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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권 문화유산

한시로 읽는 갈마에서 중앙탑...

작성자東守마루/김인동|작성시간26.06.14|조회수2 목록 댓글 0

<6월 千里忠州 뒷정리 (3)> 한시로 읽은 갈마에서 중앙탑까지

* 지난 겨울, 보이지 않는 충주의 물길 탐색을 했다. 그때 항목을 정해 남한강을 따라 내려오며 한시가 있는 공간을 정리해 보았다. 좀 길긴 하지만, 어제 걸었던 갈마에서 중앙탑까지 쓴 글을 각주를 떼어내고 옮긴다.

(10) 금탄(金灘)

금탄(金灘)은 ‘쇠여울’이고, 금천(金遷)은 ‘쇠벼라’이다. 하나는 물길이고 하나는 땅길이다. 탄금대 합수머리를 지나며 불어난 물은 쇠꽂이[金串] 벼랑을 치고 나가며 여울을 이루고 북쪽으로 굽어 흐른다.

조선 시대에 금천은 한강의 특정 지점으로 인식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충청도 충주목 산천조에 ‘금천은 주의 서쪽 10리에 있는데, 바로 북진의 하류’라고 하였고, 청풍군 산천조에 청풍의 북진(北津)을 설명하며, ‘병풍산 밑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와서 금천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고, 단양군 산천조에 상진(上津)을 설명하며, ‘군 북쪽 13리에 있다. 혹은 마진(馬津)이라고도 한다. 근원이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와 흘러 충주 금천으로 들어간다’고 하였고, 영춘현 산천조에 남진(南津)을 설명하며, ‘현 남쪽 2리에 있다. 근원이 강릉부 오대산에서 나와 금천으로 흘러 들어간다’고 하였다. 또한 원주의 섬강(蟾江)을 설명하며, ‘주의 서남쪽 50리에 있다. 즉 충청도 충주 금천 하류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관련해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은 ‘서울의 한강은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일컬었고, 고려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 일컬었다. 그 근원은 둘인데, 충주의 금천(金遷)으로부터 흘러온 것을 남강(南江)이라 일컫고, 춘천의 소양강으로부터 온 것을 북강(北江)이라 일컫는다’고 하며, ‘남강은 그 근원이 둘이 있으니, 하나는 강릉의 오대산 우통수(于筒水) 금강연(金剛淵)에서 나온다. 하나는 근원이 보은의 속리산에서 나와 산 위에서 물이 세 줄기로 나뉘어지는데, …(중략)… 북쪽으로 충주 서남쪽에 이르러 달천이 되고, 서쪽으로 금천에 이르러 청풍강과 합하고’라며 남한강의 시작을 금천에서 청풍강과 달천이 합하여 남한강이 됨을 설명하고 있다.

물길과 관련하여 992년 고려 시대에 개경까지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선에 지불할 배삯을 정할 때, 여수포(麗水浦)를 기록하였고, 그곳의 이전 호칭은 금천포(金遷浦)로 대원군(大原郡)에 있다고 하였다. ‘대원(大原)’은 고려 성종(成宗, 재위 981~997) 때 충주의 별호였다. 그리고 고려 초에 12창을 설치할 때, 충주에 덕흥창(德興倉)을 두었고, 20척의 조운선을 배치하였다. 덕흥창은 조선 초에 그대로 계승되어 이용하였다. 태종 3년(1403)에 경상도 지역의 세곡을 분리하여 별도로 보관하기 위하여 덕흥창 남쪽에 경원창을 설치하였다. 태종 11년(1411)에 금천에 창고 200여 칸을 지었고, 이듬해에 10여 칸이 화재로 불탔다. 그리고 1461년(세조 7)에 큰 화재로 불타면서 1465년(세조 11)에 가흥으로 창을 옮겼다.

중앙탑면 창동 마을회관이 있는 큰 마을에 덕흥창이 있었고, 덕흥창 남쪽에 있었다는 경원창은 금강사(金剛寺)가 있는 골짜기에 위치하며 1403년에 경상도 세곡을 수납하는 곳으로 분리되었고, 1465년에 가흥창으로 옮길 때까지 조창으로 기능했었다. 덕흥창과 경원창이 구분되었지만 통칭하여 금천창(金遷倉)으로도 불렸다.

금천포와 여수포, 덕흥창과 경원창이 설치되었던 곳이 금천이고, 남한강 물길을 이용한 조운의 출발지였다. 조운뿐만 아니라 물길의 출발지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배로 그곳을 거쳐간 이들이 많았고, 그들이 남긴 시 또한 많은 곳이다.

금탄 또는 금천을 제목에 넣은 시를 지은 사람은 30명이 확인되는데, 금천이 배의 출발지였거나 도착지였던 사람들을 창작 시기 순으로 정리할 수 있다.

①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1468년(무자) 4월 4일에, ② 홍귀달(洪貴達, 1439~1504)은 1479년(기해)과 1481년(신축)에, ③ 박은(朴誾, 1479~1504)은 1502년(임술) 4월 10일에, ④ 박우(朴祐, 1476~1547)는 1522년(임오)에, ⑤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은 1528년(무자) 6월 중순에, ⑥ 이황(李滉, 1501~1570)은 1557년(정사)에, ⑦ 노수신(盧守愼, 1515~1590)은 1546년(병오)ㆍ1567년(정묘)ㆍ1568년(무진)에, ⑧ 유운룡(柳雲龍, 1539~1601)은 1558년(무오) 봄에, ⑨ 박승임(朴承任, 1517~1586)은 1564년(갑자)에, ⑩ 권호문(權好文, 1532~1587)은 1570년(경오)에, ⑪ 노진(盧禛, 1518~1578)은 1573년(계유)에, ⑫ 구봉령(具鳳齡, 1536~1586)은 1574년(갑술)에, ⑬ 이안눌(李安訥, 1571~1637)은 1602년(임인) 8월 21일ㆍ1608년(무신) 7월 18일에, ⑭ 김현성(金玄成, 1542~1621)은 1604년(갑진)에, ⑮ 이광윤(李光胤, 1564~1637)은 1620년(경신) 가을에, ⑯ 이정(李楨, 1641~1680)은 1666년(병오)에, ⑰ 김창흡(金昌翕, 1651~1708)과 ⑱ 김창협(金昌協, 1653~1722)은 1688년(무진) 3월에, ⑲ 송상기(宋相琦, 1657~1723)는 1689년(기사)에, ⑳ 이현익(李顯益, 1678~1717)은 미상이고, ㉑ 정중기(鄭重器, 1685~1757)는 1732년(임자) 6월 26일에, ㉒ 권만(權萬, 1688~1749)은 1729년(기유)에, ㉓ 권정침(權正沈, 1710~1767)은 1761년(신사) 8월 25일에, ㉔ 이광려(李匡呂, 1720~1783)는 미상이고, ㉕ 유한준(俞漢雋, 1732~1811)은 1764년(갑신)에, ㉖ 이이순(李頤淳, 1754~1832)은 1800년(경신) 윤4월에 금천을 중심으로 시를 지은 것이 확인된다.

서거정(徐居正, 1420~1488)은 1476년(병신)에 충주 목사 박계성(朴繼姓, 1436~?)에게 답시를 쓰거나, 1483년(계묘)에 충주에 부처(付處)된 강자평(姜子平, 1430~1486)을 생각하며 시를 쓰며 금탄을 넣었다. 박계성에게 보낸 시에 ‘金灘水漲帆飛急 금탄의 물 벌창할 제 돛단배 급히 몰아 / 更擬元龍去上樓 다시 원룡의 백척루를 올라보고 싶구려’라고 한 것으로 보아 1475년에 충주에서 박계성과 만났고,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금탄에서 배를 탔던 것은 추정되지만, 직접 언급이 없기 때문에 제외하였고, 유성룡(柳成龍, 1542~1607)은 1596년(병신) 3월 청명 전에 육로로 안동에 내려가던 중에 금천 길에서 정경세(鄭經世, 1563~1633)에게 써준 시이고,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1789년 4월, ‘이때 나는 갑과(甲科) 급제자로서 각과초계(閣課抄啓)에 뽑혀 역마를 타고 충주에 갔는데, 부친께서 울산 부사가 되었으므로 그 행차를 충주까지 모시고 갔었다(四月也 時余以甲科 仍被閣課抄啓 乘傳赴忠州 家君爲蔚山府使 遂陪行至忠州)’고 하여 육로를 이용해 금천에서 전별한 사실을 알 수 있으므로 물길을 이용한 사례에서 제외하였다. 그리고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의 경우 <청금정도(聽琴亭圖)>의 화제(畫題)이므로 제외하였다.

시에서 금천에서 배를 탔던 가장 이른 시기에 확인되는 이는 김종직이다.

<사월 초사일에 권 첨지ㆍ양 내한 수사가 나와 함께 배를 타고 금천에서 간단한 주연을 가진 다음 월락탄을 지나는데, 이 때 세 기녀가 따랐다. (四月初四日權僉知楊內翰守泗與余同乘舟金遷小酌過月落灘時三妓從焉)>

緩棹吟過月落灘 유유히 노질하여 읊으면서 월락탄을 지나니
便風獵獵助淸歡 순풍이 솔솔 불어 즐거운 놀이 돕는구나
江花未慣詩腸損 강 꽃은 시의 생각 닳는 건 알지 못하고
笑却樽前不折看 술동이 앞에 꺾지 않고 보는걸 비웃네그려
- 김종직, 『점필재집』 권4. 시.

1468년에 금천에서 간단한 주연을 가진 후 월탄을 지나는 데 기녀 셋이 배를 타고 따라왔다고 한다. 2003년에 남한강 수운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강원도 태백의 검룡소부터 물길을 따라 충주까지 내려온 일이 있다. 이때 청풍에 살던 한상철ㆍ우도봉 노인을 만났었다. 두 분은 남한강의 마지막 뗏사공으로 불리던 이들이다. 뗏목을 몰고 서울에 가던 상황을 이야기할 때에 충주 중앙탑 부근에 가면 가끔 작은 배에 술상을 차려서 따라붙는 여인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마치 그와 같은 장면을 김종직의 시에서 볼 수 있다.

금천에서 월탄까지 뱃길로 보통 10리라고 한다. 거의 직선으로 곧게 뻗은 물길로 월탄에서 왼쪽으로 물길이 꺾이기 전에 강폭이 넓고 물이 잔잔하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배나 뗏목을 따라 호객하던 기생이 있었던 사실을 이 시에서 확인할 수 있다.

1567년(선조 2) 6월에 금천에서 편지로 만난 두 사람이 있다. 1567년 6월 28일에 명종이 승하하고, 선조가 왕위를 계승했다. 명종이 승하하기 전에 여러 차례 유지를 내려 퇴계를 부렀고, 그것에 응하여 서울로 가는 길이었다. 이때 괴산에 유배되어 있던 노수신이 보내온 시를 금천에서 받아보고 차운하여 보냈다.

<퇴계의 행차에 드리다 (寄退溪行軒)>
* 이때 퇴계가 금탄(金灘)에서 배를 타고 조정의 부름에 응하여 가는 중이었다.(時登金灘舟赴召)

雲幕隨流水 장막 친 배는 흐르는 강물을 따라가는데
煙扉掩峽墟 연기 낀 삽짝은 골짝 마을에 닫혀 있습니다
神仙不易得 신선이 되는 건 쉬 얻을 수 없거니와
人世固多虞 인간 세상은 진실로 우환이 많고말고요
靜了看何象 고요할 땐 어떠한 징후를 관찰하며
閑來著幾書 한가할 땐 글은 얼마나 저술하였는지요
囊裝未肯壓 행장 보따리는 눌리지 않게 하겠거니와
不惜借霑濡 아끼지 말고 젖은 시편이나 빌려줬으면 합니다
- 노수신, 『소재집』 권5, 시.

<유신에서 노과회가 부쳐온 시에 차운하다 (惟新 次盧寡悔見寄)>

促召加申命 재촉해 불러 명을 거듭 내리시니
扶行出舊墟 지팡이 의지하고 고향 집을 나섰네
衝炎多疾病 더위를 무릅쓰고 가는데 아픈 데는 많아지고
歷險備艱虞 험한 길 가노라니 어려움도 하 많구려
旅館淹留日 여관에 여러 날 머물러 있자니
親朋問勞書 친한 벗이 위로하는 편지를 보내왔네
焉能辨爻象 내 어찌 조정 조짐을 분간할 수 있으리오
自不免沈濡 스스로 성덕 입는 걸 면치 못하는 것을
- 이황, 『퇴계집』 내집 권4, 시.

명종의 승하는 을사사화(1545)로 인해 드리웠던 길고 긴 장막이 걷힐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하였다. 그 과정에서 노수신은 장인이며 스승이었던 이연경을 잃었고(1548), 직접적으로 동서인 강유선(1549)과 다른 스승인 이언적(1553)을 잃었다. 이황은 1549년에 초대 청홍도 관찰사로 나왔던 형 이해(李瀣, 1496~1550)를 잃었다.

노수신의 시에 그러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이황의 시에 ‘焉能辨爻象 내 어찌 조정 조짐을 분간할 수 있으리오’라며 시와 함께 보내왔을 편지에 쓰인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두 사람의 문집에는 주고받은 편지는 수록하지 않았다.

만 20년간을 유배중이었던 노수신은 급변하는 정국을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필요했을 것이다.

<퇴계에게 답한 시를 다시 부치다 (復寄答退溪)>

公案中天日 공안은 중천에 뜬 태양과 같건만
斯文萬古墟 사문은 만고에 폐허가 되어 버렸습니다
精微盡晦整 정미함은 회암 정암에서 다하였고
人道發唐虞 인도는 당우에서 처음 발명되었지요
汎認爲他說 그 학설을 범범하게 인식하고 있으니
誰將辦一書 누가 장차 한 글을 지어 분변할런지요
寧如隴鸚縶 차라리 새장에 갇힌 농앵처럼 될지언정
不作渡狐濡 물 건너다 꼬리 적신 여우는 안 되렵니다
- 노수신, 『소재집』 권5, 시.

자신의 시에 차운해 보내온 이황의 시에 다시 차운하여 답장을 보냈다. 첫 시에서 내비치지 못한 자신의 속내를 가감없이 표현하고 있다. 노수신은 1567년 10월 12일자로 해배되었고, 홍문관 교리로 제수되었다. 노수신이 해배되던 날 유신현(維新縣)으로 강등되었던 충주도 복호되었다.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당대의 두 사람의 편지가 오간 금천은 두 사람의 운명뿐만 아니라 충주의 운명 역시 오갔던 뒷이야기를 담고 있다.

금천을 출발지나 도착지로 삼은 시에는 친척인 경우가 몇 건 확인된다. 박은과 이안눌, 유운룡과 유성룡, 김창협과 김창흡으로, 박은은 이안눌의 외할아버지이고, 나머지 경우는 형제간이다.

박은은 1502년 4월 9일에 금천에서 배를 타고 서울까지 갔다고 한다. 101년이 지난 1602년에 이안눌도 금천에서 배를 타고 박은의 시를 읽으며, 자신의 시를 써내려갔다. 둘 다 네 수를 지었는데, 그 중에 이안눌의 시 한 수를 살펴보면 100년의 시차를 둔 충주 물길의 같음을 알 수 있다.

星霜一瞥百年中 백년 중에 흘깃 보는 한 해는
今古還驚日直同 예나 지금이나 해가 같음에 도리어 놀란다
卷裏山川渾不改 시권 속의 뫼와 내는 변함이 없고
金灘揮涕憶公公 금탄에 눈물 뿌리며 공을 추억한다
- 이안눌, 「앞의 시」 제2수.

이안눌은 공교롭게도 101년 전에 금천에서 배를 타고 출발했던 외할아버지 박은의 시를 읽으며 추억에 잠긴다. 이와 관련해 주를 달았다.

홍치 임술(1502)년은 만력 임인(1602)년인 지금으로부터 101년 전이다. 공은 4월 경술(9일)에 금탄에서 배를 타고, 신해(10일)에 신륵사에서 묵고, 임자(11일)에 갈산을 지나, 계축(12일)에 두미포를 지나, 갑인(13일)에 광진에 도착했다. 나는 지금 8월 경술(21일)에 배를 탔는데 묵은 곳, 거리, 일진, 간지가 전후 서로 같기 때문에 이른 것이다. (弘治壬戌 距今萬曆壬寅 一百有一年 公以四月庚戌 自金灘放舟 辛亥 宿神勒寺 壬子 次葛山 癸丑 次豆彌 甲寅 到廣津 余今以八月庚戌 上舟 宿處道里日辰干支前後竝同故云)

둘 다 경술일에 배를 탔고, 배를 타고 내려가며 묵은 곳, 거리, 일진, 간지가 서로 같았다고 한다. 4월과 8월의 계절 차이에 따른 강물의 증수 상황은 다를 수 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이 같았다고 한다. 이안눌은 1602년에 금천에서 배를 타고 내려가며 두 편을 지었는데, 한 편은 ‘恨無吾祖手 내 할아버지 솜씨에 원망 없으니 / 新句記幽深 새로운 싯구 그윽하게 적는다’고 하였고, 다른 편에서는 ‘眼底江山無好句 눈 아래 강산은 좋은 구절 없으니 / 吾行已後翠軒翁 내가 가는 것이 취헌옹이 지나간 뒤라서이라’며 마무리 지었다. 외할아버지 박은을 존중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유운룡과 유성룡의 경우, 중간에 임진왜란이라는 큰 변수가 자리한다.

<금탄 여점에서 새벽에 일어나 일률을 즉석에서 읊다(金灘旅店 曉起口占一律)>

曉起開牕騪遠目 새벽에 일어나 창문을 여니 멀리 큰 말이 보이고
川林景物各爭姸 개울과 숲의 경치는 저마다 어여쁨을 다툰다
彌茫沃野天疑盡 아득하게 기름진 들은 하늘이 다한 듯 의심스럽고
圍抱高山水欲邊 주위를 둘러싼 높은 산은 물가로 달린다
漠漠煙籠漁店柳 생선가게 버드나무는 연푸르게 잎이 돋아 몽롱하고
依依雨暗賈客船 장삿배에 자욱한 비가 내리며 아른거린다
須看麰麥靑於染 보아하니 보리 싹은 물들인 것처럼 푸른데
却喜秋成占有年 가을이 되면 풍년을 점치게 하니 기쁘다
- 유운룡, 『겸암집』 권1, 시.

<금탄 길에서 경임에게 드리다(金灘路中贈景任)>

十年湖海强棲遲 십 년을 강호에서 마음껏 노니는 것 강하게 꿈꿨는데
素志還慙墨子絲 평소의 뜻은 묵자의 실이 되어 부끄럽게 돌아왔네
躍馬論兵新事業 말 달리며 병법을 논하는 새로운 사업이요
滄波白鳥舊心期 푸른 파도 위를 나는 흰 새는 옛 마음의 기약이다
金灘水闊村烟細 금탄의 물은 넓고 마을에 가는 연기 오르고
月嶽山高棧道危 월악산은 높고 잔도는 험하다
此去風塵如可靖 이번에 가는 풍진은 편안할까
始知人世有男兒 인간 세상에 남아 있음을 비로소 알겠다
- 유성룡, 『서애집』 문집 권1, 시.

유운룡은 1558년 봄에, 유성룡은 1596년 봄에 금천에서 지은 시다. 유운룡은 새벽에 일어나 금천 여점에서 창을 열고 보이는 풍광을 잔잔하게 그리고 있다. 강 건너 금가면에 보이는 들은 넓고, 강을 따라 뻗은 산줄기가 두른 듯하다. 생선가게의 버드나무는 새잎이 돋아나고, 마침 비 내리는 가운데 장삿배가 아른거린다. 봄비를 맞는 보리 싹은 푸른 물을 들인 듯한데, 가을을 생각하니 풍년이 기대되는 평화로운 모습을 그리고 있다. 반면에 유성룡은 정경세에게 써주며 임진왜란 이후의 혼란한 중앙 정계 상황을 그리고 있다. 무(武)를 등한히 한 상황에서 벌어진 전쟁의 상흔을 극복하기 위해 국방을 튼튼히 할 방법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고, 그래서 이번에 지나간 풍진이 과연 편안할까를 고민한다. 그런 와중에 엄청난 피해를 입은 충주에도 밥 짓는 연기가 가느다랗게 오르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유성룡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 유운룡을 해직하여 어머니를 구출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선조에게 읍소했었다. 일어나지 않았어야할 전쟁으로 인한 전후 상황이 같은 장소에서 지은 형제의 시에 그 시차만큼이나 선명하게 구별된다.

1688년 3월에 단양 구경을 떠난 김창협ㆍ창흡 형제는 물길을 거슬러 오르며 지은 시에 충주 물길에 대한 기록을 많이 남겼다. 김창협은 18운의 오언배율을, 김창흡은 24운의 오언배율을 <금탄(金灘)>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지었다. 긴 시에서 눈에 드는 풍경과 봄 정경을 그렸는데, ‘人家逐岸住 기슭 따라 늘어선 인가에서는 / 吠煙隨密疎 개가 짖고 밥 짓는 연기 피어나’(김창협)와 ‘曖曖負崦村 산촌이 어둠을 짊어지니 / 雞犬堪采隱 닭과 개는 풍채를 숨기며 견딘다’(김창흡)고 하며 같은 대상에 대한 형제간의 작은 표현의 차이가 느껴진다.

<금탄에서 배를 타고 여강에 이르러 우연히 읊다(自金灘乘舟至驪江偶吟)>
* (1732년) 6월 29일은 경휘전 소상이다. 백관은 당연히 변제(變除)하는데, 26일에 금탄의 정상국 댁에 이르러 의견을 물었더니, 육로로 가면 연전(練前)에 복명하기 어렵다기에 바로 배를 타고 한양으로 돌아왔다.(六月二十九日 乃敬徽殿小祥也 百官當變除 而二十六日至金灘鄭相家問議 從陸路難以復命於練前 遂乘舟還洛)

雨後滄江水沒涯 비온 뒤에 창강의 물이 불어
風前輕帆疾如馳 바람 앞에 가벼운 돛이 미친 듯이 달리는 것 같다
雙雙白鳥逢還失 짝지어 날던 흰 새를 만났다가 돌아오며 잃어버리고
點點靑山看忽移 점점이 있는 청산은 보이다가 갑자기 옮긴다
寺古神僧曾住錫 절은 오래돼 신승이 주석하였었고
樓淸圃老尙留詩 누대는 맑은데 포로의 시가 여전히 남아있다
王京此去知無遠 왕경이 이리 가면 멀지 않은 것 알겠으니
庶趁魂宮釋服時 여럿이 혼궁에 달려가니 상복을 벗는 때다
* 청심루에 포은의 제영시가 있고, 벽사는 곧 무학대사가 지점한 곳이다.(淸心樓有圃隱題詠 甓寺卽無學所占)
- 정중기, 『매산집』 권1, 시.

1727년에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정중기(鄭重器, 1635~1757)는 1731년에 승정원 가주서(假注書)로서 1732년 2월까지 입시하였다. 병으로 개차된 후, 6월 18일에 북교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산천의 대축을 맡았었다. 그 뒤에 고향 영천에 내려갔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6월 29일에 있는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宣懿王后, 1730~1732)의 변제(變除)에 맞춰 상경하는 길에 26일에 금탄의 정상국 집에 들렀다고 한다. 정호(鄭澔, 1648~1736)에게 정해진 시한에 맞춰 돌아갈 방법을 묻고는, 바로 배를 탔다고 한다. 앞서 박은과 이안눌의 경우 나흘이 걸렸지만, 정중기의 경우 하루 이틀 사이에 배를 타고 서울에 도착한 것을 알 수 있다.

충주의 물길 중에서 남아 있는 시를 보면, 금천은 가장 붐볐던 포구 중의 하나였다.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남한강 본류와 달천이 합쳐져 수량이 늘어나며 급류를 형성하여 쇠여울[金灘]이 되고, 그것을 지나 북쪽으로 흐름이 바뀌면서 유속이 느려진 곳에 금천(金遷)이 자리했다. 금천은 고려 시대부터 덕흥창이 설치되어 조세 운반의 중심 기지 역할을 하였고, 조선 초에는 경원창이 추가되며 물길의 중심 포구로 기능했었다. 2003년에 중앙탑면 창동의 청명주 기능보유자였던 김영기 옹을 만났을 때, 일제 강점기에 200석을 싣는 배를 4척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세조 11년(1465)에 가흥으로 세곡창을 이전하며 규모가 축소되었지만 포구로서의 기능은 물길을 이용하는 상황에서 계속 유지했다. 금천에 일정한 배가 항상 있었고, 그곳부터 월탄까지 10리 뱃길은 거의 직선으로 평안했기에 금천에서 배를 타고 내린 사람들이 남긴 제영시가 많다. 대부분 배를 타고 가던 느낌이나 금천과 주변 풍광을 그리고 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창동의 마애불이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던 기도처로 기능했었는데, 그에 대한 언급이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금천은 충주 읍치와 가장 가까운 포구로서 기능했던 사실이 새롭게 확인된다.

(11) 청금정(聽琴亭)

탄금대를 지나 하류인 목계까지 이어진 물길의 중간중간 강가에 자리한 정자가 몇 개 있었다고 한다. 물길을 따라 정리한 시에는 청금정(聽琴亭), 옥강정(玉江亭), 사휴정(四休亭), 창랑정(滄浪亭) 또는 범허정(泛虛亭) 등의 정자 이름이 보인다. 이들 정자가 있던 곳은 우륵이 뱃놀이하다가 쉬었던 곳이라는 전설이 있다.

제일 상류에 있었다는 청금정은 금천 지역에서 확인된다. 금천에 살았다고 전해지는 유항(柳恒, 1574~1647)의 시 한 수가 『충청도읍지』에 수록되어 있다.

<청금정(聽琴亭)>

聽琴亭對彈琴臺 청금정은 탄금대와 마주하고
江空石老雲千古 텅 빈 강에 돌은 늙고 구름은 천고에 흐른다
風吹玄鶴時復來 바람 불어 현학이 다시 오는 때에
十二曲欄山月午 열두 곡 울리는 난간에는 산달이 낮에 뜨리라
- 유항, 『충청도읍지』 충주목 제영조.

이 시는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그 소리를 듣는다는 뜻의 청금정을 노래한 제영시로 소개하고 있다. 유항이 금천에 살던 때 청금정은 있지만 탄금대에서 가야금은 연주되지 않았다. 다만, 우륵 선인이 현학을 타고 돌아갔다는 전설이 있어서, 그가 다시 현학을 타고 돌아오면 열두 줄 가야금이 연주되고 청금정 난간에 울리며 낮달이 뜰 것이라는 예언같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쩌면 이것은 탄금대 전설의 연장선에서 전해지던 이야기였는지도 모른다.

청금정을 중심으로 한 폭의 산수화를 그린 ‘청금정도’가 있었던 듯하다. 그림의 주인이 화제를 청해서 지은 <제청금정도(題聽琴亭圖)>라는 제목의 시 한 편이 확인된다.

<‘청금정도’에 쓰다(題聽琴亭圖)>

衰人不堪供世事 노인은 세상일에 종사하기 견디지 못해
誅茅一把東淮谷 초가집 한 채 동회 골짜기에 지었네
琴書顚倒拋左右 거문고와 책은 뒤집혀 좌우에 버려졌고
北窓淸風臥幽獨 북창에 시원한 바람 부니 홀로 조용히 누웠네
何來朴生美少年 어디선가 온 박생이라는 미소년이
袖中龍眠畫一幅 소매에서 용면의 그림 한 폭 가져왔네
言是樓巖聽琴亭 이것이 누암에 있는 청금정이라 하는데
亭臨月灘第一曲 정자는 월탄의 첫 번째 구비를 마주했네
上游形勝領略盡 상류의 형승은 대략 알고 있으니
羅代遺蹤在耳目 신라의 유적도 이목에 남아 있네
指點于仙百尺臺 손으로 우선의 백 척 누대 가리키니
金生廢菴山之足 산발치에 김생의 버려진 암자 있네
最是灘叟舊田園 무엇보다 옛날 탄수가 살던 전원이니
何如淮翁江上屋 회옹의 강가 집에 비교하면 어떠한가
百頃䆉稏靑不稀 백 이랑 논은 푸른 빛 드물지 않고
千柄芙蓉森如束 천 줄기 버들은 묶은 것처럼 빽빽하네
問汝此中何所事 묻노니, 그대는 이곳에서 무슨 일을 하는가
上事老兄兼收族 위로는 늙은 형 섬기고 아울러 친족 거두네
妻兒手自操井臼 처자는 손수 물 긷고 절구 찧으니
貧士生涯不干祿 가난한 선비의 생애는 벼슬을 바라지 않네
迎賓垂釣頗潑刺 손님 맞아 낚시 드리우면 고기 제법 팔팔하고
殺鷄爲黍雜野蔌 닭 잡고 기장밥 지어 나물 섞으리라
淮叟欣然有成言 회옹이 기뻐하며 약속하는 말 있으니
秋來欲訪島龜玉 가을이 오면 도담, 구담, 옥순봉 찾아
扁舟歷登聽琴亭 일엽편주 타고 차례로 청금정에 오르면
畫中山川應簇簇 그림 속의 산천이 응당 빽빽하리라
於是把酒題上頭 이에 술잔 들고 위쪽에 시를 쓰니
肯負落霞與孤鶩 지는 노을과 외로운 따오기 저버릴 수 있으랴
- 신익성, 『낙전당집』 권1, 시-칠언고체.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박생(朴生)이라는 미소년이 가지고 온 <청금정도>를 보고 화제(畫題)로 쓴 시이다. 신익성은 선조의 부마인 동양위(東陽尉)이다.

그림에는 초가집 한 채를 짓고 홀로 조용히 누워있는 노인이 있다. 초가집이 자리한 곳은 동회(東淮) 골짜기라고 하였다. 동회는 신익성의 별서가 있던 양수리의 두물머리 일대를 말한다. 그곳에 백운루(白雲樓)라는 누대가 있었다고 한다. 청금정이 그려진 위치가 동회의 백운루처럼 강가에 있다.

그곳을 기준으로 탄금대와 김생사가 보이고, 또한 이연경이 살던 용탄이 있어 이 또한 신익성 본인의 동회의 풍경과 비교한다. 그곳에서 위로는 늙은 형을 섬기고 친족을 거두며, 처자는 손수 물 긷고 절구질하는 가난한 선비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가을이 오면 단양 구경을 가며 청금정에 한번 들르겠다는 약속을 한다.

이 시는 남학명(南鶴鳴, 1654~1722)이 1686년 10월에 사군을 기행하며 쓴 <유사군기(遊四郡記>에 ‘다음날(6일) 청금정을 지났는데 이는 바로 낙전(신익성)이 “정자는 월탄의 제일곡을 마주하고, 우선이 금을 타던 백척대를 가리키네(亭臨月灘第一曲 指點于僊百尺臺)”라고 일컬은 곳이다.’라고 하였다. 월탄의 제일곡은 금탄을 지나 북쪽으로 물길이 꺾이는 지점을 이야기하며, 백척대는 탄금대를 말한다. 그 지점에 있던 청금정을 지나던 남학명은 <제청금정도>에 그린 시구를 인용하며 설명하였다.

신익성이 청금정도에 쓰면서 한번 들르겠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청금정 주인을 만나서 남긴 시 한 편이 확인된다.

<광릉의 배 안에서 청금정 주인을 만나 구봉(九峯 송익필(宋翼弼, 1534~1599))의 시에 화운하다 (廣陵舟中逢聽琴亭主人和九峯詩)>

點點雲山面面堆 점점이 보이는 구름과 산, 면면이 드러난 언덕
小崢嶸處數椽開 작은 산마루 가파른 곳에 몇 칸 집이 열렸네
訥翁詩攬三江色 눌옹의 시는 삼강의 풍경을 담아냈고
于勒琴傳萬古臺 우륵의 가야금은 만고의 누대에 전하네

其二
飛鷺浴鳧自朝暮 나는 백로 멱 감는 오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浮雲流水還今古 떠가는 구름 흐르는 물은 예나 지금이나
舟中細和九峯詩 배 안에서 구봉의 시에 하나하나 화운하며
把酒沈吟江日午 술잔 잡고 나지막이 읊조리는 강에서의 오후
- 신익성, 『낙전당집』 권4, 시-칠언절구.

청금정 주인이 누구인지도, 신익성과 광릉에서 만난 때도 모른다.

첫 수는 청금정 주인이 보내왔던 <청금정도>에서 본 청금정과 그 주변 풍경을 묘사하였다. 이규경(李圭景, 1788~1856)은 ‘그(탄금대) 건너 마주 보는 언덕 가는 청금정(聽琴亭)으로 한 작은 마을을 이루어 하늘이 달팽이 껍질 같은데 몇 호가 부칠 만한 곳이다.(其越邊相望之岸 名聽琴亭 作一小洞天如蝸殼 可寄數戶處也)’라고 하였다. 그리고 강 건너 우륵이 가야금을 탔던 탄금대를 이야기하며, 탄금대와 관련된 제영시를 가장 많이 남긴 박상(朴祥, 1474~1530)을 이야기한다. 둘째 수는 하루 종일 멱 감는 백로와 오리, 변함없는 구름과 물을 이야기했는데 그림 속에 정지된 장면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송익필의 시에 화운하며 청금정 주인과 배 안에서 술자리를 가지며 시 읊는 강에서의 오후, 현실로 돌아오고 있다.

청금정 가까이 살았던 정호(鄭澔, 1648~1736)가 지은 시가 하나 있다.

<조카 용하(鄭龍河, 1671~1701)의 청금정운에 차운하다(次家姪龍河聽琴亭韻)>

金丹無驗劫灰寒 구전금단 효과 없이 차가운 재가 되었고
華表千年鶴未還 천년 화표주에 학은 돌아오지 않네
一曲峨洋誰復聽 아양의 한 곡조 누가 다시 들을까
古梅春入數枝殘 봄이 든 늙은 매화에 가지 몇 개 남았구나
- 정호, 『장암집』 권1, 칠언절구.

시에 선약이 효과 없이 재가 되었기에 천년 화표주로 존재하는 탄금대에 신선이 되어 학을 타고 갔다는 우륵 선인이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탄금대의 가야금 소리를 누가 들을 수 있을지 모르는데, 봄을 맞은 매화에는 가지 몇 개가 남아 있다고 하였다. 탄금대에서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를 듣는다는 의미로 청금정이라고 이름하였지만, 그렇지 않은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항의 청금정과 신익성이 지은 청금정도 화제시, 남학명이 보았던 청금정, 정호가 그렸던 청금정은 1850년대까지 있었기에 이규경이 충주를 설명하면서 언급하였지만, 지금은 흔적이 없다. 보통 창동의 마애불이 있는 동산 꼭대기에 지어 놓은 콘크리트 정자를 청금정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청금정이 있던 위치는 그곳이 아니다.

청금대 【대】 벼루 모퉁이의 금강사(金剛寺)가 있는 언덕을 말하는데, 탄금대에서 가야금을 연주하면 이곳에서 소리를 들었다는 것에서 유래한 명칭임. (예성문화연구회, 『충주의 지명』, 충주시ㆍ예성문화연구회, 1997. p.335.)

지금은 아무것도 없지만, 창동 남쪽의 첫 골짜기에 금강사라는 절에서 보면, 왼쪽 산줄기 중간에 터가 있다. 좀 더 정밀한 고증이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청금정은 금탄부터 목계까지 이어지는 물길 구간에 있었던 첫 번째 정자였다. 보통 정자를 제영 공간으로 지은 시가 많지만, 청금정이라는 정자와 관련된 제영시는 많지 않다. 그 위치 또한 정확하지 않아 고증이 요구된다.

(12) 누암(樓巖)

『여지도서』에서 누암은 충주의 물길로 기록되지 않았다. 그러나 누암을 제목으로 한 시가 의외로 많다. 그리고 누암에는 그간 잘 알려지지 않았던 선소(船所)가 확인된다. 『호서읍지』 충주목 <읍사례(邑事例)>에 금천(金遷) 선소와 산계(山溪) 선소가 기록되어 있다. 산계는 목계로 민간 포구가 발달한 곳으로 물길의 중요 지역이었다. 금천 또한 일찍이 창이 설치되었던 곳으로 물길을 이용하던 중요한 곳이었다. 그런데 금천 선소는 ‘忠州樓岩船所’로 기록되었다.

“성을 지키는 기구로는 불랑기(佛狼機,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가져와 전투에 사용한 대포)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현재 산성에 비축된 것은 2백여 문(門)뿐이어서 만약 급변이라도 있으면 매우 부족합니다. 그래서 50문을 더 만들려고 두석(豆錫, 놋쇠) 30근을 수어청에서 동래(東萊)에서 무역하여 현재 선산(善山)에 실어다 두었습니다.

선산(善山)에서 충주(忠州)의 누암(樓巖) 선소(船所)까지는 불과 3~4일의 길이나 운임을 마련할 수가 없습니다. 입시한 대신들에게 하문하시고 편리한 대로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又所啓, 守城之具, 無過於佛狼機, 而卽今山城所儲, 只是二百餘門, 脫有緩急, 甚爲不足, 故將欲加造五十門, 豆錫三十斤, 自本廳貿得於東萊, 今方輸置於善山, 自善山至忠州樓岩船所, 亦不過三四日程, 而運價無以辦出, 下詢于入侍大臣, 從便處之, 何如?)(1692년(숙종 18) 12월 3일자 『승정원일기』와 12월 4일자 『비변사등록』)

이 기록은 누암서원을 세우기 전의 기록이다. 누암서원 때문에 누암과 관련된 시가 늘긴 했지만, 그보다 먼저 누암 선소가 존재했고 그곳에서 배편을 이용하던 상황에서 시가 많이 지어진 것으로 이해된다.

지금까지 확인한 누암 관련 제영시는 33명이 지은 45편 55수이다. 논의 대상으로 삼은 충주의 물길 관련 제영시 중에 작가 수로는 34명이 확인되는 가흥에 이어 두 번째이고, 작품 편수로는 가장 많다. 그 중에 구봉령이 6편 8수로 가장 많다.

구봉령은 1565년(명종 20) 가을에 충청도의 재상(災傷)을 안찰했고, 1576년(선조 9) 4월에 충청도 관찰사에 배수되어 1년간 근무했다. 당시에 충청도 관찰부가 충주에 있었기 때문에 누암을 비롯한 충주 관련 시가 많은 것으로 추정한다.

<누암의 객창에서 새벽에 일어나 우연히 쓰다 (樓巖旅窓 曉起偶書)>

昨來孤棹泝斜陽 어제 온 외로운 배 석양을 거슬러 올라가니
水色煙光共杳茫 물빛과 안개 빛 모두 아득히 펼쳐졌었네
回首忽驚新道路 고개 돌리니 길이 새로워 홀연히 놀라니
何心更管舊行裝 무슨 마음으로 다시 옛날 행장 꾸리는가
半簾風月詩千首 걷힌 주렴에 비친 풍월에 천 수 시 짓고
萬里湖山夢一場 만 리 강호에서 한 바탕 꿈꾸는구나
騎馬明朝過嶺去 내일 아침이면 말 타고 고개를 넘으리니
碧雲東望是家鄕 동으로 푸른 구름 이는 곳이 고향이라네
- 구봉령, 『백담집』 속집 권3, 칠언절구.

구봉령이 어제 저녁에 배를 타고 도착한 누암의 여관에서 자고 새벽에 일어나서 쓴 시이다. 누암에서 배를 내려 물길을 버리고 땅길로 바꿨는데, 죽령 너머 안동 고향을 생각하고 있다.

<누암에서 세낸 배가 역풍에 막혀 겨우 가흥에 도착하여 다시 육로를 취하다(樓巖雇船 阻逆風 僅達可興 還取旱路)>

雇船要速達 세낸 배는 빨리 이르는데 요긴한데
鞍馬豈爲勞 말 타는 일은 어찌나 수고롭게 하는지
病久思身穩 긴 병에 몸 편한 것 생각하니
春寒怯浪高 봄 추위에 물결 높을까 두렵다
旱路還成算 한로(육로)로 정해진 계획을 돌리나
舟人未解嘲 뱃사람은 조롱하지 않는다
可憐飛動意 나는 듯 움직일 뜻이 가련해지며
衰白任蕭條 늙은 머리칼 고요하고 쓸쓸해진다
- 조찬한, 『현주집』 권5, 오언율시.

조찬한(趙纘韓, 1572~1631)은 누암에서 배를 빌렸다고 한다. 배를 빌린 이유는 먼 길 가는데 빠르고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봄 추위에 부는 바람 때문에 물결이 높은 것을 걱정했다. 역풍에 제대로 나가지 못하는 배는 가흥에 도착해 다시 땅길로 바꾸게 되었다.

<누암을 지나며(過樓巖)>

水村早解纜 강마을에서 일찍 닻줄 풀고
棹下樓巖春 노 저어 내려가니 누암은 봄이다
桃柳翳一岸 복숭아 버드나무 어둑한 한 언덕에
恰有百家隣 흡사 백가가 이웃한 것 같다
突兀野中㙮 들 가운데 탑이 우뚝 솟아
相送下江人 강을 내려가는 사람을 보낸다
- 신성하, 『화암집』 권2, 시.

신성하(申聖夏, 1665~1736)는 배를 타고 내려가고 있다. 강에서 본 누암은 백 집이 이웃한 것처럼 큰 마을이었다. 누암을 지나며 너른 들 가운데 탑이 우뚝 솟았는데, 탑이 강을 내려가는 사람을 전송하는 것 같다고 하였다. 들 가운데 우뚝 솟은 탑은 중앙탑이다.

<누암서원(樓巖書院)>

古祠衰柳繫行舟 옛 사당의 쇠한 버드나무에 가는 배 매어두고
巖徑巃嵸草色秋 바위 길 높고 험준한데 풀 색은 가을이다
山裏絃歌如宿昔 산 속의 거문고 소리는 옛날 같으니
始知吾道在滄洲 비로소 알겠다, 우리 도는 창주(滄洲)에 있음을
- 남유용, 『뇌연집』 권5, 시.

남유용(南有容, 1698~1747)은 1747년 5월에 충주 목사에 제배되었다가 8월에 필선(弼善)에 제배되어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풀 색이 가을이라고 했으니,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배를 매어두고 누암서원에 들렀던 것 같다. 1695년에 창건한 누암서원은 1702년에 사액되었는데, 송시열을 주향(主享)하였다. 누암서원이 창건된 후 누암서원에 들렀던 이들이 지은 시가 추가된다.

<누암서원을 지나며(過樓巖書院)>

赤舃遭讒日 적석(赤舃)의 참소를 만나
蒼梧葬聖秋 창오(蒼梧)에서 가을에 성스럽게 장례지냈다
彈琴千古水 탄금대에 흐르는 천고의 물에
曾是送歸舟 일찍이 이곳에서 돌아가는 배 보냈다
* 右宋子(송시열, 1607~1689)

魚水天鑑衷 고기와 물은 충(衷)을 밝게 밝히는데
缺缺缺缺缺
陰陽消長交 음과 양은 사라짐과 자라남을 교차하니
三朝重荷擔 세 조정에서 거듭 짐을 졌었다
* 右老峯先生(민정중, 1628~1692)

書經命集註 서경(書經)의 집주를 명받아서
獨也九峯賢 홀로 구봉의 현인이 되었다
楚山奎隕後 초산(楚山)에서 별이 떨어진 후
臯比尙儼然 고비(臯比)가 여전히 엄연하다
* 右遂庵先生(권상하, 1641~1721)

直節松江祖 곧은 절개를 가진 송강을 조상으로
高山大老師 높은 산 같은 큰 스승이다
惟公獨慥慥 오직 공은 홀로 독실하게 정진하여
脚下實難爲 발 아래 실로 어렵게 되었다
* 右丈巖先生(정호, 1648~1736)
- 이항로, 『화서집』 권1, 시.

이항로(李恒老, 1792~1868)는 화서학파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학맥은 송시열을 따랐던 인물이고, 송시열을 모신 누암서원에 들렀다. 그러면서 누암서원에 배향된 송시열, 민정중, 권상하, 정호에 대한 각각의 시를 남겼다.

누암서원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누암(樓巖)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 과정에서 폭파하여 길을 넓히며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다만, 누암서원이 창건된 후 누암이 있던 산은 ‘서원동산’이라고 불린다. 누암서원 터만 가지고 백 집이 이웃한 것 같다던 누암 마을을 생각할 수 없다. 소일(召日)로 부르는 마을 전체를 누암 마을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만 누암 선소의 존재를 이해할 수 있다.

지적원도를 재구해 보면, 보조댐 건설로 인한 수위 상승은 물론 옛날에 강을 따라 났던 길의 존재도 수몰되었다. 물길의 이용이 끊기고, 지형 변화에 따라 마을은 축소ㆍ위축되었지만, 누암 선소가 있었던 곳이고, 관련 제영시가 많은 곳이 누암이었다. 지금은 어떻게 해 볼 도리가 없지만, 충주의 물길 중에 핵심 지역이었던 곳으로 재인식할 이유가 있다.

(13) 중앙탑(中央塔)

중앙탑 역시 『여지도서』에 충주의 물길로 기록되지 않았다. 뿐만아니라 조선 시대 기록에서는 중앙탑을 찾아볼 수 없다. 숭유억불 정책의 결과로 이해하지만, 탑의 규모로 볼 때 뚜렷한 이유는 확실하지 않다.

‘突兀野中㙮 들 가운데 탑이 우뚝 솟아 / 相送下江人 강을 내려가는 사람을 보낸다’고 한 조찬한의 시처럼 가끔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중앙탑이 서 있는 곳의 너른 들을 ‘탑들’이라고 하고, ‘塔坪’으로 적는다. 배를 타고 가는 이들에게는 등대와 같은 존재였던 것 같다.

중앙탑이라고 적은 경우는 없지만, 다른 이름으로 중앙탑을 소재로 지은 시가 세 편 확인된다.

<월탄탑(月灘塔)>

塔影亭亭落照中 석양빛에 길게 드리운 탑 그림자는
妄緣虛做萬年功 허망한 인연으로 빈 터에 지은 만년의 공이로세
經過今古無窮變 예나 지나 지나온 무궁한 변화에
迎送西南幾箇雄 서쪽으로 남쪽으로 맞고 보낸 문호(文豪)는 몇이던고
衆岳獻晴雲鬢亂 맑게 개인 뭇 산엔 구름이 흩어지고
一江含媚膩波洪 석양 머금은 강줄기엔 살진 물결이 일렁이네
黃昏巢鷺避鸇立 황혼에 깃든 해오리는 송골매를 피해 섰더니
挾子冥冥飛向東 새끼 낀 채 훨훨 날아 동쪽으로 가는구나
- 주세붕, 『무릉잡고』 권5 별집, 시.

주세붕(周世鵬, 1495~1554)의 문집에는 이 시 앞에 <送李牧使若氷出宰公州>와 <嘉興灘>을 실었다. 이약빙은 1543년 10월 11일자로 충주 목사에 제수되었다. 이약빙(李若氷, 1489~1547)의 공주 목사 임명 사실은 확인되지 않지만, 주세붕이 충주에 들렀을 때 공주 목사로 이임하던 시기였다.

주세붕은 배를 타고 중앙탑을 본 것은 아니다. 말을 타고 가흥으로 오가던 길에 멈춰 서서 눈앞에 우뚝 선 중앙탑을 보고 있다. 절은 없고 탑만 서 있다. 그 세월 동안 탑 앞을 지나간 수많은 사람의 발길을 생각한다. 그리고 석양에 일렁이는 윤슬을 보며 동쪽으로 날아가는 해오리를 바라보고 있다.

그 때 그곳에 사는 사람에게 탑 이름을 물었더라면 ‘중앙탑’이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주세붕은 ‘월탄탑(月灘塔)’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월탄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김생사탑(金生寺塔)>

激電奇巖過 번개 치는데 기이한 바위 지나니
停雲古塔來 머문 구름 사이로 옛 탑이 다가온다
野禽巢始定 들새는 비로소 깃들이고
歸雁響空哀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 창공에 애닯다
名共沈碑水 명성은 비석과 함께 물에 잠기고
形疑造字臺 의아한 모양은 글씨 쓰는 대석 같은데
高標猶獨秀 드높은 자취는 여전히 홀로 빼어나니
長想絶倫才 생각건대 뛰어난 재주로다
- 임상원, 『염헌집』 권4, 시.

이 시는 임상원(任相元, 1638~1697)이 1676년(병진) 3월 1일에 두미포(斗尾浦)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올라오며 강에서 중앙탑을 보고 쓴 것이다. 전날 여주를 지나며 벽사(壁寺)를 구경하며 시를 지었는데, 그때 본 강가의 탑과 비교되었을 것이다. 벽사의 탑보다 훨씬 큰 들 가운데 선 중앙탑을 ‘김생사탑’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그런지 탑신을 ‘造字臺’라고 하였다. 중앙탑은 몇 가지 전설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김생의 서고라는 설이 있다. 서성(書聖)으로 불리는 김생(金生)의 명성은 오랜 세월이 지나며 비석과 함께 물에 잠겼고, 홀로 남은 탑만이 김생이 글씨 쓰던 대석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빼어난 모습에 감탄하고 있다.

<금탄 북쪽 언덕에 탑이 있는데 높이가 십여 장으로 멀리서도 잘 보인다(金灘北岸有塔 高可十餘丈 遠遠可望)>

相思巖已遠 상사바우는 이미 멀어지고
白塔立如人 하얀 탑이 사람처럼 섰다
參差水中象 상아처럼 물속에 들쑥날쑥
佛影幻相因 불영인 양 환상적이다
碑版昧莫徵 비판은 어둑하여 알 길 없고
滄波逝幾春 푸른 물결에 지난 봄은 몇 번일고
天花散無跡 하늘 꽃 흩어져 자최 없고
野草合成茵 들풀 얽혀 자리를 이뤘다
我筏近彼岸 내 배는 언덕 가까이서
沿洄豈迷津 오르락내리락 몇 번을 헤맸던가
- 김창흡, 『삼연집』 권3, 시.

이 시는 김창흡이 형 김창협과 함께 1748년 3월에 청풍ㆍ단양 지역을 유람하기 위해 배를 타고 올라오던 중에 7일에 목계에서 조돈 구간을 지나며 얻는 오언고시 5수 중의 하나이다. 당일의 일기에는 ‘앞에 탑연이 있고 남쪽 가에는 평평한 언덕이다. 위에 백탑이 있는데 높이가 십여 발은 된다. (前有塔淵 南邊平臯 上有白塔 高可數十丈)’라고 적었다. 윤봉구(尹鳳九, 1681~1767)는 ‘白塔樓巖是 흰탑이 있으니 이곳이 누암이라 / 樓巖路不迷 누암 길은 헤매지 않는다’면서 중앙탑을 누암의 지표로 인식했지만, 김창흡은 배를 타고 강에서 본 중앙탑 자체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중앙탑 인근의 물길로 월탄이 있는데, 월탄에 있는 바위를 ‘상사바위’로 기록하였다.

중앙탑은 높이가 14.5m이다. 1장(丈)이 3.33m이니까 김창흡은 눈대중으로 33m 높이로 보았다. 실측한 것이 아니기에 높거나 크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물길을 이용한 사람들이 하나 둘 기록한 중앙탑은 크고 높다. 그만큼 눈에 잘 띄는데도 불구하고 탑 이름을 적지 않았다. 충주의 지지류에 계족산(鷄足山)을 기록하지 않은 인색함이 중앙탑에서도 발견된다. 그럼에도 배나 뗏목을 운항하던 뱃사람들에게는 뱃길의 안전을 기원하는 기도처로써 기능하며 오늘도 굳건하게 그 자리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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