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안심사
안심사는 사적기(事蹟記)가 남아있지 않아 창건에 관한 자세한 내력을 알 수 없다. 「안심사고적연대표(安心寺古蹟年代表)」에 따르면 775년(혜공왕 11) 진표율사(眞表律師)가 창건하고, 1325년(충숙왕 12) 원명국사가 중창하였다고 한다.
진입로의 계단을 오르면 왼쪽에 선방(禪房)이 있고 오른쪽의 높은 단 위에 영산전이 서향하고 있다. 대웅전은 안쪽 깊숙한 곳에 남서향하고 있으며 대웅전의 왼쪽에는 산신각과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및 탑비(塔碑)가 있다.
청주 안심사 대웅전(보물)
안심사 대웅전은 충청좌도 청주 남령 구룡산 안심사의 주불전으로, 초창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606년 중수 기록이 발견되어 그 이전부터 존재했음이 확인된다. 1626년 송암대사가 중창했고, 1980년대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1997년에는 안심사 영산회 괘불탱이 국보로 지정되었다.
변천 과정
본래 정면 3칸·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었으나,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며 규모와 형태가 바뀌었다. 1816년 중창 시 측면이 2칸으로 줄고 지붕이 맞배지붕으로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1649년·1672년·1761년·1842년 등 지속적인 보수가 있었고, 1979년 해체 보수 시 구조 안정성을 위해 일부 부재를 변경·보강했다.
건축 특징
현재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다포계 맞배집으로,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초석과 민흘림 원기둥을 사용했다. 공포는 내외 3출목으로 주상포와 주간포 형태에 차이가 있으며, 다포집임에도 창방 위에 평방을 쓰지 않고 공포를 배열한 점이 두드러진 특징이다.
가구는 원래 1고주 5량 구조였으나 후대 축소로 변경되었고, 정면은 겹처마·배면은 홑처마이며 우물반자 천장과 불상 위 닫집을 갖추고 있다.
내부 봉안 불상
석가여래를 주불로 모시고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의의
조선 중기 이후 다포계 건축의 특징을 보이면서도 일부 조선 초기 양식을 간직하고 있다. 반복된 중수로 평면과 구조가 변화했지만 각 시대의 건축 기법이 반영되어 다포계 건축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특히 조선 후기 사찰의 경제적 어려움으로 불전 규모가 축소되고 구조가 간소화되는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1980년대 보물로 지정되었다.
청주안심사 영산회괘불
(국보 297호)
괘불은 사찰에서 큰 법회나 부처남 오신날과 같은
불교 행사가 있을 때 야외에 걸어 예배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불화佛畵로서 전국적으로 남아있는 것은 드물다.
안심사에 전해자는 이 괘불은 윗부분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으나
전체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거의 원상을 간직하고있다.
불화의 내용은
석가여래를 가운데 모시고 그 주위에 불보살과
제자들인 교화성종敎化聖衆과 사천왕四天王의
호법신護法神들은 좌우 대칭으로 배치한 것으로
색갈이 선명하고 화려하며 기교가 뛰어나서
당대를 대표할 수 있는 역작이다.
괘불의 하단에는
순치9년 임진4월일 順治九年任眞四月日이라 쓰여져 있고
주상전하수만세 主上殿下壽萬歲
왕비전하수제년 王妃殿下壽濟年
세자전하수천추世子殿下壽千秋
표기되어 있어 조선 효종孝宗3년(1652)에
제작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재질은 모시바탕에 채색이며
세로 7.26m 가로 4.72m이다.
신겸信謙 덕희德熙 지언知彦 진성眞性 신율信律
삼인三印 경원敬元 명계明戒 혜월惠月 등 9명의 승려가 그렸다.
전체적으로 보면
항마촉지인降魔燭地印
왼손은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손모양
하고 있으며 영축산 靈竺山에서 법화경 法華經을 설법하는
괘불탱이다.
참고문헌>2확장영역 접기
「청원 안심사 대웅전 정밀실측조사보고서」(문화재청, 2012)
「안심사 대웅전」(국립문화재연구소, 『한국의 고건축』16,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