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5일 발안 장날을 기해 김흥열과 김성열의 주도 아래 고주리 주민들도 만세시위에 참가하여 조선독립 만세를 불렀다.
이날 안경환, 현병기, 김시열, 김창열, 김경열, 김동진, 김교신, 송준용, 박경의
김성열, 김선일, 김영열(金永烈,) 김영열(金英烈)과 김공열, 김기하, 김사군, 김인지. 안주년, 최원규, 김세열, 김주남, 김주업, 김흥복 등 전 주민들이 부락 앞에 모여 김흥열의 선창에 따라 조선독립 만세를 힘차게 부른 후 발안으로 집결했다. 그리고 이 날 12시를 기해 발안 주재소를 중심으로 투석전을 벌이다가 김성열이 수비대에게 잡혀 주재소로 끌려 들어갔다.
4월 9일 새벽, 조용히 잠든 고주리에 조선인 순사보 조희창의 선도로 수비대가 들이 닥쳤다. 수비대들은 마을을 포위하고 가가호호 수색하였다. 이 날 미쳐 피신하지 못한 안경환, 현병기, 김시열, 김창열, 김경열, 김동진, 김교신, 송준용, 박경의, 김성열, 김흥복, 김주남, 김세열, 등이 수비대들에게 포박을 당한 채 발안 주재소로 끌려 갔다.
이 날 마침 김흥열과 김주업은 결혼 문제로 인해 남양에 나가 있어 화를 면하였다.
이들 주민들은 삼괴지역 주민득과 분리하여 역시 똑 같은 고문을 가하였다. 그들은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도록 가혹한 고문을 받고 몇번씩 기절하는 비인간적 학대 속에서 거의 죽은 송장처럼 되어 냇가에 버려졌다. 그들은 집에 돌아와 여려달 동안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당시 고문을 당한 생존자 현병기(94세) 김시열(87세)옹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고문당할 때 생각을 하면 몸서리가 쳐집니다. 미친 놈들처럼 사정없이 몽둥이로 내려치니 무슨 장사인들 배겨 나겠어요. 누구의 지령을 받았느냐, 주동자가 김흥열이냐, 백낙렬이 어디 숨었느냐 하면서 몽둥이로 패대는데 얼마를 맞았는지도 몰라요. 이렇게 여려차례 시달리다 기절해 버렸지요.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정신을 가까스로 차리고 보니 냇가에 버려졌더군요. 우리들은 서로 도우며 기어서 집에까지 돌아와 여러 달 동안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했어요. 지금도 날이 흐리면 그때 고문의 여독으로 전신이 쑤셔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말을 마치고는 눈시울을 적신다. 또 이 날 수촌리 이순모는 면사무소와 주재소 습격사건에 참가한 후 고주리 처가 집으로 몸을 피신해 있었다.
그런데 이 날 새벽녘에 수비대들이 총소리에 놀래어 장인 김교신과 사위 이순모는 안방 벽장 속에 숨어 있었다. 이때 순사보 조희창이 수비대 2명을 데리고 이 집을 덮친 것이다. 조희창이 방문을 열고 안방으로 들어가려 할 때 김교신의 부인 김향순이 그들 앞을 막으며 못들어 가게 안간힘을 썻으나 수비대에게 얻어맞고 기절하고 말았다.
결국 벽장 속에 숨었던 김교신과 이순모는 고주리 주민들과 함께 발안으로 끌려와 삼괴지역 사람들과 함께 혹독한 고문을 당하다 수원경찰서로 넘겨져 주동자로 몰려서 징역살이를 하였다.
4월 15일 오후 제암리 주민을 집단학살하고 집을 모두 불태운 수비대들은 다시 조희창을 선두로 6명의 수비대와 함께 팔탄면 고주리 쪽으로 올라갔다.
고주리는 제암리에서 불과 10분 거리 밖에 안되는 가까운 부락이다.
이때 고주리 주민 대부분은 제암리의 참변을 목격하고 거의 모두 산속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김흥열 가족만은 「그 놈들도 사람인데 차마 죄없는 사람들을 저희 마음대로 죽이지는 못하겠지」 하는 생각에서 온 가족이 피신하지 않고 그대로 집안에 있었다.
조희창은 수비대들을 이끌고 김흥열의 집에 들이 닥쳤다. 그리고 조희창은 수비대를 시켜 김흥열을 비롯한 김성열 김세열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 등 한 가족 6명을 방에서 끌어내어 포박을 지어 집 뒤 언덕으로 끌고 올라 갔다. 이때 김성열, 김세열. 김주남. 김흥복 등은 고문의 여독으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 끌려갔다.
조희창은 칼을 뽑아들고 김흥열에게 백낙렬이 숨어 있는 곳을 대지 않으면 전 가족을 몰살시키겠다고 위협했다.
김흥열이 모른다고 하자 조희창은 이 지방의 만세운동을 주동했으면서 모른다는 건 말이 안된다고 하면서 칼등으로 김흥열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나 김흥열은 「내가 안다 해도 네 놈에게 그 분이 계신 곳을 말할 수 없다. 조국과 민족을 파는 불구대천의 원수인 네 놈에게 무슨 말을 하란 말이냐? 현상금 200원이 그리도 탐이 난단 말이냐! 삼괴지역과 발안 만세운동도 나와 이정근이 주동했다. 마음대로 하여라.」 하며 조희창의 얼굴에 침을 뱉았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조희창은 군도를 뽑아들고 사정없이 김흥열의 목을 쳤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비대들이 일제히 군도를 휘둘러 차례차례 6인의 목을 치자 붉은 피를 뿜으며 목이 사방에서 펄펄 뛰었다.
그래도 모자랐던지 사방에 나뒹구는 몸체에 난도질을 가해 여섯 토막을 냈다. 팔 다리가 잘리어 사방에서 펄펄 뛰었고 언덕은 온통 붉은 피로 물들었다. 수비대들은 6명의 시체를 걷어 모아놓고 짚가리의 짚을 날라다 쌓아 놓은 후 불을 질렀다.
당시 김주업은 결혼한지 3일만에 참살을 당하셨던 것이다.
이때 김세열의 아들 김원기가 밖으로 뛰어나와 이 광경을 보고 「나만 살면 뭘해, 같이 죽여라」하며 수비대들에게 덤벼들자 수비대들의 구두발에 채여 울타리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이를 본 김주업의 처 한씨는 이집안의 유일한 혈손인 김원기를 끌어당겨 치마폭에 숨겨 집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바람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한다. 그리고 한씨 부인은 너무나 잔인한 참살현장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아 그 날로 자리에 누워 신음하다가 3일만에 죽고 말았다 하니 김흥열 일가는 한꺼번에 7명이 몰살되고 만 것이다.
그 후 수비대들은 매일같이 이 곳에 들러 시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하다가 3일이 지나서야 묻으라 했다.
그래서 이 부락 김시열은 고문의 여독으로 불편한 몸을 이끌고 부락주민들과 함께 시체를 추려 화장을 할 때 어느 토막이 누구의 것인지 분간할 수 없어 대충 찾아 맞출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김주업 김주남 김흥복의 시체라고 생각되는 것만을 대충 추려 분묘를 만들었으나 그 유골이 여섯 사람 전부의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김흥열, 김세열, 김성열의 시체는 얼마나 불을 많이 놓았는지 도저히 분간할 길이 없어 그 재를 함께 나누어 팔탄면 월문리 공동묘지에 분묘를 만들었던 것이다.
당시 손수 시체들을 거둔 김시열옹은 당시를 회상하면서 이렇게 술회한다.
「토막토막 난도질을 한 후 불을 놓아 시체를 구별할 수 없게끔 만든 왜병들의 만행에 치가 떨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단 말입니까? 지금도 그때의 광경을 생각하면 현기증이 납니다.」 말을 마치고는 눈물을 흘렸다.
그 후 수비대의 만행이 치를 떨던 부락 주민들은 매일같이 천덕산 상봉에 올라가 조국의 자주독립을 기원하는 한편 왜경들의 갖은 박해에도 굴하지 않고 끝까지 항거했다 한다. “김선진 저 미래문화사 중에서”
위 노란색 봉분 3개가 선열들의 묘역이다
당시 공동묘지에 야간에 몰래 무덤을 만들어 봉분이 눈에 띄지 않도록 하였다
지금은 2001년 화성시에서 위자리에 봉분을 보수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