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평화와 문학
김우종
1952년 정월 하순 쯤이었을 것이다. 나는 많은 누더기 병사들 속에 묻혀서 북쪽으로 걷고 또 걷고 있었다. 몇일 전까지는 부상자로 입원중이어서 누더기가 아니었다.
우리는 모두 20대 사내들인데 드믈게 소년도 있었고 아가씨도 있었다.아가씨는 간호병이었을 것이다. 인제전투로 5천명 정도가 죽거나 포로가 되고 신고산에 갇혀 있었을 때는 천여명이었는데 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국군포로 전체가 하얀 눈을 밟고 북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곧 총받이로 죽게 되어 있던 자리를 면하는 것이지만 탄광도 도살장임에 틀림없었다. 제대로 안 먹여주고 깊은 땅 속에서 과로와 진폐병으로 죽게 하는 도살장. 그때 우리는 도살장으로 가는 것이었지만 그것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군사 비밀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나 혼자 확실한 정보로 알고 거기 가기 전에 탈출하려다가 실패했다.
그 때 정월의 함경도 산과 들은 면사포를 쓴 신부처럼 온통 하얀 눈을 뒤집어 쓰고 눈이 부셨다. 그렇지만 우리는 밤에만 움직이는 야행성 동물이었다. 하늘의 비행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밤길만 걷다가 눈과 얼음 위에 쓰러져서 잠에 곯아떨어졌다. 밤새 걸으며 입김이 성애가 되고 고드름이 되어 있었으니까 쓰러져 잠이 들면 그대로 냉동고 속의 고등어처럼 굳어버린 생선이 될 듯했다. 그런데 얼어죽지는 않았다. 아니 처음 출발점 근처에서 봤던 한 명은 먼저 얼어 죽었을 것이다. 그는 홑 내의 차림이었다. 내가 알던 얼굴인데 어딘가에 갇혀 있다가 갑자기 그 차림으로 우리 대열에 끼워넣어졌고 곧 보이지 않았다. 그는 아마도 몇십미터를 못 가서 망부석 아닌 망부빙으로 굳어지며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소변을 보면 바닥에 떨어지기 전에 빙수가 되는 혹한이었기 때문이다. 어짜피 목적지까지 가려고 고생하기 전에 자비가 베풀어진 것이다.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글망뎡
어름 우희 댓닙자리 보와 님과 나와 어러주굴망뎡
정둔 오ᄂᆞᆯ밤 더디새오시라 더디새오시라
- 만전춘 별사
나는 국문학도이니 이런 고려가요나 읊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때 그곳은 사랑하는 모든 것과 영구 작별을 고하고 죽을 일만 남아 있었다. 아무도 우리 일행이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만전춘>의 그들은 댓닢을 깔았는데 우리들이 누울 자리는 얼음과 눈 뿐이었고 함께 얼어죽어 줄 님이 없었다. 일행 중에 있었던 한 아가씨는 함께 걷는 병사와 친했으니 내가 그들이었다면 꼭 끌어 안고 그대로 잠들며 얼어 죽고 싶었을 것이다. ‘님과 나와 얼어죽을망정 ’그렇게 죽어도 좋지 않겠느냐고 <만전춘>이 가르쳤고 그것이 옳았다. 안 그래도 탄광에 들어가서 대부분 굶고 병들어서 곧 죽어버릴 터인데.
그런데 탄광까지 가기 전에 갑자기 우리는 남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O
그 해 여름 부슬비가 내리는 밤에 나는 마침내 탈출 남하하고 중부전선에서 대포를 쏘다가 미군부대 고문관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갑자기 군생활이 완전히 거꾸로 뒤집혔다. 포로경력 때문에 계급장이 다 떨어지고 기합받던 졸병이 상류계급이 되었다. 고문관이 상사계급장을 달아주었다. 그것은 불법이지만 아무도 시비를 걸 수 없었다. 미군병사들은 내게 경례를 부쳤다. 식당에서는 줄을 서지 않고 앉아서 어르신네 대접만 받았다. 운전은 못했지만 차도 한 대 있었다. 고문관은 운전병이 있는 다른 차를 탔다.
그런데 이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날 동이 트기 전에 나는 막사 바깥
땅바닥에서 눈을 떴다. 고열로 의식을 잃고 혼자 기어 나왔었나 보다. 곧 왕십리의 미군병원에 후송된 다음 날 심야에 또 의식을 잃었었다. 눈을 떴는데 여러 명이 나를 에워싸고 들여다보고 있었다. 담당의사는 방한복을 입은채로 달려 나와서 나를 살려내고 곧 특별실로 옮겨줬다. 거기서는 백인 흑인 여간호사들이 24시간 곁에서 들여다보며 살려 내고 퇴원 후 제대해서 복학했다. 복학등록금은 병원 동기생이던 미군병사가 귀국할 때 도와주고 떠났다.
내가 걸렸던 유행성출혈열 himorrhagic fever는 미군이 세균전을 벌이고 있다고 국제적 논쟁을 일으켰었다. 나도 학술논문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고 최근에 유튜브 대담프로에서도 그 말이 나오고 있었다. 이호왕 박사의 바이러스 발견에 의하면 미군에 의한 세균전은 오해인 듯하지만 너무도 많은 사실들이 그런 오해를 유발하고 있다. 핵폭탄에도 비유되는 탄저균 보유 때문에 시민단체의 시위가 몇 차례 있어도 명확한 해명이 없는 것도 그렇다. 유행성출혈열의 세균무기는 일본군의 731부대 연구기록에 있고 그 기록이 미국으로 넘어갔고 일본군 전범들이 미국에서 연구를 계속해 온 것등이 오해를 남기게 된다. 탄저균이 아니라도 세균무기는 가장 싸게 먹히는 핵무기나 다름 없기 때문에 세균전의 악몽은 사라지기 어려울 것이다. 더구나 이를 개발하기 위한 생체실험은 너무도 끔찍해서 말하기가 어렵다.
전쟁은 지금 계속중이며 이는 인류의 가장 큰 범죄다. 방어전이라 해도 원천적으로 그것은 잔인한 살인이며 범죄다. 그리고 이 잔인성은 원천적으로 인류가 지니고 있는 정신질환이다.
이 질환은 자연과학이 아니고 사상과 감정의 순화로 치유되어야 하며 그것이 문학이 할 수 있는 기능이다. 언어예술 이상으로 그 기능을 발휘할 효율적 방법은 없으므로 우리 문인은 누구보다 순화된 사상과 감정의 예술인으로 인류구원에 참여해야 한다.
[2026. 창작산맥 여름호 권두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