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의 원성왕릉(괘릉)의 문턱에서 그리스 신화의 영웅, 헤라클래스를 만나다’
천년 고도 경주, 그중에서도 원성왕릉을 지키는 석상들은 여느 왕릉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깊게 패인 눈동자, 무성한 수염, 그리고 한 손에 쥐어진 낯선 몽둥이. 신라 왕이 잠든 곳을 지키는 이들은 왜 우리와 닮지 않은 ‘서역인’의 모습을 하고 있을까?
무인상 (서역인) ㅣ 문인상 (위구르 or 소그드인)
이번에는 고구려 벽화부터 실크로드의 거상 위구르인, 그리고 멀리 그리스 로마 신화의 헤라클래스 도상에 이르기까지, 석상 하나에 응축된 방대한 국제 문화의 흐름을 짚어보고자 한다. 단순히 무덤을 지키는 역사를 넘어, 당대 가장 개방적이고 역동적이었던 통일신라의 ‘글로벌 DNA’를 함께 추적해 보자.
■ 무덤을 지키는 역사(力士)
원래 사찰의 탑이나 무덤을 지키면서 힘쓰는 사람을 ‘역사(力士)’라고 하는데, 특이하게도 역사를 서역인으로 세웠다. 이러한 예는 시대를 한참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도 볼 수가 있다. ‘각저총(角抵塚)’이란 고분에서 두 사람이 씨름하는 장면이 있는데, 한 사람은 무덤 속의 주인공이고 그중 매부리코를 가진 사람이 서역인이다. 그런데 이 씨름은 단순한 경기가 아니라 죽은 사람의 통과 의례라고 봐야 한다. 싸워 이기고 천국이나 극락세계의 관문을 통과하는 그런 상징성을 가진 벽화라 보면 된다.
문명이 발달된 사회에서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면 천국으로 갈 수 있지만, 옛날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려면 힘이 있어야 갈 수 있다고 믿었다. 싸워서 자기 힘으로 극복해야 들어간다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승사자인 문지기를 왜 서역인으로 했을까? 동방의 사람들은 대체로 사람이 죽으면 서쪽으로 간다는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아미타불이 서쪽이 있는 이유, 태어나는 생명은 동쪽에서, 사라져가는 생명은 서쪽이라는 생각을 늘 부각(浮刻)시켰다.
저세상을 표현할 때 상상의 세계에서 서쪽 세계를 만들다가 실존하는 세계를 만들어 버린 거다. 그래서 서쪽 사람들은 죽음의 세계와 근접해있는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진 면도 있고, 실크로드를 개척하면서 서아시아 사람들과 싸우면서 실크로드의 장악력을 이슬람 세계에 빼앗기는 ‘탈라스 전투’를 비롯하여 수많은 전투에서 무섭게 다가오는 서역인의 모습이 많이 부각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위구르인들이 문인상으로 많이 표현되고 있는데, 중국이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실크로드를 장악하고 다스리고 또한 문화의 다양성 면에서 세계적으로 확대해가는 과정에 당시 실크로드 정세를 잘 몰랐다. 그래서 이런 위구르나 소그드인들을 관리로 고용해서 통치해 나갔던 것이다. 이런 사람들은 실크로드 상권을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로 이들이 점차 장안에까지 들어와 활동하다 실질적으로 회계업무와 재무 그리고 외교와 관련된 부서에 위구르 인들이 진출하여 근무하게 된다. 우리 신라에도 그들이 이렇게 진출했다고 보여지는 대목이다!
■ 신라 사회의 국제적 개방성
결국, 통일신라시대 원성왕릉에 이런 외국인들의 석상을 배치해 놓았다는 것은, 통일신라가 국제시장 세계 흐름 속에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무인상은 오른손에 도깨비방망이를 닮은 몽둥이를 쥐고 있고, 턱수염이 유난히 많은데 이런 도상은 그리스로마신화에 등장하는 헤라클래스 상이 전해지다가 이런 형태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우리나라 절에 있는 금강역사와 동일한 존재인데, 헤라클래스가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전해지면서 불교에서는 금강역사로, 왕실의례에서는 이런 무관석으로 등장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하겠다. 그런데 무관은 칼도 있고 창도 있을 텐데 하필 몽둥이를 들고 있어 경호효력이 다소 감소하겠다는 느낌이 들지 않으신가? 이것은 바로 헤라클래스가 ‘헤라’ 여신으로부터 물려받은 12과업 중 첫 번째가 사자를 때려잡아 오는 것인데 이때 사자 가죽에 상처를 남기지 않고 잡아 와야 했다.
■ 사자가죽과 몽둥이를 든 헤라클래스
사실 사자가죽이 굉장히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인데 가죽에 상처를 남기게 되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 그래서 헤라는 상처를 내지 않고 사자를 잡다가 제발 사자에게 물려 죽으라는 의도였지만, 헤라클래스는 지혜롭게 몽둥이로 사자를 때려잡았다. 그래서 헤라클래스를 상징하는 무기가 저런 몽둥이다. 그래서 헤라클래스의 도상에서는 항상 사자 가죽과 몽둥이를 든 형상으로 나타난다.
사자가죽과 몽둥이를 든 헤라클래스
이런 몽둥이가 불교에 들어오면서 금강저라고 하는 각이진 다이마몬드로 만들어진 몽둥이로 바뀌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원래 헤라클래스의 몽둥이 형태에 가까운 것을 가지고 있다.
경주가 실크로드의 출발점이자 종착지라고 할 때 흔히 이런 신상들이 ‘그리스 로마로부터 서아시아와 실크로드 그리고 당 제국과 통일신라로 이어주는 국제문화의 흐름 속에 분포하고 있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소라 할 수 있겠다.
■ 지성(知性)과 교류(交流)로 리더하라
그래서 문화개방 문제는 부족해서 받아들이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국제사회의 문화 현상을 활짝 개방하여 빨리 배워 세계정세 속에서 우리가 뒤처지지 않고 리더해나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구한말 일본이 서구문화를 무한정 받아들일 때 우리 조선은 쇄국정책(鎖國政策)으로 일관하다가 결국 일본에게 나라를 통째로 빼앗겨 버린 뼈아픈 경험을 겪었다. 지금 북한이 자력갱생, 주체사상을 고집하다가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는 교훈도 곱씹어보아야 하겠다. 1200년 전 신라인들의 개방적인 국가경영을 괘릉에서 한 수 배운다.
■ 1200년 전 신라가 던지는 메시지, “폐쇄는 몰락을, 개방은 번영을 낳는다”
원성왕릉의 석인상들은 단순한 조각품이 아니다. 그것은 통일신라가 당대 최고의 국제도시들과 실시간으로 호흡하며, 서구의 신화적 모티브까지도 자신들의 예술로 승화시킨 ‘문화적 자신감’의 증거다.
낯선 존재를 배척하지 않고 왕실의 수호자로 삼았던 신라인들의 열린 마음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묵직한 교훈을 던진다. 구한말의 쇄국정책이 불러온 비극과 현재 북한의 고립주의가 보여주는 한계는, 1200년 전 신라인들이 누렸던 풍요로운 국제화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경주 괘릉 앞에 서서 몽둥이를 든 서역 무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한다. 문화는 섞일 때 생명력을 얻고, 국가는 열려 있을 때 비로소 세계의 흐름을 주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1200년 전 신라인들이 보여준 그 당당한 ‘개방적 국가경영’의 지혜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