여도 받아들이지 않으시니 책임이 돌아갈 곳이 있을 것이다. 지금 내가[兆年] 능히 그 미덕을 순하게 하지 못하고 그 악행을 늘리는 것에만 알맞을 뿐, 〈이는〉 신하가 임금을 아끼는 도리가 아니니, 차라리 떠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는 이튿날 말 한 필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세상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뒤에 이조년의 동생인 이연경(李延慶)이 〈충혜〉왕을 알현하자 왕이 말하기를, “그대의 형이 나를 욕보였도다.”라고 하였다. 이연경이 자기 형은 늙은 미치광이라고 대답하자 왕은 기뻐서 쌀과 콩을 50석씩, 베 500필을 하사하였다. 충혜왕 3년(1342)에 〈왕을〉 시종한 공을 1등에 책봉하고 성근익찬경절공신(誠勤翊贊勁節功臣)의 칭호를 하사한 후, 벽에 그의 초상을 그려 걸고 부모와 처자에게 작위(爵位)를 주고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였다. 이듬해에 죽으니 나이 75살이었으며 시호는 문렬(文烈)이다.
〈이조년은〉 체구가 작았지만 날래고 재빨랐으며, 의지가 굳어서 거리낌 없이 직언하였으므로, 엄격함 때문에 〈다른 사람이〉 만나기를 꺼렸다. 〈이에〉 매번 〈대궐에〉 들어가서 알현할 때, 왕이 그의 신발 소리를 듣고 말하기를, “이조년이 오는구나.”라고 하면서 좌우의 사람들을 물리치고 몸가짐을 단정히 하고 기다렸다. 여러 벼슬을 거치면서 훌륭한 치적이 많았으므로 공민왕(恭愍王) 때에 그 공을 의논하여 성산후(星山侯)를 추증하고 충혜왕의 묘정(廟廷)에 배향하였다.
아들 이포(李褒)는 관직이 검교시중(檢校侍中)에 이르렀으며, 성품은 순박하고 후덕하였으며 언제나 예의가 발랐다. 이포의 아들은 이인복(李仁復)·이인임(李仁任)·이인미(李仁美)·이인립(李仁立)·이인달(李仁達)·이인민(李仁敏)이다. 이인복과 이인임은 따로 전기가 있다. 이인미는 판서(判書)에, 이인립은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에, 이인달은 주부(注簿)에, 이인민은 문하평리(門下評理)까지 올랐다. 이조년의 조카는 이승경(李承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