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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열전

문열공 조헌(趙憲)선생 전장 기적비(戰場紀蹟碑)

작성자무한|작성시간08.06.01|조회수93 목록 댓글 0

 

청주(淸州) 조헌전장기적비(趙憲戰場紀蹟碑)


문렬공(文烈公) 중봉(重峰) 조선생(趙先生)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篆題>

조선국(朝鮮國) 문렬공(文烈公) 중봉(重峰) 조선생(趙先生) 전장기적비(戰場紀蹟碑)


가선대부(嘉善大夫) 형조참판(刑曹叅判) 겸 수홍문관대제학(兼 守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김진규(金鎭圭) 지음.

 

통훈대부(通訓大夫) 원임행청도군수(原任行淸道郡守) 대구진관병마(大丘鎭管兵馬) 동첨절제사(同僉節制使) 이수당(李秀棠) 씀.


통훈대부(通訓大夫) 행사헌부지평(行司憲府持平) 겸춘추관기주관(兼春秋館記註官) 이방언(李邦彦)이 전액을 씀.


청주성(淸州城) 서문(西門) 바깥에 옛 전장(戰場)이 있는데, 문렬공(文烈公) 중봉(重峯) 조선생(趙先生)이 일찍이 여기에서 왜구(倭寇)를 무찔렀다고 전한다.


대개 만력(萬曆) 정해(1587년)와 신묘(1591년) 사이에 일본의 괴수 히데요시(秀吉)가 사신을 보내 우리의 사정을 염탐하고 또 길을 빌러달라고 하였다. 선생은 이때를 전후하여 상소를 올려 하늘에 두 해가 없고 땅에 두 왕이 없으며, 명(明)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 저들은 임금을 죽이고 칭호를 참람되이 사용하며 중국을 범하려고 하니, 청컨대 그 사신의 목을 베어 천자에게 아뢰고 이웃나라를 깨우치자고 하였다.


그러나 답을 듣지 못하였는데, 왜적들이 쳐들어와 임금이 수레를 타고 피난길에 나서게 되었다.

선생은 이때에 옥천(沃川)에 있었는데, 난리의 소식을 듣고는 통곡하며 의병을 일으켜 먼저 보은(報恩)에 있는 적을 공격하고자 하였다. 순찰하는 이들이 길이 막힘에, 선생은 오른쪽 길로 돌아 1,600여 명을 이끌고 깃발을 나부끼고 격문(檄文)을 돌리며 적이 나아가는 것을 막았다. 적병들 중 청주(淸州)에 웅거(雄據)하고 있는 자들의 기세가 성하여, 방어하거나 방어를 돕던 여러 군사들이 모두 궤멸하여 의사(義士) 박우현(朴友賢)이 전사하니 선생이 이에 달려가 승(僧) 영규(靈圭)의 군과 합세하였다.


임진(1592년) 8월 초하루에 적들과 청주성(淸州城)의 서쪽에서 맞닥뜨렸다. 친히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여 크게 이기니 적들이 성안으로 도망쳤다. 우리 군대가 승세를 타고 장차 성을 넘어 들어가려 하는데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며 하늘이 컴컴해졌다. 선생이 살펴보니 병장기를 든 여러 적병들이 밤에 시체를 불태우고는 북문(北門)을 통하여 몰래 빠져나가는데, 좌로(左路)의 모든 적들이 또한 그것을 바라보고는 달아나는 것이었다. 적중(敵中)에서 빠져나 자들이 적들에게 서로 이르기를 “이 군사들은 청주성을 방어하던 무리들에 비할 바가 아니니, 그 예봉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였다.


선생이 더욱 군사를 모아 임금을 쫓아 달려 나가는데, 길에서 금산(錦山)에 있는 적들이 장차 양호(兩湖)를 침범하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리나라가 만약 양호(兩湖)를 잃는다면 다시 일으켜 세울 근거가 없어지는 것이라고 여겨 군대를 돌려 순찰사(巡察使)에게로 갔다. (그런데 순찰사가) 의병들의 가속들을 가두고 붙잡아 선생을 따르지 못하게 하니, 선생을 따르는 자는 단지 700명에 불과하였다. 이미 싸움은 적은 수로 많은 적과 싸우는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라, 선생과 한 무리의 군대는 모두 순절(殉節)하였던 것이다.

 

선생은 군대를 일으킨 이래 충의(忠義)로 사람을 감격시켰을 뿐 한 번도 형벌로 위엄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군사들이 스스로 명령에 따르니 능히 초야의 도망가고 버린 무리들로써 오합지졸(烏合之卒)을 몰아서 솔개처럼 날랜 적들을 잡아 이처럼 크게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금산의 싸움에서 다른 이들의 어지럽히고 방해하는 바가 되지 않았더라면 거기서도 당연히 청주에서와 같이 크게 이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 뿐 만이 아니라 선생이 왜(倭)의 일에 대하여는 본래부터 소상히 헤아리고 있어서, 이미 호남(湖南)과 영남(嶺南)지역을 수비하고 방어하는 방책을 조정에 미리 이야기하였으며, 또 권세있는 이들에게 부디 성가퀴를 늘리고 해자(垓字)를 준설(濬渫)하여 전쟁에 대비하도록 경계하였던 것이다.


하늘의 북소리를 듣고 하늘의 상을 살펴서, 적들이 바다를 건너올 것과 왕자들이 사로잡힐 것을 미리 알았으니, 만약 미리 이를 살펴 근심하는 이가 일찍 쓰임을 당해 그 계획을 펼 수 있었다면, 그 공적이 어찌 적진에 이르러 단지 전략을 짜고 결단하는 데에 그쳤을 것인가?


그리고 하물며 왜사(倭使)가 왔을 때에 조정이 모두 겁내고 의혹되었으나 홀로 대의(大義)로 항거하였으니, 진실로 그의 말대로 그때에 행하였다면 적도 반드시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을 것이니, 어찌 병장기를 쓸 일이 있었겠는가? 간사한 소인배의 배척을 당하여 곤궁에 처하였으나 전쟁이 일어나서야 비로소 그 말이 옳았음을 알게 되었는데, 또 꺼리고 질시함을 입어 공(功)을 이루지 못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물러나 생각해 보건대 선생이 능히 적의 움직임을 간파하고 제압하여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지혜로써 능히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진실로 정성이 지극한 곳에 이르러서 그렇게 된 것이며, 또 여러 차례 상소를 올려 말한 것도 또한 한때의 비분강개한 마음이 발한 것과는 다른 점이 있었다.


대개 선생은 순일(純一)하고도 강대(剛大)한 자질에다가 그 학문에도 연원(淵源)이 있어서 배운 것을 실천함이 독실(篤實)하였으며, 평소에 힘쓴 바가 모두 하늘의 명(命)과 백성의 떳떳한 도리의 소중함이었을 뿐, 조금도 이해(利害) 관계의 잡된 일이 섞인 적이 없었다.


그런 까닭에 의리가 밝혀지고 이치에 달통하여, 어떤 일을 하고자 하면 마치 해와 달이 높이 걸려 있어 아무런 가림이 없는 것과 같고, 강하(江河)의 흐름이 막히거나 지체하는 일이 없는 것과 같았으니, 이런 까닭에 능히 바다 동쪽의 한 나라에서 춘추(春秋)의 일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선생이 일찍이 선생의 학문을 칭송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지극히 큰 것을 논하면서도 마치 집안의 일을 말하듯이 하고, 천하의 지극히 어려운 일에 처해있으면서도 마치 매일 밥 먹고 숨 쉬듯 한다.”고 하였으니 이 말이야말로 정말 선생의 모습을 잘 들어낸 것이라 하겠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몸을 버려 절개를 지킨 것도 또한 그 한 부분이라고 할 것이니, 하물며 이 전공(戰功)만을 가지고 어찌 선생을 논하기에 족하다 할 것인가? 그렇지만 무릇 덕(德)을 숭상하고 인(仁)을 좋아하게 하는 데에 있어서는, 그 형적(形迹)이 눈에 훤히 들어난다면 그 사람이 마음에 생각하는 것 또한 깊어질 것이다.


아아, 오늘날 이곳을 지나가는 이들이 배회(徘徊)하며 돌아 살펴보고, 이로써 그날의 피를 튀기며 북채를 쥐고 의병을 일으켜 적을 향해 분노하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면, 반드시 마음이 움직이고 머리카락이 곤두서며 늠름하게 마치 자신이 전쟁터에 있는 것처럼 느낄 것이니, 그 그리고 사모하는 마음이 그저 멀리서 듣고 생각했을 때 보다는 두 배가 될 것이다. 또 이로 말미암아 이른바 하늘의 올바른 명(命)과 백성의 떳떳한 도리를 더 확충(擴充)해 나가면, 선생이 이와 같이 될 수 있었던 그 근본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이곳의 한 조각 거칠고 풀에 덮인 땅이 바로 높은 산이나 큰 길과 같이 될 것이니, 어찌 그저 평범한 전쟁터로만 볼 수 있겠는가? 청주(淸州) 사람들이 이런 까닭으로 돌을 세워 이를 기록하고자 하여 그 일을 적어줄 것을 청하니 이에 그 사정을 기록하고 시(詩=銘)를 짓는다. 그 글에 이르기를


오직 하늘이 백성들에게 내려 주신 것이 인(仁)과 의(義)이니,

누군들 인의(仁義)를 갖추고 있지 않겠냐만 혹 이해관계로 말미암아 잃어버리게 되네.

아름답도다 선생이여 학문으로 이를 보충하니,

그 배움이 독실하고 그 본성을 회복하였네.

농사지으며 살고 있는데 섬오랑캐들이 미친개처럼 몰려오니,

누가 병장기를 들고 사직(社稷)을 호위하였던가.

이때에 오직 선생 뿐이시니 전리(田里)에서 군사를 일으켜,

충성심을 떨쳐 적을 토벌할 때에 무리들과 죽음으로서 맹세하였다네.

상당(上黨=淸州)의 언덕 서문 밖 교외에서,

북을 치며 군사들을 독려(督勵)하니 마치 호랑이의 울음소리 같았네.

이에 펼쳐놓고 마음껏 달려가니 수레소리 벼락치듯 하거늘,

벌떼처럼 달려가니 호서지방이 깨끗해졌도다.

믿음직스럽고도 절도있는 병사의 모습, 누가 감히 우리를 대적할건가.

진실로 간사하게 어지럽히는 자들이 없었다면 사졸들이 더욱 많이 모였을 것을.

적들이 쳐들어올 조짐이 있음에 선생이 말씀하시니,

저들의 죄를 성토하여 우리의 의로움이 펼쳐졌도다.

적의 예봉(銳鋒)이 굳세니 선생이 목숨을 내놓으셨고,

조용히 인(仁)을 이루어 이에 그 바름을 얻으셨도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하늘의 이치에 따라서,

드디어 정성스러운 마음 온전히 하였으니 모범으로 삼아 영원히 제사를 모시네.

서문 밖 교외 상당(上黨)의 땅에는,

지난날 성루를 만든 곳을 지금도 찾아볼 수 있네.

음산하게 내리는 비 사이로 펄럭이는 깃발인가,

저 오장원(五丈原)의 싸움과 같이 그 위업을 위수(渭水)가에 남겼네.

이 고장 사람들이 가리키는 곳은 선생이 남긴 공을 사모함이니,

사모함이 깊은 것이지 그 전공(戰功)을 자랑함이 아닐세.

무릇 모든 고을 사람들도 모두 마땅히 지켜야할 도리 갖고 있어,

이에 보고 감격하니 선생이 바로 스승일세.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83년 되는 경인년(숙종 36, 1710년)에 세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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