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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문화유산

탄금대 양진명소

작성자東守마루/김인동|작성시간26.06.05|조회수4 목록 댓글 0

탄금대 양진명소
대흥사 옆에 옛 양진명소사 자리에서 열리는데, 그 행사에 보낸 자료 원고이다.
탄금대의 시작부터 양진명소와 양진명소사에 대한 옛 기록을 인용해서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썼다. 끝에는 1602년에 충주 목사로 부임했던 정구가 임진왜란에 탄금대 전투에서 희생된 장졸들을 위해 양진명소사에서 위령제를 지낼 때 썼던 제문이다.

* 양진명소(楊津溟所)와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

“[12년(551)] 봄 정월에 개국(開國)으로 연호를 고쳤다. 3월에 왕이 순행하다가 낭성(娘城)에 이르러 우륵(于勒)과 그의 제자 이문(尼文)이 음악에 정통하다는 말을 듣고, 특별히 그들을 불렀다. 왕이 하림궁(河臨宮)에 머물며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는데, 두 사람이 각각 새로운 노래를 지어 연주하였다. 이보다 앞서 가야국(加耶國) 가실왕(嘉悉王)이 12줄 현금[十二弦琴]을 만들었는데, 열두 달의 음률을 본뜬 것이다. 이에 우륵에게 명하여 곡을 만들도록 하였는데, 그 나라가 어지러워짐에 따라 악기를 가지고 우리에게 의탁하였다. 그 악기의 이름은 가야금(加耶琴)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4 진흥왕 12년(551) 3월.)

탄금대(彈琴臺)라는 이름은 551년 3월에 신라 진흥왕이 충주에 방문했을 때 우륵을 불러 가야금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사에서 시작되었다. 시간이 흐르며 그것은 전설이 되었다. 천 년의 세월이 흐른 1592년에 탄금대 전투가 벌어졌다. 신립 장군을 위시한 수 천의 충주 남정들이 희생되었다. 그래서 탄금대에는 ‘열두대’ 전설이 포개지며 그 날의 이야기로 내려온다.

탄금대 아래 강에는 양진명소(楊津溟所)라는 깊은 소가 있었다. 그곳에는 한강을 다스리는 용이 살고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나라에서는 정기적으로 그곳에 치성을 드렸다.

대천(大川) : 양진명소(楊津溟所)는 청풍(淸風)으로부터 충주를 지나 서북쪽으로 흘러 여강(驪江)이 된다. [봄ㆍ가을에 향축(香祝)을 내려 제사를 지내는데, 소사(小祀)로 한다.] (大川 楊津溟所自淸風過州 西南[北]流爲驪江 [春秋降香祝行祭 小祀]) (『세종실록지리지』 충청도 충주목 대천조)

제사를 지내던 시설로 대흥사 옆에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라는 사당이 있었다.

양진명소사(楊津溟所祠) 견문산(犬門山) 밑 금휴포(琴休浦) 어귀에 있다. 사전(祀典)에 소사(小祀)로 실려 있다. 봄가을마다 향(香)과 축문을 내려 치제(致祭)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권14, 충청도 충주목 사묘조)

양진명소사에서는 국행 소사가 봄ㆍ가을로 정기적인 제사를 지냈다. 이 외에도 수시로 기우제(祈雨祭)와 기청제(祈晴祭), 기고제(祈告祭), 고유제(告由祭), 위령제(慰靈祭)와 같은 충주 목사가 제관이 되어 지내던 각종 제사가 수시로 있었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터만 남아 있다. 어쩌면 탄금대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공간인데, 현재 충주에서는 무관심의 대상이기도 하다.

* 참고로 조선 시대 충주에서 기우제를 지내던 공식장소는 사직(社稷), 양진(楊津), 용연(龍淵), 월악(月嶽)이었다. 사직산, 탄금대 양진명소사, 목벌 용연, 월악산 월악사(月岳祠)였다.

다음은 1602년 충주 목사로 부임한 정구(鄭逑, 1543~1620)가 양진명소사에서 지낸 위령제의 제문이다.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장수와 병졸들에게 올린 제문[祭壬辰戰亡將士文]>
- 충주 탄금대(彈琴臺)에서 -

嗚呼哀哉 아, 애통하여라
天沓沓其蓋高 아득히 뻗은 하늘 높기도 한데
日黯黯而無色 어슴푸레 태양은 빛을 잃었네
山旣哀而浦思 산빛 하마 슬프고 강물도 시름
風亦凄而雲漠 바람결 스산하고 구름도 흐려
歷萬古而長思 역사에서 참상 사례 손꼽아 보면
慘孰加於壬辰 임진년 당시보다 더한 적 없네
抑時運之不幸 어쩌면 나라 시운 불행했던가
豈天心之未仁 아니라면 천심이 잔인했던가
島夷之兇狡斯極 섬 오랑캐 흉악함이 극에 달하니
蔽海之跳梁孰遏 바다 덮고 오는 기세 누가 막을꼬
警急釜山之失守 부산진 잃었다고 경보 급하고
勢迫鳥嶺之潰裂 새재 방어 무너져 형세 급할 제
雲屯鯨豕之遍野 고래 같은 적병이 들판 깔리니
林立豼貅之膽落 표범 같은 아군들 담력 꺾였네
漲驚沙之撲天 센 바람 모래 날려 하늘 치솟고
橫殺氣之騰空 허공에는 팽팽한 살기 감돌아
匣寶刀以莫售 칼집 속의 보검을 뽑지 못하니
腰利鏃而奚庸 허리춤 화살촉을 어디에 쓰랴
丸刃紛其交加 탄환 칼날 어지러이 접전을 하자
將卒亂而失列 아군의 장수 병졸 전열을 잃어
風日晦而昏霧 어두운 날씨 속에 안개 흐리고
山川震乎蕩擊 밀고 당기는 소리에 산천 진동해
迷陰陵之前路 도망갈 길 어딘가 알 수 없으니
塞睢水之長流 긴 강은 시체 쌓여 아니 흘렀네
江涵萬丈之冤 강물은 만 길 높은 원한 머금고
天包百代之愁 하늘은 천년 시름 간직하였네
念父母之鞠育 부모 품 애지중지 자라나면서
憶兄弟之相隨 형제와 자나 깨나 어울렸었고
繄妻子之和樂 처자 얻어 오순도순 나누던 정은
蓋有甚於塤箎 형제의 화목보다 깊었건마는
何偶然而暫離 어이하여 우연히 잠시 떠난 뒤
逈死生之莫知 서로 간에 생사를 알 수 없는고
此肝腦之塗地 여기선 찢긴 주검 널려 있는데
彼飮食而猶祈 저쪽선 돌아오길 마냥 기도해
無所辜於天地 천지간에 아무런 죄가 없거늘
乃禍酷之如斯 재앙 어이 그리도 참혹했는지
孤其子而獨其父 자식은 고아 되고 아비 홀로 되었으며
寡其妻而鮮兄弟 아내는 과부 되고 형제 짝을 잃었어라
骸骨莫收於沙磧 모래밭 널린 해골 거두지 못해
心目耿耿而盈涕 그때 정경 떠올리니 눈물이 글썽
怨窮天而愈深 하늘에 사무치는 끝없는 원한
慟十年而如昨 십 년이 흘렀어도 어제 같기만
民今訖其少康 백성은 이제 다소 안정됐으나
魂髣髴而誰託 떠도는 넋 어디에 의지할 건고
霜月凄涼之夜 싸늘한 가을 달빛 처량한 밤과
煙雨沈淫之夕 안개비 흩뿌리는 음침한 저녁
哭啾啾之相聞 여기저기 흐느끼는 귀신의 울음
孰楚些之相及 그 누가 초혼가를 불러나 줄꼬
寓深悲於枯草 진한 슬픔 마른 풀 스며 있기에
聞不忍於波咽 목메인 물결소리 차마 못 들어
眄川原之浩渺 아스라한 산천을 둘러보자니
零老淚之如血 늙은 이 몸 피눈물 떨어지누나
寄一奠而敍告 한잔 술에 부치어 충정 고하니
想群饗之髣髴 흠향하는 뭇 영혼 어른거리네
已矣乎 원혼이여 이제 그만 돌아가소서
自古時命之莫不然 예로부터 운명 모두 그러했거니
何莫解夫鬱結 맺힌 원한 그 어찌 아니 풀리까
嗚呼哀哉 아, 애통하여라

* 사진은 1921년에 촬영된 유리건판 사진으로 확인되는 양진명소사의 마지막 모습(국립중앙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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