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碑)
중원고구려비의 연가-
*공연 6월8일 (토)/*오전11시 *오후 1시.30분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야외무대
#충주고구려비(국보 제 205호)
#씨엘오페라단 창작오페라
충주고구려비전시관 야외광장이
역사적 문화휴식 공간으로 재 탄생되었다.
그런 공간에서 충주오페라단(단장 김순화)의 창작오페라 -‘비.중원고구려비의 연가’-가 고구려비를 발견한 역사의 현장 인 고구려비전시관에서 두 번 째 공연을 갖는다.
호국보훈의 달 6월 8일 토요일 오전 11시, 오후 1시30분 두 차례 열리는 이번 공연은 충주고구려비가 세워지기까지 삶의 이야기와 수많은 전쟁의 아픔 속에서도 끝내 지켜냈던 충주.중원의 이야기를 감동의 스토리로서 담아낸다.
"이번 공연을 통해 충주의 문화관광콘텐츠로 자리매김 하길 기대하며 '충주고구려비가 세계에서 찾는 역사적인 장소가 될 수 있도록 함께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김순화 단장의 당부 인사가 있었다.
*충주고구려비(忠州高句麗碑/국보 제205호)는
국내 유일한 고구려비로 천 오백여년 동안
입석(立石)마을을 지켜온 무병장수와 다산과 풍요를 기원하는 상징적인 선돌이었다. 이곳 충주 중원이 백제와 고구려가 주인공이 되었다가 다시 신라가 지배하고, 고려와 조선시대를 거친 역사의 산 증인이었다.
그동안 민초들 곁에서 위안의 대상이었으며, 기원의 기도 장소 이었다.
그런 사연을 안고 이름없이 서 있던 비석이 1979년 2월에 충주의 향토 연구단체인 당시 '예성 동호회(예성문화연구회)'에 의하여 최초로 학계에 보고 되어서
단국대 정영호교수를 비롯 역사학자들에 의해 고구려비라 최초로 공표(1979.4.8)되었다.
당시 해방 후 최고의 금석문 발견이라고 온 나라가 들썩이었다. 바로 우리나라 고대사의 중요한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는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수 많은 전란과 자연재해가 있었지만 넘어지면 일으켜 세운 입석리 주민들이 있었기에 오늘날 1.500여년 잠에서 깨어나 마침내 고구려 역사를 새로 쓰는 감동의 순간을 충주고구려전시관에서 다시 만나볼 수 가 있게 되었다.
충주고구려비는 중국 만주 통구에 있는 광개토대왕비를 축소한 모습이다.
비를 세운 시기에 대해
광개토대왕(재위391~412)설, 장수왕(재위413~491)설, 문자명왕(재위 492~519)설 등,여러 설이 있지만 대체로 장수왕대(481년)로 추정하고 있다. 또한 건립시기와 비문 해석에 따라서 '척경비'와 '경계비' 또는 '회맹비'와 '공적비' 그리고 '순수비'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럼 고구려비가 우리나라 역사의 위대한 발견으로 여겨지는 까닭은 무엇인가?
첫째. 우리나라의 유일한 고구려 석비라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크다.
광개토대왕비와 함께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푸는 중요한 열쇠로 만주로부터 남한강 유역까지 세력을 확장한 고구려의 존재를 뚜렷이 보여준다.
둘째. 5세기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를 동이(東夷)라 하고 신라의 왕을 매금(寐錦)이라 부른 점은 고구려가 상위의 입장에서 신라를 대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는 여형여제(如兄如弟)라는 표현이나 고구려 왕이 신라 매금에게 의복을 하사했다는 내용도 고구려와 신라가 주종 관계에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신라 내에 고구려의 군대가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신라토내당주(新羅土內幢主)는 신라에 파견된 고구려의 군사령관이었다.
세째. 3국간의 정치적 관계 뿐만 아니라 문화적 교류와 영향을 알 수 있다.
당주, 도사 같은 직명은 고구려 문화가 신라 문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시사한다. 불교 등 고구려 문화가 백제와 신라에 전해졌듯 비석 문화도 백제와 신라에 큰 영향을 끼쳤다.
네째. 고구려의 관등조직이나 인명표기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있다.
내당주, 고무루성수사 등 관직명과 전부, 하부 등 출신부명, 그리고 태사자, 주부, 발위사자, 대형 등 관등명, 다우환노, 귀덕, 보노 등 고구려인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고구려의 인명 표기가 관직명, 출신부명, 관등명, 인명 순으로 기재되었음을 비로 통해 확인 할 수가 있다.
다섯째. 고구려에서도 이두식 표기가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절사, 절교사 등의 용어는 이두로서 신라의 이두가 기원을 두고 있다는 추정을 뒤받침한다. 충주 고구려비의 이두식 표기는 순한문식으로 된 광개토대왕비와 대조를 이룬다. 고구려의 이두식 표기는 평양성 각석에서도 확인된다.
특히 충주고구려비가 발견되기 전까지는 고구려가 한강 이남 지역으로 진출했다고 사실적으로 증명하지 못하였다. 즉, 충주고구려비는 고구려의 척경과 경계 또는 공적비와 순수비 등을 나타내는 비로 고구려가 한강을 넘어 충주지역까지 진출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 것이다.
바로 오늘날에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포함시키는 이른바 동북공정의 역사왜곡 정책을 가시화하는 시점에서 충주고구려비는 우리 고구려역사에 대하여 기여하는 바가 매우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