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몽주의 시대 - 경험론
이 장에서는 근대철학에 경험론적 인식론의 발전에 주된 공헌을 한 철학자들이 열어놓은 몇 가지 탐구노선을 논의해 볼 것이다. 경험론적 미학자들은, 창조적 상상력과 미적 향수와 같은 과정에 관하여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결론들을 끌어내었다. 종종, 데카르트가 근대합리론의 원천으로 간주되듯이, 베이컨은 보통 근대 경험론의 주창자이며 선구자로 간주된다.
신고전주의적 합리론과 형식론은 예술의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논리적 설득력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합리론적 방법은 광범위하게 선험적이며 독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베이컨적 전통은, 예술에 내포된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에 주의를 환기시켰고, 17, 8세기 영국 학파는 이 과제에 그들의 노력을 집중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개인의 작품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이전에 비해 보다 일반화되었다.
작시와 비평 둘 다에 권위를 행사했던 '총칙'은 보다 강력히 도전 받기 시작했다. 시인, 즉 천재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그는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위대한 작품을 낳는 자로 이해되었다. 고전의 권위(즉 모방, 자연과 이성, 법칙을 따르는 것)가 비판을 받아 그 토대로 침식당하였다.
1. 상상력과 예술적 창조
상상력 개념은 17세기에 처음으로 사상의 전면에 나타났다. 그것은 경험자료들을 재배열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어떤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17세기 사상가들은 이 과정에 관한 보다 정확하고 면밀한 연구를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데카르트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탐구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상력을, 감각과 마찬가지로 참된 지식의 획득에 있어 매우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Regulae}에서 '직관'을 정의하면서 직관이라는 것은 "오감의 동요하는 증언이나 상상력의 어줍은 구성에서 비롯되는 그르치기 쉬운 판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Meditation}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표현하고 있다. "상상력은 그것이 오성(지성) 능력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나의 본성에 혹은 나의 본질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2) 베이컨(1561∼1626)
베이컨은 상상력에, 데카르트 전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의 저작인 {과학과 종교의 위업에 관하여}는 새 시대를 알리는 그의 외침으로 되어 있다. 그 제2권의 서두에 나오는 분류는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학식의 여러 부분들은 '인간오성(지성)'의 세 부분들과 관련하고 있다. 오성(지성)은 학식의 소재지이다. 역사는 기억에, 시는 상상력에, 그리고 철학은 이성에 관련되어 있다. 베이컨에 의하면, 시는 사물의 본성에 마음을 숙여 복종하는 이성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욕망에 사물들의 외양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연을 개선한다."
그에 의하면, 상상력은 역사와 철학과 같은 학문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시는 학문보다는 일종의 쾌, 혹은 기지(wit)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견해에서 베이컨은 17세기에 하나의 문제를 제출하였다. 즉,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회화나 조각)을 산출하기 위하여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가? 베이컨은 상상력을 독자적인 특별한 활력인 것으로 갈라냄으로써 새로운 탐구분야를 열었다.
3) 토마스 홉스(1588∼1679)
베이컨의 그와 같은 도전은 토마스 홉스에게서 채택되었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상상력과 감각과의 관계에 관하여 주의 깊게 설명하였다. "처음에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법이다"라고 홉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생득적 또는 선험적 관념들을 거부하고 모든 관념에 이미지의 특성(감각적 특질)을 부여한다.
감각적 생리학적 기능은 동작(motion)에 있다. 물리적 동작이 그쳤을 때 이것의 이미지 또는 환영이 남는다. "따라서 상상력은 쇠퇴해 가는 감각일 뿐이다. 감각이 쇠약하고 오래되고 지나가 버릴 때 그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홉스는 '복합상상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복합상상력이 일어나는 법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람이 어떤 물건이나 일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사고할 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고는 전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전에 감각할 일이 없는 삼루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상상에서 다른 상상에로 이행하는 것도 그에 대해 똑같은 일이 우리의 감각 속에서 아직 한번도 진행된 일이 없었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홉스는 좀 더 심리학적 관찰로 눈을 돌려 하나의 구분을 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미지를 비교할 때, 그 가운데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사점을 식별함에 뛰어난 사람은 훌륭한 기지(good wit)를 지녔다 하고, 이 경우에 그것은 훌륭한 환상(good fancy)을 의미한다. 차이점을 찾음에 우수한 사람은 훌륭한 판단력을 지녔다고 한다. 이 두 능력은 모두 시를 쓰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중 '환상'이 보다 탁월해야 한다. 홉스에 의하면, 시가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상상력에 의해서이다.
홉스는 '감각상의 쾌'와 '마음의 쾌'를 구분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커다란 쾌는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지식에 제공되는 만족이다. 그리고 복합상상력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그 새로움을 주기 위함이다.
4) 존 로크(1632∼1704)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은 인간정신은 제원천과 제능력에 관한 장대하고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 저서이다. 그의 주된 목표의 하나는, 오성이 단순관념에 작용하여 일체의 복합관념과, 심지어 합리주의자들이 경험을 통해서는 추적할 수 없다고 여겨왔던 것(예, 무한대, 세제곱)까지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복합관념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오성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구성(composition)이다. 구성이란, 동일한 또는 여러 종류의 단순관념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로크는, 오성이 '인식'을 구축하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식'은 관념들의 비교와 그 진정한 관련성의 탐구에 있다. {인간 오성론}에 새로운 장 '관념들의 연합에 관하여'를 추가하여 로크는, "관념들 상호간의 자연적 대응과 결합"으로부터 "전적으로 우연이나 관례에서 기인한 관념들 상호간의 또 하나의 결합"을 구별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상호 독립되고 모호한 관념들의 잘못된 결합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의 관점에서 관념들의 잘못된 연합은 오류와 미신, 편견의 원천이며 결국 진리가 될 '질서 있는 사고과정'과는 상반된다. 이러한 부자연스런 연합이 철학보다 시의 특성이다라는 주장의 첫걸음일 수도 있다. 로크는 '기지(wit)'와 '판단력(judgement)'의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기지'는 대체로 관념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신속하고 다양하게 짜 맞추는데 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유사성이나 일치성이 발견될 수 있고, 이에 의하여 유쾌한 광경과 기분 좋은 광경이 환상(fancy) 속에 형성되게 된다. 그 반면, 판단력은 아주 다른 측면에서 즉 아무리 적은 차이라도 발견될 수 있도록 관념들을 서로 주의 깊게 분리하는데 있다. 이렇게 하여 유사점과 친근성에 오도되어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것은 은유나 인유(引喩)와 전혀 반대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은유와 인유에는 대부분 기지 오락과 익살이 자리를 차지하고서 환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그리하여 그 기지의 미가 한눈에 나타나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 어떤 진리나 근거가 있는지 검토하는 사유의 노고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오직 즐겁게 해주는 일에 골몰하는 관리(官吏), 아첨꾼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비유적인 말과 언어상의 인유는 기본적인 언어오용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상상력이 우리 시각상에 쾌를 줄 때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면 이 때의 말의 비유는 '완전한 속임수'이다. 여기에서 로크는 17세기가 낳은, 언어에 관한 가장 강력한 새로운 사상의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즉, 언어는 그것이 훌륭한 경험적 지식의 획득과 전수도구로 사용될 때, 평이성과 명료성 정확성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기준들을 시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때의 언어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로크에서 시작된 논리 실증주의적 사고에서 우리는 두 가지 상이한 언어개념, 즉 시의 은유적 언어와 과학적 문자적 언어라는 개념이 떠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때 시는 유쾌한 동시에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경구가 이제 처음으로 분열될 위험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이러한 목적의 어느 하나에 봉사하는 것이 곧 다른 하나를 해치는 것이 된다면 동일한 담론에서 그 양자가 동시에 수행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시는 지식의 매체로써 널리 생각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지식에 대한 요청과는 전혀 별개로 하나의 경험, 특별한 종류의 쾌를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5) 데이비드 흄(1711∼1776)과 데이비드 하틀리(1705∼1757)
관념의 연합이론은 18세기의 체계적 심리학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근대 실험심리학의 토대가 되었다.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관념의 심리학적 유인 혹은 일종의 인력의 어떤 관대한 힘을 가정하고 그것에 의해 관념은, 자신의 유사성, 인과적 관계, 그 본래 인상의 시간적 공간적 일관성에 따라 연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을 더욱 정교하게 확립한 사람은 데이비드 하틀리였다.
하틀리는, 흄의 도식을 단순화시킨 관념연합설을 고전적 형태를 제공하였다. 연속된 감각들의 단순한 반복은 그 감각들 각각에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을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거해서, 그는 연속적 연합과 동시 발생적 연합 모두를 설명하였다.
2. 취미의 문제 : 샤프츠베리에서 흄까지
앞에서 논의된 예술가의 상상력에 관한 대부분의 이론들은 예술기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 절에서는 예술의 기원 혹은 원인의 이론으로부터, 감정의 혹은 체험의 이론으로 눈을 돌린다. 이것이 미적 향수의 심리학과 관련된다.
1) 샤프츠베리(1671∼1713)
그는 홉스와 로크의 심리학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모든 저술에 쓰며있는 형이상학은 소생된 플라톤 주의였다. 그에 의하면, 미와 선은 일치하고 동일한 심적 능력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파악된다.
샤프츠베리가 '도덕감(moral sense)'이라 이름한 이 '심안' 이론은 18세기 윤리학 이론과 미학에 기여한 그의 업적이다. 그것은 본질적 특성은 추론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 대상을 파악한다는 점과, 그러나 그러한 파악에는 그 대상을 선험적 조화 개념과 대조시키는 일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다.
선(善) 또는 미(美)의 이름 하에서 조화는 감각적 성질이 아니라 일종의 선험적 성질이다.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는데 필요한 심적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18세기 경험론 미학의 주제들 가운데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서 이미 이 기능에 '취미'라는 명칭이 부여되고 있었다. 그 취미 개념은 미학사의 지극히 중요한 한 장에 있어서 커다란 수확으로 보였다. 샤프츠베리는 취미를 상대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감'은 도덕감과 같이 보편적 판단 기준을 가능케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그 세기말 유행하였던 심리학적 이기주의 이론을 고찰함으로써 오늘날의 소위 '미적 태도'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샤프츠베리에 의하면, 사람이 실제로 어떤 개별행동에서 쾌를 얻는다는 사실이 곧 그 행동이 이기적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만족에는 아무런 이기심도 상관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미적 향수는 소유욕과 완전히 구별된다. 그리고 '무관심적인 미적 관조'가 실제적 관심과 명백히 대조됨을 설명하고 있다.
샤프츠베리가 개척해 놓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18세기의 업적이 있다. 즉, 미 이외에 또 다른 가치 있는 미적 특질들을 인정함으로써 미적인 것의 영역을 확대시킨 것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주된 논의의 대상이 '숭고(崇高)'이다. 그 개념은 룽기누스의 {숭고론}에서 시작된다. 숭고 개념의 완성에 또 하나의 자극제가 있었는데, 즉 17세기 후반에 자연과 자연미에 대한 강렬한 새로운 감정의 출현이었다. 샤프츠베리가 예술과 더불어 자연을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취하는 데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함으로써 자연의 보다 거칠고 무시무시한 모습, 예컨대 울퉁불퉁한 절벽, 깊은 구렁, 사나운 급류,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저 우주 공간의 광막한 등의 쾌에 눈을 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감상의 폭을 넓힘으로써 보다 심오한 숭고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다. 자연의 웅장함은 우리가 이해하고 포착하기에 너무 크다는 점 때문에 자연의 존재를 그 자신을 창조한 조물주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숭고'라는 미적 체험으로 된다.
※무관심적 태도
무관심성이라는 개념은, 도덕과 종교의 모든 교훈이 근본적으로는 이기주의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토마스 홉스의 지능적 이기주의에 대립하여 생긴 개념이다. 샤프츠베리는 플라톤 주의자들과 함께 이러한 견해에 대항하여 德과 善은 반드시 무관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들은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 하고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18세기에 있어서 그러한 사상은 하나의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무관심이라는 말은, 대상을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관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기심, 이익이나 실용에 대한 고려의 不在를 의미하였다.
(참고도서 : Harold Osborne 著, {미학과 예술론}, 大旺社)
2) 애디슨(1672∼1719)
애디슨은 1712년에 {관객(spectator)}志에 '상상력의 쾌'에 관한 일련의 글을 다루었다. 상상력의 쾌는 가시적 대상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 대상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있을 때와, 회화, 조각상, 작도 또는 그와 유사한 경우로부터 그것의 관념이 마음속에 환기될 때의 경우이다. 즉 현존하는 대상에서 비롯되는 쾌는 '일차적'이고 기억된 혹은 상상된 대상에서 비롯되는 쾌는 '이차적'이다. 일차적 쾌는 웅장한 것, 비범한 것 혹은 아름다운 것을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차적 쾌를 줄 수 있는 것은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다. 마음은, 원래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을, 이것을 재현하는 조각상이나 그림 묘사 또는 음악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관념들과 비교한다.
이 때 쾌를 주는 것은 '그 묘사에 담겨있는 그것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자극하는 묘사의 적절성'이다. 애디슨의 작업은, 예술과 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초해하였으며 어느 정도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3) 프란시스 허치슨(1694∼1746)
철학적 미학에 있어 최초의 근대적 논문은 1725년 프란시스 허치슨이 출판한 {미와 덕성에 관한 우리의 관념의 기원에 관한 연구}의 전반부인 [미, 질서, 조화, 그리고 디자인의 연구]이다. 허치슨은 샤프츠베리의 제자였다. 그는 샤프츠베리로부터 '도덕감' 개념을 채택하여 자신의 {연구(Inquiry)}에 도입하였고 발전시켜 나갔다.
허치슨의 목표는, 관념들(시각의 경우에는 미 또는 유추, 청각의 경우에는 화음)을 자극하는 대상의 진정한 성질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는 이러한 관념을 지각하는 능력을 '내적인 감각(internal sense)'이라고 부르고자 하였다. 미를 지각하는 능력은 정확히 '감각'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산출하는 쾌는, "어떤 원리, 비례, 원인 혹은 대상의 유용성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의 관념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른다. 허치슨에 의하면 미의 지각과 관련되어 다음과 같이 공통된 특질을 말한다. "우리가 대상에서 아음답다고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말하면 단일성과 다양성의 복비례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미의 감각은 "다양한 통일성을 지닌 일체의 대상으로부터 미의 관념을 수용하는 수동적 능력"으로 재정의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정도로 이 감각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동일한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내감(internal sense)과 도덕감각(moral sense)
허치슨에 의하면, 대상들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은 다양과 통일의 복합 비율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 형체가 동일 수준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을 경우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따라 결정되고 그 역도 역시 성립한다. 그는 이러한 수학적인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을 내감(internal sense)이라고 불렀다.
감각이라는 쓰여지는 능력과 구별하기 위하여, 규칙성 법칙 조화 의미를 알아보는 능력을 내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우리가 덕성이라고 부르는, 이성적 주체들의 정감 행위 및 성격들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요소를 일컬어 도덕감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샤프츠베리에게서는 양자가 동일시되었던 것에 반해 허치슨에 이르러서는 양자가 기능적으로 분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감과 도덕감각을 독특한 쾌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는 미를 결정하는 '내감'의 통일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개성, 기질, 과거의 환경 등으로 인한 '환상(fancy)'의 다양성들을 설명해 보고자 하였다.
(참고도서 : 김문환 著, {근대미학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4) 흄(1711∼1776)
허치슨의 영향이 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결실을 보았다. 흄이 미에 관한 문제를 최초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에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미는 정의될 수 없고 오직 취미 또는 감각에 의해 식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미는 쾌를 산출하는 형식에 불과하며 추는 고통을 전달하는 부분들의 구조이다. 이것이 미와 추의 본질이며 따라서 이들은 때때로 '감정(sentiment)'을 가리킨다. 흄은 {품행의 원리에 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처음 출현하는 즉시로 우리의 애착과 찬동을 요구하며, 따라서 그것의 잘못된 영향을 시정하거나 혹은 우리의 취미와 감정에 더 잘 맞추기 위한 어떤 추론도 불가능한 그런 종류의 미", 둘째, "많은 미의 법칙들 특히 예술의 법칙들에 의한 미(적합한 감정을 느끼지 위하여 추론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흄의 그의 저서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주의 깊게 몰두하였다. 이 글의 서두에서 그는, 이 세상에 퍼져있는 각양각색의 취미는 일견 명백해 보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오히려 더욱 다양함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하나의 취미기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감정은 "대상과 심적 기능이나 능력과의 어떤 일치 또는 관계를 기록할 뿐이다". 미는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한 특질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물들을 관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마음들도 저마다 상이한 미를 지각한다. 그에 의하면 '실재'하는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평의 원리 혹은 '구성법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 기초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흄은 말한다. 진정한 심판자가 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며 또한 찬양할 만한 일이다. 섬세한 감정과 통합되어 있고 연습에 의해 개선되고 비교에 의해 완전해지고 모든 편견을 깨끗이 씻은 건전한 감각만이 비평가들을 이 귀중한 신분에 합당하도록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종합적 판단은 미와 취미의 진정한 기준이 된다. 흄의 체계는 비상대주의적 기초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데, 즉 취미의 일반원리는 인간본성에 있어 일정 불변한 것이다.
3. 미적 특질 : 호가드에서 엘리슨까지
예술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설명해보려는 18세기의 확고한 노력에서 우리는 두 가지 근본적인 관심의 노선을 추적할 수 있다. 하나는 '취미', 다른 하나는 '미, 숭고'이다. 여기서는 미와 숭고 개념으로 그 강조점을 바꾸어 본다.
1) 윌리엄 호가드(1697∼1764)
호가드는 시각적 미의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입체와 형태는 보여졌을 때 여러 가지 종류의 선(線)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선의 아름다움을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시각적 미를 설명해 줄 것이다. 선의 아름다움을 산출하는데 6가지 특징이 협동한다. 즉 접합성, 다양성, 일관성, 단순성, 복합성, 양 크기 등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회화는 모든 종류는 각각 이러한 근본적 선의 관계에 바탕을 둔 변형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호가드는 말한다.
2) 에드먼드 버어크
미적 특질의 본성에 대한 가장 유명한 연구는 버어크에 의해 출판된 {숭고와 미 관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이다. 버어크가 목표로 삼았던 것 중 하나는, 상호 주관적으로 타당한 취미의 기준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오감과 상상력, 판단 등을 통하여 외부 사물을 다룬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취미와 판단을 통하여 만족감을 낳는데 작용하는 원리는 보편적일 것이다.
미와 숭고에 대한 버어크의 구별은, 두 가지 유형의 쾌적한 감각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 쾌'와, 그가 '유적'이라고 이름 지은 '고통의 제거 또는 감소'이다.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상황에 있지 않으면서 고통과 위험의 표상을 갖게 될 때 그 정념은 유적한 것이다. 이러한 '유적'을 촉발하는 모든 것을 나는 '숭고'라고 부른다. 그는 '숭고'를 놀라움이라 칭한다. 그것은 일체의 동작이 멈춰져 있고 약간의 공포를 동반하는 그런 정신의 상태이며 마음이 그 자신 관조하고 있는 것으로 꽉 차있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어떤 대상이 숭고의 감정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시무시한다든가, 실제로 무시무시한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든가, 혹은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어떤 특성을 지니거나 해야한다. 무시무시함은 숭고의 감정을 환기하고, 그것의 고통스러움이 통제되고 감소될 때 고유한 '유적'을 불러일으킨다.
모호함은 무시무시함에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무서움은 무지에 의해 증대되기 때문이다. 힘, 결핍과 공허, 그리고 규모의 웅대함도 숭고에 크게 이바지한다. '미'에 대한 분석도 숭고의 분석과 유사하다. 버어크는 '미는 부분들의 비례에 있다'는 설과, '미는 적합성에 의해 야기되거나 혹은 그것으로 되어 있다'는 설을 거부하고 있다. 미를 야기하는 특질은 조그마함, 부드러움, 점진적 변화, 섬세함 등이다. 그의 최종적 결론에 의하면, 미와 숭고는 그들의 제반 조건상 상반된다. 그러면 어떤 특질이 숭고를 산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이제 어떻게 이러한 특질이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신체에 작용하여 숭고를 산출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규모의 웅대함이 왜 숭고의 원인이 되는가? 광대한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눈이 피곤해지고, 그 눈은 온통 경련을 일으키면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에 가까이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 부드럽고 조그맣고 섬세한 대상에서 왜 우리는 사랑을 느끼는가? 그것이 우리 유기체에 그와 유사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즉 미는 "전 체계 내의 경화된 부분에 대한 이완작용을 한다". 여기에는 미학사에 있어서 약간 참신한 중요사상이 있다. 그것은 미적 향수에 대한 설명이 생리학적 수준에서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3) 그 외 사상가들
18세기는, 우리 자신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미학의 근본문제에 관해 가장 강렬하고 다양하게 창조적 사고를 전개하였던 시기이다. 18세기의 가장 커다란 업적의 하나인 미적 범주의 확대가 있었다. 이 때 어느 정도 숭고 개념이 확대됨으로써 고전전 미 개념이 좁혀지고 위축되기도 했지만, 숭고라는 용어는 데카르트적 미학이 억압하거나 외면했던 예술의 온갖 요소들을 담을 주머니로 점점 자라났다. 미적 정서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와, 숭고에 대한 열광은 신고전주의 비평체계에 최종적인 일격을 가하였다. 결정적인 법칙과 규준의 개념은, 취미에 대한 강조에 그 자리를 내놓았으며 보다 강력하고 덜 정제된 정서에 대한 환영과 더불어, 상상적 또는 직관적 진리가 이성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강조되었다. 많은 사상가들은 이 총체적 운동에 어떤 역할을 하였다.
★베일리 : {숭고론}
★제라드 : {취미론}
★헨리 호움 : {비평의 여러 요소들}
★블레어 : {수사학 강론}
★토마스 레이드 : {인간 지성론}
★아담 스미스 : {모방의 본질에 대하여}
4) 드니 디드로
그는 대다수 불란서 동시대인들보다 미학의 문제에 더 많은 더 체계적인 사상을 제공하였다. {백과전서}에 나오는 디드로의 미에 관한 글 '미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철학적 연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의 조건인 특질들은,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사물들 모두에 공통된 것이어야 한고 그것들 없이는 미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것이어야 하며, 그것들이 변화할 때 미의 정도도 변화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에 알맞은 유일한 개념이 rapports 즉 '관계개념'이다. 그 관계란 단순히 논리적 의미에서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결합, 상합성, 또는 적합성을 포함하는 관계이다. 나의 오성에 rapports의 관념을 깨우쳐주는 것은 그 모두가 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예술에서 다채로운 관계들 전체의 조화를 지각하고 기뻐한다. rapports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작품은 더욱 더 아름답다.
5) 아치벌드 앨리슨
그의 [취미의 본성과 원리에 관한 논문] 두 번째 증보판은 매우 중요한 체계적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 논증들이 주의 깊고 정교하며 또한 완전히 연합론적 원리에 입각하여 '상상의 쾌'를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졌다. 앨리슨의 첫째 주 논제는, 자연이나 예술에서 미와 숭고를 향수하는 것은 관념들의 정연한 사슬이 정서를 산출하는 그 과정에, 상상력이 종사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상이나 대상의 성질이 아니라, 어떤 단순정서를 산출하는 그러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성공적인 예술 작품에는 그 작품을 하나의 완전체로 되게 하는 지배적 성질 또는 정서가 존재한다.
질료의 성질들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성에 쾌를 주거나 재미있는 정서를 산출하는데 적합하게 되어 있는 그러한 성질들의 기호 또는 표시인 것으로 간주된다. 앨리슨 체계에 의미 있는 특징은, 그것이 미의 지각 조건에 대한 정연한 공식을 발견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를 포기하고 있다는 점과, 미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앨리슨이 끌어내고 있는 또 하나의 결론은 앞장의 신고전주의적 논의를 상기시킨다. 즉, 하나의 예술작품은 그것이 야기하는 연관 사슬의 일관성에 의해 진정한 미적 쾌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 예술작품이 '그 특성이나 표현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본질적이다.
이 장에서는 근대철학에 경험론적 인식론의 발전에 주된 공헌을 한 철학자들이 열어놓은 몇 가지 탐구노선을 논의해 볼 것이다. 경험론적 미학자들은, 창조적 상상력과 미적 향수와 같은 과정에 관하여 상당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 결론들을 끌어내었다. 종종, 데카르트가 근대합리론의 원천으로 간주되듯이, 베이컨은 보통 근대 경험론의 주창자이며 선구자로 간주된다.
신고전주의적 합리론과 형식론은 예술의 본질을 분석함으로써 자신의 논리적 설득력을 확보할 것을 주장하였다. 합리론적 방법은 광범위하게 선험적이며 독단적인 요소를 지니고 있었다. 이와는 달리 베이컨적 전통은, 예술에 내포된 심리학적 과정에 대한 경험적 연구의 필요성에 주의를 환기시켰고, 17, 8세기 영국 학파는 이 과제에 그들의 노력을 집중하였다. 이 시기에는 개개인의 작품에 대한 치밀한 연구가 이전에 비해 보다 일반화되었다.
작시와 비평 둘 다에 권위를 행사했던 '총칙'은 보다 강력히 도전 받기 시작했다. 시인, 즉 천재의 개념이 생겨났으며 그는 법칙을 무시함으로써 위대한 작품을 낳는 자로 이해되었다. 고전의 권위(즉 모방, 자연과 이성, 법칙을 따르는 것)가 비판을 받아 그 토대로 침식당하였다.
1. 상상력과 예술적 창조
상상력 개념은 17세기에 처음으로 사상의 전면에 나타났다. 그것은 경험자료들을 재배열하고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 어떤 능력이라고 할 수 있는데 17세기 사상가들은 이 과정에 관한 보다 정확하고 면밀한 연구를 고려하기 시작하였다. 데카르트적 전통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대개 이러한 탐구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상상력을, 감각과 마찬가지로 참된 지식의 획득에 있어 매우 부차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1) 데카르트
데카르트는 {Regulae}에서 '직관'을 정의하면서 직관이라는 것은 "오감의 동요하는 증언이나 상상력의 어줍은 구성에서 비롯되는 그르치기 쉬운 판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Meditation}에서는 다음과 같이 상상력을 표현하고 있다. "상상력은 그것이 오성(지성) 능력과 다르기 때문에 결코 나의 본성에 혹은 나의 본질에 필수적인 요소가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2) 베이컨(1561∼1626)
베이컨은 상상력에, 데카르트 전통의 철학자들과는 다른 지위를 부여하였다. 그의 저작인 {과학과 종교의 위업에 관하여}는 새 시대를 알리는 그의 외침으로 되어 있다. 그 제2권의 서두에 나오는 분류는 이후의 사상가들에게 매우 중요한 것이 되었다.
"학식의 여러 부분들은 '인간오성(지성)'의 세 부분들과 관련하고 있다. 오성(지성)은 학식의 소재지이다. 역사는 기억에, 시는 상상력에, 그리고 철학은 이성에 관련되어 있다. 베이컨에 의하면, 시는 사물의 본성에 마음을 숙여 복종하는 이성과는 대조적으로 마음의 욕망에 사물들의 외양을 굴복시킴으로써 자연을 개선한다."
그에 의하면, 상상력은 역사와 철학과 같은 학문을 산출하지는 않는다. 시는 학문보다는 일종의 쾌, 혹은 기지(wit)의 역할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와 같은 견해에서 베이컨은 17세기에 하나의 문제를 제출하였다. 즉, '상상력'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시(회화나 조각)을 산출하기 위하여 그것이 정확히 어떻게 작용하는가? 베이컨은 상상력을 독자적인 특별한 활력인 것으로 갈라냄으로써 새로운 탐구분야를 열었다.
3) 토마스 홉스(1588∼1679)
베이컨의 그와 같은 도전은 토마스 홉스에게서 채택되었다. 그는 {리바이어던}에서 상상력과 감각과의 관계에 관하여 주의 깊게 설명하였다. "처음에 감각기관을 거치지 않고서는 인간의 마음속에는 아무런 개념도 없는 법이다"라고 홉스는 말한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생득적 또는 선험적 관념들을 거부하고 모든 관념에 이미지의 특성(감각적 특질)을 부여한다.
감각적 생리학적 기능은 동작(motion)에 있다. 물리적 동작이 그쳤을 때 이것의 이미지 또는 환영이 남는다. "따라서 상상력은 쇠퇴해 가는 감각일 뿐이다. 감각이 쇠약하고 오래되고 지나가 버릴 때 그것을 '기억'이라고 한다". 홉스는 '복합상상력'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복합상상력이 일어나는 법칙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사람이 어떤 물건이나 일에 대하여 무엇인가를 사고할 때 그 다음에 이어지는 사고는 전혀 우연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전에 감각할 일이 없는 삼루에 대해 상상을 할 수 없는 것처럼, 하나의 상상에서 다른 상상에로 이행하는 것도 그에 대해 똑같은 일이 우리의 감각 속에서 아직 한번도 진행된 일이 없었다면 성립되지 않는다"
홉스는 좀 더 심리학적 관찰로 눈을 돌려 하나의 구분을 하고 있다. 즉, 사람들은 자기들의 이미지를 비교할 때, 그 가운데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유사점을 식별함에 뛰어난 사람은 훌륭한 기지(good wit)를 지녔다 하고, 이 경우에 그것은 훌륭한 환상(good fancy)을 의미한다. 차이점을 찾음에 우수한 사람은 훌륭한 판단력을 지녔다고 한다. 이 두 능력은 모두 시를 쓰는데 필수적이다. 그러나 그 중 '환상'이 보다 탁월해야 한다. 홉스에 의하면, 시가 정념을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은 일차적으로 상상력에 의해서이다.
홉스는 '감각상의 쾌'와 '마음의 쾌'를 구분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커다란 쾌는 새로운 경험과 새로운 지식에 제공되는 만족이다. 그리고 복합상상력이 존재하는 것도 바로 그 새로움을 주기 위함이다.
4) 존 로크(1632∼1704)
존 로크의 {인간 오성론(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은 인간정신은 제원천과 제능력에 관한 장대하고 조용한 혁명을 일으킨 저서이다. 그의 주된 목표의 하나는, 오성이 단순관념에 작용하여 일체의 복합관념과, 심지어 합리주의자들이 경험을 통해서는 추적할 수 없다고 여겨왔던 것(예, 무한대, 세제곱)까지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다. 복합관념을 설명하는데 필요한 오성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은 '구성(composition)이다. 구성이란, 동일한 또는 여러 종류의 단순관념들을 결합하는 것이다.
로크는, 오성이 '인식'을 구축하는 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인식'은 관념들의 비교와 그 진정한 관련성의 탐구에 있다. {인간 오성론}에 새로운 장 '관념들의 연합에 관하여'를 추가하여 로크는, "관념들 상호간의 자연적 대응과 결합"으로부터 "전적으로 우연이나 관례에서 기인한 관념들 상호간의 또 하나의 결합"을 구별하고 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상호 독립되고 모호한 관념들의 잘못된 결합을 피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다. 로크의 관점에서 관념들의 잘못된 연합은 오류와 미신, 편견의 원천이며 결국 진리가 될 '질서 있는 사고과정'과는 상반된다. 이러한 부자연스런 연합이 철학보다 시의 특성이다라는 주장의 첫걸음일 수도 있다. 로크는 '기지(wit)'와 '판단력(judgement)'의 차이를 구별하기 시작했다.
"'기지'는 대체로 관념들을 모으고 그것들을 신속하고 다양하게 짜 맞추는데 있다. 그리고 거기서 어떤 유사성이나 일치성이 발견될 수 있고, 이에 의하여 유쾌한 광경과 기분 좋은 광경이 환상(fancy) 속에 형성되게 된다. 그 반면, 판단력은 아주 다른 측면에서 즉 아무리 적은 차이라도 발견될 수 있도록 관념들을 서로 주의 깊게 분리하는데 있다. 이렇게 하여 유사점과 친근성에 오도되어 한 사물을 다른 사물이라고 잘못 생각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것은 은유나 인유(引喩)와 전혀 반대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은유와 인유에는 대부분 기지 오락과 익살이 자리를 차지하고서 환상에 활기를 불어 넣어주고, 그리하여 그 기지의 미가 한눈에 나타나고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기분 좋은 것이 된다. 왜냐하면 그 속에 어떤 진리나 근거가 있는지 검토하는 사유의 노고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상상력'은 오직 즐겁게 해주는 일에 골몰하는 관리(官吏), 아첨꾼일 뿐만 아니라 상상력의 비유적인 말과 언어상의 인유는 기본적인 언어오용으로 분류될 수 있다. 상상력이 우리 시각상에 쾌를 줄 때는 아무 잘못이 없지만 있는 그대로의 사물에 관하여 말하고자 한다면 이 때의 말의 비유는 '완전한 속임수'이다. 여기에서 로크는 17세기가 낳은, 언어에 관한 가장 강력한 새로운 사상의 하나를 표현하고 있다. 즉, 언어는 그것이 훌륭한 경험적 지식의 획득과 전수도구로 사용될 때, 평이성과 명료성 정확성의 기준을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기준들을 시에서 유용하게 사용될 때의 언어 기준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로크에서 시작된 논리 실증주의적 사고에서 우리는 두 가지 상이한 언어개념, 즉 시의 은유적 언어와 과학적 문자적 언어라는 개념이 떠오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때 시는 유쾌한 동시에 교육적이어야 한다는 호라티우스의 경구가 이제 처음으로 분열될 위험에 처해지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언어가 이러한 목적의 어느 하나에 봉사하는 것이 곧 다른 하나를 해치는 것이 된다면 동일한 담론에서 그 양자가 동시에 수행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시는 지식의 매체로써 널리 생각되고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 지식에 대한 요청과는 전혀 별개로 하나의 경험, 특별한 종류의 쾌를 주기 위하여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5) 데이비드 흄(1711∼1776)과 데이비드 하틀리(1705∼1757)
관념의 연합이론은 18세기의 체계적 심리학 이론으로 발전하였고 19세기에 이르러 근대 실험심리학의 토대가 되었다. 데이비드 흄은 {인성론}에서, 관념의 심리학적 유인 혹은 일종의 인력의 어떤 관대한 힘을 가정하고 그것에 의해 관념은, 자신의 유사성, 인과적 관계, 그 본래 인상의 시간적 공간적 일관성에 따라 연합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심리학을 더욱 정교하게 확립한 사람은 데이비드 하틀리였다.
하틀리는, 흄의 도식을 단순화시킨 관념연합설을 고전적 형태를 제공하였다. 연속된 감각들의 단순한 반복은 그 감각들 각각에 그에 대응하는 관념들을 마음속에 불러일으키는 능력을 부여할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거해서, 그는 연속적 연합과 동시 발생적 연합 모두를 설명하였다.
2. 취미의 문제 : 샤프츠베리에서 흄까지
앞에서 논의된 예술가의 상상력에 관한 대부분의 이론들은 예술기원의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 절에서는 예술의 기원 혹은 원인의 이론으로부터, 감정의 혹은 체험의 이론으로 눈을 돌린다. 이것이 미적 향수의 심리학과 관련된다.
1) 샤프츠베리(1671∼1713)
그는 홉스와 로크의 심리학에 동조하지도 않았고 체계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모든 저술에 쓰며있는 형이상학은 소생된 플라톤 주의였다. 그에 의하면, 미와 선은 일치하고 동일한 심적 능력에 의해 동일한 방식으로 파악된다.
샤프츠베리가 '도덕감(moral sense)'이라 이름한 이 '심안' 이론은 18세기 윤리학 이론과 미학에 기여한 그의 업적이다. 그것은 본질적 특성은 추론을 거치지 않고 즉각적으로 그 대상을 파악한다는 점과, 그러나 그러한 파악에는 그 대상을 선험적 조화 개념과 대조시키는 일이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오감에 의한 것이 아니라 직관적이다.
선(善) 또는 미(美)의 이름 하에서 조화는 감각적 성질이 아니라 일종의 선험적 성질이다. 아름다운 대상을 감상하는데 필요한 심적 능력을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은 18세기 경험론 미학의 주제들 가운데 상당한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서 이미 이 기능에 '취미'라는 명칭이 부여되고 있었다. 그 취미 개념은 미학사의 지극히 중요한 한 장에 있어서 커다란 수확으로 보였다. 샤프츠베리는 취미를 상대적 개념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미감'은 도덕감과 같이 보편적 판단 기준을 가능케 한다고 그는 주장했다. 그는 그 세기말 유행하였던 심리학적 이기주의 이론을 고찰함으로써 오늘날의 소위 '미적 태도'의 문제를 제기하였다.
샤프츠베리에 의하면, 사람이 실제로 어떤 개별행동에서 쾌를 얻는다는 사실이 곧 그 행동이 이기적임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종류의 만족에는 아무런 이기심도 상관되어 있지 않다고 말한다. 미적 향수는 소유욕과 완전히 구별된다. 그리고 '무관심적인 미적 관조'가 실제적 관심과 명백히 대조됨을 설명하고 있다.
샤프츠베리가 개척해 놓았던 또 하나의 중요한 18세기의 업적이 있다. 즉, 미 이외에 또 다른 가치 있는 미적 특질들을 인정함으로써 미적인 것의 영역을 확대시킨 것이다. 이들 가운데 가장 주된 논의의 대상이 '숭고(崇高)'이다. 그 개념은 룽기누스의 {숭고론}에서 시작된다. 숭고 개념의 완성에 또 하나의 자극제가 있었는데, 즉 17세기 후반에 자연과 자연미에 대한 강렬한 새로운 감정의 출현이었다. 샤프츠베리가 예술과 더불어 자연을 미적 관조의 대상으로 취하는 데에는 새로운 어떤 것이 있다. 자연을 보고 느끼는 것에서 즐거움을 얻으려고 함으로써 자연의 보다 거칠고 무시무시한 모습, 예컨대 울퉁불퉁한 절벽, 깊은 구렁, 사나운 급류, 그리고 별과 별 사이의 저 우주 공간의 광막한 등의 쾌에 눈을 열었던 것이다. 이렇게 감상의 폭을 넓힘으로써 보다 심오한 숭고 개념이 자라나게 되었다. 자연의 웅장함은 우리가 이해하고 포착하기에 너무 크다는 점 때문에 자연의 존재를 그 자신을 창조한 조물주를 생각나게 하는 어떤 것으로 만든다. 이러한 종교적 체험이 '숭고'라는 미적 체험으로 된다.
※무관심적 태도
무관심성이라는 개념은, 도덕과 종교의 모든 교훈이 근본적으로는 이기주의로 환원될 수 있다고 주장한 토마스 홉스의 지능적 이기주의에 대립하여 생긴 개념이다. 샤프츠베리는 플라톤 주의자들과 함께 이러한 견해에 대항하여 德과 善은 반드시 무관심적이라고 주장하였다. 이것들은 그 자체를 위해서 추구되어야 하고 이기적인 동기로부터 추구되어서는 안 된다. 18세기에 있어서 그러한 사상은 하나의 새로운 것이었다. 물론 무관심이라는 말은, 대상을 주의력을 가지고 보는 관심의 결여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이기심, 이익이나 실용에 대한 고려의 不在를 의미하였다.
(참고도서 : Harold Osborne 著, {미학과 예술론}, 大旺社)
2) 애디슨(1672∼1719)
애디슨은 1712년에 {관객(spectator)}志에 '상상력의 쾌'에 관한 일련의 글을 다루었다. 상상력의 쾌는 가시적 대상에서 비롯되는 것인데, 그것은 그 대상을 실제로 눈으로 보고 있을 때와, 회화, 조각상, 작도 또는 그와 유사한 경우로부터 그것의 관념이 마음속에 환기될 때의 경우이다. 즉 현존하는 대상에서 비롯되는 쾌는 '일차적'이고 기억된 혹은 상상된 대상에서 비롯되는 쾌는 '이차적'이다. 일차적 쾌는 웅장한 것, 비범한 것 혹은 아름다운 것을 봄으로써 생기는 것이다. 이차적 쾌를 줄 수 있는 것은 음악을 포함한 모든 예술이다. 마음은, 원래의 대상에서 일어나는 관념들을, 이것을 재현하는 조각상이나 그림 묘사 또는 음악에서 우리가 받아들이는 관념들과 비교한다.
이 때 쾌를 주는 것은 '그 묘사에 담겨있는 그것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이미지를 자극하는 묘사의 적절성'이다. 애디슨의 작업은, 예술과 미에 대한 새로운 접근 방식을 초해하였으며 어느 정도 하나의 모범이 되었다.
3) 프란시스 허치슨(1694∼1746)
철학적 미학에 있어 최초의 근대적 논문은 1725년 프란시스 허치슨이 출판한 {미와 덕성에 관한 우리의 관념의 기원에 관한 연구}의 전반부인 [미, 질서, 조화, 그리고 디자인의 연구]이다. 허치슨은 샤프츠베리의 제자였다. 그는 샤프츠베리로부터 '도덕감' 개념을 채택하여 자신의 {연구(Inquiry)}에 도입하였고 발전시켜 나갔다.
허치슨의 목표는, 관념들(시각의 경우에는 미 또는 유추, 청각의 경우에는 화음)을 자극하는 대상의 진정한 성질을 발견하는 일이다. 그는 이러한 관념을 지각하는 능력을 '내적인 감각(internal sense)'이라고 부르고자 하였다. 미를 지각하는 능력은 정확히 '감각'이라고 명명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산출하는 쾌는, "어떤 원리, 비례, 원인 혹은 대상의 유용성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의 관념은 즉각적이고 직접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른다. 허치슨에 의하면 미의 지각과 관련되어 다음과 같이 공통된 특질을 말한다. "우리가 대상에서 아음답다고 하는 것은, 수학적으로 말하면 단일성과 다양성의 복비례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미의 감각은 "다양한 통일성을 지닌 일체의 대상으로부터 미의 관념을 수용하는 수동적 능력"으로 재정의 될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정도로 이 감각을 지닌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동일한 법칙에 따라 작용한다.
※내감(internal sense)과 도덕감각(moral sense)
허치슨에 의하면, 대상들 속에 들어있는 아름다움이라 부르는 것은 다양과 통일의 복합 비율 속에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한 형체가 동일 수준의 통일성을 갖추고 있을 경우 아름다움은 다양성에 따라 결정되고 그 역도 역시 성립한다. 그는 이러한 수학적인 관계를 알아보는 능력을 내감(internal sense)이라고 불렀다.
감각이라는 쓰여지는 능력과 구별하기 위하여, 규칙성 법칙 조화 의미를 알아보는 능력을 내감이라고 부르기로 한다. 그리고 우리가 덕성이라고 부르는, 이성적 주체들의 정감 행위 및 성격들에서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요소를 일컬어 도덕감각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샤프츠베리에게서는 양자가 동일시되었던 것에 반해 허치슨에 이르러서는 양자가 기능적으로 분화된다. 그러나 이러한 내감과 도덕감각을 독특한 쾌와 연결해서 생각하는 것은 여전하다. 그는 미를 결정하는 '내감'의 통일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개성, 기질, 과거의 환경 등으로 인한 '환상(fancy)'의 다양성들을 설명해 보고자 하였다.
(참고도서 : 김문환 著, {근대미학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4) 흄(1711∼1776)
허치슨의 영향이 흄에게 있어서 가장 큰 결실을 보았다. 흄이 미에 관한 문제를 최초로 다루고 있는 것은 그의 {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에 나타나 있다. 그에 의하면, 미는 정의될 수 없고 오직 취미 또는 감각에 의해 식별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즉, 미는 쾌를 산출하는 형식에 불과하며 추는 고통을 전달하는 부분들의 구조이다. 이것이 미와 추의 본질이며 따라서 이들은 때때로 '감정(sentiment)'을 가리킨다. 흄은 {품행의 원리에 관한 연구}에서 다음과 같은 구분을 제시하고 있다.
첫째, "처음 출현하는 즉시로 우리의 애착과 찬동을 요구하며, 따라서 그것의 잘못된 영향을 시정하거나 혹은 우리의 취미와 감정에 더 잘 맞추기 위한 어떤 추론도 불가능한 그런 종류의 미", 둘째, "많은 미의 법칙들 특히 예술의 법칙들에 의한 미(적합한 감정을 느끼지 위하여 추론을 사용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흄의 그의 저서 {취미의 기준에 관하여}에서 이 문제에 관하여 주의 깊게 몰두하였다. 이 글의 서두에서 그는, 이 세상에 퍼져있는 각양각색의 취미는 일견 명백해 보이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오히려 더욱 다양함이 드러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도 어떤 하나의 취미기준을 추구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였다. 감정은 "대상과 심적 기능이나 능력과의 어떤 일치 또는 관계를 기록할 뿐이다". 미는 사물 그 자체에 내재한 특질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물들을 관조하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며, 마음들도 저마다 상이한 미를 지각한다. 그에 의하면 '실재'하는 미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비평의 원리 혹은 '구성법칙'은 선험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에 기초하는 것이 명백하다고 흄은 말한다. 진정한 심판자가 된다는 것은 드문 일이며 또한 찬양할 만한 일이다. 섬세한 감정과 통합되어 있고 연습에 의해 개선되고 비교에 의해 완전해지고 모든 편견을 깨끗이 씻은 건전한 감각만이 비평가들을 이 귀중한 신분에 합당하도록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의 종합적 판단은 미와 취미의 진정한 기준이 된다. 흄의 체계는 비상대주의적 기초를 지니고 있다. 할 수 있는데, 즉 취미의 일반원리는 인간본성에 있어 일정 불변한 것이다.
3. 미적 특질 : 호가드에서 엘리슨까지
예술에 관한 우리의 경험을 이해하고 설명해보려는 18세기의 확고한 노력에서 우리는 두 가지 근본적인 관심의 노선을 추적할 수 있다. 하나는 '취미', 다른 하나는 '미, 숭고'이다. 여기서는 미와 숭고 개념으로 그 강조점을 바꾸어 본다.
1) 윌리엄 호가드(1697∼1764)
호가드는 시각적 미의 문제를 단순화시키고 있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입체와 형태는 보여졌을 때 여러 가지 종류의 선(線)으로 환원될 수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선의 아름다움을 분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모든 시각적 미를 설명해 줄 것이다. 선의 아름다움을 산출하는데 6가지 특징이 협동한다. 즉 접합성, 다양성, 일관성, 단순성, 복합성, 양 크기 등이 그것이다. 아름다운 회화는 모든 종류는 각각 이러한 근본적 선의 관계에 바탕을 둔 변형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호가드는 말한다.
2) 에드먼드 버어크
미적 특질의 본성에 대한 가장 유명한 연구는 버어크에 의해 출판된 {숭고와 미 관념의 기원에 관한 철학적 탐구}이다. 버어크가 목표로 삼았던 것 중 하나는, 상호 주관적으로 타당한 취미의 기준을 발견하는 일이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이 오감과 상상력, 판단 등을 통하여 외부 사물을 다룬다고 지적하면서, 우리가 취미와 판단을 통하여 만족감을 낳는데 작용하는 원리는 보편적일 것이다.
미와 숭고에 대한 버어크의 구별은, 두 가지 유형의 쾌적한 감각의 구분에 기초하고 있다. 이것은 '절대적 쾌'와, 그가 '유적'이라고 이름 지은 '고통의 제거 또는 감소'이다. 우리가 실제로 그러한 상황에 있지 않으면서 고통과 위험의 표상을 갖게 될 때 그 정념은 유적한 것이다. 이러한 '유적'을 촉발하는 모든 것을 나는 '숭고'라고 부른다. 그는 '숭고'를 놀라움이라 칭한다. 그것은 일체의 동작이 멈춰져 있고 약간의 공포를 동반하는 그런 정신의 상태이며 마음이 그 자신 관조하고 있는 것으로 꽉 차있고 꼼짝달싹하지 못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다.
어떤 대상이 숭고의 감정을 촉발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시무시한다든가, 실제로 무시무시한 어떤 것과 관련되어 있든가, 혹은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작용하는 어떤 특성을 지니거나 해야한다. 무시무시함은 숭고의 감정을 환기하고, 그것의 고통스러움이 통제되고 감소될 때 고유한 '유적'을 불러일으킨다.
모호함은 무시무시함에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무서움은 무지에 의해 증대되기 때문이다. 힘, 결핍과 공허, 그리고 규모의 웅대함도 숭고에 크게 이바지한다. '미'에 대한 분석도 숭고의 분석과 유사하다. 버어크는 '미는 부분들의 비례에 있다'는 설과, '미는 적합성에 의해 야기되거나 혹은 그것으로 되어 있다'는 설을 거부하고 있다. 미를 야기하는 특질은 조그마함, 부드러움, 점진적 변화, 섬세함 등이다. 그의 최종적 결론에 의하면, 미와 숭고는 그들의 제반 조건상 상반된다. 그러면 어떤 특질이 숭고를 산출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면, 이제 어떻게 이러한 특질이 공포와 유사한 방식으로 신체에 작용하여 숭고를 산출하게 되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규모의 웅대함이 왜 숭고의 원인이 되는가? 광대한 대상으로부터 나오는 빛에 눈이 피곤해지고, 그 눈은 온통 경련을 일으키면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에 가까이 접근하기 때문이다. 또, 부드럽고 조그맣고 섬세한 대상에서 왜 우리는 사랑을 느끼는가? 그것이 우리 유기체에 그와 유사한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즉 미는 "전 체계 내의 경화된 부분에 대한 이완작용을 한다". 여기에는 미학사에 있어서 약간 참신한 중요사상이 있다. 그것은 미적 향수에 대한 설명이 생리학적 수준에서 추구되고 있다는 것이다.
3) 그 외 사상가들
18세기는, 우리 자신의 시대를 제외하고는 미학의 근본문제에 관해 가장 강렬하고 다양하게 창조적 사고를 전개하였던 시기이다. 18세기의 가장 커다란 업적의 하나인 미적 범주의 확대가 있었다. 이 때 어느 정도 숭고 개념이 확대됨으로써 고전전 미 개념이 좁혀지고 위축되기도 했지만, 숭고라는 용어는 데카르트적 미학이 억압하거나 외면했던 예술의 온갖 요소들을 담을 주머니로 점점 자라났다. 미적 정서에 관한 심리학적 연구와, 숭고에 대한 열광은 신고전주의 비평체계에 최종적인 일격을 가하였다. 결정적인 법칙과 규준의 개념은, 취미에 대한 강조에 그 자리를 내놓았으며 보다 강력하고 덜 정제된 정서에 대한 환영과 더불어, 상상적 또는 직관적 진리가 이성보다 우월한 어떤 것으로 강조되었다. 많은 사상가들은 이 총체적 운동에 어떤 역할을 하였다.
★베일리 : {숭고론}
★제라드 : {취미론}
★헨리 호움 : {비평의 여러 요소들}
★블레어 : {수사학 강론}
★토마스 레이드 : {인간 지성론}
★아담 스미스 : {모방의 본질에 대하여}
4) 드니 디드로
그는 대다수 불란서 동시대인들보다 미학의 문제에 더 많은 더 체계적인 사상을 제공하였다. {백과전서}에 나오는 디드로의 미에 관한 글 '미의 기원과 본질에 관한 철학적 연구'에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의 조건인 특질들은, 각양각색의 아름다운 사물들 모두에 공통된 것이어야 한고 그것들 없이는 미가 존재하지 않는 그런 것이어야 하며, 그것들이 변화할 때 미의 정도도 변화하는 그런 것이어야 한다.
그러한 것들에 알맞은 유일한 개념이 rapports 즉 '관계개념'이다. 그 관계란 단순히 논리적 의미에서의 관계가 아니라, 어떤 종류의 결합, 상합성, 또는 적합성을 포함하는 관계이다. 나의 오성에 rapports의 관념을 깨우쳐주는 것은 그 모두가 미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위대한 예술에서 다채로운 관계들 전체의 조화를 지각하고 기뻐한다. rapports가 많으면 많을수록 그 작품은 더욱 더 아름답다.
5) 아치벌드 앨리슨
그의 [취미의 본성과 원리에 관한 논문] 두 번째 증보판은 매우 중요한 체계적 작품으로 인정받게 되었고, 그 논증들이 주의 깊고 정교하며 또한 완전히 연합론적 원리에 입각하여 '상상의 쾌'를 설명하려고 한다는 점에서 두드러졌다. 앨리슨의 첫째 주 논제는, 자연이나 예술에서 미와 숭고를 향수하는 것은 관념들의 정연한 사슬이 정서를 산출하는 그 과정에, 상상력이 종사할 때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실상 아름답거나 숭고하게 느껴지는 것은 대상이나 대상의 성질이 아니라, 어떤 단순정서를 산출하는 그러한 어떤 것이다. 그리고 성공적인 예술 작품에는 그 작품을 하나의 완전체로 되게 하는 지배적 성질 또는 정서가 존재한다.
질료의 성질들은 그 자체로서 아름답거나 숭고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성에 쾌를 주거나 재미있는 정서를 산출하는데 적합하게 되어 있는 그러한 성질들의 기호 또는 표시인 것으로 간주된다. 앨리슨 체계에 의미 있는 특징은, 그것이 미의 지각 조건에 대한 정연한 공식을 발견하려는 지속적인 시도를 포기하고 있다는 점과, 미의 영역이 무한하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앨리슨이 끌어내고 있는 또 하나의 결론은 앞장의 신고전주의적 논의를 상기시킨다. 즉, 하나의 예술작품은 그것이 야기하는 연관 사슬의 일관성에 의해 진정한 미적 쾌를 제공하기 때문에 그 예술작품이 '그 특성이나 표현의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은 본질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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