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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막 다락방

지리산을 품은 남원 답사기

작성자東守마루/김인동|작성시간26.06.19|조회수6 목록 댓글 0

지리산 품은 남원 답사

'가야와 실상사 그리고 문학 속의 사랑(광한루와 만복사지)과 혼불'

싱그러운 오월 답사 가는 날(충주전통문화회 제243차 정기답사)이다.
전국적으로 비 예보가 내렸다. 답사에서 날씨가 주는 영향은 정말 크다. 걱정되어 방수 재킷에 우산까지 챙겼다. 이른 아침, 출발시각이 다가오도록 하늘은 잔뜩 찌푸렸지만, 다행히 빗방울은 떨어지지 않는다. 버스가 출발하고 박부규 회장의 인사말에서도 역시 날씨 이야기가 먼저 나왔다.
비가 온다고 걱정들 하시는데, 별로 걱정할 것 없습니다. 26년 동안 답사하면서 기상청 예보는 거의 다 맞았지만, 참 묘하게도 우리는 비와 눈을 피해 다녔습니다. 신기하게도 버스 타고 달릴 때는 비가 내려도, 막상 버스에서 내려 답사할 때는 비가 그쳤거든요. 이번에도 그 전통이 이어질 겁니다.” 나는 속으로  “그래, 그동안 답사길에 사찰과 교회, 성당, 향교, 단군전, 서낭당 등을 두루 찾아다니며 문안 인사 잘 드렸으니, 그분들께서 도와주시는 거겠지...” 웃스게 소리를 하면서도 정말 이번 답사도 그렇게 되기를  빌었다.
 버스가 남쪽으로 한 시간 남짓 달리자 빗방울이 후드득 떨어지기 시작한다. 한 시간을 더 달려 장수휴게소에 차를 세우니, 굵은 빗방울이 잣아든다. 참 다행이다. 첫 답사지 남원 가야 고분군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가 지나는 이곳은 무진장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전북의 무주, 진안, 장수 삼군을 일컫는 말이다. 흔히 전라도 하면 드넓은 호남평야와 나주평야를 떠올리지만, 무진장은 진안고원이라 불릴 만큼 높고 험준한 산악 지대다. 그래서 기후도 다른 호남 지역보다 서늘해 고랭지 농업이 발달했고, 겨울에는 눈이 유난히 많이 내린다. 덕유산 스키장이 이곳에 있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덕유산 구천동에 한번 눈이 내리면 봄이 와도 쉽게 녹지 않는다고 하니, 그 깊이를 짐작할 만하다.
 창밖으로 보이는 산과 들은 온통 싱그러운 수채화 같다. 구름에 휩싸인 짙푸른 산자락이 신비롭기 그지없다. 산이 높아 구름이 낮게 깔린 것일까구름이 차분하게 산을 감싸고 있다. 잠시 후 내리던 비가 멈추고 덕유산 자락에 해가 살짝 얼굴을 내민다. 잿빛 구름 틈으로 흰 구름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마치 시골집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처럼 정겹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시골길을 들어서 고개를 오르는데, 생각보다 고개가 깊고 가팔랐다. 아마도 이 길이 초행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지는 것인지, 예전에 가야 고분군 가던 길과는 전혀 다르게 느껴졌다. 시간이 다소 늦어져 집행부에서 미리 약속한 해설사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고 하면서 길도 잘못 들었다고 한다. 전라도인데 강원도 산악 지대에 온 듯한 이 느낌이 마치 강원도 함백산 국가대표 훈련소에 오르는 기분이다. 바로 무진장의 높고 험준한 지형을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가야 고분군 입구에서도 한참을 헤맸다. 알고 보니 전시관이 새로 지어지며 이전한 탓이었다. 먼 기억을 더듬어 앞장서서 나섰다. 마을 뒤쪽으로 가니 문을 굳게 닫고 빗장까지 걸어 잠근 채 텅 빈 옛 전시관이 쓸쓸히 서 있다. 이정표같이 반갑다. 우선 고분군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푸른 잔디가 깔린 능선을 따라 거대한 무덤들이 줄지어 서 있다. 단체 기념사진을 찍고 새 전시관으로 향하니, 약속 시각이 한참 지났는데도 양두례 남원문화관광해설사께서 환한 미소로 우리를 반갑게 맞아주신다. 일찍부터 나오셔서 기다리셨다고 한다. 미안한 마음을 뒤로하고 곧바로 해설을 듣기 시작했다.
남원 가야 고분군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고, 호남 지역에서는 최초로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이 된 곳입니다. 가야 문화권 연구의 기준점이 되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남원시에서 55억 원을 들여 새로 전시관을 지었고, 전시실과 디지털 영상실 등을 갖추고 운봉고원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 선생의 설명이 이어진다.
지리산 한 줄기인 연비산에서 뻗어 내린 능선을 따라 성내마을 북쪽에 40여 기의 봉토분이 분포해 있습니다. 지름 20m가 넘는 대형 고분만 12기가 확인되었고요. 무덤 양식은 가야계 수혈식 석관묘와 일부 백제계 횡혈식 석실분이 함께 나타납니다. 횡혈식 석실은 무덤 옆으로 통로를 내고 돌방을 만든 구조인데, 5~6세기 이곳에 있었던 운봉고원 가야라는 정치 세력과 백제가 얼마나 긴밀하게 교류했는지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그리고 청동거울, 금동신발 같은 유물도 출토되었는데, 백제 왕릉급 부장품과 견줄 만한 것들입니다.
발굴할 때 보니 고분을 만들 때 흙을 다지고 배수시설을 만드는 등 기술이 상당히 발달했었습니다. 특히 건물이 낮고 둥근 곡선으로 지어진 것은, 주민과 전문가 의견을 듣고 고분의 능선 곡선을 해치지 않도록 지하식으로 설계했기 때문입니다.” 일사천리로 명확하게 해설해주시는 덕분에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었다. 유물과 무덤 구조를 보며 해설을 들으니 현장감이 살아있었다. 문득 나도 모르게 충주와 비교하게 된다. 충주에도 사적 루암리 고분군이 있다. 신라가 중원을 차지하고 귀족들을 이주시켜 중원경으로 삼았던 흔적이지만, 내부를 볼 수도 없고 유물도 전시되지 않아 탐방객들의 흥미를 끌지 못한다. 인근 고구려전시관이나 중앙탑보다 인기도 적다. 문 닫은 작은 옛 가야 고분전시관이 부럽다. 답답한 마음이 들었다. 답사를 마치고 고맙다고 인사를 하려는데 양 선생이 제가 실상사까지 같이 가 드릴게요. 그곳은 해설사가 따로 없어서  제가 가서 설명해 드리려고요. 제 차로 따라가시면 됩니다.”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요즘 국제 정세 탓에 기름값도 많이 올랐는데, 자원봉사로 해설하시는 분이 자차까지 운전해가며 동행해 주신다니. 문화관광해설사는 일비도 적다. 의료보험 혜택도 없는 자원봉사자이다.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주시니 감동이 아닐 수 없다.
 실상사로 가는 길목에 백장암을 지나친다. 공예품 같은 아름다운 석탑 있다. 눈높이에 적당하게 새겨진 불보살상과 주악천인상이 인상적이었다. 특히 물소리와 고즈넉한 대숲과 묵언 수행하는 것처럼 서 있던 석등이 좋았는데, 오늘 일정에 없어 아쉬움이 남는다. 마침내 실상사에 도착했다. 돌다리를 건너자 입구에 커다란 석장승 두 기가 우뚝 서 있다. 코가 크고 벙거지를 쓴 모습이 꼭 제주도 돌하르방을 닮았다. 얼마 전 TV에서 제주 돌하르방이 벙거지를 쓴 이유를 군사 모자라고 하던데, 마을과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라는 의미는 같겠다고 생각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수호신이자 경계표 역할을 하며, 대개 남녀 한 쌍으로 세운다. 지역에 따라 벅수’ ‘돌하르방’ ‘수살목등으로 불리고, 재료에 따라 나누기도 한다.
 실상사는 지리산 천왕봉을 가장 편안하고 잘 바라볼 수 있는 명당에 자리 잡았다. 신라 말 홍척국사가 창건한 이곳은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세워진 선문으로, 홍척국사와 제자 수철화상이 법맥을 이으며 선종을 크게 일으킨 도량이다. 양 선생이 입을 연다. 실상사에는 고승들의 사리를 모신 부도탑도 많고, 거대한 철불도 유명합니다. 신라 말 선종이 들어오면서 철로 불상을 만드는 일이 유행했는데, 이곳 철조여래좌상이 그 대표적인 예입니다. 당당한 어깨와 엄숙한 표정에서 당시 선종의 기백이 느껴지지요.” 양 선생의 나직한 목소리가 경내에 울려 퍼진다. “발굴할 때 나온 기와 조각들만 봐도 당시 절집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와 문양만 봐도 제작 시대를 알 수 있으니 귀중한 자료지요.”
앞장서서 제일 먼저 동서 삼층석탑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이 쌍탑은 서로 마주 보며 서 있어 더욱 아름답습니다. 특히 동탑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상륜부가 완전한 원형으로 남아있어, 불국사 석가탑 복원할 때 이 모습을 본떴을 정도로 중요한 유산입니다.”
두 탑 사이 높은 자리에 석등이 서 있는 것을 가리키며 양 선생이 말을 이어간다. 이곳 석등은 쌍탑 사이에 배치되어 전체적으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특별한 점은 바로 옆에 본래의 계단이 남아있다는 것인데, 이는 당시 단순히 상징물이 아니라 실제로 불을 켜고 관리하는 등, 조명 기구로 사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석등 가운데 본래의 계단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는 예는 이곳이 유일합니다.” 이어서 발걸음을 보광전에 이루었다. 실상사의 주 법당으로, 주불은 비로자나불을 모시고 있다.
진리 그 자체를 상징하는 비로자나불 좌우에는 협시보살인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배치되어, 이치의 깨달음과 실천의 의미를 함께 나타낸다. 이곳 보살상은 종이로 제작된 것이 특징으로, 가볍고 부드러운 선이 다른 사찰에서는 보기 드문 독특한 모습을 보여준다. 보광전 한쪽에는 범종이 걸려있다. 1694(숙종 20)에 주조된 이 종은 표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 시주자, 불사의 의미까지 정확히 확인할 수 있다. 몸통은 안정적인 곡선을 이루고 당좌·유곽·비천상 등 전통 범종의 양식을 잘 갖추었다. 특히 종아래쪽에 는 독특한 지도 형상의 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일제강점기에는 이 무늬가 일본의 기운을 누르는 의미라 하여 주지 스님이 경찰서에 끌려가 심문을 받기도 했던 이야기가 전해진다.
보광전 옆쪽으로는 약사전이 자리한다. 이곳에 모셔진 철조여래좌상은 실상사의 핵심 유물로, 통일신라 헌강왕 6(서기 870)에 조성되었음이 뒷면 명문으로 정확히 밝혀졌다. 다시 해설이 이어진다. “선종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 오랜 세월 형태를 유지하는 철조 불상을 주조하는 풍토가 널리 퍼졌고, 이 철불은 그 선도적인 작품입니다. 당당한 어깨, 안정된 결가부좌, 부드럽게 펼쳐진 옷 주름과 너그러운 미소 속에, 막 우리 땅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선종의 깊은 정신이 담겨 있습니다. 또한, 실상사에는 창건 당시부터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리산에 절을 세우지 않으면 우리나라 정기가 모두 일본으로 넘어간다고 해서 철불을 천왕봉과 일본 후지산을 향해 일직 선상에 놓게 해서, 그 정기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누르기 위한 풍수적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일본이 흥하면 실상사가 망하고, 일본이 망하면 실상사가 흥한다.’라는 말까지 있었으니, 얼마나 이곳이 호국 정신의 중심이었는지 알 수 있지요.” 양선생의 해설이 명료하다.
 통일신라 말 국력이 쇠약해지고 왜구의 침입이 극심했을 때, 백성들의 공포와 불안을 달래주는 정신적 방어막이 바로 실상사이었다. 철불 사진을 좀 담고 이리저리 살폈더니 시간이 지체되었다. 다시 일행을 찾아보니 극락전 방향으로 이동하고 있다. 극락전은 극락세계를 다스리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모신 법당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없어진 것을 1684년(숙종 10년)에 다시 중건하였으며, 소박하면서도 단정한 모습이 오랜 세월의 무게를 느끼게 한다. 낮은 기단 위에 자리 잡은 건물은 부드럽게 휘어진 지붕 선과 균형 잡힌 기둥 배치가 안정적인 느낌을 주며, 내부는 차분하고 고요한 기운이 감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실상사의 오랜 역사와 불교 신앙이 깃든 공간으로, 조용히 발걸음을 멈추고 마음을 가다듬기에 알맞은 곳이다.
 극락전을 나오자 양 선생이 손을 들어 가리키며 설명을 이어간다. “이곳에 있는 두기의 승탑이 바로 실상사를 세우고 이끌어 오신 핵심 고승들의 승탑입니다. 홍척국사는 신라 중기 무렵 당나라에 가서 선종의 깊은 가르침을 배우고 돌아오신 분입니다. 그 후 이곳 실상사를 창건하여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 가장 먼저 선종의 기틀을 세우셨지요. 이 탑은 그분의 사리를 봉안한 팔각원당형 승탑으로, 기단부터 탑신, 상륜부까지 균형 잡힌 모습에 연꽃과 구름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통일신라 후기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줍니다. 함께 세워진 탑비에는 그분의 생애와 선종을 우리 땅에 뿌리내린 의미가 자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천히 탑 주위를 돌아보고 수철화상 승탑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돌렸다.
 “수철화상 능가보월탑과 탑비입니다. 수철화상은 홍척국사의 가장 뛰어난 제자로, 스님의 뒤를 이어 실상사의 법맥을 이어받고 선풍을 크게 떨치셨습니다. 당시 많은 제자를 모아 가르치고 도량을 정비하여 실상사를 한국 선종의 중심 도량으로 키워내셨지요. 탑은 간결하고 견고한 모습에 조형미가 뛰어나며, 탑비에는 그분이 선종을 널리 알리고 불교를 발전시킨 공적이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실상사는 부도탑만 돌아보아도 한나절이 걸릴 만큼 고승들이 많았다
절 입구에서 왼쪽으로 올라가면 편운화상 부도가 따로 자리 잡고 있다. 오늘 답사 일정이 촉박하여 그곳을 보지는 못했다. 아쉬운 마음에 대신 예전 답사 때 직접 보고 정리해 둔 자료를 바탕으로 그 의미를 되새겨 본다. 편운화상은 홍척국사의 제자이자 수철화상의 동문으로, 실상사 3대 조사이자 경북 성주 안봉사를 세운 인물이다. 탑에 새겨진 명문에는 정개 10(서기 910)’이라고 적혀 있어, 당시 이 일대가 후백제 견훤의 세력 아래 있었음을 보여주는 귀중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팔각승탑이 대세이던 시대에 이 부도는 독특하게도 향로인 향완모양을 본떠 온통 원형으로 만들어졌다. 고승에게 향을 피워 올리며 추모하는 마음을 형상화한 것으로, 위는 넓고 아래는 좁은 항아리 형태에 연꽃과 구름무늬가 섬세하게 새겨져 있어 조형미가 뛰어나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스님의 호 편은흐르는 구름을 뜻한다. 집착 없이 자유롭게 세상을 떠돌며 깨달음을 구했던 그의 삶이, 이 둥글고 완만한 탑의 모습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듯하다. 큰 스님께서 남긴 시 한 편을 옮겨본다.

흐르는 구름 머물 곳 없고
바람 따라 이곳저곳 가네
모습도 이름도 얽매임 없어
온 세상이 나의 집이로다

이렇게 실상사에 담긴 선종의 역사, 불교 예술의 아름다움, 민족의 호국 정신을 모두 마음에 새기고 나서, 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발길을 돌렸다. 오늘 짧은 시간이었지만 실상사의 깊은 역사와 문화재 속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양 선생 덕분이었다. 동선과 해설도 핵심만 간추려 명쾌하게 설명해주시니 시간도 절약되고 머릿속으로 정리가 잘되었다.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리니, “아닙니다. 저도 평소 좋아하는 절이라 즐거운 마음으로 온 것으로요. 선생님도 해설사라고 하시니 더 반갑네요. 성함을 보니 예전에 한문관 카페에 올려주신 글을 읽은 적이 있어요.” 인제야 아는 척을 한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일행들은 벌써 저만치 앞서가고 없다. 오늘 일정이 빡빡하다 보니 회원들 발걸음이 어느 때 보다 빠르다. 그렇게 실상사 답사를 마쳤다. 신기하게도 답사를 마치자 비가 거짓말처럼 깔끔하게 그쳤다. 다음 답사지는 광한루이다. 벌써 마음속에는 춘향이가 그네를 뛰는 모습이 그려진다.

실상사 소재 주요 문화재

<보물>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 (신라 말)
- 수철화상 능가보월탑비 (신라 말)
- 실상사 석등 (신라 말)
- 실상사 부도 (고려 시대)
- 실상사삼층석탑(쌍탑) (신라 말)
- 증각홍척국사 응료탑 (신라 말)
- 증각홍척국사 응료탑비 (신라 말)
- 41호 철조여래좌상 (신라 말)
- 편운화상 부도 (후삼국 시대)

<전북 유형문화재>
- 45호 극락전 (1684)
- 137호 보광전 범종 (1694)

<중요민속자료>
석장승 3(조선 후기)


'실상사를 뒤로하고, 남원 광한루로'

실상사에서의 답사 시간은 예정보다 더 소요되었다. 사실 실상사를 제대로 둘러보는 데 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하다. 문화답사라면 최소한 두 시간은 머물러야 할 만큼 볼거리가 많은 곳이기에, 자연스럽게 시간이 지체된 것 같다. 그래서 점심시간도 30분가량 늦어지고 말았다. 오늘 점심은 광한루 부근에 자리한 추어탕집에서 먹기로 했다. 남원은 지리산의 거대한 품을 적셔주는 남강의 물줄기를 따라 낮게 형성된 고을이다. 그런 고울 한복판에 섬진강 지류 중 하나인 요천(蓼川)이 가른다. 바로 요천이 흐르는 곳에 광한루원이 있다. 바로 이 주변에 추어탕집이 약 20여 곳이 모여 있다. 남원은 예로부터 추어탕으로 이름난 고장이다. 그 이유는 섬진강 지류인 요천의 맑은 물에는 미꾸라지가 많이 서식하고, 주변 땅은 추어탕에 넣는 토란대, 고사리 같은 산나물이 잘 자라는 조건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 한다. 우리 일행은 늦은 점심이라 허기졌지만, 구수하고 진한 추어탕 한 그릇을 맛있게 비우고 바로 옆에 있는 광한루원으로 발길을 옮겼다.

'광한루원에서 만난 해설사'
  광한루원에서 만난 남원문화관광해설사는 박은숙 선생이었다. 전 한 문관중앙회 박은숙 사무국장과 동명이다. 반가운 마음에 물어보았더니 알고 있다고 한다.광한루원은 공간이 매우 넓고 풍광이 빼어나 그냥 걷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르기 쉬운 곳이다. 우리는 바로 광한루로 향하는 대신 오른쪽 길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미리 박 선생에게 머무를 시간을 알려 주어서인지, 그에 맞춰 동선과 시간, 이동 경로까지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울창한 숲길을 따라 걷노라니, 오랜 세월 이곳을 지켜온 듯한 고목들이 곳곳에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일행을 한 그루의 팽나무 앞에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 나무는 수령이 450년을 넘었습니다. 1558, 조선 명종 때 심어진 것으로 본래는 옛 남원관 마당에 있었지만, 지금의 자리로 옮겨 심었지요.” 마치 큰 어른께 인사하듯, 편안하게 해설하는 모습이 마음에 와닿는다.
회원들 사이에서 아름다운 풍경을 벗 삼아 자유롭게 걷고 사진도 찍고 싶다는 의견이 나와 답사 일정이 조정되어 잰걸음이 되었다. 그림 같은 완월정을 스치고, 춘향의 영혼이 깃든 곳, 춘향사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춘향사당은 ''1931년 일제강점기에 남원의 유지들이 주축이 되어 권번의 기생들과 힘을 합하여 춘향의 절개를 이어 받들고자 설립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라고 하는데, 춘향의 초상화가 당시 춘향의 나이보다 조숙하고 성숙해 보이는 것 같았다.

'연못 위 신선의 정자, 영주각'

광한루를 향해 걷는 길, 연못 한가운데 섬처럼 또 있는 영주각이 물빛에 비쳐 더욱 아름답게 다가온다. 박 선생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영주각은 남원 부사 장의국 선생께서 처음 세운 정자로, 정면 석 칸, 측면 두 칸에 팔작지붕을 얹은 아담한 건축물입니다. 다듬지 않은 자연석으로 기단을 쌓아 거칠면서도 깊은 운치가 살아있고, 누각 안에는 예부터 이곳 풍광을 노래한 시편들이 편액으로 걸려있습니다.” 그중 한 구절을 소개해 준다.

영주각(瀛洲閣)

호숫물 맑아 달이 머물고
섬 위 집 높아 구름이 감도네
꽃과 나무 사철 푸르러 늘 신선의 땅
바람 불면 향기 실어 와 인간 세상 잊게 하네

바로 정철 선생이 1582년 전라감사 시절, 광한루를 크게 중수하고 연못에 삼신산(봉래·방장·영주)을 조성할 때 영주각에 직접 지어 걸었던 시라고 한다. 물과 하늘, 누각이 하나로 어우러진 풍경에 시구절이 더해지니, 정말 이곳이 사람의 세상이 아닌 신선들이 사는 영주산에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예전에 두어 번 찾은 적도 있고, 모두와 함께 움직이는 발걸음에 따로 머물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아, 시와 풍경을 눈과 마음에 담는 것으로 대신했다.

'웅장한 자태, 광한루'

  마침내 광한루 앞에 이르렀다. 박 선생의 마지막 해설이 이어졌다.광한루는 밀양 영남루, 진주 촉석루, 평양 부벽루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누각 중의 하나입니다. 광한루에서 ()’은 끝을 알 수 없는 광대무변한 우주의 공간을 뜻하고, ‘()’은 차갑고도 신비로운 은하수의 모습을 의미합니다. 조선의 선비들은 이 작은 누각에 앉아 대우주의 섭리를 논하고 신선의 세계를 꿈꾸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광한루는 본래 1419년 세종 때, 황희 선생이 광통루라 이름 지어 세운 누각입니다. 1444년 정인지 선생이 이곳의 빼어난 경치에 감탄해 달나라 궁전 광한청허부와 같다.’ 하시며 광한루로 고쳐 부르게 되었고, 1582년 정철 선생이 크게 중수하며 연못 가운데 봉래·방장·영주, 세 개의 신선의 섬을 조성했습니다. 정유재란 때 불에 타 사라졌던 것을 1639년 남원 부사 신감 선생이 다시 세웠고, 이후 여러 차례 손질을 거쳐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광한루의 건축 구조는 정면 다섯 칸, 측면 네 칸의 팔작지붕 다락집으로, 이익공 양식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세부 기법은 다포계의 특징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동쪽에는 석 칸의 부속 건물이, 북쪽으로는 계단 건물이 이어져, 어느 방향에서 보아도 그 모습이 조금씩 다릅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내부에 오를 수 없습니다. 혹여 있을 안전사고를 막으려는 조치라 하니 아쉬울 따름입니다. 예전에는 직접 올라 탁 트인 풍경을 내려다보며, 마치 이몽룡이 된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는데 아쉽습니다. 제 해설은 여기까지입니다.”

, 이제부터는 자유시간이란다. “마음껏 둘러보시고 아름다운 추억 많이 만드시길 바랍니다.”
짧은 시간에 핵심을 담아낸 해설은 깔끔했지만, 정작 춘향과 이몽룡의 이야기는 그냥 지나간 듯해 아쉬움이 남는다. 워낙 소설과 영화, 드라마로 익숙한 이야기라, 시간을 배려하신 탓이리라. 고마운 마음에 인사를 전했지만, 준비한 것이 없어 빈손이 되고 말아 말만 앞섰다. 사진 한 장을 남기고 아쉬운 작별을 고한 뒤, 우리 일행은 삼삼오오 흩어졌다.

'오작교에 서서, 인연의 의미를 돌아보다.'

홀로 연못가 오작교를 천천히 걸었다. 발길이 느려진 것은, 오작교의 인연들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은하수에 갇혀 만나지 못하던 견우와 직녀가 칠월 칠석, 까마귀와 까치가 낳아준 다리, 오작교에서 만난다는 이야기는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나오는데, 사랑의 기다림과 한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애틋하다.

춘향가 한 대목이다.

남문 밖 광한루 오작교 영주각, 삼남 제일의 명승이라
달빛은 은하수에 흐르고, 다리 위엔 정()이 머무네
한번 맺은 언약 하늘에 걸려, 쇠와 돌처럼 변치 않으려고
이생이 다하고 다음 세상에도, 다시 만나 사랑하리

수백 년이 지나도 이 다리 위엔 여전히 그들의 심장 소리가 들리는 듯, 바람에 실린 풍경이 더욱 애틋하게 다가온다. 푸른 연못물에 비친 광한루 그림자, 흐르는 구름과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데, 혼자 걷는 발걸음 탓일까? 마음 한구석엔 그리움과 여운이 감돈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오자, 광한루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만복사지로 발길을 돌렸다. 이번 답사길은 유난히 문학의 향기가 짙게 감돈다. 광한루의 춘향가, 만복사지의 만복사저포기, 그리고 최명희의 혼불문학관과 구 서도역까지 우연이기보다는, 문학의 고장 남원이기에 당연한 일인 듯싶다. 발길 닿는 곳마다 이야기가 피어나는 이 땅에, 점점 더 마음이 끌린다.

남원 만복사지
돌이 들려주는 천 년의 시간과 사랑

 만복사지이다. 바로 길가에 자리해 있다. 우리가 도착한 것을 알고 남원문화관광해설사가 달려온다.
이제는 멀리서 보아도 해설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남원문화관광해설사의 단체복이 생활 한복이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마치 춘향과 이 도령을 연상하게 한다. 오늘 모두 잘 어울렸는데, 만복사지에서 만난 해설사도 예외는 아니다. 춘향사당에 전해지는 춘향의 모습이 떠오르게 한다. 우리 일행이 버스에서 모두 내리자마자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 바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남원문화관광해설사 노은영입니다. 이곳이 바로 남원시 왕정동에 있는 만복사 터입니다. 고려 문종 때 창건된 큰 사찰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기린산 동쪽에 자리하며 동쪽에는 5층 전당이, 서쪽에는 2층 전당이 서 있었고, 그 안에는 높이 53척에 이르는 금동불이 있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조선 초기 강희맹은 이곳을 두고 소나무 그늘이 짙어 고을을 감싸고, 달빛 아래 종소리가 가득하며, 덩굴 덮인 오솔길은 부귀와 상관없이 고요하다라고 읊었을 만큼 크게 번성했던 곳입니다.” 간략하게 만복사지의 역사를 설명한 뒤, 우리를 당간지주 쪽으로 안내한다.
두 돌기둥이 나란히 서 있는 모습을 보며 노 선생이 덧붙인다. “절에서 큰 행사가 있을 때 깃대를 세우던 돌기둥입니다. 지금은 당간도 깃발도 없이 그저 서 있을 뿐이지만, 높이 4에 달하는 크기와 견고한 형태를 보면 당시 이곳 사찰이 얼마나 큰 규모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모서리는 닳고 표면은 거칠어졌지만, 여전히 땅속 깊이 박힌 모습이 당당하다. 마치 지나간 모든 기억을 묵묵히 기록하고 간직하고 있는 듯 굳건하게 서 있다. 지금은 바람만 스치는 빈 곳이지만, 천 년 전에는 이곳에 화려한 깃발이 펄럭이고 신도들의 발걸음 소리가 끊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옆에는 바로 석인상이 서 있다. “사찰의 경계를 지키고 수호하는 의미로 세워진 것으로 보입니다. 오랜 세월 땅속에 묻혀 있다가 얼마 전 온전한 모습을 찾았는데, 세월이 흘러 얼굴은 희미해졌지만 거친 선 속에 힘이 느껴지죠.” 해설을 듣고 자세히 바라보니 왠지 그리스 신상처럼 얼굴 윤곽이 서구적이다. 학자들 사이에서는 그리스 신화의 조각상이 실크로드를 통해 전해져 불교와 융합하며 부처님을 수호하는 금강역사로 자리 잡았다는 설도 있는데, 어쩌면 그런 인물들이 돌로 변해 이 터전을 지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상상해 본다. 이 석인상은 본래 자리가 아니어서 이름도 없이 한동안 그저 만복사지 석인상으로 불리었다.
석불 대앞에 서자 해설이 이어진다.
불상을 받치던 받침돌입니다. 본래 3단 구조에 연꽃과 다양한 무늬가 정교하게 새겨져 있었지만, 지금은 위쪽 부분이 비어 있습니다. 그 크기만으로도 당시 얼마나 큰 불상이 있었는지 짐작할 수 있죠.” 비어 있는 공간을 바라보니 마음이 허전해진다. 한때는 수많은 이들의 기도를 받았을 자리가, 이제는 텅 빈 채 바람만 통과하고 있다. 돌의 크기와 무게감만이 그 시절의 영화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오층석탑에 이르자 노 선생의 목소리에 힘이 느껴진다. “고려 전기 석탑 양식을 대표하는 유물로, 2단 기단 위에 탑신이 쌓였고 지붕돌 끝은 부드럽게 위로 휘어 곡선미가 돋보입니다. 일부 훼손이 되었지만, 통일신라 양식에서 고려 양식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특징이 잘 남아있어 학술 가치가 매우 높습니다.” 천년의 세월을 견디고 선 탑을 올려다보니, 공부 잘하는 모범생처럼 단정하다. 당시 사람들의 믿음과 정성이 그대로 응축된 듯 오층탑이 퍽 안정감이 있다.
만복사지에 단 한 채 한옥 건물 안으로 들어서니 석조여래입상이 자리하고 있다. “절 창건 당시 함께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높이 2의 화강암 불상입니다. 얼굴은 원만하고 부드러워 온화한 인상이지만, 옷 주름이나 자세는 다소 경직된 느낌이 있는데, 이는 통일신라의 섬세한 기법이 고려로 넘어오며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입니다.” 이어서 광배를 가리키며 설명한다. “광배는 머리와 몸통 부분이 굵은 선으로 나뉘어 있고, 윗부분은 훼손되었지만 남은 부분에는 연꽃과 불꽃무늬, 작은 불상들이 정교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특히 뒷면에 석불좌상이 함께 조각된 점은 매우 드문 사례입니다.” 앞뒤로 부처님의 모습이 새겨진 것을 보며, 탑돌이를 하듯이 사방으로 돌며 부처님께 예를 올렸을 것이다.
이제 만복사지 여기저기 흩어진 석재들 사이로 천천히 걸어본다. 기와 조각과 석재들이 뒹구는 이곳은, 한때는 수많은 전각이 늘어서고 향내가 그윽하며 밤낮없이 독경 소리가 울려 퍼졌던 큰 사찰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그저 빈 터만 남아 세월의 무상함을 말없이 보여주고 있다. 만복사는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의 한문 소설 <만복사저포기(萬福寺 樗蒲 記)>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 소설은 우리가 조금 전에 답사한 광한루원의 무대이었던 춘향전과 달리 남자가 절개를 지키는 내용으로, 살아있는 남자인 양생과 죽은 처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렸다.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남원에 양생이라는 늙은 총각이 일찍이 어머니를 여의고 외로이 살고 있었다. 평생 짝을 만나지 못해 괴로워하던 늙은 총각 양생이 이 절에 와서 부처님과 저포놀이(樗蒲, 백제 때 있었던 윷과 비슷한 놀이)로 내기를 제안한다. “제가 지면 매일 불공을 드리고, 이기면 짝을 구하게 해달라고 간절히 빌었단다. 결국, 양생이 이기자, 어두워진 뒤 한 여인이 나타난다. 그녀는 왜구의 침입으로 억울하게 죽어 이승을 떠돌던 혼령으로, 자신의 무덤으로 그를 안내하고 진심 어린 하룻밤 정을 나누지만, 살아있는 사람과 죽은 영혼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경계가 있었다. 결국은 슬픈 작별을 고한 뒤에도 양생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평생 다시 장가를 들지 않았으며, 끝내 지리산으로 들어가 홀로 삶을 마쳤다고 전해진다.
엄격한 유교적 질서가 사회 전반을 지배하던 조선 시대에,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선 사랑을 그려낸 것은 매우 파격적인 시도였다. 당시 이야기는 현실의 규범보다 인간의 마음과 감정 자체를 소중히 여겼고, 권선징악의 교훈 대신 이루어질 수 없는 인연의 슬픔과 그리움을 진솔하게 담아냈다. 그런데 부처니은 왜? 내기에 졌으면 깨끗하게 정말로 좋은 배필과 인연을 맺게하여 백년 해로하게 해주어야 하지 않나? 참 부처님 심볼을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소설인가? 춘향전. 혼불. 만복사저포기에는 모두 쉬운 사랑이 없다.
 한때 크게 번성했던 만복사는 이제 폐허로 변해 풀밭 사이로 돌들만 흩어져 있고, 인적없는 적막을 채우는 빈 절터이지만,  지나간 세월의 흔적이 서려 있고,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어서인지 쉽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 노 선생과 아쉬운 작별을 나누고, 다음 목적지인 혼불문학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만복사지는 동선이 한눈에 들어와 그리 넓어 보이지 않는 탓일까머무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다

'혼불문학관과 서도역 '

 비 갠 뒤 오후, 혼불문학관에 다다르니 공기가 맑고 상쾌하다. 예정보다 늦은 시간이라 문을 닫을 무렵이었지만, 마당에서 기다리던 해설사가 웃는 얼굴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친절하게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모습에, 고개가 절로 숙어진다. 오늘 청일점인 남성이시다. “이곳이 바로 소설 '혼불'의 무대가 된 곳입니다. 책 속에 나오는 매안마을이 바로 이 노봉마을을 본떴다고 보시면 됩니다. 정말 신기한 건, 이 소설 덕분에 마을 앞 구 서도역이 헐리지 않고 살아남은 일이에요. 옛 철로가 새로 놓이면서 역을 철거할 계획이었는데, 소설 속에 나오는 유서 깊은 장소라는 게 알려지면서 남원시에서 사들여 보존하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글 하나가 이 땅의 모습을 지켜준 셈입니다.” 고맙게도 오늘 마지막 답사지인 서도역에 대하여 미리 해설을 해주신다.
최명희 선생은 정말 정성을 다해 이 글을 쓰셨습니다. 여러 해 동안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옛날이야기부터 말투까지 꼼꼼히 메모했고, 마치 돌에 글자를 새기듯 한 문장 한 장을 다듬고 또 다듬으셨다고 해요. 그분은 단순히 이야기를 꾸민 게 아니라, 점점 잊혀가는 우리 말과 우리 삶의 정신을 글로 남기고자 하셨던 겁니다. 결혼식 풍경, 연날리기, 베를 짜는 모습, 장례 문화 등 옛사람들의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어 마치 그 시대를 여행하는 듯합니다. 어떤 부분은 너무 정확하게 표현하려고 며칠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셨다고 해요. 그 당시 여인들의 마음과 삶을 그토록 섬세하고 아름답게 담아낸 글이 '혼불'입니다. 그래서 이 소설을 우리 풍습과 말의 보물창고라고도 부릅니다.”
 문학관 안으로 들어가니 작가가 직접 쓰신 글씨, 사용하시던 만년필과 메모 수첩, 그리고 오랜 시간 다듬어진 원고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글이 신문에 처음 실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이야기도 한눈에 볼 수 있었고, 글을 쓰던 방이 그대로 재현되어 있었으며, 책 속 장면들을 작은 모형으로 만든 전시물도 눈길을 끌었다. 결혼하는 모습, 아이들이 노는 모습, 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모습 등이 실감 나게 펼쳐져, 마치 이야기 속으로 직접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었다.
 소설 '혼불'은 일제강점기 남원시 지방의 반가 매안 이씨 문중과 그에 얽맨 민촌 거멍굴의 사람들, 만주로 떠나간 사람, 어려운 시대를 살아간 우리 선인들의 이야기이었다. 세상이 흔들려도, 뿌리를 내리고 꿋꿋이 살아가는 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특히 대를 이어 집안을 지켜온 세 명의 여인 이야기가 중심을 이루었다. 마치 대나무가 마디를 만들며 계속 자라듯, 슬픔과 어려움 속에서도 삶을 이어갔다. “최명희 선생은 혼불 속에서만 6,000여 가지의 어휘를 이용하였다고 합니다.
이러한 집필 과정에 대해 작가 자신도 '나는 원고를 쓸 때면 손가락으로 바위를 뚫어 글씨를 새기는 것' 만 같았다고 합니다.” 문학관을 나서는데, 해설사의 말이 가슴에 박힌다. 글을 쓰는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관람을 마치고 다시 밖으로 나오니 언덕 아래로 잔잔한 호수가 보인다. 바로 소설 속에 나오는 청호저수지다. 푸른 하늘과 구름이 물에 비쳐 그림처럼 아름답다. “이 호수는 단순한 풍경이 아닙니다. 책 속에서 청암 부인의 마을 사람들을 설득해 함께 만든 곳으로, 가뭄이 들 때마다 온 마을을 살려준 소중한 물길이었어요. 서로 힘을 합쳐 어려움을 이겨낸 마음이 그대로 담겨 있는 곳입니다.”
해설사의 목소리 톤이 조금 낮아진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최명희 선생은 이 이야기를 끝까지 완성하시지 못했습니다. 난소암이 찾아와 5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마지막 순간까지도 펜을 놓지 못하셨다고 해요. 그래서 이 책에는 이야기 속 인물들의 아픔과 한뿐만 아니라, 선생 자신이 미처 다 이루지 못한 꿈과 아쉬움까지 함께 배어 있다고 느껴집니다.”
퇴근 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끝까지 친절하게 이야기해 주신 해설사에게 고맙고 미안한 마음으로 인사를 드리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한번 호수와 문학관을 바라보았다. 작가의 못다 한 이야기와 한이 이곳 풍경에 실려 마음을 깊이 흔든다. 최명희 작가의 강연 록 '나의 혼, 나의 문학' 중 그분의 말이 떠오른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감성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혼불 같이 살았던 작가의 유언 같다.

 이제 발길을 돌려 서도역으로 향한다.
이곳에는 별도의 해설사가 없다. 시끌벅적한 소란도 없이 고요히 시간이 머물러 있다. 한때 전라선의 작은 길목으로 사람과 소식이 오가던 곳이었지만 2002년 선로가 이설되면서 여객 열차는 다니지 않게 되었고, 낡은, 역사와 이어진 옛 철도 구간은 풀이 자라고 나무가 우거진 채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명희 작가는 이곳을 직접 걷고 느끼며, 기쁨과 슬픔, 만남과 이별이 오가는 이야기의 무대로 삼았으니, 지금은 고요한 풍경 속에 그 시절의 정서가 조용히 깃들어 있는 듯하다.
5월의 햇살 아래, 풀 덮인 옛 철길은 구불구불 이어지고, 길가에 늘어선 메타세쿼이아 나무들이 푸른 잎으로 그늘을 드리우며 바람이 불 때마다 부드러운 숨결을 전해준다. 회원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발걸음을 멈춘다. 낡은, 역사 앞에 서기도 하고, 옛 선로 위를 천천히 걷기도 하며 스마트폰을 꺼내 든다. 화면에 풍경을 담고 자세를 잡아 사진을 찍는 모습이 정겹다. 오늘의 느낌을 화면과 마음속에 함께 간직하려는 듯하다.
옛 기차역을 바라보니, 1970년대 우리나라 기차 안에서 펼쳐지던 모습이 문득 떠오른다. 그때의 기차는 늘 사람들로 가득 찼다. 좌석이 모자라 통로에 앉기도 하였지만, 마음만은 넉넉했다. 창밖으로 느리게 스쳐 가는 들녘을 바라보며 이웃처럼 자연스레 안부를 묻고, 누군가의 기타 소리에 함께 목소리를 보태기도 했었다. 따끈한 계란과 김밥, 보따리에 넣어 온 소주까지 꺼내 서로 권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기차 안은 그 자체로 작은 세상이었고, 낯선 이들 사이에도 정이 오가는 온기가 가득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오늘날 기차 안 풍경은 완전히 달라졌다. 자리는 편안해졌지만 모두 스마트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이 없고, 조금만 소리가 나도 눈치를 준다. 편안해진 만큼 서로의 온기는 옅어지고, 그 시절의 정겨운 모습은 이제 추억과 글 속에서만 만나게 되었다.
그런 느낌으로 회원들을 보아서인가? 돌아서는 회원들의 얼굴에는 오늘 본 풍경과 마음 담은 이야기가 새겨졌음이 느껴진다.
그렇다. 함께함은 거창한 몸짓이 아니다. 답사길에서 같은 풍경 속에서 세월이 남긴 흔적과 이야기를 듣고 바라보는 일이다. 굳이 많은 말을 주고받지 않아도  공간에 담긴 시간을 함께 느끼며 같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추억 하나를 더 담을 수 있다. 그래서 오늘 하루가 더욱 풍요롭고 여유롭다.
이제 오늘 답사는 끝이다. 기차가 다니지 않는 이 옛 서도역을 마음으로 달리며 답사길을 마무리한다. 밖을 바라보면 여행이고, 나를 바라보면 수행이라고 하는데, 답사는 여행으로 밖을 보고 추억으로 다시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가?
돌아오는 버스 창밖 너머로 허연 낮달이 따라온다. 마치 육체는 가고 세월은 흘러도, 글에 담긴 정신과 이야기는 꺼지지 않고 빛을 내듯, 오늘 하루가 마음속에 오래도록 이어질 것 같다.

흰 달

김인동

하늘 한 자락
일부러
외롭게 꾸며 놓은 듯
희미한 빛 겨우 남긴 채
모든 것을 비워 두었다

햇살조차
쉬이 닿지 않는 자리
희미한 낮달 하나 서 있다

바람도
그곳에 이르면
말없이 지나치고
구름조차
머물지 않아
숨을 곳 없는
허연 낮달이 떠 있다
 
낮에 보이는 저 달은
육체 떠난 혼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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