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평의공파>
파조소개--金九鼎
<아직 준비중입니다>

<草屋 閑談圖>
<사촌 현지 탐방>(2001. 8. 15. 항용(제). 현지 방문 촬영, 제공)

<안동김씨 사촌 입향 육백년 추원비> <영귀정>(言永歸亭)

<후산정사>(後山精舍) <만취당>(晩翠堂)

<만취당 현판>(한석봉 서) <만취당 내 류성룡 모친 김씨의 가마틀>
*만취당((晩翠堂)1.소 재 지 :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2.해설 : 만취당은 연산조의 이름난 선비 송은 김광수(松隱 金光粹)의 증손인 김사원(金士元, 1539∼1601)이 창건한 정자로, 조선조 특유의 11칸 대청 건물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사가 건물로 지방유형문화재 169호 1983년 6월 20일에 지정되었다.

<종택 사랑채> <종택 현판>

<만동서숙(김성수-도평의공파 회장댁) 정원의 우물> <후송재>(後松齋)

<만취당 묘소> <추원재>(追遠齋-만취당 재실)

<자여당>(自餘堂) <사촌 서림(西林) 사적비>
<이하는 2002. 10. 12. 정중씨 제공 사진>

<양진당>(김상린 선조. 만취당의 5 손자 중 5째. 만취당 동편에 위치. 종택에서 100보 거리)

<양진당 내 현판>(자은선생 글씨) <양진당 내 현판>(김창회 글)

<양진당 종가>(2002년 신축.종손 거주중) <사촌리 전경>(좌-서림 초교, 중앙-양진당 만취당 종택, 우-중고교)
<각종 문집류 소개>(2001. 8. 15. 항용(제) 사촌 현지 촬영, 2002. 6. 24. 정중씨(도) 자료 제공)
1. 만취당(金士元) 선생 문집

<만취당선조실기 상> <만취당선조실기 하>

<만취당선생 실기>(중간본)
2. 후송재(後松齋-金士貞) 문집
<후송재집>

<후송재집 표지 및 내부 사진>(2003. 5. 20. 태서(익) 제공. 출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3. 松隱先生 문집류
김광수(金光粹) 1468(세조14)∼1563(명종18).
조선의 시인. 자는 국화(國華), 호는 송은(松隱). 아버지는 지례현감 극해(克諧)이다.
1501년(연산군 7)에 진사가 되었으나 과거에 집착하지 않았다. 고향인 의성의 북촌에 머물면서 시가를 읊조리며 청빈하게 지냈으며, 효성과 우애가 지극하여 부근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죽은 뒤 대곡산(大谷山)에 장사지냈는데, 그뒤 외손인 유성룡(柳成龍)이 왕의 명을 받아 제사지내고 묘를 살펴보았다. 의성의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과 《경심잠 警心箴》이 있다.
<송은선생 문집> <경심장>
(김창회 소장.2002. 8. 16.항용(제). 현지 방문. 촬영 제공) (규장각 소장. 2002. 2. 항용(제) 조사. 제공)
<송은선생 문집 내부. 송은 친필유묵>(2002. 6. 24. 정중씨(도) 자료 제공)

<송은선생 문집 내부. 송은 친필유묵>
* 장대서원(藏待書院--송은 김광수 선생 배향서원. 2002. 6. 12. 정중씨(도) 자료 조사. 제공)

■ 소재지 : 의성군 봉양면 장대리
장대리 기슭에 경현사와 강당이 자리잡고 있으며 상리 출신인 오봉 신지제가 세운 곳이다.
조선조 광해군의 혼정으로 공조정 랑의 벼슬을 마다하고 낙향하여 1610년에 서당을 열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오봉 타 계 37년만인 1663년에 후진을 기르던 강당에 스승을 경모하는 뜻으로 경현사를 세워 향사를 하고 다음 해에 경정 이민성을 모셨다. 1702년에 경현사를 서원으로 추숭하고 송은 김광수, 회당 신원록선생을 함께 모셨다. 1868년 8월에 조령으로 서원이 훼철되었으며 1996년에 중건하였다.
* 영귀정(詠歸亭)(송은 김광수 선생 정자. 2002. 6. 12. 정중씨(도) 자료 조사. 제공)

종목별 , 지정번호 : 경상북도문화재자료 234호. 명칭 :영귀정 (詠歸亭). 분류 :누(정).각. 수량: 1동. 지정일: 1991.03.25. 소재지:경북 의성군 점곡면 서변리 319. 소유자:안동김씨문중. 관리자:안동김씨문중
이 정자는 미천강변의 절벽 위에 자리잡고 있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고 있다.
4. 川沙(金宗德)先生 문집류

<천사선생 문집>(좌-원본, 우-영인본-1992. 계명대 간.)

<고증(考證)>(좌-원본, 우-내부)

<초려문답(艸廬問答)>(좌-원본, 우-내부)
<성학정로(聖學正路)>(원본)

<성학정로(聖學正路)>(내부)

<심경강록(心經講錄>(내부) <천사선생 학술발표회>(2002. 4. 13. 경북대. 동방한문학회 주관)
6.金浩直의 <漢陽歌>
(1995. 12. 金泰德 刊)
7. 金日秀의 <四禮要覽>


<충렬공 재사 상량문 원문. 金昌會 撰>
8. 자은유고(紫隱遺稿)

<자은유고(紫隱遺稿)>
*<새로 발견한 서찰 사진 소개>
1. 川沙(金宗德) 서찰(1)
1)일시 : 2003. 4. 2 : 발용(군)씨 사이트 소개. 항용(제), 주회(안)씨 총 8점의 서찰을 인터넷 상에서 검색 발굴.
2)소장처 : <옥과미술관>(전남 곡성군 옥과면 옥과리 산 1-3번지 ☏ 061-363-7278~9, Fax: 061-363-7279 ) http://www.asan.or.kr/
3)서찰 촬영일시 : 2003. 4. 16. 안사연 6명 현지 방문. 열람 및 촬영.
4) 작성일 : 1785(정조9. 62세). 10. 26.

5) 해독 원문 및 번역(준비중)
2. 川沙(金宗德) 서찰(2)
1)--3)은 상기와 동일
4)미상

5)원문 해독 및 해석(준비중)
3. 천사 김종덕(川沙 金宗德) 친필 (02. 8. 9. 발견. 출전-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친필>( 2002. 8. 9. 발견. 출전-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4. 金宗發 친필 유묵

<용연공(容淵公) 金宗發(金宗德 叔弟) 친필 유묵>
5. 金宗燮 친필 유묵

<金宗燮(김종덕의 季弟) 친필 유묵>
* <만사문집 발간식 거행>
1. 일시 : 2003. 5. 5
2. 장소 :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 만취당
3. 참여자 : 관내 유지 및 종친 약 200 여 명
4. 자료 제공자 : 김억(도. 만사 김진종의 손)
5. 만사(晩沙) 김진종(金振鍾) 소개
김진종(1883-1951)--字는 聲彦 號는 晩沙. 1883년 계미 정월 13일에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에서 태어나심. 어려서 의성 의병대장을 하신 일가의 형님이 되시는 云山公 象鐘의 문하생으로 그 총명과 자질은 그 누구와 비길 수 없으셨으며 향중의 모범이 되시었음.
1894년(12세 때)에 과거제도가 없어져 학식을 시험받지 못함. 1896년 만 13세에 병신년 창의로 인하여 부친을 여의시고 사촌 동네가 잿더미로 변하자 의성군 안평면 화령리의 외가 살이를 떠나심. 39세에 사촌 고향으로 다시오시어 문중일을 보시고 의성 사림을 대표하여 30년간 활동하시다가 1951년 4월 8일, 69세에 별세하심.
6. <만사문집>(晩沙文集) 소개

7. 행사장면

<축사를 하고 있는 김종우 의성문화원장>

<만취당에 모인 참석인>

<축사하는 대구 종친회 호길 회장님>

<축사하는 점곡면장님>

<축사하는 창회 종친님>

<축사하는 도평의공파 종손 희윤 종친님>
<기산유고 서문> (2003. 5. 7. 정중(도) 제공)
서문이 책은 나의 족선조 기산 김공 휘 석유의 시문집이다
공은 실로 오문의 장덕이요 향도의 망사로 널리 알려지고 많은 저술과 선정유촉에 문필의 기록을 남겼으나 사림에서 공을 칭송한 만제장갈의 유사는 찾을 수 없다
세대는 멀어지고 전란이 거듭됨에 영성주예의 전전이거로 당시 제제고사간에 일행기선의 글이 산일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후학의 장연한 감회 금할길 없다
하례은례(夏禮殷禮)를 오능언지(吾能言之)나 기송(杞宋)은 불가징(不可徵)이라 하고 공자께서 한탄하심은 문헌이 없기 때문이다
보첩을 상고하면 참판 이돈우 도사 김도화 선생의 광기와 행장이 있다고 하였으나 천운의 순환으로 후일을 기대 하면서 이제 상전구비와 정사초록의 유고를 참고로 아래와 같이 개략을 서술한다
공의 가계를 살펴보면 고려조 훈업상신 충렬공 휘 방경은 중시조요 조선조 연산당시의 고사 송은 광수선생은 현조이시며 동방부자로 존앙받는 퇴도고제 만취당 사원선생은 구대조이시다
1805년 순조 을축에 삼구단 양0공의 여섯아들중 다섯째로 태어나시니 품성이 총유 하시고 기지가 헌앙하였다
일찍이 유학을 세업으로 삼던 가정에서 승발유염으로 초학을 익히고 성장하여서는 성망 높은 선비 신암이동하 공의 사위가 되셨다
그로부터 외0의 보익으로 학문은 날로 발전하고 한결 정진하여 대의를 효해하고 과업에 일일면진하였으며 늦게는 정재 유치명선생의 강석에 나아가 더욱 심잠하여 유망이 향방에 울연하였다
장년시절 친명으로 장옥에 출입하였으나 청운입신의 이치를 깨닫고 임하에서 정양하였다
5책5권 유고의 심대한 저서중에는 약간의 시편이 있으나
이는 병인양요의 프랑스군함이 양화진을 점령하고 강화에 들어올때 판서 이시원의사가 절명시를 남기고 순절하자 간절한 서문과 함께 차운 하였으니 "팔월강성정기공 천왕파랑육침중 연상의리정마구 생사증안정비흉" 이라고 읊었다
대개 보국교화와 관련된 사십여편의 시가 있을 뿐이다
이로 미루어 시장에 힘쓰지 않고 경학과 이학에 전심 하였음을 알수 있다
1855년 철종을묘에는 영남유생 이0병공 등이 중심이 되어 장헌세자의 추존을 청하는 만인소의 사초가 공의 문장으로 이루어졌으며 대산이상정 선생의 청향소와 칠조소 등 불후의 명작을 남겼다
이것이 일권이다
2,3,4 권은 모두가 서편으로 외0인 신암공과 기수 정민병공을 비롯해서 류숙후 치후 이신암만0 , 이도정 0령, 이승지 건수공 등 영하명유와 경서를 강론한 서찰이 수백편이다
문친간에는 율원 양휴공에게 질의하고 기계 노선공과 학문으로 깊이 상교하였다
5권은 제문과 약간의 서 기가 있으며 잡저로 칠실대언이 있다
통문편을 살펴보면 안동향교 통도내문을 비롯해서 노강 임천서원통문 갈암선생 분황통문 등이 공의 수중에서 제통되었으니 그 문장의 깊이는 미루어 가히 알수 있다 이렇게 정리된 유고는 등수의 절차를 밟아 대가의 교정과 서문으로 이루어져야 하거늘 그렇지 못한 점 한스럽다
세월을 거슬러 공의 영손 자은 봉종공이 선고간역에 일진 하였으나 유의미수로 몰세하셨다 이제 임오세말의 모일 자은공의 후학수계취회 당시 여자를 수검해서 기산고를 영인 제작하기로 취의 하였다
계중장로분들이 소자에게 머릿글을 쓰라고 청촉하는지라 생각하면 두려울 따름이다
학문과 덕행이 세인의 사표가 되고 고결한 정신은 당세와 후세에 교화의 영향을 끼쳤으나 초옥에서 잠해로 정양한 선인의 권두에 어찌 단문을 붙이리요마는 다만 후일 상고의 자료에 공하기 위해 잠망을 무릎쓰고 전말을 밝혀 삼가 서문을 대신 한다
2002년 임오 계동 상현 족후손 창회근서
*(오탈자 한자는 추후 수정하겠습니다)
<도평의공(都評議公) 파계도>(2002. 9. 24. 정보미 제공)
시조,충렬공,파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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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世 5世 1世 |
12世 6世 2世 |
13世 7世 3世 |
14世 8世 4世 |
15世 9世 5世 |
16世 10世 6世 |
17世 11世 7世 |
18世 12世 8世 |
19世 13世 9世 |
20世 14世 10世 |
21世 15世 11世 |
22世 16世 12世 |
23世 17世 13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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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정(九鼎) 都評議公 |
자첨 (子瞻) |
효온 (孝溫) |
극혜 (克혜) |
광수 (光粹) |
당 (당) |
세우 (세佑) |
사원 (士元) |
준 (濬) |
상완 (尙완) |
요좌 (堯佐) |
이중 (履重) |
낙응 (洛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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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成佐) |
이후 (履厚) |
추응 (秋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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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 (履亨) |
박응 (박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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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극 (履極) |
화응 (和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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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 (尙琦) |
굉좌 (宏佐) |
이일 (履逸) |
정응 (鼎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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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적 (履迪) |
여응 (呂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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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좌 (夢佐) |
이달 (履達) |
삼응 (參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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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각 (尙珏) |
순좌 (舜佐) |
이상 (履祥) |
시응 (時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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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 (履昌) |
인응 (麟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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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양 (履陽) |
천응 (千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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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 (履長) |
만응 (萬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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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좌 (碩佐) |
이정 (履正) |
도응 (道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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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 (履慶) |
원응 (遠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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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履性) |
주응 (胄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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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 (履命) |
조응 (祖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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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빈 (尙玭) |
영좌 (英佐) |
이겸 (履謙) |
하응 (河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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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 (漢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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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응 (洙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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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응 (泗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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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좌 (弘佐) |
이건 (履健) |
구응 (龜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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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휴 (履休) |
적응 (迪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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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신 (履信) |
운응 (運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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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응(言 +成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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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린 (尙璘) |
양좌 (良佐) |
이규 (履規) |
두응 (斗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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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응 (鏡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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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履矢+巨) |
규응 (奎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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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응 (箕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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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탄 (履坦) |
분응 (賁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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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응 (三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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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응 (邦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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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응 (七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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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응 (八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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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좌 (聖佐) |
이단 (履端) |
종응 (鍾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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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 (履瑞) |
용응 (龍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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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응 (虎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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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좌 (賢佐) |
이모 (履模) |
남응 (南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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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응 (東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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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 (履楷) |
예응 (예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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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표 (履標) |
재응 (載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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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형 (士亨) |
한 (澣) |
상찬 (尙璨) |
충좌 (忠佐) |
이안 (履安) |
수응 (壽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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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응 (善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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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정 (士貞) |
회 (淮) |
상유 (尙瑜) |
은좌 (殷佐) |
이강 (履剛) |
진응 (震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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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응 (器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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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履中) |
형응 (衡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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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관 (履寬) |
성 (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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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응 (鳴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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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 (履和) |
치응 (致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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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履成) |
오응 (五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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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 (履吉) |
중응 (重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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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응 (大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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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응 (益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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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응 (貴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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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좌 (慶佐) |
이희 (履禧) |
상응 (商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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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응 (瑞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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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응 (夏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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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履祜) |
휴응 (休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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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응 (樞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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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응 (權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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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응 (彬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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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 (履祺) |
일응 (一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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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응 (敏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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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 (履裕) |
효응 (孝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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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응 (聖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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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 (泂) |
상관 (尙瓘) |
희좌 (姬佐) |
이도 (履道) |
태응 (台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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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좌 (信佐) |
이전 (履全) |
래응 (來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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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 (光復) |
언걸 (彦傑) |
개 ? (開 ?) |
자각 (自覺) |
해 (海) |
상완 (尙琬) |
길좌 (吉佐) |
이숭 (履崇) |
홍응 (洪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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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 (履峻) |
태응 (汰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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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좌 (正佐) |
이경 (履庚) |
배응 (培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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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 (履容) |
성응 (性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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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항 (孝恒) |
영진 (永진) |
언륜 (彦倫) |
몽정 (夢禎) |
백눌 (伯訥) |
윤충 (胤忠) |
기인 (起仁) |
계조 (繼祚) |
성옥 (聲玉) |
익 (익) |
세청 (世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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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상 (夢祥) |
백민 (伯敏) |
준신 (俊臣) |
숙 (石+肅) |
익조 (益祚) |
광옥 (光玉) |
당 (당) |
세윤 (世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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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옥 (衡玉) |
집 (石+集) |
세관 (世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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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 (世濯)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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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옥 (鳴玉) |
탁 (鐸) |
세한 (世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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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상) |
세일 (世溢)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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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기 (夢祺) |
순룡 (舜龍) |
진신 (진臣) |
희만 (喜萬) |
남려 (南麗) |
의용 (義容) |
시기 (是錡) |
응구 (膺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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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룡 (見龍) |
덕남 (德男) |
이인 (履仁) |
만익 (萬익) |
성택 (聖澤) |
이추 (以樞) |
용욱 (龍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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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인 (賁仁) |
만갑 (萬鉀) |
성한 (聖漢) |
이권 (以權) |
성욱 (星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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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 (以楨) |
정욱 (井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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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주 (以柱) |
규욱 (奎煜) |
<이하 자료 -- 2002. 10. 29. 정중씨(도) 제공>
고려 봉거 직장 도평의 지인 부군 묘갈명(김구정 선조)도평의공 묘갈명
(都評議公 墓碣銘)
고려 봉거 직장 도평의 지인 부군 묘갈명
(高麗 奉擧 直長 都評議 知印 府君 墓碣銘)
고려조의 봉거직장 도평의지인 휘 구정 부군 은 유아(惟我) 사김씨(沙金氏)의 분파조이시다. 삼가 생각하니 우리 김씨의 원조(遠祖)는 세대를 실전(失傳)해서 고거(考據)가 확실치 않았는데 경순왕의 손자이신 공부시랑 평장사 휘 숙승공께서 비로소 안동(安東)의 관(貫)을 받았으나 누대에 걸쳐 자호(字號) 배위(配位)와 세덕문물(世德文物)이 전하지 못하다가 한림학사지제고를 지내시고 선서(善書)로 명동일세(名動日世)한 휘 효인공이 계시니 곧 부군의 5대조이다. 고조의 휘는 방경이니 정동 도원수 추충정난공신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시충렬로서 금고(今古)에 대현(大顯)하고 물계서원에 주향(主享)으로 뫼시니 우리의 중시조이며 증조 휘 선은 전법판서 상장군이다. 조 휘 승택은 도첨의 정승 시(諡) 양간이요 고(考)의 휘는 면으로 안렴사를 역임하고 치가와 수분에 힘썼다.
공의 생년은 전하지 않고 초휘(初諱)는 충(忠)이였는데 일찍이 도평의지인을 지내시고 만년에 조선구장(祖先舊庄)인 회곡의 상락대에서 불식락강(不息洛江)의 자연을 벗삼아 근서무농(勤書務農)과 고가전범(古家典範)을 밝히면서 가산려수(佳山麗水)에 묻혀 송로자적(送老自適)하니 물외(物外) 한정(閑情)의 천품(天品)을 족히 추량(推量)할 수 있다. 오호라 1389년 홍무기사(洪武己巳) 이월 이십사일에 몰(沒)하시고 행현(杏峴) 중강을좌(中岡乙坐)에 안장(安葬)하였으며 배는 아산장씨로 전서 성미의 따님인데 대대(大垈) 유좌에 뫼셨다. 외아들 휘 자첨은 감목관으로 입향사촌하였고 그 아드님 휘 효온은 문과사직이며 휘 효항은 관사정인데 청송 화현으로 정거했다. 효온의 아들 휘 극해는 문과 북평사와 지례현감을 지냈고 청백리로 알려졌으며 아드님 휘 광수는 호 송은(松隱)으로 진사시에 합격하고 태학에서 공부하던중 연산 사화를 예견하고 낙향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후학을 지도했으며 장대서원에 제향되었다. 들째 휘 광복은 충순위인데 김해 덕산리에 전손세거하고 광수의 아들 휘 당은 기자전참봉이요 아드님 휘 세우는 통례원 인의이다.
인의공께서 3형제를 두시니 휘 사원 사형 사정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晩翠堂)인데 퇴도고제(退陶高弟)로서 임란에 창의 정제장으로 활약하고 후산사(後山祠)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의 호는 독수헌으로 유일재 김언기 문하에 수학하여 문과 직장이며 아들 간과 같이 진보로 이거하였다. 사정은 호 후송재(後松齋)라 하며 사숙계문(私淑溪門)하고 곽망우당 의진에서 중형사형과 같이 활동하였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하였다.
사원의 아들 휘 준은 직장이고 사형의 아들 휘 간은 호 송암이요 사정의 아들 휘 회는 호 경암으로 문과 정랑이요 휘 형은 호 삼우당이다. 준의 아들 휘 상원은 호 남애로 한려문에 수학이요 위 상기는 호 사오 장사랑이며 휘 상각은 호 자여당(自餘堂)이고 휘 상비는 호 금취헌이며 휘 상인은 호 양진당(養眞堂)으로 충렬공(忠烈公)의 묘전설치(墓田設置)를 주도(主導)하였다. 간의 아들은 휘 상위 상찬이요 외의 아들 위 상유는 호 옥계로 장사랑이며 형의 아들은 휘 상관이다.
그후 10여대에 걸쳐 문무과한과 유망을 갖춘 자손이 수십여이나 다 기록하지 못한다.
아! 선세의 장갈(狀碣)이 미비함으로 이제 보첩과 세전구비(世傳口碑)를 모아 서(敍)하고 삼가 명(銘)하노니
낙수변(洛水邊)의 상락대(上洛臺)는 승국고벌(勝國古閥) 터전이요
가산려수(佳山麗水) 자연경(自然景)은 세심정혼(洗心淨魂) 조신(操身)이라
충렬고리(忠烈古里) 청아의범(淸雅儀範) 문소지북(聞韶之北) 봉형(封瑩)이요
행현중강(杏峴中岡) 정민지탁(貞珉之琢) 이 산천(山川)과 함께하리
1992년 임신 소춘절
주)본글은 '내고향 사촌' (지은이:김창회 펴낸이:김억 2000년 6월)에서 올렸습니다(올린이:충렬공 28세손, 도평의공 24세손 容慶)
김 자첨 사촌 입향조 묘갈명
선무랑 행 함길도 감목관 부군 묘갈명
(宣務郞 行 咸吉道 監牧官 府君 墓碣f銘)
함길도 감목관 부군의 휘는 자첨이요
성은 김씨로서 관향은 안동이다
고(考)의 휘는 구정으로 봉거직장 도평의 지인이니 우리 사김씨(沙金氏)의 분파조요
조의 휘는 면(冕)으로 안렴사이며 증조 휘 승택(承澤)은 도첨의정승 시(諡) 양간이요
고조의 휘 선(瑄=심방변)은 전법판서 상장군이다
개국공 시 충렬이며 훈업으로 대현(大顯)금고(今古)하니 곧 중시조(中始祖)이고 상계(上系)는 신라종성(新羅宗性)이다
공은 1369年 홍무 기유에 태어나시니 천성이 호매하고 고지원식의 탁견이 있었다. 상락 회곡의 세거사족이며 선대유훈으로 광화를 누렸으나 조선조가 개국을 함에 세류에 순응하고 유신(維新)의 뜻을 살려 고가(古家) 세업(世業)을 버리고 가권(家眷)과 함께 사촌에 입향하여 진황(榛荒)을 정리하고 자손의 터전을 닦은 후에 원대한 경륜으로 서림(西林)을 조성하고 전손의 기지를 잡았다. 조정에서는 승국훈신 후손의 예우로 감목관 에 임용 하였으나 사양한 후 공명을 탈략하고 전원에서 근검으로 백세를 경영하다가 1454年 단종 2년 86세로 사세(辭世)하시고 행현 선묘하에 봉안하였으며 배는 시진 송씨로 차동 묘좌에 안장했다. 자 효온은 문과 사직(司直)이고 효항은 사정(司正)이며, 여(女)는 김극경(金克敬) 유야거(柳野居) 권처신(權處信)이고 권식(權軾)은 생원이다. 효온의 자 극해는 문과 북평사와 지례현감이요 극해의자 광수는 진사로서 장대서원에 제향하였으며 세칭 송은선생이라 하였고 광복은 관충순위다. 광수의 자 당은 기자전 참봉이고 자 세우는 통례원 인의요 세우의 자 사원은 퇴도문인으로 호는 만취당이며 임란에 창의하고 부호군이요 사형은 호 독수헌인데 문과 직장이며 사정은 호 후송재로 중형인 사형과 같이 곽망우당 의진에서 창의하고 지평에 추증되엇다. 사원의 자 준은 관직장이요 사형의 자 간은 호 송암 통덕랑이며 사정의 자 회는 호 경암인데 문과정랑이고 형(泂)은 호 삼우당으로 통덕랑이다.
준의 자 상원은 호 남애 수(壽) 호군(護軍)이요 상기의 호는 사오 장사랑이며 상각은 호 자여당(自餘堂)이고 상비의 호는 금취헌이며 상인의 호는 양진당(養眞堂)으로 증사복사정이다. 간의 자는 상위 상찬이며
회의 자 상유는 호 옥계로 장사랑이며 형의 자 상관은 통덕랑이다.
상원의 자 요좌는 증사복사정이고 다음은 성좌(成佐)이며 상기의 자는 괸좌 몽좌요 상각의 자 순좌는 호 산계며 석좌는 호 운암 통덕랑이고 상비의 자는 영좌 홍좌요 상인의 자 양좌는 호 사주로 생원에 증 호조참의이고 성좌(聖佐)는 호 송리(松里)로 문과부사이며 현좌는 통덕랑이다. 상유의 자 은좌는 호 소북이고 경좌는 호 기은이며 상권의 자는 희좌 신좌 명좌이다. 그 후의 번연한 자손은 다 기록하지 못하고 이제 보첩과 상전설화를 추려서 서하고 명하노니
영가부서 회곡산수 위국충훈 세장이요 (永嘉府西 檜谷山水 衛國忠勳 世庄 이요)
영지명향 사진리는 탈략공명 기지로다 (嶺知名鄕 沙眞里는 脫略功名 基地로다)
염담과욕 맑은정신 구십향수 누렸으며 (심방변+舌淡寡慾 맑은精神 九十享壽 누렸으며)
선조지하 천년유택 일월같이 밝으소서 (先兆之下 千年幽宅 日月같이 빛나소서)
- 1992년(年) 임신 소춘절-
주)본글은 '내고향 사촌' (지은이:김창회 펴낸이:김억 2000년 6월)에서 올렸습니다(올린이:충렬공 28세손, 도평의공 24세손 容慶)
내고향 사촌(沙村)
동해를 바라보며
남쪽으로 내리뻗은 태백산맥이 보현산에서 멈추었고
그 일지(一枝)가
서북으로 거슬러서 솟재(鼎嶺)가 우뚝하다.
이곳에서 발원한 기수(沂水)가
협곡을 따라 장장 팔십리를 관류하여 대천(大川)을 이루고
다시 서북으로 굽이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 언저리에
주회(周回)수십리의 옥야(沃野)에 자리 잡은
사촌(沙村)은
영남의 명기(名基)로
널리 알려 졌다.
북으로는 기령산(奇靈山)과 자하산(紫霞山)의 정기를 받아
온 마을에 양기(陽氣)를 쏟아준다.
안대(案對)의 병봉(丙峯)과 응봉(鷹峯=매봉)의 용수(聳秀)는
마을을 지켜주며
동으로 멀리 황학산의 운봉과
서편 의 천마산(天馬山)의
옛 성지(城址)는 외조(外兆)의 구실로 충족하다.
이래서
의성(義城)에서
<제일사촌(第一沙村)> 이라 할 만치
좋은 기지(基址)로 손꼽히며
이곳 사촌은 안동김씨 도평의공파(安東金氏 都平議公派)의
육백년 세거지(世居地)로
이마을 의 역사는 정확히 알수 없다.
다만
신라정승 나천업(孤雲 최치원의 빙부)이 이 마을에 살았다고 전해오니
아마 신라 중말엽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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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마을에 안동김씨가 뿌리 박은지는
약 6백년이 된다
서기 1392년(壬申)에 태조 이성계가
병마를 동원해서 이조를 창업하자
고려조의 함길도(咸吉道) 감목관(監牧官)이었던
도평의공(都平議公)의 아드님 휘 자첨(諱 子瞻)도
이태조의 부름을 받았으나 이에 불응하고
상향(桑鄕)인 안동의 회곡(檜谷)을 떠나
이 마을(沙村)에 정착하므로써 후손이 세거하게 되었다.
감목공(監牧公)의 아드님 사직공 휘 효온(司直公 諱 孝溫)이
세종조(世宗朝)에
비로소 출사(出仕)해서
사직(司直)을 지냈고
그의 아드님 평사공<評事公 諱 극해(克諧)>은
진사(進士)로서 문과(文科) 북평사(北評事)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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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에 입향한 안동김씨에서
가장 빛을 낸 분은 평사공의 아드님
송은공(松隱公 諱 光粹)이었다.
公은 일찍이 상경(上京)해서
성균관 태학(成均館 太學)에 유학(遊學)하였고
성균진사(成均進士)에 입격(入格)하였으나
때 마침 연산 난정시(燕山亂政時)라
불원간에 큰 정변이 있을 것을 예기(豫期)하고
행장을 수습하여
사촌(沙村)으로 내려 오셨다.
이로부터 송은선조(松隱先祖) 께서는
집옆에 한 그루의 왜송(矮松 =향나무)을 벗 삼아
시부(詩賦)로 세월을 보내시면서
이 왜송((矮松=香나무)을
<만년송>(萬年松)이라 이름하고
자호(自號)를 송은처사(松隱處士)라 하였으니
만년송은
후일에 많은 묵객(墨客)에게 시상(詩想)의 대상(對象)이 되었으며
그 창창(蒼蒼)한 용자(容姿)는
아직도 남아 있어
후손으로 하여금 선음(先蔭)을 회상(回想)케 한다.
공(公)은
또 남산(南山)밑 소담(小潭)위에
초당(草堂)을 지어
<영귀서당(詠歸書堂)>이라 현액(縣額)하고
후진(後進)의 강학(講學)을 일삼았다.
송은선조께서는
특히 시부(詩賦)에 능(能)하시어서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임진왜란에 소실(消失)되고
다만 문집(文集) 일권(一卷)만이 세상에 전해져 있으며
그 중에서도
<금부(琴賦)>와 <관산부(關山賦)>는
명작중 명작으로
궁중악장(宮中樂章)에 실렸다 한다.
또 만년에는
<경심잠(警心箴)> 십조목(十條目)을 지어
내외손에게 전수하므로서
행실의 신조로 삼게하고
구십육세에 숙연(肅然)히
고종(考終)하시니
일향(一鄕)의 후학(後學)들이
공(公)의 학덕(學德)을 기리기 위해
장대서원(藏待書院)에 배향함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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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은 선조께서는 일남 육녀를 두시었다.
그래서 내외손 백여명이라 하지만
친손(親孫)은 인의공 휘 세우(引儀公 諱 世佑)한 분이다.
칠대단신(七代單身)으로 근근히 가계가 상속(相續)된 가문이다.
인의공(引儀公 諱 世佑)이
비로소 삼남을 두었으니
만취당 휘 사원(晩翠堂 諱 士元),
독수헌 휘 사형(獨秀軒 諱 士亨),
후송제 휘 사정(後松齊 諱 士貞)이다.
宣祖25년(서기1592년)에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송은선조의 내외손들은
모두 국란(國亂)의 수습(收拾)에 앞장섰다.
당시 영의정으로 팔도체찰사의 중임을 맡아
슬기롭게 전란을 수습한
서애 류성룡을 비롯해서
서애의 백씨(伯氏)겸암(謙菴)류운용(柳雲龍).
건마산(乾馬山)에
성(城)을 쌓고 침공(侵攻)하는 왜적(倭賊)과
독전(獨戰)하다가
세부득(勢不得)으로
절벽(絶壁)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고
부인(夫人)신씨(申氏)와
사비(私婢)복분(福分)
그리고 계견(鷄犬)까지
추락(墜落)순절(殉節)해서
일가삼절(一家三節)의 미담(美談)을 남긴
의사(義士)김치중(金致中)등
외손(外孫)중의 대표(代表)다.
뿐만 아니라
송은선조의 증손(曾孫) 삼형제도
창연(蒼然)히 창의(倡義)하여
만취당공(晩翠堂公)은
義兵을 소모(召募)하여 경주(慶州)까지 출진(出陣),
전과(戰果)를 올렸고
많은 사재(私財)로 난민(難民)을
진휼(賑恤)하였으며
독수헌공(獨秀軒公)과 후송제공(後松齊公)은
망우당 곽재우(忘憂堂 郭再祐) 장군을 따라
창령(昌寧)의 화왕산성(火旺山城)에서
다대(多大)한 전과를 거두므로서
그 공적이 모두
창의록(倡義錄)에 남아 있다.
이로서 만취당(晩翠堂)공은
부호군(副護軍)에
후송제(後松齊)공은
도유(道儒)의 천거(薦擧)로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추증되고
만취당공은 후산정사(後山精舍)에
후송제공은 도담사(道潭祠)에서 향사(享祀)하였다.
한편
문과직장(文科直長)을 지낸 독수헌(獨秀軒)공은
부진(赴陣)의 회로(回路)에
청송(靑松)의 진보(眞寶)에 定着하였기에
실로
사촌의 안동김씨는
만취당파와 후송제파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살고 있다
이렇게
영세(零細)한 사촌의 안동김씨가
번성(繁盛)하기 시작하기는
인조-효종 때 부터이며
이때는 이미 이십여의 문호(門戶)를 열게 되었다.
+++++++++
인조4년(서기1626년)에
경상감사 하담공<(荷潭公) 휘 시양 제학공파(諱 時讓 提學公派)>이
실전(失傳)되었던 충렬공 능소(忠烈公 陵所)의
逼近(핍근)에
범장(犯葬)한 근시제<(近始齊)(金垓光山人)>의 묘(墓)를
계정굴이(啓請掘移)한 후로 수호(守護)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사촌의 후손들이
이를 개탄(慨嘆)한 끝에
양진당공<(養眞堂公)휘 상린(諱 尙璘)>이
門內의 후손들과 공론(公論)하고
각자(各自)의 손출(損出)로 위사(位士)를 매치(買置)하여
상거백여리(相距百餘里)를 내왕(來往)하면서
세일제(歲一祭)의
향화(香火)를
궐(闕)하지 않았다.
이후부터
영남에 출사(出仕)한 후손들이
사비(祀費)를 도우므로
그 잉여금(剩餘金)으로 제전(祭田)을 확장,
안동 소산(素山)의 익원공파 종중에 반송(半送)해서
위사를 매입하고
사촌(沙村)과 소산(素山)의 양문중에서 수년윤행(遂年輪行)으로
이백여년을 봉사(奉祀)하다가
순조(純祖)조(朝)(서기1800년경)에
비로소 묘하에 위사를 매치(買置)하였다.(乙酉譜 충렬공 傍註에 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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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의 안동김씨는
여느 유생(儒生)들과 같이
선비의 기질로 학문에 전념할 뿐 벼슬을 탐내지 않았다.
그래도 문과 11명,무과 1명 급제와
40여명의 생원 및 진사가 배출되었지만
그다지 고관대작은 없었다.
효온(사직),극해(북평사),회<淮=科名渫:병조정랑(兵曹正郞)>,성좌(영해부사),성(통례원좌통례),오응(함평현감),도응(회(懷)인현감),종구(성균전적),종경(사헌부지평),종발(사헌부장령),의유(사훈원정언)등 문과 11명과 이중(오위도총부부장),무과 1명이며
소과40여명은 지면관계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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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특히 문명저세(文鳴著世)하기는
천사(川沙 諱 宗德)선생이다.
川沙선생은
일찍이
대산 이상정(大山 李象靖)선생에게 師事하여
퇴계학의 정통연원을
계승한
성리학의 대가(大家)로서
많은 士子가 의귀수업하였고
문하에서 이름 높은 문장가가 많이 배출하였으며
천사문집십권을 비롯하여
초려문답,성학정로,성학입문,년보,언행록,부록,동몽입본 등
많은 저서가 간행되었고 미간행 유고는
위손 창회(胃孫 昌會)가 보존하고 있다.
이래서
천사선생의 학덕과 경륜은
조가(朝家)에 상문(上聞)되어
정종(正宗)조(朝)에서는
일천(逸薦)으로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제수(除授)되고
다시 수첨구(壽僉 示+區)를 가자(加資)하였으며
사후( 死後)에
부조위(不 示+兆位)의 명(命)이 내렸다.
1895년(고종32년)
국모(國母)시해(屍害)의 을미사변, 단발령등의 개혁으로
배일의식이 고조되고
주로 지방유생들 중심으로
국모의 원수를 갚고 외세를 몰아내려
의성지방에서도 창의(倡義)
의병(義兵)대장(大將)에 운산<(云山)휘(諱)상종(象鍾)>,
소모장(召募將)좌산<(左山)휘( 諱)수욱(壽旭)>.
중군(中軍)만포<(晩圃)권대직(權大稷)>
,선봉장<(先鋒將)휘(諱)수담(壽聃)>,
관향장(管餉將)휘(諱)수협(壽莢)>등
막하 참모와 자진해서 가담한
여러 향리(鄕吏) 의병들과 혼연일체가 되어
의성 구봉산
금성산운(金城山雲) 뒷산,
청송(靑松)감은(甘隱),
옥산황산 등지에서
여러차례 일군(日軍)들과 격렬히 싸웠으며
워낙 우수한 무기와 훈련된 일군(日軍)이라
(휘 수담)(휘 수협)황산전장에서 전사하시고
그외 많은 사상자가 발생 끝내는
퇴폐(頹廢)의 눈물을 머금지 않을수 없었다.
당시
이곳 사촌은
영남지방의 와해(瓦海)라 불리울 정도로
많은 기와집들이 즐비한 동리 였는데
의병들이 전투에서 패하자
일군들은 의병의 본거지이자 의병대장마을이라 하며
집집마다 다니며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마을은 삽시간에 불바다로 변했고
고색찬연하던 옛 기와집과 많은 서책 유물들이
한줌의 재로 변하고 말았으니
한심한 일이였다.(1896년3월30일)
이런 일련의 사실들은
을미의병활약에 대한 일본인의 보복조치로서
우리 고장에서는(
1896년)병신난(丙申亂)이라 말하고 있다.
의병대장(諱 상종)1968년3월1일
정부로부터 독립운동유공자로 추서되어
대통령표창(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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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6월25일새벽
북한인민군이 기습남침을 개시
철갑차(鐵甲車)를 앞세우고
38선을 돌파 순식간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고
물 밀 듯이 몰아 내려와
8월초순경
사촌 앞산에서 대격전이 벌어져
수백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고
당시
사촌주민들은
남으로 피난하여
청도 금천 천변에서 1개월여를 지내는 동안
한미합동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성공을 거둠으로써
인민군은 대구근교 팔공산까지 내려왔으나
후방보급이 차단되자 후퇴하기 시작하였으며
8월 추석날
비로소 피난짐을 짊어지고
폐허의 비린내나는 전쟁터를 밟으면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북상(北上)하던 인민군은
중부지역의 국군에 의해 차단되어
미처 북으로 가지못한 잔여사단규모의 병력이
태백산 줄기를 타고 남으로
또 다시 내려오면서
의성경찰서와 점곡지서를 습격
밤이면 인민군
낮이면 미해병대가 점거
일주일여에 걸쳐 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지당(웅텅)부근에 잠복중이던 인민군이
미군대위를 사살하자
화가난 미군들이
일제히 마을에 불을 질렀다.
그리하여
백여호가 소실(消失)되고
동리는 비참한 눈물로 얼룩졌다.
사변(事變)으로 인하여
사촌에도 여러사람이 희생을 당하였으며
청년들은 모두 용감하게 참전(參戰)하였다.
이렇게
사촌의 안동김씨가 번창하고
인물이 배출되기는
선령(先靈)의 음덕과 지령(地靈)의 탓이라하겠으며
영남(嶺南)일대(一帶)에서 사촌김씨(沙村金氏)로 통하는
벌족(閥族)으로 행세(行勢)한다.
그러나
근세에 와서는 많은 인재가 나오지 못했으니
이는
모든 유생(儒生)들이 그리하다시피
개화에 눈뜨지아니하고
수구(守舊)를 고집(固執)하여
신학문(新學問)을 멀리 하였고
청렴(淸廉)을 인간의 기본신조로 삼아
일본의 치하에서
굴욕적 영예(榮譽)를 기피(忌避)한 탓이라 하겠다.
이렇게
완고(頑固)한 환경에 젖어온
사촌문중은
타 종중에 못지않게 강력한 조직체를 가졌다.
문중의 대소사는 불문율에 의한 전통적 관례에 따라
대문회(大門會)에서 결의되고 양지파(兩支派)에서도 마찬가지다.
화수회(花樹會=大門中),
동약계(同約禾+契=만취당파),
친목계(후송제파)등 년 1차의 정기총회를 개최함으로서
재외족친은 방향(訪鄕)의 기회가 되어
족의(族誼)를 꾀하고 있다.
특히 문중소유인 전후십리의 광대한 임야는
문중산하 조직체인
공목계(共睦 禾+契)가 산림관리를 담당하고 있으며
상(喪) 장례(葬禮)에 대한
취로(就勞)의 의무(義務)도 맡고 있다.
그밖에 청년회, 부인회등이 있어
년중 경조사에 상부상조로 전통미풍양속을 지키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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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글 쓴 분은
제가 평소 존경하는 족조(族祖) 김사수(金沙秀)氏 이며
십수년간 점곡면장 역임하셨으며
경심장해설발간,
사촌서림사적비(沙村西林事蹟碑)건립 등(等) 많은 일을 하신 어른입니다
경심장해설(1987년刊)책자에서
감히 허락없이 이 글 올림을 용서하시고
틀린부분 지적해 주시면 고치겠습니다
-김정중(金정中) 글 올림-
안동김씨 사촌입향 육백년 추원비(安東金氏 沙村入鄕 六百年 追遠碑)
태백(太白)은 동(東)쪽을 휘 감았고
소백(小白)은 서북(西北)으로 둘러섰다
황지(潢池)에서 발원(發源)한
낙수(洛水)천리(千里)의 연변(沿邊)에는
옥야(沃野)가 전개(展開)되고
홍유석덕(鴻儒碩德)이 연(連)달아 배출(輩出)되니
세인(世人)들은 영남(嶺南)을 가리켜
인재(人才)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여기 소주(韶州)의 북촌(北村) 사진리(沙眞里)는
명산(名山)대하(大河)의 지맥(支脈) 지류(支流)가 알맞게 배분(配分)되어
산광수색(山光水色) 명미(明媚)하고
기름진 전토(田土가) 수리(數里)에 連하여
백세(百世)전손(傳孫)의
훌륭한 기지(基地)로 알려진 곳 이다
차(嗟)홉다.
우리 감목(監牧)선조(先祖) 휘(諱) 자첨(子瞻)께서는
분파조(分派祖)이신
도평의공(都平議公) 휘(諱) 구정(九鼎)의 아들이시며
고려조(高麗朝)의 훈업(勳業)상신(相臣)인
충렬공(忠烈公) 대조(大祖)의 오세손으로
천성(天性)이 호매(豪邁)하고 고지(高志)원식(遠識)의 탁견(卓見)이 있어
안동(安東)회곡에서 세거(世居)하다가
조선조의 개국(開國)됨에
시류(時流)에 알맞는 유신(維新)의 뜻으로
청전(靑氈)세업(世業)을 버리시고
사촌(沙村)에 조기(肇基)하니
곧 이조(李朝)의 개국(開國)년대(年代) 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전조(前朝) 명신(名臣)의
후손(後孫)예우(禮遇)로
감목(監牧)관(官)에 제수(除授) 하였으나
사양(辭讓)하고
도광(韜光)양덕(養德)의 처세(處世)와
영세(永世)를 내다보는 경륜(徑綸)으로
서림(西林)을 조성(造成)한 선조(先祖)는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수성(守成)의 요제(要 言+帝) 전지(傳之)자손(子孫)하여
오늘의 우리를 이 땅에 살게하니
모두가 석과(碩果)불식(不食)의 업보(業報)일 것이다.
맏아드님 휘 효온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문과에 올라 사직을 역임하였으나
세조의 찬위를 보고 은거불사하고
문과동방인
박팽년 최항과는 심교(心交)가 깊었다.
둘째 휘 효항은 사정을 벼슬하였으나
문헌무징으로 상고치 못하고
청송화현으로 개기(開基)정거(定居)하여
청명(淸名)직절(直節)로 수분(守分)하고 현재에 이른다.
효온의 아드님 휘 극해는
생원과 문과에 등제하여
북평사와 지례현감을 지냈으며
청백(淸白)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아드님 휘 광수는
진사시에 합격하고 공부하던중
사우간에 중망(重望)이 높았으나
연산조의 사화로 시정의 불리함을 보고 낙향하여
영귀정을 짓고 존현양사에 힘쓴 일사(逸士)로서
세칭(世稱) 송은선생이라 하였다
사후(死後)에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장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그 청고한 인격을 독행(篤行)군자(君子)요
소안(韶顔)백발(白髮)의 지상(地上)선인(仙人)이라고
외손(外孫) 서애선생 류성룡은 기록하였다
둘째 휘 광복은
충순위를 역임하고 효우로 처신하여
백씨 송은선생과 함께 연방고를 남겼다
그후 아들 연걸과 같이 김해 덕산리에서
전손세거하며 문물이 상승하고 일향의 문족이 되었다
송은선생의 아들휘 당은
기자전참봉이시고
그아드님 휘 세우는
통례원 인의이시다
인의공께서는 세아들을 두셨으니
휘 사원 사형 사정 으로
모두가 일방의 망사가 되었다
사원의 호는 만취당으로 퇴도고제이며
도산의 월란암에서 위사의 학문에 전심하여
선생의 심허를 받았으며
임란을 당하여서는 구국의 일념으로
창의하여 정제장이 되고
후덕심인으로 진할유민하니
김씨 의창이라 별칭하였다
사후에는 후산사에 제향하였으며
사형은 호를 독수헌이라 했고
문과에 올라 직장을 지냈으며
유일제선생 김언기문하에서 학문을 익혔다
동생 사정과 함께
화왕산의 곽망우당 의진에서 활약하엿고
아들 완과 같이 진보로 전거 하였다
사정은 호를 후송재라 하였고
사숙계문으로 수학하였으며
곽망우당 의진에서
적신성서의
피 끓는 시를 남겨 세상에 전한다
사후에는 지평에 추증 되었고
도담사에 제향하였다
그후에도
사마문무와 문집학설을 남긴 후손이 번다하나
다 기록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한다
거슬러 생각하면 입향후
이십대 십갑자에 이른 오늘날
세수인경의 범절을 지키며
대과 십삼원 소과 이십팔원이 배출되고
문한도 빈번하여 유맥이 상승하여
교남벌족으로 원근에 알려지니
어찌 비양의 덕을 닦은 현조의 여음이 아니리요
바야흐로 세도의 변천은 금석을 달리하여
농경사회는 산업사회로
정신문화는 물질문화로
집성대촌은 이산전거로 옮겨지는 것은 시대의 순리라
다만 이시기를 당하여
내세의 후진에게 근원을 찾게하고
숭조의 정신을 함양하여
처심적려의 생각을 기르고자
선조의 체취가 서린 유서깊은 서림에
추원비를 세워
이곳을 찾는 후손에게
고향의 상념을 심어주고
우리의 내력을 영세에 전하고자
후손 사수(沙秀)씨등의 주선으로
문원의 성력을 모아
비석을 세우면서 삼가 銘하노니
매봉산에 나린용(龍)이 서림(西林)에와 머무르고
유심(幽深)하다 기수남상(沂水濫觴) 이강산(江山)에 응(應)했도다
영철(潁哲)할사 선조(先祖)님이 조기길지(肇基吉地) 하셨으며
비양(卑讓)으로 덕(德)을삼고 성경(誠敬)으로 수분(守分)했네
명창정궤(明窓淨机-) 밝은뜻은 지고염사(志高廉士) 길렀으며
청화(淸和)로운 몸가짐은 유방백세(遺芳百世) 이아닌가
함양훈도(涵養薰陶) 깊은훈해(訓海-언변) 시례가성(詩禮家聲) 아름답고
번연(繁衍)할사 운잉(雲仍)이여 천세상전(千世相傳) 하옵고져
서기 1992년 임신 梅雨節
後孫 昌會 謹撰
義城後人 金九稷 謹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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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의 스승!!
창회 대부님 지으신
사촌서림 소재
육백년 추원비문 감히 올립니다
(천사 김종덕 선생 直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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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 김창회
의성 사촌거주,
안동김씨대종회 부회장(도평이공파),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글씨쓴이: 김구직
서예가
沙村입향후 대소등과 및 문학저세자 약록 (59명) 7월4일 완료
1.金方慶- 2.渲(심방변)- 3.承澤- 4.冕- 5.九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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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김자첨(金自瞻) (1369~1454)
충렬공 김방경의 6세손(5대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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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 안동김씨의 입향조 이시다
조정에서는 전조명신 후손의 예우로 감목관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손의 세거 기업을 정리하고 86세의 향수를 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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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김효온(金孝溫) (1412~ ? )
자첨의 아들이며 1434년 세종 갑인에 생원을 거쳐
문과에 급제하여 사직의 벼슬을 하고 향리에 은거 했다.
문과 동방인 박팽년, 최항과 친교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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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김극해(金克諧) (1440~ ? )
효온의 아들이며 1495년 세조 기묘에 생원이 되고
문과에 올라 북평사와 지례현감을 역임했다.
청백리로서 세상에 알려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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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김광수(金光粹) (1468~1563)
극해의 아들이며 호가 송은(松隱) 이다
1501년 연산 신유에 진사가 되고
태학에서 연수중 연산정란을 예견하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남산록 소담上에
영귀정을 짓고 시가를 읊으며 청빈하게 생애를 보냈다
사후에 장대서원에 제향 되었으며
송은집 과 경심잠이 세상에 전한다
한편 임란에 ?장입상으로 산하 재조의 위업을 남긴 류성룡은 외손이며
증손인 사원 사형, 사정도각각 창의 하여 국란에 유공하고
외증손 김치중은 의병장으로 순절 했다
영귀정은 문화재 234호로 지정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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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김사원(金士元) (1539~1601)
광수의 증손으로 호가 만취당 이다
퇴계의 문인으로 월란정사에서 수업 하였으며 덕량이 심후 했다
임란에 창의 하여 정재장이 되었으며
난후에는 휼민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사후에 후산정사에 제향하였으며
실기가 전한다
당시 지은 만취당이 현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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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김사형(金士亨) (1541~? )
호는 독수헌이며 사원의 동생이다
유일제,김언기의 문인이며
문과에 급제하여 직장을 역임 하였다
임란에는 동생 사정과 더불어 창의하여
곽재우의 휘하에서 군무에 협찬 하고 유공하였다
창의록에 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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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김사정(金士貞) (1552~1620)
호가 후송재로 사원의 동생이다
어려서 재예와 총명이 있었으나
년미급(年未及)으로
계문(溪門=이퇴계 문하)에 나아가지 못하고
사숙하였다
중형인 사형과 함께 곽재우 의진에서 공을 세웠다
사후에 사헌부지평에 추증되고
도담사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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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김 회(金淮) (1578~1641)
사정의 아들이며 호는 경암이다
2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612년 광해 임자에 문과에 급제 했다.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 왔으며
형조정랑을 역임하였다
만년에는 향리에서 수덕하고
문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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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김상원(金尙瑗) (1598~1687)
사원의 손자이고 호는 남애 이다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문인으로
스승의 가르침이 독실이 받아 들였다
병자호란 굴욕을 한스러워 하며
대명통기(大明統紀)를 숭상하니
세인들이 숭정처사(崇楨處士)라 일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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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김상기(金尙琦) (1602~1670)
상원의 동생이고 호는 사오 이다 장사랑을 역임하였으며
문학행의(誼)와 시문에 능하여
영하(嶺下) 士友와 교류하며 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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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김상유(尙瑜) (1605~1678)
호는 옥계이고 淮의 아들이다
문행이 있었으나 과장에는 나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계도 하였고
장사랑을 역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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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김상린(尙璘) (1616~1675)
사원의 손자이고 호는 양진당 이다
숭선효우로 이름이 높았다
만년에는 양진당을 세우고 학문을 연수했다
경술 신해의 팔도기근시에는 영남유수로 추천 되었으며
사복시정의 증직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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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감양좌(良佐) (1636~1708)
상린의 아들이고 호는 사주(沙洲)이다
1681년 肅宗 신유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권두경 권두인 등과 교류가 깊었으며
문집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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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김성좌(聖佐) (1639~1708)
양좌의 동생이고 호는 송리(松里)이다
1663년현종 계유(25歲) 에
문과 급제하여
여러고을을 역임하고
영해부사로 재임중 청백리로 이름이 있었으며
갈암 이현일의 문인이 되었다
만년에는 빙계계곡에
세심정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김성좌(金聖佐) 임경(任卿) 현종4(계묘, 1663) 식년시(式年試) 丙科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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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김이달(履達) (1656~1736)
상기의 손자이며 호는 덕은이다
1696년 숙종 병자에 생원이 되었으며
문장에 능하고
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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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김이중(履中) (1657~1731)
상유의 손자이고 호는 북오 이다
1693년 숙종 계유에 무과에 올라
선전관을 거쳐
오위장이 되었다
무신에 의병장으로 활동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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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김이규(履規) (1658~1732)
자는 자범이며 양좌의 아들이다
1689년 숙종 을사에 진사가 되고
文詞가 뛰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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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김이구(履矩) (1662~1722)
양좌의 아들이며 호는 정락재(靜樂齋)이다
일찍이 학문과 시례에 밝아
향당에 알려 졌다
유집이 있으며
대산 이상정은 빙청옥결(氷淸玉潔)이라고 칭찬하였으며
호조참판의 증직이 내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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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김도응(道應) (1685~ ? )
사원의 6세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회인현감을 역임하였다
<<<김도응(金道應) 행언(行彦) 숙종37(신묘, 1711) 식년시(式年試) 丙科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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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김성(聲) (1686~1760)
상유의 증손이고 호는 성고(省皐)이다
문과에 등과하여
좌통례를 역임하였다
초휘는 성응(聲應) 이였으며
강경시(講經時) 어명(御命)으로 개명하여 성(聲)이 되었다
-----------------------------------------
21)김오응(五應) (1699~1749)
회(淮)의 현손이며 호는 구은(龜隱)이다
경사에 정통하고 문사와 필법이 뛰어났다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정랑을 역임하고
함평현감으로 치적을 남겼다
무신란으로 영남 피무(被誣) 당시
재위 유수로서
전 영남이 신원(伸寃)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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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김추응(秋應) (1700~1788)
상원의 증손이다
1717년 숙종 정유에 생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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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김재응(載應) (1704~ 1797)
상린의 증손이고 호는 소암(素巖)이다
눌은(訥隱) 이광정에게 배우고
경사에 밝으며 문장이 온아(溫雅)하였다
유집과 사례집사(四禮集辭)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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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김종덕(宗德) (1724~1797)
상린의 현손이며 호는 천사(川沙)이다
일찌기 가학을 익히고
대산 이상정에게 배웠다
1753년 영조 계유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1779년에는 학행으로 천거되어 의금부도사가 되었다
경사와 리학을 궁구(窮究)하여
문하에 많은 제자를 배출 하였으며
퇴계학통의 맥을 이었다
저서로는 문집10책과 성학정로
성학입문 공문일통 석학정장 정본
고증 초려문답 부록 등을 남겼으며
동몽교재인 입본도 있다
1992년에는 계명한문학연구회에서
연구자료총서 3집으로 전집이 행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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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김성응(誠應) (생몰미상)
사원의 6세손(5대손) 이고 호는 서파(西坡)이다
족종(族從) 종덕에게 배우고
생원시에 입방(入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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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김종필(宗泌) (1730~1789)
오응의 아들이고 호는 반성(半聲)이다
성도(性度)가 청아하고
문장이 뛰어 났으며 문집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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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김종경(宗敬) (1732~1785)
종덕의 동생이고 호는 구재(苟齋)이다
재예와 총명이 뛰어 났으며
일찌기 이상정의 제자가 되었다
1774년 영조 갑오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이 되었고
스승의 지시로 심경강록간보의 찬술에 힘썼으며
문집5권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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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김종구(宗九) (1732~1778)
상기의 현손이고 호는 운암(云菴)이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간담청아하였으며
정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전적이 되었고
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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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김종헌(宗憲) (1735~1805)
淮(회)의 6세손이고 호는 낙포(나무목변+樂圃)이다.
1795년 정조 을묘에 진사가 되었다
경학이 높고 유집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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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김종신(宗臣) (1735~1813)
종덕의 종제이고 호는 경재(絅齋)이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정조조에 진사가 되었고 유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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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김종국(宗國) (1739~1801)
회(淮)의 6세손이고 자는 경보(景輔)이다
1768년 영조 무자에 생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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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김종발(宗發) (1739~1801)
종덕의 동생이고 호는 용연(容淵)이다
1777년 정조 정유에 문과에 급제하고
사헌부장령을 역임했다
이상정의 문인으로 도학이 고명 했다
문집4권과 유가요람,예서 등이 세상에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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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김종섭(宗燮) (1743~1791)
종덕의 동생이고 호는 제암(濟菴)이다
어릴적 부터 총명이 뛰어났으며 이상정의 문인이다
1768년 영조무자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행이 높았으며 문집 4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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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김종식(宗軾) (1745~1816)
회(淮)의 6세손이며 호는 가은(稼隱)이다
1777년 정조 정유에 생원이 되었다
학문이 깊고 사우간에 중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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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김종준(宗駿) (1747~1821)
종덕의 종제이고 호는 芹谷(근곡)이며 이상정의 문인이다
1789년 정조 을유에 생원이 되고
필법이 능했으며 유고 2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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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김성진(聲進) (1741~1807)
사정의 8세손이고 호는 괴음당(槐陰堂)이다
족대부(族大父) 재응(載應)에게 배우고 경학이 깊었다
中庸圖(중용도)와 강목감작편이 있으며
문집 3권이 있다
------------------------
37)김양직(養直) (1742~1774)
사원(士元)의 9세손이고 자는 덕여(德汝)이다
1771년 영조 신묘에 생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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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김청진(淸進) (1757~1837)
사원의 8세손이고 호는 칠송(七松)이다
족숙 종덕에게 배우고 경학이 높았다
1801년 순조 신유에 생원이 되고 유집이 있다
--------------------------------------------
39)김경진(景進) (1767~ ? )
회(淮)의 7세손이고 자는 절계(折桂)이다
1809년 순조 기사에 생원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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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김성진(誠進) (1768~1837)
상기의 6세손이고 호는 서오(西塢)이다
1814년 순조 갑술에 생원이 되었다 족부 종덕을 사사 하였으며
천학역행으로 사우간 중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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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김양휴(養休) (1777~1854)
良佐의 6세손이고 호는 율원(栗園)이다
일찌기 족대부 종덕과
외왕고(外王考) 이종수(李宗洙)를 사사하고
만년에는
남한조(南漢朝)에게 배워 학문이 높았다
문집 5권이 있다
-------------------------------------------
42)김양경(養絅) (1784~1854)
양좌의 6세손이고 자는 미언(美彦)이다
1831년 순조 신묘에 진사가 되었다
--------------------------------
43)김양정(養楨) (1785~1847)
회(淮)의 8세손이며 호는 정암(定菴)이다
1834년 순조 갑오에 생원이 되었다
일찌기 정종노(鄭종魯)를 사사하여 학문이 고명하고 후진을 지도 했다
문집 8권이 있다
----------------------------
44)김양식(養植) (1791~1862)
양정의 동생이고 호는 지암(止菴)이다
1831년 순조 신묘에 진사가 되었다
형 양정과 더불어 독지호학(篤志好學)하고
문집 3권이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
45)김양징(養徵-삼수변) (1794~1856)
종섭의 손자이고 호는 백암(栢菴)이다
1849년 헌종 기유에 생원이 되고
자성이 명민하고 시집이 있다
----------------------------------------
46)김양린(養麟) (1796~1870)
종경의 손자이고 호는 竹下이다
1835년 헌종 을미에 생원이 되고
經史에 박습하고 시집이 있다
---------------------------------
47)김의유(義裕) (1800~1854)
士元의 10세손이며 호는 思村이다
1836년 순조 병신에 문과에 급제하고 正言이 되었다
문장과 덕망이 있었다
----------------------------------
48)김양범(養範) (1802~1879)
종발의 손자이고 호는 晩同(만동)이다
1844년 헌종 갑진에 생원 진사 양시에 합격했다
王考의 심법을 전수받아 독행호학 하였다
만동서숙을 지어 문생을 기르고 유고가 있다
-------------------------------------
49)김석유(奭裕) (1805~1868)
의유의 동생이고 호는 奇山이다
정제 柳致明을 사사하여 경학이 높고 사우의 推重(추중)이 있었다
문집 5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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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김기선(驥善) (1806~1883)
양식의 아들이고 호는 기서(沂墅)이다
1835년 헌종 기미에 생원이 되었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유집 2권이 있다
-----------------------------------------
51)김노선(魯善) (1815~1872)
양정의 아들이고 호는 기계(奇溪)이다
1865년 철종 을유에 생원이 되었다
정제 柳致明을 사사하여 학행이 높았고
도천(道薦)의 물망이 있었다
유집 10권이 있다
---------------------------------
52)김수익(壽翼) (1815~1872)
사원의 11세손이고 호는 운고(雲皐)이다
1852년 철종 임자에 생원이 되었다
탁락대절(卓落大節)의 높은 기개가 있었다
-----------------------------------------
53)김상종(象鍾) (1848~1908)
수익의 아들이고 호는 운산(云山)이다 가학을 익히다가
서산 김흥락에게 배웠다
문장이 웅휘(雄輝)하고 행금이 독실했다
1896년 고종 병신에는 의성의 의병대장에 추대(推戴)되어
구성산(九成山)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황산(凰山)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병(破兵)조칙(詔勅)에 의해 전진(戰陣)을 해산 했다
연방집(聯芳集)이 있으며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54)김수욱(壽旭) (1852~1902)
종덕의 현손이고 호는 좌산(左山)이다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배우고 문학과 시례에 밝아 몸소 실천 했다
병신에는 운산공 상종과 더불어 창의 하여
소모장(召募將)이 되고 전쟁에 참여 했다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 받았다
---------------------------------
55)김수담(壽聃)
양징(養徵-삼수변)의 손자이고 자는 근수(謹搜-재방변 없음)이다
강인한 성품에 가학을 익히다가
운산공 상종과 더불어 창의하여
선봉장이 되고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29일 황산전투에서 순국 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56)김수협(壽莢) (1853~1896)
상원의 9세손이고 자는 영수(英搜-재방변 없음)이다
가학을 익히다가 운산공 상종과 더불어 창의 하여
관향장(管餉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황산전투에서 김수담과 함께 순국했다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받았다
------------------------------------
57)김상호(相鎬)(1865~ ? )
양좌(良佐)의 9세손이고 자는 우창(遇昌)이다
1894년 고종 갑오에 진사가 되었다
-------------------------------------
58)김시호(時鎬) (1876~ 1916)
종발의 6세손이고 호는 죽헌(竹軒)이다
한말에 주사(主事)를 역임 하였다
-------------------------------------
59)김호직(浩直) (1874~ 1953)
세종(世鍾)의 아들이고 호는 우강(雨岡)이다
1894년 고종 갑오에 진사가 되었다
향산(響山)이만도(李晩燾)에게 배우고 경사에 독실했다
외화(外華)가 준수하고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문집 4권과 독집,동천자 한양가 등의 저서가 있다
------------------------
이로써 59인의대소등과및 문학저세자 약력록을 올리면서
1) 참고문헌--사촌세거 약사(1996년 간),조선조 문과방목
2) 틀린부분 있으시면 연락주시면 수정 하겠습니다
3) 우선 산골에서 선비의 맥을 맥맥히 이어오신 선조님들을 흠모하오며
글 쓰신 어른께 감사드리고
저의 작은 수고로움으로
이 홈페지가 무게를 가지고
도평의공파 부분의 일부분으로 수록하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4)沙村 門中의 항렬자 소개:(宗派 기준)
충렬공(김방경)..1세- 선..2세(1대)- 승택..3세(2대)- 면..4세(3대)-구정(도평의공)-자첨(입향조) -효온- 극해- 광수(송은공)-당
-세우 - 士元(만취당)- 준- 尙0- 0佐-0應- 宗0- 0進- 養0- 0裕-壽0- 0鍾(鎬)- 浩,在0- 0秀,會,植- 熙,泰0-0中,相,植- 容0- 0敎(28代=29世孫)
*(충렬공24대손(25세손)항렬에 식(植)자가 있어서 저 26대손(27세손)은 中,相자를 썼는가 봅니다)
讀花神國傳戱吟(독 화신국전희 음)
-송은 김광수 선조님 詩-
번역문 올립니다.
-화신국전-
자손들아 한 이백년은 살아야 하고
남녀 둘은 낳아서 전해야 한다.
산수(山水)를 좋아하면 향기가 절로 나고
나무를 잘 가꾸면 식물(食物)도 난다.
말이 있다 해도 겨우 잔치집에 가고
소는 없으면 밭을 못 간다.
웃음소리가 언제나 떠들썩하면
사철 의복도 하늘이 준다.
의복을 깨끗이 입을 양이면
좋은 연석에도 가게 되리라.
원컨데 후생들아 화신국(花神國)에 태어나
언제나 가족들과 같이 즐겨라.
<萬年松亭韻 >
一別俎徠問幾時 * 靑香細細來詩筆
일별조래문기시 * 청향세세래시필
栽封蒼翠萬年姿 * 殘子紛紛落硯池
재봉창취만년자 * 잔자분분낙연지
葉密幽禽啼自在 * 昻莊獨立村園裏
엽밀유금제자재 * 앙장독립촌원리
苔斑鱗甲老尤奇 * 不許尋常俗士知
태반린갑노우기 * 불허심상속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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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노니 조래산(俎來山) 떠나온지 몇해런고
만년송(萬年松) 푸를 그루 고이고이 심었노라
맑은 향(香) 은은하게 시축(詩軸)에 풍겨오고
송화(松花)가루 날아서 벼루에 떨어진다
푸른 잎 무성하니 새 소리 한가롭고
늙은 줄기 이끼끼니 인갑(鱗甲)인양 아롱진다
은사(隱士)의 동산(東山)에 우뚝히 서 있으니
심상(尋常)한 저 속사(俗士)야 몰라준들 어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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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靑苔一逕隔紅塵 * 車馬縱然嫌地僻
청태일경격홍진 * 차마종연혐지벽
幽興相尋日轉新 * 鶯花曾不厭家貧
유흥상심일전신 * 앵화증불염가빈
看山坐處凉生腋 * 自喜萬年松影裏
간산좌처량생액 * 자희만년송영리
高枕眠時翠滴巾 * 四時風景屬閑人
고침면시취적건 * 사시풍경속한인
--------------------
이끼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그윽한 흥(興)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후미져 으슥한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집이 가난하다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산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높은 베개 잠이드니 푸른 빛이 낯을 덮네
만년송(萬年松) 그늘속에 한가로운 이몸이라
아름다운 사시풍경(四時風景) 나홀로 기뻐하리
*******************************************************
註
-만년송=지정보호수, 소재지: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만취당 앞 수령 600년 향나무임,
-----------
-조래산:중국의 산, 조=한자가 없음(두인 변에 조 임)
-----------
-뒷날 여헌 장현광 선생은 이 시를 전해 듣고
이 어른이 흉중이 여락해서 일점의 녹루도 없도다
하고
늘 만년송 안부를 물었다 한다
-----------
-작가: 연산조의 시인 송은 김광수(1468~1563),
만취당 김사원의 증조부
서애류성룡 외조부
점곡면 사촌리 영귀정
장대서원 배향
사촌안동김씨 문규
서문
자고로 우리 사촌은 안동김문의 집성촌이었으나
멀지않은 옛날부터 안동권씨와 풍산류씨의 혼성대촌이 되었으며
그외 타성도 뜸뜸이 살고 있다
그 생활예절은 반례(班禮)와 향례(鄕禮)와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순후한 민풍의 고장으로 칭송받고 있으니
이는 유교적 예속 보급을 통하여
향촌사회의 도덕적 질서의 확립과 양속미풍이 진작되고
각종 재난에 상호부조하는 풍습이 불문율처럼 시행되고 있기때문이다.
거슬러 생각하면
송나라의 람전현에 살았던 도학자 여대균 형제가
향리사람의 교화를 위하여 함께 지켜야할 규약을 마련하고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란상휼의 4강목 설정과 동시에
선적과 악적을 두어 해당자를 기록으로 남겼다가
향중의 회의시에 상벌을 행하였던것을
여씨 향약이라 하였다
이를 남송의 주자에 의해 약간의 증손을 거쳐 시행되고
우리나라에는 고려 말기에 성리학 보급과 더불어 수용 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실시되기는
조선조 중종 당시로서 감사와 수령을 통해 보급하는 관치향약으로 발전 하였으며
퇴계이황의 예안 향약과
율곡이이의 해주향약은
우리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향약이다
향약의 문헌을 살펴 볼때
향약.향안.향규.동계.리약등의 일정단위 자치규칙이 시행된바 있다.
우리 의성에서도
회당 신원록이 퇴계의 수편 향약을 보급한적이 있고
자암 이민환이 향약강신약조에 서문을 달아 행하였으나
내용은 유사하고
추진은 강력하지 못하였다
한문중을 단위로 하는 문약이나 문규는 발견하지 못하였고
다만의 귀화민으로 가창우록의 김충선의 후손이
우록동내외자손급동리조약이 있을 뿐이다.
우리 사촌 일원에서도
일찌기 1680년 숙종 경신에 지은
이계 남몽뢰의 사촌리약중수서문을 살펴 볼때
자락당 권숙영 신촌 남해준 남애 김상원
사오 김상기 오우재 권전,권선
현감 손만웅 등이 김석좌 김양좌를 시켜
마을에 통문을 돌리고 조약을 강정하였다고 기록 되었으나
설정된 절목은 상고 할길 없다
서문의 한 구절에는
어른은 사랑을 두텁게 하고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여 화목한 질서를 세웠고
또한 덕업을 서로 권하여 허물을 서로 조심하여
포악한 모습과
비열한 말을 서로 삼가하여
아무런 폐단없이 수십년을 지났다 라고 말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향약의 4대강목의 뜻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덕업상권은 옳은 일을 서로 권하며
문중의 기풍을 바로잡는 도덕을 선양하고자함이며
과실상규는 문중의 구성원들이 각자 성찰하면서
과실을 바로잡아 앞으로의 잘못을 줄이고자 함이며
예속상교는 올바른 범절로 서로 사귀고
어른을 섬기며 경조사에 상호부조 하자는 내용이며
환란상휼은 천재나 지변등의
뜻밖의 재난에 서로 도와 위기대처에 상응하고자 함이다
정축년 성하의 어느날
선재 만취당에서 문중의 장소분이 자리를 함께하고
동성가취의악법이 국령으로 통과 되었음을 개탄하며
오족은 이를 엄금하고
그외 사항을 포함하여
문규를 초안 하라는 명을 받았으나
마음이 정리되지않은 상태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생각하면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매말라가는 사회문화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선자와 악자의 가름이 분명하기 어렵고
상벌의 기준이 또한 사회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기 그지없다.
삼가 신명에 대한 두려운 마음으로
권장사항과 규제사항을 정리하여 별지에 기록하고 머릿말을 대신한다
1997년 정축 12월 일
문규제정발기인
김강호 김위만 김성수 김학수 김희경 김벽수 김희국 김형수 김영균 김창회
김형수
**************************
서로 권장할일 ..................................서로 규제할일
부모에게 효도할일...............................부모조상을 욕되게 하는일
형제간에 우애할일...............................어른을 속이거나 헐뜯는일
어른과 노인을 공경할일..........................어른을 능멸히 여기는일
서로간에 신의를 지키는일.......................남을 사기 하는 일
문친간에 하목할일...............................일가친척에게 패악하는일
이웃을 잘 사귀는일..............................강자가 약자를 능멸히 여기는일
문중의 결의에 잘따르는 일.......................의결된 문사에 불평하는일
문중의 役事에 부지런 할일.......................위선 부역에 성실하지 않는일
언행을 삼가할일.................................언사가 저속하고 무도한일
일시의 분노를 잘참는일.......................경우를 무시하고 송사를 일으키는일
남모르게 선행하는일..........................남모르게 악행하는일
위선사업에 거액을 헌납하는 일................문중의 재물을 임의로 손상시키는 일
이상의 실행이 뚜렷하거나 그외에도 특별한 선행이 있는 자를 선적(善籍)에 기록 유지 하였다가 유사시 문의에 의해 표창한다.
이상의 행실을 자주 범하거나 그외에도 사리에 맞지 않는 악행을 자주범하여 기강을 어지럽힌 자를 악적 에 기록 유지하였다가 유사시에문의에 의해 징계한다
******
부칙
1. 이문규는 1998년 무인 1월 부터 시행한다
2. 이 문규의 공정한 운영을 위하여 운영위원회를 구성 하고 상벌과 징계의 의결권을 행사한다
가. 운영위원회 구성
0. 자동참여:도평의공파 회장 및 도유사
ㅐ.선출참여:문중운영위원 9명(계 11명)
나.운영위원회의 의결은 3분의 2이상의 참석과 참석위원의 만장일치로 의결한다
3. 운영우ㅣ원회의 소집은 필요에따라 수시로 개최하되 도유사가 소집한다 . 이상.
부록1.문중 청소년에게 고함
2.계녀훈
3. 문중 회전시의 제홀
-------------------------------------
선적부------------------------------------악적부
성명--선행사유 상기.......................성명--악행사유 상기
좌목-성명-자호-생-
<큰마 우물 이야기>
사촌마을 한복판에
임란전부터 내려온 우물 있지요 (웅굴이라캐요)
물이 좋아 오래 산다는 마을
큰인물이 셋이 난다며(신라시대 정승 나천업,조선시대 영의정 류성룡)
아직도 큰인물 한사람 기다리는 마을.
도참설에 의하면
(현 전국 대학의 사학,지리과 학생들 순방코스 사촌마을)
지형이 배모양으로 생겨
구멍을 뚫으면 가라앉는다고
우물은 전 동네에 한개 뿐 이랬데요
우물 처음 팠을 때
붉은 황토물 먹으면 큰자식 낳는다는 말에
김진사(조선초 시인 송은 김광수)댁
넷째딸(김씨부인=류성룡 모친 당시 열두어살)은
그 흙물을 몇 바가지나 먹었대
그후 영의정을 낳았다는 전설도 있어요
온 문중 사람이 물 길러 먹던곳
물 지는 머슴이 줄을 이었대요
병신란(1896년 의병)에 견딘 만취당
6.25때 누가 그 옆 소깝삐까리에 불질렀을 때
어떤 부인네
이 우물물 길러 동이로 끼얹어 불을 껐기에
지금도 현존 하는 우물 옆 만취당!!
**********************************
짚 따배 틀어 머리에 얹고
물동이 그위에 얹어
가뭄에 새벽물 따라 먹든곳
물동이 이고 가는
춤추던 엉덩이~~~
어릴적 기억이 선하네요
아! 잊을수 없는 고향의 물 맛!!!!
이 아침에
고향 우물의 씨원한 샘물 한바가지 씩 퍼 디리니더
다 마시세이
<김정중 씀>
p/s 사촌마을=경북의성군점곡면사촌3리
=도평의공파 문중소재지
=안동김氏입향610년마을
만취당 =(송은 김광수의 증손 김사원의호),임란전 목조건물
=도평의공파 종택 옆 현존
경북의성군 홈페쥐 참조(沙村선비마을,만취당,만년송)
월란정사(月瀾精舍)
임란공신
만취당<<선조께서
22歲 되시던 1560년(명종 庚申)에
퇴계선생께 청업(請業)하고 십여년간 수학하시던 곳이며
도산 2곡(陶山二曲)으로 경계(景界)가 절승(絶勝)임>>
(위는 만취당 실기에 사진과 함께 실린 내용입니다)
********************************************************
사촌문중의
안동도산 소재 유일한 정자
이젠 안동댐 수몰지역으로
배를 타고 갈수있는곳
일찌기 퇴도 선생께서
수제자 사원(만취당 김사원)선생께
정자자리 하나를
유일하게
내어주신곳
이곳에서 문답하시고
지으신 詩가 여러 수 만취당 실기에 전한다
진성이씨 퇴계후손분 들과
안동김 사촌 종중과
윤번제로 유사 맡아
400여년 동안 학술회의 개최 하신곳
내 어릴적 월란정 모임에 문중 대표로 가신다며
자랑스레 맘 설레시던
조부님 부주님!
거길 따라 간적 있는 철부지 나
월란정 가시는 사촌 손님이라며
업어 건네 주시던
중시리하던 아저씨도 이제는 이세상 분이 아니실거야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유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않는고... 의
그유수(流水)를
그런 저런 일들로
얼마나 많은 양반님네 들 업어 건너 주셨을꼬
나룻배 저어 가기 보다 업어줌이 간편 했을터
경상도 말로 어버라(업어라)
한마디에 잠뱅이 둥둥 걷고...
***
안동시 도산면 토계동(?)의
월란정사 풍광이
댐의 물과 더불어 더욱 절경이리라
퇴계후손 문중과 공동 관리하지만
안동김씨 사촌문중의 재산
송이버섯도 많이 나지요
그토록
아담하고 단아한 정자
정겨운 토담
반겨주던 대문칸
영남학파 계승하며 지켜온 토계 온혜 부포 섬촌 사촌 양반님네들
모임과 정자와 두 문중
세월속에 빛 바랬는지
<김정중 씀>
*<김문수의 만취당기>(2003. 2.1 정중(도) 제공)
작가 김문수씨(62)는 이같은 명당과 그 터에 대한 한 인간의 맹신과 집요한 집착을 해학적으로 엮어낸 소설로 20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했다. '만취당기'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이 소설의 무대는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 일대. 더 없는 명당에 터를 잡아 세 명의 정승을 배출한다는 전설을 지니고 있으며, 경북도 지방유형문화재로도 우리에게 친숙한 사촌리의 '의성만취당'에서 작가는 이 소설의 소재를 얻은 것. 실제상황과는 전혀 다른이야기의 구성이지만 턱없이 낡은 풍수설을 믿고 자신의 아들을 정승으로만들려는 아버지와 그것을 믿지 않는 자식간에 빚어지는 갈등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다른 사람에게 20여년전에 넘어간 고향집 만취당을 되찾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간 아버지를 뒤따라 온 주인공이 7세때 떠난 고향과 처음 맞닥뜨린곳은 중앙선 의성역. 새벽에 열차에서 내린 그에게 고향은 '따뜻한 잠자리와 예쁜 아가씨'로 유혹하며 다가온다. 그러나 작품속의 주인공과는 달리 기자가 벌건 대낮에 의성역 광장을 찾았을 때엔 주위는 그저 조용하기만 했다. '예쁜 아가씨'로 방금 내린 승객을 유혹하려는 아줌마부대는 물론 역앞 가게에서조차 손님을 끌어보려는인기척도 없다. 1990년에 새로 지었다는 역사의 산뜻한 도색만이 삭막한분위기를 조금 덜어줄 뿐. 역사안으로 들어서자 어이없게도 대합실의 한쪽에 자그마한 정원이 꾸며져 있다. 앙증스러운 풍경에 미상불 미소가 떠올랐지만 그 속에는 승객감소에 따른 철도청의 고민이 숨어있을 터. 인구가줄어들고,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면서 쇠락해가는 농촌의 한 단면이 그대로투영되는 듯해 안타까운 생각도 언뜻 든다. 때마침 역 주변 도로에서는 '쌀값 제값받기'를 주장하는 의성농민들의 시위가 한창이다. 이곳에서의 '따뜻한 잠자리' 유혹을 물리치고 소설속의 주인공은 고향과더 가까운 읍으로 택시를 타고 간 것으로 묘사돼 있지만 그 '고향과 가까운 읍'은 작품의 구성을 위해 설정한 가공의 무대일 뿐 실상은 존재하지않는 공간이다. 전국농악경연대회 탓에 잠자리를 구하지 못한 주인공이 고향마을까지의 시오리길을 샛별을 등불삼아 터덜터덜 걸어간 다음 서림에서한데잠을 자도록 만드는 공간배치일 뿐인 것. 해서 우리 일행은 곧장 점곡면 사촌리로 향했다.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20여분 달린 끝에 만난 사촌리는 시골마을 치고는 좀 규모가 클 뿐 평범하다. 크다고는 하지만 이 곳이 면소재지이고 보면 오히려 작다는 편이 맞을지도 모를 일이다. 한때 300호를 넘었지만 지금은 130호 정도란다. 마을을가로지르는 도로를 따라 잠깐만 달리자 금세 왼쪽 골목길 입구에 붙어 있는 '의성만취당'의 입간판이 나타난다. 골목으로 들어서자 지금껏 평범했던 마을이 금세 다른 인상으로 다가온다. 돌과 흙을 섞어 만든 담이 기와를 머리에 인 채 길게 늘어서 있고, 민속마을에 들어선 듯 고색창연한 집들이 눈앞에 가득 들어온다. 그 마을의 한 복판에 누각인지 정자인지 짧은소견탓에 언뜻 구별이 되지 않는 큰 건물이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만취당이다. 작가는 소설속에서 이 일대가 농공단지로 지정돼 만취당은 물론 마을전체가 없어질 운명으로 설정, 만취당이 지닌 전설대로 행정고시에 합격한아들이 반드시 국무총리나 장관이 돼 줄 것으로 믿는 이택희 노인을 분개하게 만들었지만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일 뿐 만취당은 물론 마을까지 아직 건재하다. 기실 이 만취당과 사촌리 또한 이씨와는 무관하다. 사촌리는안동김씨의 세거지로, 타성받이는 지금도 네댓집에 불과하다. 만취당은 1582년에 지어진 안동 김씨 집안의 소유로 한번도 남에게 넘어간 적이 없다고 한다. 낯선 외지인들의 출현에 잔뜩 긴장한 개들이 일제히 짖어대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고 만취당과 바로 옆에 자리잡은 이 집안의 종택을 둘러 본다. 수백년의 풍상을 견딘 고가에서는 옛 사람들의 냄새가 물씬 풍긴다. 사람이 거처하지 않는 탓에 쇠락하기는 했지만 문화재로 지정됐기 때문에 이나마 버티고 있을 것이다. 빈집을 엿보는 객적은 마음에 조심스레 종택의 문을 열자 누군가 종택의 마당까지 알뜰히 밭으로 가꾸어 놓은 풍경이 눈에들어와 이채롭다. 동네 노인을 잡고 이 마을에서 정말 정승이 났느냐고 물어보자 이 곳이외가인 서애 유성룡 선생이 유일하단다. 옛날 마을의 오래 된 은행나무를베 불상을 조성하는 바람에 한 명의 정승이 날 기회를 상실했으며, 또 한명의 정승감이 태어나기는 했으나 시대를 잘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는것. 일제의 민비시해당시 의병장을 지낸 김상종 선생이 바로 그 아까운 인물이라고 했다. 소설의 주인공이 고향집을 눈앞에 두고 노숙을 한 서림은 이름 그대로마을의 서쪽에 있는 숲이다. 마을의 서쪽이 허하면 인물이 나지 않는다는풍수에 따라 안동김씨의 조상들이 600년전에 조성했다는 유명한 숲으로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됐다. 그러나 초겨울의 서림은 황량하다. 활엽수로조성된 숲은 나무들의 굵은 둥치에서 연륜을 읽을 수 있을 뿐 메마른 가지들이 앙상하다. 그 옛날 이 숲을 뒤덮었다는 왜가리들도 사라진 지 오래라는데, 바닥에 널린 낙옆과 삭정이를 끌어모아 작품 속의 주인공이 그랬던것처럼 모닥불이라도 지피면 쓸쓸함이 가실까. 그러고 보니 나지막한 주위의 산에도 늘푸른 소나무 보다 활엽수들이 훨씬 많아 초겨울의 스산함을더하게 만든다. 소설속에선 만취당의 당호가 '저 시냇가의 소나무는 더디고 더디게 자라지만 무성하고도 늦도록 푸르도다'라는 한시의 한 구절에서따 왔다고 했는데.... 서림을 뒤로 하고 돌아서면서도 '소설속의 이야기처럼 전설이 자신이나아들에게 구현되길 기다리며 분투하는 가족들이 아직도 있을까' 못내 궁금했다. *작품 줄거리 아버지를 뒤따라온 나는 잠자리를 찾지못해 만취당을 눈앞에 두고 서림에서 하루밤을 지샌 다음 수상한 사람이 나타났다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경찰의 안내로 아버지를 찾아 나서지만 아버지는 고향집이 내려다보이는산위의 바위에 올라 혼자 술을 마시고 있다. 고향마을이 농공단지로 지정돼 몽땅 헐리게 된데 대한 울화때문. 아버지는 집을 되찾기 위한 돈을 내놓으며, 세도가에게 백을 써서라도목을 보존하라고 나를 타이른다. 나는 짐짓 아버지가 시키는대로 하겠다고달래면서도 속으로는 '끝까지 싸우다 안되면 이 돈으로 만취당이라는 주점이라도 내서 살지언정 굴복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한다. /정근재기자 kayjay@yeongnam.com |
<후산서원 소개> (출처:의성군 홈페이지. 2003. 2.1. 정중(도) 제공)
후산서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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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촌마을 소개>(2003. 2.3. 정중(도) 제공)
사촌(沙村)3리는 신라시대 나정승(羅正丞)이 이 마을에 살았다는 전설과 자하산(紫
霞山) 중턱에 나정승(羅正丞)의 묘라고 전해지는 고총(古塚)으로 보아 마을의 역사
가 1.000년이 넘었으리라 짐작되어 그후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후예 김
자첨(金子瞻)이 안동(安東) 회곡(檜谷) 에서 이주하여 1392년 중국의 사진촌(沙眞
村)을 본따서 지었다 함
▷ 자연 부락...
-사촌(沙村)의 가로숲(西林) : 사촌 서편 매봉산 기슭을 따라 길이 약1040m 폭40m
의 방풍 경관림이 길게 가로 누여 있으니 이곳이 사촌 가로숲이다 수종은 상수리 나
무 느티나무 팽나무등 10여종 이며 수령은 300-600년 사이의 노거수(老巨樹)가 많
고 수고가15-20m로 장대한 숲을 이루고 있다 이는 도내에서도 가장 큰 숲의 하나
인데 약600년전 안동 김씨(安東金氏) 입향 시조인 감목공(監牧公) 김자첨(金子瞻)
이 안동(安東)에서 사촌(沙村)으로 옮겨 마을을 이룰 때 서편 긴 평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고 소도 휴식을 할수 있게 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지금도 푸른 숲에 100여 마리의 왜가리 떼와 뭇 철새들의 찾아들며 봄에는 새소리 여름에는 녹음 겨울에는
설화로 절경을 이루고 있다 보호림 1등급 9-75호로 경상북도에서 지정한 바 있다
-만취당(晩翠堂) : 조선 중종(中宗) 선조(宣朝)때 사람인 김사원(金士元) 호(晩翠堂)
이 지은 건물로 부석사(浮石寺) 무량수전(無量壽殿)과 더불어 국내에서 가장 오래
된 사가의 목조 건물로 안동 김씨(安東金氏) 종실(宗室)로 사용되어온 조선조(朝鮮
朝) 특유의 11칸 대청 건물이며 현판은 한석봉(韓石峰) 친필이라 전해지며 지방유
형 문화재 제169호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병암서당屛岩書堂) : 단종때 절의를 지킨 김한동(金漢仝)의 증손인 김응하(金應夏)
가 동생 응상(應商) 응주(應周) 강학하던 곳으로 지금부터 400년 전에 창건하여 현
재에 이르고 있음
-후산 서원(後山書院) : 18C 건물로 춘추 정일에 각 유림에서 모여 향사를 모시던 서
원으로 대원군때 훼당하고 지금은 안동김씨 도평의공파 제사로 쓰이고 있다
<내고향 사촌(沙村)>(2003. 2. 4. 억(도) 제공)
세상에는 고향을 잊고 사는 사람이 많다. 바쁘게 지내다 보면 자기가 나서 자란 곳을 까마득히 잊을 수가 있다. 그러나 옛날 어느 분인가 고향을 그리워 말하기를,
「A胡馬叱北風 越鳥巢南枝 (호마질북풍 월조소남지) 」
몽고(蒙古)의 말은 북풍에 울부짖고, 월(越)나라의 새는 남쪽가지에 둥우리를 튼다.
고 하였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향을 사랑하며 또한 자랑한다. 이것은 인간의 본능적인 욕구이고, 오늘날 산업사회의 급격한 변천과 더불어 차츰 삭막해지는 인간 심성(心性)에 더욱 절실히 자리잡기 시작하는 회향심(懷鄕心), 또는 향수의 도도한 물결이기도 하다. 이 물결은 명절이나 피서철에, 산과 바다와 고향으로 아우성치듯 밀려 오고가는 대이동으로 표면화되고 있는 것이다. 한편, 꿈에도 고향을 그리워하며 헤매고 있는 이산가족들의 하소연과 향수에 젖어 울부짖듯 늘어 놓은 사연들에서 우리는 고향을 그리는 한결 절실한 정서와 감정을 읽을 수 있고, 또 어느 누구나 공감해 마지 않는다.
실향(失鄕)한 북한 출신의 문인, 시인 등 모두가 고향을 소개할 때는 그 산하가 빼어나고 인정과 풍물이 아름답다고 극찬하지않는 이가 없다. 나는 오랜 세월 고향을 떠나서 살아본 일이 없어서 그들처럼 고향에 대한 애틋한 정을 느껴보지 못했다. 고향에 사뭇 살고 있기 때문에 고향을 오히려 감각하지 못하는 덤덤한 사람이 되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 기회에 점곡(點谷)의 산수와 풍물을 소개하면서 한번쯤 고향을 생각해 보게 되었으니, 마침 다행한 일이라고나 할까?
점곡은 지형상 경북도 내에서도 가장 중앙이 되는 의성읍에서 북동 15km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출입하는 주요 통로는, 의성에서 주왕산(周王山)국립공원이 있는 청송으로 뻗은 지방도를 따라 두 개의 고개를 넘어서 들어오는 길과 구안(大邱, 安東) 도로가 지나는 단촌에서 동으로 훤히 트인 골을 따라 8km 가량의 포장된 군도가 이곳으로 뚫렸고, 안동군 길안에서 좁은 골, 높은 재를 넘어 남서로 14km 되는 곳이 이 고장이다. 이 세 길 가운데 어느 길을 통해 오든지 처음 오는 사람이면 누구나 사방이 준험한 산악 속의 벽지로 우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막상 이 고장에 들어와 보면, 남북 3km, 동서 10여km가 거침없이 터진 별유천지(別有天地)가 전개되어, 시원하면서도 한편 안온한 느낌을 갖게 된다. 이곳이 일찍이 지사(地士)들이 말한 바 영남(嶺南) 8명기(名基)의 하나라고 하는 의성 사촌(沙村)이다. 사방으로 통하는 차편은 편도 27회로 그리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이며, 지세는 동쪽이 높고 서쪽이 낮은 편인데, 보현산(普賢山) 솟재<鼎嶺>와 황학산(黃鶴山)에서 발원한 물의 흐름이 급하여 넓은 하천부지를 형성하고, 토질은 사질양토로 배수가 잘 되어 과수 재배의 적지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해발 160m로, 생산과 생활에 가장 적당한 지대이며, 낮과 밤의 일교차가 비교적 심하여, 여름에는 모기가 없어 무덥고 짧은 밤을 쾌적하게 숙면할 수 있으니, 이 또한 명기설을 뒷받침하는 일례가 아닐까 한다. 그외에도 이곳의 식수(食水) 또한 도내에서 으뜸이다. 매월 실시하는 식수 검사 때는, 마을 어느 곳의 샘물을 가져가도 가장 양질의 식수로 감정을 받는다. 몇해 전에 식수가 좋아 장수촌이란 제목으로 한국일보 사회면에 발표된 일이 있다. 이런 연유(緣由)로 여름철이 되면 도시의 공해와 효진(段塵)을 피해 이곳 출신 사람들 또는 이 지방과 연고있는 사람들이 줄을 이어 찾아 들기도 한다. 이곳의 촌락(村落) 구성을 살펴보면, 소재지 사촌은 4백여호가 집단으로 거주하는 전형적인 대촌인데, 이렇게 큰 자연부락은 도내에서도 흔하지 않다. 여기에는 고려말과 조선초에 입향한 고려 중흥 공신 충렬공(忠烈公) 김 방경(金方慶)의 5세손 감목공(監牧公) 김 자첨(金子瞻)의 후예인 안동 김씨와 단종조 절의신 행정(杏亭) 권 식(權軾)의 예손인 안동 권씨를 비롯하여 조선후기에는 조선중기의 명유(名儒) 겸암(謙菴) 유 운용(柳雲龍)의 후손인 풍산 유씨가 입향하여 상호 융화된 씨족사회를 이루고 있으며, 면 소재지에서 동남쪽 2km인 윤이실(尹谷)에는 학행과 절의로 이름난 이계(伊溪) 남몽뢰(南夢賚)의 후손 영양 남씨가, 동쪽 1km 지점 단애(丹厓)실에는 퇴계 문하의 고제 송고(松皐) 박윤함(朴允牽)의 후예 반남 박씨, 서쪽 중리(中里)에는 1문 5종반의 충절로 임진왜란때 창의(倡義)의 공훈이 길이 빛나는 이름 높은 김치중(金致中) 의사 일가의 자손인 의성 김씨가 각각 수려한 터를 잡아 세거(世居)하면서 문맥(文脈)과 통혼으로 빈번히 인연을 맺고 내왕 상교하고 있다. 평상시에나 길흉사에 모여들면 선의(先誼)를 밝히고 우정을 나누며 명조(名祖)의 훈화를 받들고 순박한 미풍양속을 재물보다 귀하게 여기니 이는 모두 면면한 전통의 유풍이 서려 내려오기 때문이다.
이 고장은 또한 문향(文鄕)으로서도 이름이 높다. 옛날부터 학문으로써 향리를 빛낸 어른들이 많지만 위에 든 행정 권식과 연산조때의 은사 송은(松隱) 김광수(金光粹)의 유풍(遺風) 탓인지, 환로와 훈업으로 나간 사람이 적고 학문과 수신을 미덕으로 삼은 인사가 많았다. 그러나 이른바 문치를 표방하고 정교일치(政敎一致)의 유학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조 사회에서 일단 각자의 지적 수준과 능력을 가름해 보고자 했음인지 자격을 인정받는데는 뒤지지 않았다. 그 실례를 들면 이 고장에서 대소과(生員과 進士 및 文科, 武科)에 53명이 급제되었음이 그러한 일면을 충분히 뒷받침해 주고 있다. 이 고장은 자연경관이나 유적 유물 등도 적지 않다. 면 소재지 북서 4km 거리에 위치한 대한 조계종 16교구 본산 고운사(孤雲寺)는 전국에서 유수한 대찰로 일찌기 신라시대의 거유 최치원(崔致遠)이 머물다 갔다하여 그 호를 취하여 고운사(高雲寺)를 고운사(孤雲寺)로 고쳐 불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입구의 계곡과 임학이 유수하여 각처의 소풍객이 끊이지 않는다. 남서방 4km 지점의 건마산성은 임진란때 김치중 의사의 전적지로도 유명하다. 성 아래 있는 깊은 소(沼)와 십리 장벽은 철따라 그 모습을 달리 하는 보기 드문 명소로, 옛 글에 A山靑石白間間花(산은 푸르고 돌은 흰데 사이사이 꽃이로구나) B고 한 시는 이곳을 두고 말한 듯하다. 면 소재지의 방풍림 가로숲은 경상북도 지정보호 1등급 9~75호이고(지금은 천연기념물 405호로 지정) 임진란때의 치란 공신이며 송은 김광수의 외손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의 출생지라는 전설이 있다. 10km의 무제(無堤) 평원을 남북으로 가로 질러 수령 5백년을 넘는 태고연한 노거수 사이에 대곡천(大谷川)이 관류(貫流)하여 낙동강의 지류인 기수(沂水)에 합류한다. 내의 바닥은 씻은 듯이 깨끗하여 옥돌같은 자갈이 총총히 깔려 농부들이 낮잠을 즐길 수 있고, 지나가는 길손 또한 발걸음을 멈춰 쉬어 가기도 한다. 봄에는 북쪽 산밑과 노목사이에 기화요초가 다투어 피고, 여름에는 갖가지 나무가 무성하여 녹음을 이루며, 가을에 화사한 단풍으로 채색되고, 겨울에 눈이 오면 송이송이 설화가 매달린 듯 사철 경관을 이루는 이 숲에 다람쥐와 산토끼 등 들짐승들이 밤낮 찾아들고, 철따라 새들이 지저귄다. 또한 마을 앞을 완만하게 굽이치며 유유히 흐르는 기수는 맑고 차가웁기로 알려졌고, 강반(江畔)에 우뚝 솟은 송은 김광수의 강학처였던 영귀정(詠歸亭)과 더불어 절경을 이룬다. 인근 고장 인사들이 효진을 피하고 머리를 식히기 위해 이곳을 찾는 일이 왕왕 있다. 그 외에도 면내 각처에 누대정각이 많고 경관과 유적지가 적지 않지만 생략하고, 지방 문화재 169호인 만취당(晩翠堂)은 1582년에 퇴계(退溪)의 고제 만취당김사원(金士元)이 지은 집으로 규모가 웅혼하고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4백년이 넘도록 원형대로 보존된 건축물은 영남에서도 그리 흔하지 않다. 이 고장의 특산물로는, 광활한 하천부지에 펼쳐진 과수원의 사과다. 그 식부 면적이 군내에서 손꼽히고, 빛깔이 고우며, 향기로운 그 맛은 서울까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십여년 전까지 재래식 농사에 의한 담배, 고추, 채소재배로 가계를 꾸려 왔으나, 지금은 사과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주민의 생활이 비교적 안정되어 있고, 교통의 발달로 외지와의 교류 접촉이 빠르며, 현재 점곡, 단촌간의 도로 포장이 완료되고 교통이 원활하면서, 오랜 침체에서 벗어나 더욱 윤택하고 한결 활기있는 새로운 고장으로 탈바꿈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 여기에 실린 기사는 1986년 1월, 전국단위의 월간지에 게재된 기사를 그대로 실었습니다.
안동김씨 사촌입향 육백년 추원비
(安東金氏 沙村入鄕 六百年 追遠碑)
비문(碑文)
태백(太白)은 동(東)쪽을 휘감았고 소백(小白)은 서북(西北)에 둘러섰다. 황지(黃池)에서 발원(發源)한 낙수천리(洛水千里)의 연변(沿邊)에는 옥야(沃野)가 전개(展開)되고 홍유석덕(鴻儒碩德)이 연(連)달아 배출(輩出)되니 세인(世人)들은 영남(嶺南)을 가리켜 인재(人材)의 부고(府庫)라 하였다. 여기 소주(韶州)의 북촌 사진리(北村 沙眞里)는 명산대하(名山大河)의 지맥지류(支脈支流)가 알맞게 배분(配分)되어 산광수색(山光水色)은 명미(明媚)하고 기름진 전토(田土)가 수리(數里)에 연(連)
하여 백세전손(百世傳孫)의 훌륭한 기지(基地)로 알려진 곳이다.
차(嗟)홉다. 우리 감목선조 휘 자첨(監牧先祖 諱 子瞻)께서는 분파조(分派祖)이신 도평의공 휘 구정(都評議公 諱 九鼎)의 아들이시며 고려조(高麗祖)의 훈업상신(勳業相臣)인 충렬공 대조(忠烈公 大祖)의 5세손(世孫)으로 천성(天性)이 호매(豪邁)하고 고지원식(高志遠識)의 탁견(卓見)이 있어 안동회곡(安東檜谷)에서 세거(世居)하다가 조선조(朝鮮朝)가 개국(開國)됨에 시류(時流)에 알맞는 유신(維新)의 뜻으로 청전세업(靑氈世業)을 버리고 사촌(沙村)에 조기(肇基)하니 곧 이조(李朝)의 개국연대(開國年代)였다. 조정(朝廷)에서는 전조명신(前朝名臣)의 후손예우(後孫禮遇)로 감목관(監牧官)에 제수(除授)하였으나 사양(辭讓)하고 도광양덕(韜光養德)의 처세(處世)와 영세(永世)를 내다보는 경륜(經綸)으로 서림(西林)을 조성(造成)한 선조(先祖)는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수성(守成)의 요체(要諦)를 전지자손(傳之子孫)하여 오늘의 우리를 이땅에 살게하니 모두가 석과불식(碩果不食)의 업보(業報)일 것이다.
맏아드님 휘 효온(諱 孝溫)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문과(文科)에 올라 사직(司直)을 역임(歷任)하였으나 세조(世祖)의 찬위(簒位)를 보고 은거불사(隱居不仕)하고 문과동방(文科同榜)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과는 심교(心交)가 깊었다.
둘째 휘 효항(諱 孝恒)은 사정(司正)의 벼슬을 하였으나 문헌무징(文獻無徵)으로 상고(詳考)치 못하고 청송화현(靑松花峴)으로 개기정거(開基定居)하여 청명직절(淸名直節)로 수분(守分)하고 현재(現在)에 이른다. 효온(孝溫)의 아드님 휘 극해(諱 克諧)는 생원(生員)과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여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으며 청백(淸白)으로 세상(世上)에 알려졌다. 아드님 휘 광수(諱 光粹)는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고 태학(太學)에서 공부(工夫)하던 중 사우간(士友間)에 중망(重望)이 높았으나 연산조(燕山祖)의 사화(士禍)로 시정(時政)의 불리(不利)함을 보고 낙향(落鄕)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존현양사(尊賢養士)에 힘쓴 일사(逸士)로서 세칭(世稱)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하였다.
사후(死後)에는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그 청고(淸高)한 인격(人格)을 독행군자(篤行君子)요 소안백발(韶顔白髮)의 지상선인(地上仙人)이라고 외손 서애선생 유성룡(外孫 西厓先生 柳成龍)은 기록(記錄)하였다.
둘째 휘 광복(諱 光復)은 충순위(忠順衛)를 역임(歷任)하고 효우(孝友)로 처신(處身)하여 백씨 송은선생(伯氏 松隱先生)과 함께 연방고(聯芳稿)를 남겼다. 그 후 아들 언걸(彦傑)과 같이 김해 덕산리(金海 德山里)에서 전손 세거(傳孫 世居)하며 문물(文物)이 상전(相傳)하고 일향(一鄕)의 문족(聞族)이 되었다. 송은선생(松隱先生)의 아들 휘 당(諱 嬋)은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이시고 그 아드님 휘 세우(諱 世佑)는 통례원인의(通禮院引儀)시다. 인의공(引儀公)께서는 세 아들을 두었으니 휘 사원, 사형, 사정(諱 士元, 士亨, 士貞)으로 모두가 일방(一方)의 망사(望士)가 되었다.
사원(士元)의 호(號)는 만취당(晩翠堂)으로 퇴도고제(退陶高弟)이며 도산(陶山)의 월란암(月瀾菴)에서 위기(爲己)의 학문(學問)에 전심(傳心)하여 선생(先生)의 심허(心許)를 받았으며 임란(壬亂)을 당(當)하여는 구국(救國)의 일념(一念)으로 창의(倡義)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고 후덕심인(厚德深仁)으로 진활유민(賑活流民)하니 김씨의창(金氏義倉)이라 별칭(別稱)하였다. 사후(死後)에는 후산사(後山祠)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사형(士亨)은 호(號)를 독수헌(獨秀軒)이라 했고 문과(文科)에 올라 직장(直長)을 지냈으며 유일재 선생(惟一齋 先生) 김언기(金彦璣) 문하(門下)에서 학문(學問)을 익혔다. 동생 사정(士貞)과 함께 화왕산(火旺山)의 곽망우당 의진(郭忘憂堂 義陣)에서 활약(活躍)하였고 아들 한(澣)과 같이 진보(眞寶)로 전거(轉居)하였다. 사정(士貞)은 호(號)를 후송재(後松齋)라 하였고 사숙계문(私淑溪門)으로 수학(修學)하였으며 곽망우당 의진(郭忘憂堂 義陣)에서 적신성서(積薪成誓)의 피끓는 시(詩)를 남겨 세상(世上)에 알려졌다. 사후(死後)에는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祭享)하였다. 그 후에도 사마문무(司馬文武)와 문집학설(文集學說)을 남긴 후손(後孫)이 번다(繁多)하나 다 기록(記錄)하지 못함을 아쉽게 생각(生覺)한다.
거슬러 생각(生覺)하면 입향후 20대 10갑자(入鄕後 二十代 十甲子)에 이른 오늘날 세수인경(世守仁敬)의 범절(凡節)을 지키며 대과 13원(大科 十三員), 소과 28원(小科 二十八員)이 배출(輩出)되고 문한(文翰)도 빈빈(彬彬)하며 유맥(儒脈)이 상승(相承)하여 교남벌족(嶠南閥族)으로 원근(遠近)에 알려지니 어찌 비양(卑讓)의 덕(德)을 닦은 현조(賢祖)의 여음(餘蔭)이 아니리요.
바야흐로 세도(世道)의 변천(變遷)은 금석(今昔)을 달리하여 농경사회(農耕社會)는 산업사회(産業社會)로, 정신문화(精神文化)는 물질문화(物質文化)로, 집성대촌(集姓大村)은 이산전거(離散轉居)로 옮겨지는 것은 시대(時代)의 순리(順理)라 다만 이 시기(時期)를 당(當)하여 내세(來世)의 후진(後進)에게 근원(根源)을 찾게하고 숭조(崇祖)의 정신(精神)을 함양(涵養)하여 처심적려(處心積慮)의 생각(生覺)을 기르고자 선조(先祖)의 체취(體臭)가 서린 유서(遺緖)깊은 서림(西林)에 추원비(追遠碑)를 세워 이 곳을 찾는 후손(後孫)에게 고향(故鄕)의 상념(想念)을 심어주고 우리의 내력(來歷)을 영세(永世)에 전(傳)하고자 후손 사수씨(後孫 沙秀氏) 등(等)의 주선(周旋)으로 문원(門員)의 성력(誠力)을 모아 비석(碑石)을 세우면서 삼가 명(銘)하노니.
매봉산에 나린 용(龍)이 서림(西林)에와 머무르고
유심(幽深)하다 기수람상(沂水濫觴) 이 강산(江山)에 응(應)했도다.
영철(潁哲)할사 선조(先祖)님이 조기길지(肇基吉地) 하셨으며
비양(卑讓)으로 덕(德)을 삼고 성경(誠敬)으로 수분(守分)했네.
명창정궤(明窓淨免) 밝은 뜻은 지고렴사(志高廉士) 길렀으며
청화(淸和)로운 몸가짐은 유방백세(遺芳百世) 이 아닌가.
함양훈도(涵養薰陶) 깊은 훈회(訓誨) 시례가성(詩禮家聲) 아름답고
번연(繁衍)할사 운잉(雲仍)이여 천세상전(千世相傳) 하옵고져.
서기(西紀) 1992년(年) 임신(壬申) 매우절(梅雨節)
도평의공, 감목공양대위 묘갈명
(都評議公, 監牧公兩代位 墓碣銘)
■고려 봉거 직장 도평의 지인 부군 묘갈명
高麗 奉擧 直長 都評議 知印 府君 墓碣銘
高麗朝(고려조)의 봉거직장(奉擧直長) 도평의지인(都評議知印) 휘(諱) 구정(九鼎) 부군(府君)은 유아(惟我) 사김씨(沙金氏)의 분파조(分派祖)이시다. 삼가 생각하니 우리 김씨(金氏)의 원조(遠祖)는 세대(世代)를 실전(失傳)해서 고거(考據)가 확실(確實)치 않았는데 경순왕(敬順王)의 손자(孫子)이신 공부시랑(工部侍郞) 평장사(平章事) 휘(諱) 숙승공(叔承公)께서 비로소 안동(安東)의 관(貫)을 받았으나 누대(累代)에 걸쳐 자호(字號) 배위(配位)와 세덕문물(世德文物)이 전(傳)하지 못하다가 한림학사지제고(翰林學士知制誥)를 지내시고 선서(善書)로 명동일세(名動日世)한 휘(諱) 효인공(孝印公)이 계시니 곧 부군(府君)의 5대조(代祖)이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방경(方慶)이니 정동(征東) 도원수(都元帥) 추충정난공신(追忠靖難功臣) 상락군개국공(上洛郡開國公) 시충렬(諡忠烈)로서 금고(今古)에 대현(大顯)하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주향(主享)으로 뫼시니 우리의 중시조(中始祖)이며 증조(曾祖) 휘(諱) 선(歷)은 전법판서(典法判書) 상장군(上將軍)이다. 조(祖) 휘(諱) 승택(承澤)은 도첨의(都僉議) 정승(政丞) 시(諡) 양간(良簡)이요 고(考)의 휘(諱)는 면(冕)으로 안렴사(按廉使)를 역임하고 치가(治家)와 수분(守分)에 힘썼다.
공(公)의 생년(生年)은 전(傳)하지 않고 초휘(初諱)는 충(忠)이였는데 일찍이 도평의지인(都評議公知印)을 지내시고 만년(晩年)에 조선구장(祖先舊庄)인 회곡(檜谷)의 상락대(上洛臺)에서 불식락강(不息洛江)의 자연(自然)을 벗삼아 근서무농(勤書務農)과 고가전범(古家典範)을 밝히면서 가산려수(佳山麗水)에 묻혀 송로자적(送老自適)하니 물외(物外) 한정(閑情)의 천품(天品)을 족(足)히 추량(推量)할 수 있다. 오호(嗚呼)라 1389年 홍무기사(洪武己巳) 二月 二十四日에 몰(沒)하시고 행현(杏峴) 중강을좌(中岡乙坐)에 안장(安葬)하였으며 배(配)는 아산장씨(牙山蔣氏)로 전서(典書) 성미(成美)의 따님인데 대대(大垈) 유좌(酉坐)에 뫼셨다. 외아들 휘(諱) 자첨(子瞻)은 감목관(監牧官)으로 입향사촌(入鄕沙村)하였고 그 아드님 휘(諱) 효온(孝溫)은 문과(文科) 사직(司直)이며 휘(諱) 효항(孝恒)은 관사정(官司正)인데 청송(靑松) 화현(花峴)으로 정거(定居)했다. 효온(孝溫)의 아들 휘(諱) 극해(克諧)는 문과(文科)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지냈고 청백리(淸白吏)로 알려졌으며 아드님 휘(諱) 광수(光粹)는 호(號) 송은(松隱)으로 진사시(進士試)에 합격(合格)하고 태학(太學)에서 공부(工夫)하던 중(中) 연산(燕山) 사화(士禍)를 예견하고 낙향(落鄕)하여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후학(後學)을 지도했으며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둘째 휘(諱)광복(光復)은 충순위(忠順衛)인데 김해(金海) 덕산리(德山里)에 전손 세거(傳孫世居)하고 광수(光粹)의 아들 휘(諱) 당(嬋)은 기자전참봉(箕子殿參奉)이요 아드님 휘(諱) 세우(世佑)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이다.
인의공(引儀公)께서 3형제(兄弟)를 두시니 휘(諱) 사원(士元) 사형(士亨) 사정(士貞)으로 모두가 일방(一方)의 망사(望士)가 되었다. 사원(士元)의 호(號)는 만취당(晩翠堂)인데 퇴도고제(退陶高弟)로서 임란(壬亂)에 창의(倡義) 정제장(整齊將)으로 활약하고 후산사(後山祠)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사형(士亨)의 호(號)는 독수헌(獨秀軒)으로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 문하(門下)에 수학(修學)하여 문과(文科) 직장(直長)이며 아들 간(澣)과 같이 진보(眞寶)로 이거(移居)하였다. 사정(士貞)은 호(號) 후송재(後松齋)라 하며 사숙계문(私淑溪門)하고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중형(仲兄) 사형(士亨)과 같이 활동하였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祭享)하였다.
사원(士元)의 아들 휘(諱) 준(濬)은 직장(直長)이고 사형(士亨)의 아들 휘(諱) 간(澣)은 호(號) 송암(松巖)이요 사정(士貞)의 아들 휘(諱) 회(淮)는 호(號) 경암(敬菴)으로 문과(文科) 정랑(正郞)이요 휘(諱) 형(泂)은 호(號) 삼우당(三友堂)이다. 준(濬)의 아들 휘(諱) 상원(尙瑗)은 호(號) 남애(南厓)로 한려문(寒旅門)에 수학(修學)이요 휘(諱) 상기(尙琦)는 호(號) 사오(沙塢) 장사랑(將仕郞)이며 휘(諱) 상각(尙珏)은 호(號) 자여당(自餘堂)이고 휘(諱) 상비(尙王此)는 호(號) 금취헌(錦翠軒)이며 휘(諱) 상인(尙璘)은 호(號) 양진당(養眞堂)으로 충렬공(忠烈公)의 묘전설치(墓田設置)를 주도(主導)하였다. 간(澣)의 아들은 휘(諱) 상위(尙瑋) 상찬(尙璨)이요 회(淮)의 아들 휘(諱) 상유(尙瑜)는 호(號) 옥계(玉溪)로 장사랑(將士郞)이며 형(泂)의 아들은 휘(諱) 상관(尙瓘)이다.
그 후(後) 10여대(餘代)에 걸쳐 문무과한(文武科翰)과 유망(儒望)을 갖춘 자손(子孫)이 수십여(數十餘)이나 다 기록(記錄)하지 못한다.
아! 선세(先世)의 장갈(狀碣)이 미비(未備)함으로 이제 보첩(譜牒)과 세전구비(世傳口碑)를 모아 서(敍)하고 삼가 명(銘)하노니
낙수변(洛水邊)의 상락대(上洛臺)는 승국고벌(勝國古閥) 터전이요
가산려수(佳山麗水) 자연경(自然景)은 세심정혼(洗心淨魂) 조신(操身)이라
충렬고리(忠烈古里) 청아의범(淸雅儀範) 문소지북(聞韶之北) 봉형(封瑩)이요
행현중강(杏峴中岡) 정민지탁(貞珉之琢) 이산천(山川)과 함께하리
1992년(年) 임신(壬申) 소춘절(小春節)
■ 선무랑 행함길도 감목관 부군 묘갈명
宣務郞 行咸吉道 監牧官 府君 墓碣銘
함길도(咸吉道) 감목관(監牧官) 부군(府君)의 휘(諱)는 자첨(子瞻)이요 성(姓)은 김씨(金氏)로서 관향(貫鄕)은 안동(安東)이다. 고(考)의 휘(諱)는 구정(九鼎)으로 봉거직장(奉擧直長) 도평의(都評議) 지인(知印)이니 우리 사김씨(沙金氏)의 분파조(分派祖)요 조(祖)의 휘(諱)는 면(冕)으로 안렴사(按廉使)이며 증조(曾祖) 휘(諱) 승택(承澤)은 도첨의(道僉議) 정승(政丞) 시양간(諡良簡)이고 고조(高祖) 휘(諱) 선(歷)은 전법판서(典法判書) 상장군(上將軍)이다. 개국공(開國公) 시(諡) 충렬(忠烈)이며 훈업(勳業)으로 대현(大顯) 금고(今古)하니 곧 중시조(中始祖)이고 상계(上系)는 신라종성(新羅宗姓)이다.
공(公)은 1369年 홍무(洪武) 기유(己酉)에 태어나시니 천성(天性)이 호매(豪邁)하고 고지원식(高志遠識)의 탁견(卓見)이 있었다. 상락(上洛) 회곡(檜谷)의 세거사족(世居士族)이며 선대유훈(先代遺勳)으로 광화(光華)를 누렸으나 조선조(朝鮮朝)가 개국(開國)함에 세류(世流)에 순응(順應)하고 유신(維新)의 뜻을 살려 고가(古家) 세업(世業)을 버리고 가권(家眷)과 함께 사촌(沙村)에 입향(入鄕)하여 진황(榛荒)을 정리(整理)하고 자손(子孫)의 터전을 닦은 후(後)에 원대(遠大)한 경륜(經綸)으로 서림(西林)을 조성(造成)하고 전손(傳孫)의 기지(基地)를 잡았다. 조정(朝庭)에서는 승국훈신(勝國勳臣)후손(後孫)의 예우(禮遇)로 감목관(監牧官)에 임용(任用)하였으나 사양(辭讓)한 후(後) 공명(功名)을 탈략(脫略)하고 전원(田園)에서 근검(勤儉)으로 백세(百世)를 경영(經營)하다가 1454年 단종(端宗) 2年 86세(歲)로 사세(辭世)하시고 행현선묘하(杏峴先墓下)에 봉안(奉安)하였으며 배(配)는 시진(市津) 송씨(宋氏)로 차동(次洞) 묘좌(卯坐)에 안장했다. 자(子) 효온(孝溫)은 문과(文科) 사직(司直)이고 효항(孝恒)은 사정(司正)이며, 여(女)은 김극경(金克敬) 유야거(柳野居) 권처신(權處信)이고 권식(權軾)은 생원(生員)이다. 효온(孝溫)의 자(子) 극해(克諧)는 문과(文科)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이요 극해(克諧)의 자(子) 광수(光粹)는 진사(進士)로서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세칭(世稱) 송은선생(松隱先生)이라 하였고 광복(光復)은 관충순위(官忠順衛)다. 광수(光粹)의 자(子) 당(嬋)은 기자전(箕子殿) 참봉(參奉)이고 자(子) 세우(世佑)는 통례원(通禮院) 인의(引儀)요 세우(世佑)의 자(子) 사원(士元)은 퇴도문인(退陶門人)으로 호(號)는 만취당(晩翠堂)이며 임란(壬亂)에 창의(倡義)하고 부호군(副護軍)이요 사형(士亨)은 호(號) 독수헌(獨秀軒)인데 문과(文科) 직장(直長)이며 사정(士貞)은 호(號) 후송재(後松齋)로 중형(仲兄)인 사형(士亨)과 같이 곽망우당(郭忘憂堂) 의진(義陣)에서 창의(倡義)하고 지평(持平)에 추증(追贈)되었다. 사원(士元)의 자(子) 준(濬)은 관직장(官直長)이요 사형(士亨)의 자(子) 간(澣)은 호(號) 송암(松巖) 통덕랑(通德郞)이며 사정(士貞)의 자(子) 회(淮)는 호(號) 경암(敬菴)인데 문과정랑(文科正郞)이고 형(泂)은 호(號) 삼우당(三友堂)으로 통덕랑(通德郞)이다.
준(濬)의 자(子) 상원(尙瑗)은 호(號) 남애(南厓) 수(壽) 호군(護軍)이요 상기(尙琦)의 호(號)는 사오(沙塢) 장사랑(將仕郞)이며 상각(尙珏)은 호(號) 자여당(自餘堂)이고 상비(尙王此)의 호(號)는 금취헌(錦翠軒)이며 상인(尙璘)의 호(號)는 양진당(養眞堂)으로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이다. 간(澣)의 자(子)는 상위(尙瑋) 상찬(尙璨)이며 회(淮)의 자(子) 상유(尙瑜)는 호(號) 옥계(玉溪)로 장사랑(將士郞)이며 형(泂)의 자(子) 상관(尙瓘)은 통덕랑(通德郞)이다.
상원(尙瑗)의 자(子) 요좌(堯佐)는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이고 다음은 성좌(成佐)이며 상기(尙琦)의 자(子)는 굉좌(宏佐) 몽좌(夢佐)요 상각(尙珏)의 자(子) 순좌(舜佐)는 호(號) 산계(山溪)며 석좌(碩佐)는 호(號) 운암(雲菴) 통덕랑(通德郞)이고 상비(尙王此)의 자(子)는 영좌(英佐) 홍좌(弘佐)요 상인(尙璘)의 자(子) 양좌(良佐)는 호(號) 사주(沙洲)로 생원(生員)에 증(贈) 호조참의(戶曹參議)이고 성좌(聖佐)는 호(號) 송리(松里)로 문과부사(文科府使)이며 현좌(賢佐)는 통덕랑(通德郞)이다. 상유(尙瑜)의 자(子) 은좌(殷佐)는 호(號) 소북(韶北)이고 경좌(慶佐)는 호(號) 기은(沂隱)이며 상권(尙瓘)의 자(子)는 희좌(姬佐) 신좌(信佐) 명좌(明佐)이다. 그 후(後)의 번연(繁衍)한 자손(子孫)은 다 기록(記錄)하지 못하고 이제 보첩(譜牒)과 상전설화(相傳說話)를 추려서 서(序)하고 명(銘)하노니
영가부서(永嘉府西) 회곡산수(檜谷山水) 위국충훈(衛國忠勳) 세장(世庄)이요
영지명향(嶺知名鄕) 사진리(沙眞里)는 탈략공명(脫略功名) 기지(基地)로다
염담과욕(恬淡寡慾) 맑은정신(精神) 구십향수(九十享壽) 누렸으며
선조지하(先兆之下) 천년유택(千年幽宅) 일월(日月)같이 밝으소서
1992년(年) 임신(壬申) 소춘절(小春節)
송은 선조 경심잠(병서)
松隱 先祖 警心箴(幷序)
士生斯世, 參於三才, 而壽夭窮達命也已矣, 心之操捨善惡, 在吾一身, 豈敢斯須忽哉, 夫人之異乎禽獸者, 有禮義也, 人無禮義, 可謂人乎, 唐虞邈矣, 淳風日釉, 而士習卑陋, 識者寧不寒心, 是故作箴十章, 以自警爲一家子孫之勸戒云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 三才(天, 地, 人)의 하나로 참여하여 수(壽)하고 요(夭)하고 궁(窮)하고 달(達)함은 운명이라 하지만 선을 택하고 악을 버리는 것은 내몸에 달렸는데 이를 어찌 잠시라도 소홀히 할까 보냐. 대저 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예의가 있기 때문인데 예의가 없으면 어찌 사람이라 하리요. 요순시대의 아름다운 풍속은 사라져가고 선비의 옛정은 저속해지니 어찌 한심치 아니할가. 고(故)로 내가 경심장 열대목을 지어 자신을 경계하고 子孫들의 경계를 권하노라.
一. 事 親
子於父母, 恩難報答, 宜得甘旨, 以供晨夕, 勿毁四體, 攪動親心, 一出鄕關, 感念益深, 我有偏母, 年逾七旬, 西山日迫, 愁淚滿巾, 烏鳥反哺, 人而恝然, 我斟我酒, 惟壽生前
- 어버이 섬기는 일
자식이 부모에게 은혜를 보답함이 어렵다 하지만 맛있는 음식을 조석으로 받들고 제 몸을 조심하여 부모의 근심을 없게하며 하루라도 외박을 하면 부모 걱정 절로 된다. 나에게는 편모가 계시는데 70이 넘은지라 돌아가실 날 멀지 않으니 근심 걱정 뿐이로다. 까마귀도 반포(反哺)의 효(孝)를 하는데 사람이 어찌 부모 걱정 아니할까. 어버이 살아 계실 적에 내손으로 정성껏 봉양하리라.
二. 輔 君
爲臣子者, 事君盡忠, 其曰不然, 乃禽乃蟲, 比干諫死, 萬古一臣, 李斯誤國, 千載罪人, 臣而反逆, 萬死誰惜, 宜罷重典, 夷滅三族, 君臣定分, 上天鑑臨, 我載我王, 益堅丹心
- 나라에 충성할 일
무릇 백성된 자는 나라에 충성을 다해야 되나니 그렇지 못하면 짐승과 같으리라. 비간(比干, 殷의 주왕시대의 충신)은 목숨을 바쳐 간하였기에 충신이 되었고 이사(李斯, 진시황의 악정을 도운 정치가. 참형됨)는 나라를 그르쳤기에 죄인이 되었다. 신하로서 나라에 반역함은 죽어서 마땅하며 나라의 엄한 법은 삼족을 멸하고 군신간의 정한 분수 하늘의 마련이라 내 나라 내 임금을 단성으로 도우리라.
三. 祭 廟
茫茫宇宙, 享祀爲重, 是用立廟, 小心欽奉, 公鄕大夫, 以及下士, 各遵祭禮, 宗子傳祀, 彼何人斯, 慢不致誠, 我有祠宇, 蕭灑三楹, 每歲明朝, 四仲吉日, 我盡我誠, 香火不輟
- 제사를 받드는 일
드넓은 이 세상에 봉제사가 중하니라. 그러므로 사당을 세워 성의껏 받드나니 삼공(三公)의 귀한 사람에서 하나의 서인에 이르기까지 제례에 따라 맏아들이 행사하니 그 어떤 사람인들 소홀히 할 것인가. 우리집 가묘도 삼간이 소연하다. 해마다 신년 명절과 사중길일(四仲吉日, 한식·단오·추석·동지)에는 성의를 다하여 제사를 받드리라.
四. 正 家
一家之內, 夫作妻綱, 唱而和之, 服事巾裳, 子女童僕, 尊卑有級, 何物庸老, 變亂家法, 綠衣黃裳, 余甚痛惜, 厥妃奚罪, 葵百飢泣涕, 冠屢倒罷, 尾大難制, 我正我家, 以戒後裔
- 집을 바르게 다스리는 일
대개 한 집안에서는 남편은 아내의 벼리가 되나니 남편이 행하면 부인이 따르는 것은 男女간에 지켜야 할 예절이다.
수하와 비복들도 상하(上下)의 체통이 있는데 어찌 늙음을 핑계삼아 집의 질서를 문란하게 하랴. 부인네의 과분한 허식은 내 심히 유감스럽고 여자의 잘못은 가난을 원망하는데서 연유한다. 예절이 바르지 못하면 어른이 집을 다스리지 못하니라. 내 몸과 내 집을 바르게 하여 후손을 경계하고자 하노라.
五. 友 愛
惟兄與弟, 本是同根, 及其長成, 婚嫁他門, 姜公一被, 荊樹再花, 一何奇美, 其心孔嘉, 凡今之人, 相視如客, 分寸之利, 背面反目, 鴻或離行, 言之可慙, 我友我弟, 和樂且湛
- 형제 남매 화목할 일
형제 남매는 같은 부모에서 태어나 자라나고 배워서 성년이 되면 각기 다른 곳에 결혼을 한다. 강공(姜公, 후한 때 효우로 이름있는 사람)은 형제간에 같은 이불을 덮었고 진전의 집 형(荊)나무는 다시 꽃이 핀다(荊樹復生 兄弟 安樂의 眞田三兄弟 故事). 이것은 모두 선인들의 아름다운 마음이로다. 지금 사람들은 서로서로 남같이 보고 작은 이익으로 각기 다투나니 기러기의 질서있는 행렬을 보아도 부끄러운 일이다. 내부터 우애하기를 힘써 화락하게 지내리라.
六. 謹 刑
傷不復續, 死不再生, 其可誤按, 以亂民情, 凡爾有司, 愼勿暴刻, 一失其中, 悔將何及, 蒼頭赤脚, 走卒庸童, 葵賴任觸怒, 鞭背生蟲, 是亦人也, 豈無顧憐, 我寬我意, 誓不濫焉
- 형벌을 삼가할 일
한번 상하면 붙이지 못하고 죽으면 다시 살아나지 못하나니 형벌의 판단이 잘못되면 백성은 혼란하다. 무릇 형벌을 맡은 사람은 포악하고 각박함을 삼가할 것이다. 한번 중용을 잃으면 후회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종과 하인과 어린이들이 제 잘못으로 매를 맞는다 해도 그도 또한 가엾은데 내 뜻 너그럽게 가져서 매사를 조심하고 범람함이 없도록 하리라.
七. 廢 讒
悴爾墾人, 利口暢暢, 伺顔善誘, 其甘如蜜, 大而天下, 小而家國, 聞一讒間, 萬端生隙, 一掩紅顔, 夫婦參商, 一此蜂衣, 父子豺狼, 巧舌至此, 寧不愧慄, 我堅我志, 去讒不納
- 남을 헐뜯지 말 일
귓속말로 남을 험담하면서도 좋은 말로 꼬이듯 하니 그 말이야 꿀같이 달지만 크게는 천하(天下)로부터 나라와 가정에 이르기까지 험언으로 서로 이간질하면 만가지 감정이 생긴다. 부부간에도 얼굴을 붉혀 의사가 상치되고 부자간도 이리같이 무서워지나니 이처럼 무서운 험언을 하고도 어찌 부끄러워 할 줄 모르는가. 내뜻 굳게 가져 험언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리라.
八. 愼 色
蛾眉晧齒, 朱顔綠髮, 悅人心目, 爛人腸腋, 聖智明料, 不邇尤物, 彼何狂士, 而作淫荒, 狂甘雲雨, 褻瀆綱常, 行同犬豕, 慙穢日彰, 衆口悴諦, 醜不可言, 我修我身, 以訓子孫
- 여색을 삼가하는 일
나비 눈썹 흰 이빨의 아름다운 여자는 사람의 마음을 현혹하지만 남자의 정력만 소모하는 것이다. 밝은 판단으로 여색을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하는데도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음란하여서 달콤한 교정에 사로 잡혀 짐승같은 행동이 날로 더해지고 남의 비방을 받게 되니 부끄럽지 아니한가. 내 몸을 조심하고 자손을 훈계하리라.
九. 結 友
蓬生麻中, 不扶而直, 沙之在泥, 自然而黑, 芝蘭善友, 不能自負, 表裏異者, 吾友何取, 擇須勝巳, 交必端肅, 切磋磨琢, 相輔以德, 平生所思, 不過忠孝, 我礪我節, 前賢是效
- 친구를 잘 사귀는 일
따붓(蓬)이 삼밭에서 자라면 저절로 곧아지며 흰 모래가 진흙에 섞이면 자연히 검어진다. 지란(芝蘭)같은 좋은 벗은 배신함이 없고 표리(表裏)가 다른 사람 사귀지 말 것이다. 모름지기 훌륭한 벗은 단정하고 엄숙함이니 충심으로 서로 도와 갈고 닦아서 평생토록 힘쓸일 충효에 불과하다. 내 스스로 정신을 가다듬어 옛 성현을 본받으리라.
十. 安 貧
貴而近禍, 富多不仁, 何如雲壑, 以養天眞, 一瓢顔巷, 樂在其中, 三逕陶園, 白月淸風, 聖賢尙爾, 況乎小儒, 屋八九間, 可容殘軀, 田數十畝, 足慰飢腹, 我安我分, 不趨利欲
- 가난하면서도 분수를 지키는 일
귀하게 되면 화가 따르고 부자는 어질지 못함이 많다. 어찌하면 전원에 살면서 천성(天性)을 지킬까. 안연(顔淵, 孔子의 首弟子)은 누항에서 즐거워했고 도연명(陶淵明, 晋代의 逸士)은 자연을 벗삼아 살았다. 성현들도 이렇게 살았거늘 하물며 시골 선비야 말해 무엇하랴. 집이 비록 일여덟간이라도 몸을 용납할만 하고 밭이 수십 마지기이니 먹을 것은 넉넉하다. 형편에 만족하고 분수를 지켜서 명리와 욕심에 급급하지 않으리라.
※ 본 해설은 편집자의 나름입니다. 정확하다고 볼 수 없으니 양지하시고 미진하고 곡해된 부분은 원문을 참조하여 해득하시기 바랍니다.
만년송정운(萬年松亭韻)
一別苑徠問幾時 / 묻노니 조래산(苑徠山) 떠나온지 몇해런고
栽封蒼翠萬年姿 / 만년송(萬年松) 푸른 그루 고이고이 심었노라.
淸香細細來詩筆 / 맑은 향(香) 은은하게 시유(詩軸)에 풍겨오고
殘子紛紛落硯池 / 송화(松花)가루 날아서 벼루에 떨어진다.
葉密幽禽啼自在 / 푸른 잎 무성하니 새 소리 한가롭고
苔斑鱗甲老尤奇 / 늙은 줄기 이끼 끼니 인갑(鱗甲)인양 아롱진다.
冷莊獨立村園裏 / 은사(隱士)의 동산(東山)에 우뚝히 서 있으니
不許尋常俗仕知 / 심상(尋常)한 저 속사(俗士)야 몰라 준들 어떠리.
우(又)
靑苔一逕隔紅塵 / 이끼낀 오솔길이 홍진(紅塵)에 막혔으니
幽興相尋日轉新 / 그윽한 흥(興)을 찾아 날로 기분 새로워라.
車馬縱然嫌地僻 / 후미져 으슥한 곳 차마(車馬) 어이 오랴마는
鶯花曾不厭家貧 / 집이 가난하다 앵화(鶯花)야 싫어하랴.
看山坐處凉生腋 / 산(山)을 보고 앉았으니 어깨는 서늘하고
高枕眠時翠滴巾 / 높은 베개 잠이 드니 푸른 빛이 낯을 덮네.
自喜萬年松影裏 / 만년송(萬年松) 그늘 속에 한가로운 이몸이라
四時風景屬閑人 / 아름다운 사시풍경(四時風景) 나홀로 기뻐하리.
중수기(重修記)
소현동북일사(韶縣東北一舍)의 허(許)에 우뚝한 병봉(丙峯)은 묘방(卯方)이 삭립(削立)하고 유방(酉方)은 완만(緩慢)하게 내리어 길다란 능선(稜線)을 이루면서 마령청벽(馬嶺靑壁)과 마주하고 주위산강(周衛山岡)은 이곳에 응(應)했으며 정치 남상(鼎峙 濫觴)이 기수(沂水)가 되어 창송단애(蒼松丹崖)에 부딪쳐 소담(小潭)을 이루었다. 여기 사진대촌(沙眞大村)을 일목조망(一目眺望)하고 구원(丘園)의 풍치(風致)가 아름다운 서북(西北)자락에 상연(爽然)히 자리한 영귀정(詠歸亭)은 선조(先祖) 송은선생(松隱先生)께서 이양현송(灑養絃誦)하던 곳이다.
선생(先生)은 1501년 연산신유(燕山辛酉)에 진사(進士)로서 반궁(泮宮)에 상류(嘗留)할 때 제생(諸生)의 역학질의(易學質疑)를 막힘없이 답변하여 존경(尊敬)을 받았으나 무오사화(戊午士禍)의 여파(餘波)로 혼정(昏政)이 거듭되자 동배(同輩)의 만류(挽留)를 뿌리치고 낙향(落鄕)하여 사절세사(謝絶世事)하고 수간망암(數間茅庵)을 정결(精潔)하게 가꾸어 영귀(詠歸)라 편액(扁額)함은 욕호기(浴乎沂)하고 풍호무우(風乎舞雩)하고 영이귀(詠而歸)의 고사(古事)를 인용(引用)함이다. 이곳에서 소오언식(嘯傲偃息)하면서 평소(平素)에 영산사(營産事)를 말하지 않고 가언선행(嘉言善行)을 칭도(稱道)하며 빈천(貧賤)을 척척(戚戚)하지 않고 부귀(富貴)에 급급(汲汲)하지 않으며경심십잠(警心十箴)을 지어 자서(自序)하고 매양 춘화물훤(春和物暄)에 유수(幽邃)한 서림(西林)을 바라보며 죽오풍청(竹塢風淸)이요 매창월백(梅窓月白)의 금부(琴賦)로 영이귀(詠而歸)하니 모두가 지상선인(地上仙人)이라 찬탄(讚嘆)하였다. 오호(嗚呼)라 96세(歲)의 향수(享壽)로 역책(易甑)하시고 유광무천(流光貿遷)한 某年에 암(庵)은 무너지고 황원(荒園)만 남으니 세사(世事)의 영허(盈虛)를 미루어 알지니라. 어사지간(於斯之間)에 창상(滄桑)이 바뀌고 정조년간(正祖年間, 1780년대)에 이르러 후손종록(後孫宗祿)등이 뜻을 모아 선적(先蹟)의 구지(舊址)를 정리(整理)하고 간살을 조금 넓혀 오가와옥(五架瓦屋)으로 중건(重建)하여 옛날의 편액(扁額)을 게판(揭板)한 연후에 당(堂)을 중심(中心)으로 동재(東齋)는 학치(學致)요 서재(西齋)는 취정(就正)이니 곧 학이치기도(學以致其道)와 취유도이정언(就有道而正焉)이면 가위호학(可謂好學)의 논어구절(論語句節)을 뜻함이다.
이후(以後) 몇차례의 수보(修補)를 거쳐 1991年 3月 25日에는 고건물(古建物)의 규모(規模)와 특성(特性)을 인정받아 문화재 자료(文化財 資料) 234호(號)로 지정(指定)되었으며 1996年 5月 4日 형상(形象) 변경사업의 승인이 있었다. 의성군수(義城郡守)의 시공(施工)으로 금년(今年) 10月 1日에 착공(着工)하여 12月 31日에 준공(竣工)을 보았으며 3200만원의 사업비(事業費) 중 200만원은 문비(門費)로 부담하고 내부공사(內部工事)는 시공(施工)하지 못하였다.
지붕을 해체하여 산자를 바꾸고 부식연목(腐蝕椽木)의 단연(短椽) 11개와 장연(長椽) 30개를 개체하였으며 연함(椽檻)과 평고대를 새로 지었고 기와의 육할(六割) 정도를 갈아 넣었는데 기존분(旣存分)은 북(北)편에 새 기와는 남(南)편에 이어서 공사(工事)를 마무리 지었다. 당국(當局)의 성원(聲援)에 사례(謝禮)를 드리고 다만 선세유업(先世遺業)이 이손전손(以孫傳孫)으로 영전(永傳)하기 바라면서 본생선조(本生先祖) 장령공(掌令公)의 중건소지(重建小識)를 고거(考據)하여 위와같이 기문(記文)을 쓴다.
1997年 丁丑 중양절(重陽節)
후산정사(後山精舍)
기문(記文)
산(山)은 높고 웅장(雄壯)함보다 영기(靈氣)가 서려야 이름이 있고 물은 깊고 맑음보다 용(龍)이 서식(棲息)하므로 세상(世上)에 알려진다. 대개(大蓋) 유수(幽邃)한 산천(山川)과 명미(明媚)한 풍광(風光)은 선현(先賢)의 얼이 깃드므로 더욱 빛을 발(發)한다. 고(故)로 중국(中國)의 무이(武夷)는 회암부자(晦菴夫子)의 정사(精舍)가 있으므로 천하(天下)에 드러났고 청량(淸敭)과 도산(陶山)은 퇴계선생(退溪先生)께서 장수(藏修)하여 해동리학(海東理學)의 진원지(震源地)로 널리 알려졌다. 여기 후산정사(後山精舍)는 선조 만취당선생(先祖 晩翠堂先生)의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일향(一鄕)의 사림(士林)과 후손(後孫)들이 모여 춘추향(春秋享)을 올리던 곳으로 자하산 남록 향양(紫霞山 南麓 向陽)한 비탈에 청향로회(靑香老檜)가 백년(百年)의 상설(霜雪)을 무릅쓰고 울연(蔚然)히 둘러섰고 와구(瓦丘)와 서림(西林)이 샛바람을 막아 한결 아늑한 자리에 천년(千年)의 이끼가 덮인 창연(蒼然)한 고가(古家)는 뜻있는 행객(行客)의 금회(襟懷)를 여미게 한다.
선조(先祖)께서는 1539年 중종 기해 교남고사 송은선생(中宗 己亥 嶠南高士 松隱先生)의 증손(曾孫)으로 출생(出生)하시니 천성(天性)이 자인 관후(慈仁 寬厚)하시고 일찌기 가학(家學)에 유렴(濡染)되었다.
22세시(歲時)에는 존고종숙(尊姑從叔)인 겸암 유선생 운룡(謙菴 柳先生 雲龍)과 더불어 계문(溪門)에 부급(負槃)하니 선생(先生)께서 손수 무이 관선재시(武夷 觀善齋詩, 부급하방래 금조차동석 일용무여사 상간구노력(負槃何方來 今朝此同席 日用無餘事 相看俱努力))를 써서 내리시고 군능유오차의(君能喩吾此意)하심에 선조(先祖)께서는 가슴 깊이 새겨들은 후(後), 과업(科業)의 뜻을 버리고 위기(爲己)의 학문(學問)에 전심(專心)하셨다. 동문 성재 금선생 난수, 간재 이선생 덕홍(同門 惺齋 琴先生 蘭秀, 艮齋 李先生 德弘)과 같이 때로는 선생(先生)을 모시고 청량산 연대사(淸敭山 蓮臺寺)와 만월암(滿月菴), 월란암(月瀾菴)을 내왕(來往)하며 십재청익(十載請益)으로 15回에 亘한 문답(問答)을 도산전서(陶山全書)에 남겨 탁연(卓然)히 고제(高弟)가 되었으며 임란(壬亂)을 당(當)하여는 향사림(鄕士林)의 추대(推戴)로 의성정제장(義城整齊將)이 되어 활약(活躍)하시고 휼민시혜(恤民施惠)의 자성(慈性)은 향방(鄕邦)에 알려져 원근(遠近)의 기민(飢民)들이 운집(雲集)하였다고 행장(行狀)에 기록(記錄)되었다. 만년(晩年)에는 사훈(師訓)인 신언행(愼言行), 근독서(勤讀書), 무농상(務農桑)을 좌우명(左右銘)으로 삼고 생활(生活)하시다가 1601년 신축(辛丑) 63세로 천수(天壽)를 다 하셨다. 차(嗟)흡다!
오늘날 내외(內外) 운잉(雲仍)의 번연(繁衍)함이 모두가 선조(先祖)의 종덕여음(種德餘蔭)이리라. 아! 선조(先祖)가 역책(易甑)하신지 146년이 지난 1747년 정묘(丁卯)에 선생(先生)의 고산경행(高山景行)의 참뜻을 존모(尊慕)하여 재사(齋舍)를 세우고 기묘(己卯)에는 묘우(廟宇)가 완성(完成)되어 사림(士林)의 공의(公議)로 봉안절차(奉安節次)를 정(定)하고 후산정사(後山精舍)라 칭(稱)하였다. 계사(癸巳)에는 주사(廚舍)를 짓고 을미(乙未)에는 원장(垣墻)을 설치(設置)하여 그 해 12월 12일 에 사림(士林)과 내외 자손(內外 子孫)이 모인 가운데 위패(位牌)를 봉안(奉安)하고 100여년간 춘추향화(春秋香火)를 올리다가 1868년 무진(戊辰) 국령(國令)에 의해 묘우(廟宇)는 헐려 유지(遺趾)만 남고 정사(精舍)는 현존(現存)하니 후손(後孫)들의 개연추모(慨然追慕)의 감회(感懷)가 무궁(無窮)하다. 어느때 복설(復設)이 있기를 바라고 누변(累變)하는 창상(滄桑)과 작금(昨今)을 달리하는 세태(世態)에 전후사(前後事)를 징(徵)하고자 선조(先祖)의 실기(實記)를 상고(詳考)하여 전말(顚末)을 약기(略記)한다.
서기(西紀) 1980년(庚申) 모춘절(暮春節)
중수기(重修記)
소주북계(韶州北界)에 영가(永嘉)와 상접(相接)한 사진고리(沙眞故里)는 퇴도고제(退陶高弟)요 관선증시(觀善贈詩)로 선생(先生)의 심허(心許)를 받은 선조(先祖) 만취당(晩翠堂) 선생(先生)의 선세원향(先世原鄕)으로 동서수리(東西數里)가 연통(連通)하고 남북(南北) 또한 광활(廣闊)하며 전토(田土)가 기름져서 삼남가거(三南可居)의 낙지(樂地)로 향당(鄕黨)에 칭문(稱聞)된다. 여기 촌간(村間)에 용립(聳立)한 만취당(晩翠堂)은 선조(先祖)께서 낙선호의(樂善好義)하고 서수도덕(棲守道德)의 뜻을 기르던 곳으로 43세 되시던 1582년 선조(宣祖) 임오춘(壬午春)에 시역(始役)하고 그 해 6월에 자상(慈喪)으로 중단(中斷)하였다가 상기(喪期)가 끝난 갑신년(甲申年) 10월에 완역(完役)하여 만취(晩翠)라 자편(自扁)함은 만년송(萬年松)의 무궁(無窮)과 증조고(曾祖考) 송은선생(松隱先生)의 송정시(松亭詩)를 흠숭(欽崇)한 연유(緣由)일 것이다. 대개(大蓋) 사물(事物)의 흥괴(興壞)는 세간(世間)의 상사(常事)인데 임란(壬亂)을 비롯한 몇번의 전란(戰亂)과 거듭된 상벽(桑碧)의 풍상부식(風霜腐蝕)에도 원형(原形)이 상존(尙存)함은 시덕(施德)하고 감덕(感德)을 선행(善行)하고 요공(邀功)을 바라지 않는 선조(先祖)의 음혜여운(陰惠餘運)이요 그간(間)의 수보(修補)는 확연(確然)하지 못하다.
상고(詳考)하건데 당성지후(堂成之後) 127년이 지난 1711년 숙종(肅宗) 신묘(辛卯)에 동남방(東南方)의 수십연(數十椽)을 갈았으며 16년 후(後)인 영조(英祖) 정미(丁未)에 동북편(東北便)의 침식지실(寢息之室) 삼가이간(三架二間)을 증축(增築)하여 복재(復齋)라 게판(揭板)하고 월(越)37년인 영조(英祖) 갑오(甲午)에 개동이와(改棟易瓦)와 동시(同時) 서편(西便)에 작은 방(房)을 꾸며 생활(生活)의 취편(取便)에 공(貢)하였다.
1789년 영조(英祖) 기유(己酉)에는 서남(西南) 추녀의 틈난 자리에 철정(鐵釘)으로 조이고 서주(西柱)가 썩고 좀먹어 지탱(支灐)할 수 없으므로 개체(改替)할 때 문력(門力)을 기울여 분공동사(分功董事)로 도리와 편액(扁額)을 새롭게 하였으며 종택(宗宅 내실(內室)까지 병수(疊修)하는 역사(役事)가 있었고 그 후(後) 180여년간의 치수(治修)는 징(徵)할 수 없다.
1971년 신해(辛亥) 모춘(暮春)에 김덕엽지사(金德燁知事)의 심방(尋訪)으로 60만원의 보조(補助)를 받아 도색번와(塗色暢瓦)로 새롭게 단장(丹粧)하였으며 1980년에는 문재(門財)로 원장(垣墻)을 설치(設置)하고 1983년에 유형문화재(有形文化財) 169호로 지정(指定)된 후(後)에 본군(本郡) 김희윤(金熙潤) 군수(郡守)를 비롯한 약간명(若干名)을 초청(招請)하고 자축(自祝)하였다.
1986년 병인(丙寅)에 2,500만원의 예산(豫算)으로 문화재(文化財) 보수공사(補修工事)를 시공(施工)함에 동남수연(東南數椽)을 갈아넣고 개와단청(改瓦丹靑)한 후에 서남편(西南便) 기둥 사이의 공허(空虛)에 구제 문창(舊制 門窓)을 달았으며 출입계단(出入階段)에 치석(治石)을 설치(設置)하여 현재(現在)에 이른다.
절문(竊聞)컨대 당(堂)의 창건(創建)을 전후(前後)하여 이온계(李溫溪), 류서애(柳西厓), 장여헌(張旅軒) 선생(先生)을 비롯한 제선덕(諸先德)이 등임(登臨)이 아시면계(衿詩勉戒)하고 감개배회(感慨徘徊) 하셨으니 만생(晩生) 묘예(苗裔)의 억석지회(憶昔之懷)가 무궁(無窮)하다. 이제 성상무천(星霜貿遷)하고 풍이세변(風異世變)한 오늘날 문부로(門父老)께서 추선상후(追先尙後)의 미적(美蹟)을 내예(來裔)에 전(傳)하고자 기문(記文)을 촉(囑)하기에 선조(先祖) 천사공(川沙公)이 찬(撰)한 기문(記文)을 상심(詳審)하여 위와 같이 기(記)를 한다.
1986년 병인(丙寅) 양부절(陽復節)
중수기(重修記)
아름다운 강산(江山)과 누대(樓臺)는 승평(昇平)한 세월(歲月)에 청한(淸閑)으로 구지(求志)하는 선비들이 정양(靜養)하던 곳이다. 시사(時事)의 폐흥(廢興)과 문운성쇠(文運盛衰)에 따라 음풍롱월(吟風弄月)의 한가로운 공청으로 이바지하였으나 무상(無常)한 천변(天變)과 현회(顯晦)가 거듭됨은 인세(人世)의 상사(常事)이다. 대령(大嶺)의 남(南)쪽에 문헌(文獻)의 마을로 알려진 사진리(沙眞里)의 만취당(晩翠堂)은 거금(距今) 415년(年) 전(前)인 1582년(年) 선조 임오(宣祖 壬午)에 만취당선생(晩翠堂先生)이 시역창건(始役創建)하고 100여년(餘年)동안 수보(修補)없이 지내다고 숙종(肅宗) 신묘년(辛卯年)에 처음으로 치수(治修)하고 1986년(年) 병인(丙寅)의 문화재(文化財) 보수공사까지 무릇 일곱차례나 중수(重修)하였다. 이 당(堂)은 4세기(世紀)에 15년(年)을 더한 유구(悠久)한 성상(星霜)의 비바람에 씻겼지만 창연(蒼然)한 고색(古色)으로 퇴락(頹落)하였을 뿐이요, 그 굳은 주초(柱礎)와 늙은 기둥은 오히려 당시의 손때를 간직한 채 무양(無恙)하다. 이는 궁달환희(窮達歡喜)에 사색불변하고 보시광제(普施廣濟)한 선조(先祖)의 음덕(陰德)과 창업(創業)보다 어려운 열선조(列先祖)의 수성(守成)이 오늘을 있게 하였으니 실(實)로 만년송(萬年松)과 더불어 오가(吾家)의 장물(長物)이다. 1996년(年) 병자(丙子) 초여름의 어느날 문화재(文化財) 보수공사비 7,000만원과 공사의 개요(槪要) 및 감역(監役) 통지서가 군재(郡宰)로 부터 응진(應振) 성수씨(聲秀氏)에게 전해졌다. 곧 문회(門會)를 열고 설계상(設計上)에 동파와(凍破瓦) 위주의 반수개체(半數改替)를 전면개체(全面改替)코자 하였으나 문력부족(門力不足)으로 뜻과 같지 못하였다. 이에 감역(監役)의 임사(任司) 성수씨(聲秀氏)가 일비(日非)한 세사(世事)에 불원간(不遠間)의 개와(改瓦)를 예방(豫防)하고자 개연(慨然)한 마음으로 부족분(不足分) 600만원을 독당(獨當)하고 전수개와(全數改瓦)로 공정(工程)을 추진하였다. 금회시공(今回施工)은 기와의 전면개체(全面改替)와 앙토의 보수도색, 동발의 부식을 막고자 동서(東西)에 배수로를 설치하였으며 뒷편의 공간(空間)을 한자 가량 낮추어서 저습(低濕)을 예방했다. 서북(西北)편 출입문을 안으로 3척(尺)을 옮겨 세워 손괴(損壞)를 피하였고 마루의 오르내림에 편리한 디딤돌과 동북행단(東北杏壇)에 자연암(自然巖)의 설치로 조형(造形)을 이루었다.
공사가 끝날 무렵 말끔이 정리된 대청에 올라서서 계지술선(繼志述先)의 미사(美事)를 회상(回想)하고 사업비(事業費)를 지원(支援)한 당국과 와대부족분(瓦代不足分)을 전담(專擔)한 예손(裔孫)의 단성(丹誠)에 머리를 숙이고 삼가 시말(始末)을 밝혀 기문(記文)을 대신한다.
1996年 병자(丙子) 중추절(仲秋節)
<후송재(後松齋) 중수기(重修記)>
문소(聞韶) 고을의 북쪽 자하산(紫霞山) 남록 기수(沂水)의 북안에 날개가 뻗친 듯한 당우(堂宇)가 있으니 가로되 후송재(後松齋)인데 옛날의 후송재선생(後松齋先生) 김공(金公)을 우러러 추모하던 곳이다.
삼가 살피건데 공(公)은 자성(姿性)이 도(道)에 가깝고 기절(氣節)은 월등하게 뛰어났으며 송은옹(松隱翁)의 시례지훈(詩禮之訓)을 이어받고 또한 백중형(伯仲兄)인 만취직장공(晩翠直長公)과 더불어 훈창(塤唱) 지화(拳和) 형제상화(兄弟相和)하며 경서(經書)의 연구(硏究)와 문장(文章)은 이로부터 대(代)를 이어 향국(鄕國)에 울연(蔚然)하니 오히려 한결같이 순수(純粹)하여 내면을 다스리는 공부(工夫)에 부지런히 힘썼기 때문이리라.
항상 퇴계선생(退溪先生)의 강석(講席)에 나아가지 못하였음을 한(恨)스러워 하고 서원(書院)의 상덕사(尙德祠)에 알묘(謁廟)한 후 시(詩)로써 높이 추모하였으며 또한 선생의 글 가운데 예(禮)에 대한 여러가지 논설(論說)의 자료를 분류(分類)하고 편집해서 이책(二冊)을 모으니 곧 계문예설(溪門禮說)이며 대학(大學)의 도(圖)와 가계(家誡)의 팔조(八條)를 지으시니 모두가 실제로 학문(學問)을 실천하지 않음이 없었다.
때인즉 세대가 멀지 않아 선생(先生)의 남은 은택(恩澤)이 끊어지지 않았고 교유(交遊) 또한 친(親)히 배우거나 사숙(私淑)한 현사(賢士)가 아님이 없었으니 그 학문의 길이 바르고 공부(工夫)가 깊었음은 이로 미루어 가히 알지로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을 당해서는 팔도(八道)가 놀라서 움직이고 임금이 피란길에 오를 때 중씨(仲氏) 직장공(直長公)과 더불어 소매를 떨치고 의병(義兵)을 일으켜 망우당 곽공(忘憂堂 郭公)을 따라 화왕산(火旺山)에 들어가서 피를 머금고 와신(臥薪)을 불태우며 가로되 적(敵)은 섬멸하지 못하고 섶은 이와 같이 있음을 한탄하면서 드디어 한 수 읊으니 E피를 머금고 맹서하니 마음은 칼날과 같고 와신(臥薪)을 불태워도 초지(焦志)는 재가 되지 않으리. F 이 시(詩)로써 병사의 용감한 생각을 분발 고무시켰으며 군무(軍務)의 획찬(劃贊)에 도움을 주어 마침내 산하(山河) 보장(保障)의 공(功)을 이루었다.
란(亂)이 평정된 뒤에 미세(微細)한 공과 수고로움이 훈록(勳錄)에 참여하지 못하였으나 공(公)은 응연(凝然)히 수분(守分)하고 말하지 않으며 다만 창의사(倡義事)에 의병(義兵)이 귀(貴)하다고 한 바는 소욕(所慾)이 없고 나라 위하는 의(義)에서 나왔기 때문이며 진실로 작은 공적도 바라지 않았을 뿐 아니라 마음을 편하게 갖지 않음이 어찌 부끄럽지 아니할까. 이로써 공(功)을 사양(辭讓)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숨어서 정양(靜養)하고 후진을 가르쳐서 성취함을 낙(樂)으로 삼아 감암(嵌巖)에서 여생을 마쳤으나 후회(後悔)하지 않았고 염퇴(恬退)한 지조와 겸공(謙恭)하는 덕망이 또한 고사(高士)와 같았다.
집가에 송은옹(松隱翁)이 손수 심은 만년송(萬年松)이 있는데 그 옆에 두어간 집을 짓고 후송(後松)이라 편액(扁額)하니 이것은 선조(先祖)를 사모하는 정신(精神)과 세한연후(歲寒然後)에 지송백지후조(知松栢之後凋)의 뜻을 취(取)함이니라.
이제 대(代)를 지나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병신(丙申, 1896년 義兵), 경인(庚寅, 1950년 6·25)의 두 번의 병화(兵火)로 당실(堂室)의 자리가 텅비어 있었고 또한 흥폐(興廢)가 거듭되었으나 옛날의 규모(規模)와 같지 못하여 임시(臨時)로 수보(修補)하였으나 마침내 소략(疎略)함을 면(免)하지 못한지라 이에 후손(後孫) 여러분이 뜻을 모아 회복(回復)을 도모하여 옛집보다 조금 낮게 종택(宗宅) 동쪽에 중건(重建)하니 무릇 사간(四間) 겹집으로 중간은 마루요 양옆은 방이며 옛날의 재명(齋名)을 그대로 살렸다. 정원(庭園)과 화석(花石)이 의구(依舊)하니 이는 옛 어른들이 끼친 향훈(香薰)이며 문창(門窓)과 난간(欄干)은 구형(舊型)을 살렸으니 석일(昔日)의 양상(樣狀)이 완연(宛然)하다. 이에 사모(思慕)하고 추앙(追仰)함이 어찌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에당연한 바 아니리요, 공정(工程)이 끝날 무렵 주손(胄孫) 도수보(道秀甫)가 나에게 기문(記文)을 청(請)하니 돌아보건데 후생(後生)의 작은 식견(識見)으로 어찌 책임을 감당하리요? 여러번 사양해도 거두지 못하고 감(敢)히 참망(僭忘)스럽게 중건(重建) 전말(顚末)을 서술하고 심중(心中)의 느낀 바를 부쳐서 우모 경앙(寓慕 景仰)의 정성으로 이와 같이 이른다.
세계유(歲癸酉) 1993년 수요절(秀半節) 4월
진성(眞城) 이원윤(李源胤) 근기(謹記)
<양진당기(養眞堂記)>
문소(聞韶)의 치북일사(治北一舍)의 허(許)에 노수장림(老樹長林)이 바람을 막아 섰고 천감토비(泉甘土肥)하며 지광인다(地廣人多)한 대촌(大村)이 있으니 명왈(名曰) 사촌(沙村)이다. 촌중(村中)에 우리 종문(宗門)의 구심처(求心處)인 종택(宗宅)이요, 그 동(東)편 백보(百步)의 자리에 양진당(養眞堂)이 있으니 선조(先祖) 증사복사정(贈司僕寺正) 휘(諱) 상린(尙璘) 부군(府君)의 장수유식지처(藏修遊息之處)이다. 부군(府君)은 송만(松晩)의 정훈(庭訓)을 받은 직장공(直長公)의 오자중(五子中) 다섯째로 1616년(年) 광해 병진(光海 丙辰)에 태어나시니 용모(容貌)가 옥윤(玉潤)하고 기우(氣宇)가 헌활(軒豁)하며 학문(學問)을 익혀 향시(鄕試)에 합격(合格)한 바 있으나 과장(科場)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대개 사람들은 풍절(風節)이 높고 학문(學問)이 깊고 사문(師門)의 연원전수(淵源傳受)를 숭상(崇尙)하였으나 부군(府君)께서는 호고이민(好古而敏)하고 치심수신(治心修身)으로 성효독지(誠孝篤至)하고 백중제씨(伯仲諸氏)와 이이화락(怡怡和樂)으로 생활(生活)하며 지(知)보다 행(行)을 앞세워 숭선교자(崇先敎子)에 힘쓰고 중시조(中始祖) 충렬공(忠烈公)의 묘전(墓田)을 설치(設置)함에 원근(遠近) 종족(宗族)에 통의(通議)하여 수합두곡(收合斗穀)을 근간(根幹)으로 식전매답(息錢買沓)하여 매세(每歲) 성전(省奠)에 임기(臨期) 취판(取辦)을 면(免)하게 하니 인향사부(隣鄕士夫)들이 이로써 법(法)을 삼았으며 1670년 현종(顯宗) 11년(年)에는 본현(本縣) 명후(名侯) 이당규(李堂揆)가 교궁(校宮)의 전우(殿宇)를 중건(重建)할 제 감사(監司) 민시중(閔蓍重)을 통(通)하여 조정(朝庭)에 상계(上啓)하니 가납(嘉納)하시고 왕명(王命)으로 영건(營建)함에 시종(始終) 감역(監役)하여 모선상후(慕先尙後)에 공헌(貢獻)하였다. 경술(庚戌) 신해(辛亥) 양년(兩年)의 팔도(八道) 기근시(飢饉時)에는 구제책(救濟策)을 논의(論議)함에 일도다사(一道多士)가 부군(府君)을 소수(乞首)로 추대(推戴)하였고 1673년(年) 계축(癸丑)에는 조가(朝家)에서 지신청결(持身淸潔)하고 유심세무(留心世務)하며 처사명민(處事明敏)한 선비의 추천령(推薦令)이 내렸을 때 본향(本鄕)의 수천(首薦)으로 천거(薦擧)되니 이관징(李觀徵) 방백(方伯)이 기뻐하고 내가 항상(恒常) 기리는 선비라고 말하였으며 이원정(李元楨) 판서(判書)의 추천(推薦)으로 서령(暑令)에 임용(任用)코자 하였으나 글로서 사양(辭讓)하고 봉선추원(奉先追遠)의 예(禮)를 자질(子姪)에게 가르치며 흔화불염(藤和不厭)으로 정양(靜養)하면서 소당(小堂)을 짓고 이양천진(以養天眞)의 뜻을 살려 양진당(養眞堂)이라 편액(扁額)하니 지금의 현액(懸額)이다.
당(堂)의 창건(炷建)은 현종년간(顯宗年間)이며 장자(長子) 사주공(沙洲公)과 중자(仲子) 부사공(府使公)의 교유(交遊)로 인(因)한 하당(荷塘) 권두인 창설(權斗寅 蒼雪) 권두경 경옥재(權斗經 景玉齋) 이보(李囑) 대사간(大司諫) 남천(南天) 한경주부윤(漢慶州府尹) 남천택(南天澤) 등(等)의 명환(名宦)과 학자(學者)들이 내왕(來往)이 잦았다. 그 후(後) 1950년(年) 경인(庚寅) 신춘(新春)에 성상(星霜)의 누전(屢轉)으로 풍우(風雨)에 씻긴 옛 집을 주손(胄孫) 호기씨(浩驥氏)와 후손(後孫)들의 성력(誠力)으로 옛 규모(規模) 그대로 중건(重建)하니 곧 경인병란(庚寅兵亂)의 해다 오호(嗚呼)라 부군(府君)이 몰(沒)하신지 318년(年)이 지난 오늘 기송무징(杞宋無徵)을 한(恨)스러워하며 사주공(沙洲公)이 찬(撰)한 부군(府君)의 가장(家狀)과 본향(本鄕) 향교지(鄕校誌)를 근거(根據)로 전말(顚末)을 밝히면서 삼가 손을 씻고 기록(記錄)한다.
1993년(年) 계유(癸酉) 신춘(新春)
<입향후대소등과(入鄕後大小登科) 및 문학저세자략록(文學著世者略錄)>
■ 김 자 첨(金子瞻) : 1369년 ~ 1454년
충렬공(忠烈公) 김방경(金方慶)의 5세손(世孫)으로 사촌(沙村)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입향조(入鄕祖)이시다. 조정(朝庭)에서는 전조명신(前朝名臣) 후손(後孫)의 예우로 감목관(監牧官) 벼슬을 내렸으나 사양하고 후손(後孫)의 세거(世居) 기업(基業)을 정리하고 86세(歲)의 향수(享壽)를 누렸다.
■김 효 온(金孝溫) : 1412년 ~ ?
자첨(子瞻)의 아들이며 1434년 세종(世宗) 갑인(甲寅)에 생원(生員)을 거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직(司直)의 벼슬을 하고 향리에 은거했다. 문과(文科) 동방(同榜)인 박팽년(朴彭年), 최항(崔恒)과 친교(親交)가 있었다.
■김 극 해(金克諧) : 1440년 ~ ?
효온(孝溫)의 아들이며 1459년 세조(世祖) 기묘(己卯)에 생원(生員)이 되고 문과(文科)에 올라 북평사(北評事)와 지례현감(知禮縣監)을 역임했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세상에 알려졌다.
■김 광 수(金光粹) : 1468년 ~ 1563년
극해(克諧)의 아들이며 호(號)가 송은(松隱)이다. 1501년 연산(燕山) 신유(辛酉)에 진사(進士)가 되고 태학(太學)에서 연수중(硏修中) 연산정란을 예견하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향리에 내려와 남산록(南山麓) 소담상(小潭上)에 영귀정(詠歸亭)을 짓고 시가(詩歌)를 읊으며 청빈하게 생애를 보냈다. 사후(死後)에 장대서원(藏待書院)에 제향(祭享)되었으며 송은집(松隱集)과 경심잠(警心箴)이 세상에 전한다. 한편 임란(壬亂)에 출상입상(出將入相)으로 산하(山河) 재조(再造)의 위업(偉業)을 남긴 유성룡(柳成龍)은 외손(外孫)이며 증손(曾孫)인 사원(士元), 사형(士亨), 사정(士貞)도 각각 창의하여 국란에 유공하고 외증손(外曾孫) 김치중(金致中)은 의병장(義兵將)으로 순절(殉節)했다. 영귀정(詠歸亭)은 문화재(文化財) 234호로 지정(指定)되었다.
■ 김 사 원(金士元) : 1539년 ~ 1601년
광수(光粹)의 증손(曾孫)으로 호(號)가 만취당(晩翠堂)이다. 퇴계(退溪)의 문인(門人)으로 월란정사(月瀾精舍)에서 수업(修業)하였으며 덕량(德量)이 심후(深厚)했다. 임란(壬亂)에 창의하여 정제장(整齊將)이 되었으며 난후(亂後)에는 기민(飢民)을 구휼하여 김씨의창(金氏義倉)으로 알려졌다. 사후(死後)에 후산정사(後山精舍)에 제향(祭享)하였으며 실기(實記)가 전(傳)한다.
■ 김 사 형(金士亨) : 1541년 ~ ?
호(號)는 독수헌(獨秀軒)이며 사원(士元)의 동생이다. 유일재(惟一齋), 김언기(金彦璣)의 문인(門人)이며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직장(直長)을 역임하였다. 임란(壬亂)에는 동생 사정(士貞)과 더불어 창의하여 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협찬하고 유공하였다. 창의록(倡義錄)에 실려있다.
■ 김 사 정(金士貞) : 1578년 ~ 1641년
호(號)가 후송재(後松齋)로 사원(士元)의 동생이다. 어려서 재예(才藝)와 총명이 있었으나 연미급(年未及)으로 계문(溪門)에 나아가지 못하고 사숙(私淑)하였다. 중형(仲兄)인 사형(士亨)과 함께 곽재우(郭再祐) 의진(義陣)에서 공을 세웠다. 사후(死後)에 사헌부 지평(司憲府 持平)에 추증(追贈)되고 도담사(道潭祠)에 제향되었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김 회(金 淮) : 1578년 ~ 1641년
사정(士貞)의 아들이며 호(號)는 경암(敬菴)이다. 26세(歲)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612년 광해 임자(光海 壬子)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했다. 서장관(書狀官)으로 연경(燕京)에 다녀왔으며 형조정랑(刑曹正郞)을 역임하였다. 만년(晩年)에는 향리에서 수덕(修德)하고 문집(文集)이 있다.
■ 김 상 원(金尙瑗) : 1598년 ~ 1687년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남애(南厓)이다. 한강(寒岡)과 여헌(旅軒)의 문인(門人)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독실이 받아들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굴욕을 한스러워하며 대명통기(大明統紀)를 숭상하니 세인(世人)들은 숭정처사(崇禎處士)라 일컬었다.
■ 김 상 기(金尙琦) : 1602년 ~ 1670년
상원(尙瑗)의 동생이고 호(號)는 사오(沙塢)이다.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으며 문학행의(文學行誼)와 시문(詩文)에 능하여 영하(嶺下) 사우(士友)와 교유(交遊)하며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상 유(金尙瑜) : 1605년 ~ 1678년
호(號)는 옥계(玉溪)이고 회(淮)의 아들이다. 문행(文行)이 있었으나 과장(科場)에는 나아가지 않았으며 후학을 계도하였고 장사랑(將仕郞)을 역임하였다.
■ 김 상 린(金尙璘) : 1616년 ~ 1675년
사원(士元)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양진당(養眞堂)이다. 숭선효우(崇先孝友)로 이름이 높았다. 만년(晩年)에는 양진당(養眞堂)을 세우고 학문(學問)을 연수(硏修)했다. 경술(庚戌) 신해(辛亥)의 팔도기근시(八道飢饉時)에는 영남(嶺南) 소수(疏首)로 추대(推戴)되었으며 사복사정(司僕寺正)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 김 양 좌(金良佐) : 1636년 ~ 1708년
상린(尙璘)의 아들이고 호(號)는 사주(沙洲)이다. 1681년 숙종(肅宗) 신유(辛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권두경(權斗經), 권두인(權斗寅) 등과 교유(交遊)가 깊었으며 문집(文集) 4권이 있다.
■ 김 성 좌(金聖佐) : 1639년 ~ 1708년
양좌(良佐)의 동생이고 호(號)는 송리(松里)이다. 1663년 현종(顯宗) 계묘(癸卯)에 문과(文科) 급제(及第)하여 여러 고을을 역임하고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재임중(在任中) 청백리(淸白吏)로 이름이 있었으며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의 문인(門人)이 되었다. 만년(晩年)에는 빙계계곡(氷溪溪谷)에 세심정(洗心亭)을 짓고 여생을 보냈다.
■ 김 이 달(金履達) : 1656년 ~ 1736년
상기(尙琦)의 손자(孫子)이며 호(號)는 덕은(德隱)이다. 1696년 숙종(肅宗) 병자(丙子)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문장(文章)에 능하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이 중(金履中) : 1657년 ~ 1731년
상유(尙瑜)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북오(北塢)이다. 1693년 숙종(肅宗) 계유(癸酉)에 무과(武科)에 올라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 무신(戊申)에 의병장(義兵將)으로 활동(活動)하였다.
■ 김 이 규(金履規) : 1658년 ~ 1732년
자(字)는 자범(子範)이며 양재(良佐)의 아들이다. 1689년 숙종(肅宗) 기사(己巳)에 진사(進士)가 되고 문사(文詞)가 뛰어났다.
■ 김 이 구(金履矩) : 1662년 ~ 1722년
양좌(良佐)의 아들이며 호(號)는 정락재(靜樂齋)이다. 일찍이 학문(學問)과 시례(詩禮)에 밝아 향당에 알려졌다. 유집(遺集)이 있으며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빙청옥결(氷淸玉潔)이라고 칭찬하였으며 호조참판(戶曹參判)의 증직(贈職)이 내렸다.
■ 김 도 응(金道應) : 1685년 ~ ?
사원(士元)의 5세손(世孫)이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회인현감(懷仁縣監)을 역임하였다.
■ 김 성(金 聲) : 1686년 ~ 1760년
상유(尙瑜)의 증손(曾孫)이고 호(號)는 성고(省皐)이다. 문과(文科)에 등과(登科)하여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초휘(初諱)는 성응(聲應)이였으며 강경시(講經時) 어명(御命)으로 개명(改名)하여 성(聲)이 되었다.
■ 김 오 응(金五應) : 1699년 ~ 1749년
회(淮)의 현손(玄孫)이며 호(號)는 구은(龜隱)이다. 경사(經史)에 정통하고 문사(文詞)와 필법(筆法)이 뛰어났다.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하고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치적(治績)을 남겼다. 무신란(戊申亂)으로 영남(嶺南) 피무(被誣) 당시 재위(再爲) 소수(疏首)로서 전(全) 영남(嶺南)이 신원(伸輔)하였다.
■ 김 추 응(金秋應) : 1700년 ~ 1788년
상원(尙瑗)의 증손(曾孫)이다. 1717년 숙종(肅宗) 정유(丁酉)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재 응(金載應) : 1704년 ~ 1758년
상인(尙璘)의 증손(曾孫)이고 호(號)는 소암(素巖)이다. 눌은(訥隱) 이광정(李光庭)에게 배우고 경사(經史)에 밝으며 문장(文章)이 온아(溫雅)하였다. 유집(遺集)과 사례집사(四禮集辭)가 있다.
■ 김 성 응(金誠應) : 생몰미상
사원(士元)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서파(西坡)이다. 족종(族從) 종덕(宗德)에게 배우고 생원시(生員試)에 입방(入榜)하였다.
■ 김 종 덕(金宗德) : 1724년 ~ 1797년
상인(尙璘)의 현손(玄孫)이며 호(號)는 천사(川沙)이다. 일찍이 가학(家學)을 익히고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배웠다. 1753년 영조(英祖) 계유(癸酉)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合格)하고 1779년에는 학행(學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의금부도사(義禁莩事)가 되었다. 경사(經史)와 이학(理學)을 궁구(窮究)하여 문하(門下)에 많은 제자(弟子)를 배출(輩出)하였으며 퇴계(退溪學統)의 맥(脈)을 이었다. 저서(著書)로는 문집(文集) 10책(冊)과 성학정로(聖學正路), 성학입문(聖學入門), 공문일통(孔門一統), 석학정적(釋學正賊), 정본(政本), 고증(考證), 초려문답(草廬問答), 부록(附錄)을 남겼으며 동몽교재(童蒙敎材)인 입본(立本)도 있다. 1992년에는 계명한문학연구회(啓明漢文學硏究會)에서 연구자료(硏究資料) 총서 3집(輯)으로 전집(全集)이 간행(刊行)되었다.
■ 김 종 필(金宗泌) : 1730년 ~ 1789년
오응(五應)의 아들이고 호(號)는 반농(半聾)이다. 성도(性度)가 청아(淸雅)하고 문장(文章)이 뛰어났으며 문집(文集)이 있다.
■ 김 종 경(金宗敬) : 1732년 ~ 1785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구재(苟齋)이다. 재예(才藝)와 총명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이상정(李象靖)의 제자(弟子)가 되었다. 1774년 영조(英祖) 갑오(甲午)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이 되었고 스승의 지시로 심경강록간보(心經講錄刊補)의 찬술에 힘썼으며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종 구(金宗九) : 1732년 ~ 1778년
상기(尙琦)의 현손(玄孫)이고 호(號)는 운암(云菴)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文人)으로 간담청아(簡談淸雅)하였으며 정조조(正祖朝)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여 전적(典籍)이 되었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종 헌(金宗憲) : 1735년 ~ 1805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역포(歟圃)이다. 1795년 정조(正祖) 을묘(乙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경학(經學)이 높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종 신(金宗臣) : 1733년 ~ 1813년
종덕(宗德)의 종제(從弟)이고 호(號)는 경재(絅齋)이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정조조(正祖朝)에 진사(進士)가 되었고 유고(遺稿)가 있다.
■ 김 종 국(金宗國) : 1739년 ~ 1801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경보(景輔)이다. 1768년 영조(英祖) 무자(戊子)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종 발(金宗發) : 1740년 ~ 1812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용연(容淵)이다. 1777년 정조(正祖) 정유(丁酉)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을 역임했다.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으로 도학(道學)이 고명(高明)했다. 문집(文集) 4권(卷)과 유가요람(儒家要覽), 예서(禮書) 등(等)이 세상(世上)에 전(傳)한다.
■ 김 종 섭(金宗燮) : 1743년 ~ 1791년
종덕(宗德)의 동생이고 호(號)는 제암(濟菴)이다. 어릴적부터 총명이 뛰어났으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다. 1768년 영조(英祖) 무자(戊子)에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학행(學行)이 높았으며 문집(文集) 4권(卷)이 있다.
■ 김 종 식(金宗軾) : 1745년 ~ 1816년
회(淮)의 5세손(世孫)이며 호(號)는 가은(稼隱)이다. 1777년 정조(正祖) 정유(丁酉)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학문이 깊고 사우간(士友間)에 중망이 있었다.
■ 김 종 준(金宗駿) : 1747년 ~ 1821년
종덕(宗德)의 종제이고 호(號)는 근곡(芹谷)이며 이상정(李象靖)의 문인(門人)이다. 1789년 정조(正祖) 기유(己酉)에 생원(生員)이 되고 필법(筆法)이 능(能)했으며 유고(遺稿) 2권(卷)이 있다.
■ 김 형 진(金馨進) : 1741년 ~ 1807년
사정(士貞)의 8세손(世孫)이고 호(號)는 괴음당(槐陰堂)이다. 족대부(族大父) 재응(載應)에게 배우고 경학(經學)이 깊었다. 중용도(中庸圖)와 강목감작편(綱目感作篇)이 있으며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 김 양 직(金養直) : 1742년 ~ 1774년
사원(士元)의 8세손(世孫)이고 자(字)는 덕여(德汝)이다. 1771년 영조(英祖) 신묘(辛卯)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청 진(金淸進) : 1757년 ~ 1837년
사원(士元)의 7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칠송(七松)이다. 족숙(族叔) 종덕(宗德)에게 배우고 경학(經學)이 높았다. 1801년 순조(純祖) 신유(辛酉)에 생원(生員)이 되고 유집(遺集)이 있다.
■ 김 경 진(金景進) : 1767년 ~ ?
회(淮)의 7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절계(折桂)이다. 1809년 순조(純祖) 기사(己巳)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 김 성 진(金誠進) : 1768년 ~ 1837년
상기(尙琦)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서오(西塢)이다. 1814년 순조(純祖) 갑술(甲戌)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족부(族父) 종덕(宗德)을 사사(師事)하였으며 독학역행(篤學力行)으로 사우간(士友間)에 중망이 있었다.
■ 김 양 휴(金養休) : 1777년 ~ 1854년
양좌(良佐)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율원(栗園)이다. 일찍이 족대부(族大父) 종덕(宗德)과 외왕고(外王考) 이종수(李宗洙)를 사사(師事)하고 만년(晩年)에는 남한조(南漢朝)에게 배워 학문(學問)이 높았다.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양 경(金養絅) : 1784년 ~ 1838년
양좌(良佐)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미언(美彦)이다. 1831년 순조(純祖) 신묘(辛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 김 양 정(金養楨) : 1785년 ~ 1847년
회(淮)의 7세손(世孫)이며 호(號)는 정암(定菴)이다. 1834년 순조(純祖) 갑오(甲午)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일찍이 정종로(鄭宗魯)를 사사(師事)하여 학문(學問)이 고명(高明)하고 후진(後進)을 지도했다. 문집(文集) 8권(卷)이 있다.
■ 김 양 식(金養植) : 1791년 ~ 1862년
양정(養楨)의 동생이고 호(號)는 지암(止菴)이다. 1831년 순조(純祖) 신묘(辛卯)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형(兄) 양정(養楨)과 더불어 독지호학(篤志好學)하고 문집(文集) 3권(卷)이 있다.
■ 김 양 징(金養徵) : 1794년 ~ 1856년
종섭(宗燮)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백암(栢菴)이다. 1849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었으며 자성이 명민하고 시집(詩集)이 있다.
■ 김 양 인(金養麟) : 1796년 ~ 1870년
종경(宗敬)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죽하(竹下)이다. 1835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고 경사(經史)에 박습하고 시집(詩集)이 있다.
■ 김 희 유(金羲裕) : 1800년 ~ 1854년
사원(士元)의 9세손(世孫)이며 호(號)는 사촌(思村)이다. 1836년 순조(純祖) 병신(丙申)에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하고 정언(正言)이 되었다. 문장(文章)과 덕망(德望)이 있었다.
■ 김 양 범(金養範) : 1802년 ~ 1879년
종발(宗發)의 손자(孫子)이고 호(號)는 만동(晩同)이다. 1844년 헌종(憲宗) 갑진(甲辰)에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兩試)에 합격(合格)했다. 왕고(王考)의 심법(心法)을 전수받아 독행호학(篤行好學)하였다. 만동서숙(晩同書塾)을 지어 문생(門生)을 기르고 유고(遺稿)가 있다.
■ 김 석 유(金奭裕) : 1805년 ~ 1868년
희유(羲裕)의 동생이고 호(號)는 기산(奇山)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사(師事)하여 경학(經學)이 높고 사우(士友)의 추중(推重)이 있었다. 문집(文集) 5권(卷)이 있다.
■ 김 기 선(金驥善) : 1806년 ~ 1883년
양식(養植)의 아들이고 호(號)는 기서(沂墅)이다. 1835년 헌종(憲宗) 을미(乙未)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학문과 덕망이 높았으며 유집(遺集) 2권(卷)이 있다.
■ 김 노 선(金魯善) : 1811년 ~ 1886년
양정(養楨)의 아들이고 호(號)는 기계(奇溪)이다. 1865년 철종(哲宗) 을축(乙丑)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을 사사(師事)하여 학행(學行)이 높았고 도천(道薦)의 물망이 있었다. 유집(遺集) 10권(卷)이 있다.
■ 김 수 익(金壽翼) : 1815년 ~ 1872년
사원(士元)의 9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운고(雲皐)이다. 1852년 철종(哲宗) 임자(壬子)에 생원(生員)이 되었다. 탁락대절(卓落大節)의 높은 기개가 있었다.
■ 김 상 종(金象鍾) : 1848년 ~ 1908년
수익(壽翼)의 아들이고 호(號)는 운산(云山)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에게 배웠다. 문장(文章)이 웅휘(雄輝)하고 행금이 독실했다. 1896년 고종(高宗) 병신(丙申)에는 의성(義城)의 의병대장(義兵大將)에 추대(推戴)되어 구성산(九成山) 전투(戰鬪)에서 많은 전과(戰果)를 올렸으나 봉산(鳳山) 전투에서 참패하고 파병조칙(破兵詔勅)에 의해 전진(戰陣)을 해산(解散)했다. 연방집(聯芳集)이 있으며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회 종(金會鍾) : 1852년 ~ 1916년
수익(壽翼)의 아들이고 호(號)는 소운(小雲)이다. 숙조 기산공 석유(叔祖 奇山公, 奭裕)의 문하에서 배우고 병신년(丙申年)에 중씨(仲氏) 운산공(云山公)을 따라 아들 호직(浩直)과 함께 백의 종군(白衣 從軍)하여 의병(義兵)의 작전(作戰) 및 보급 등을 도운 공로로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敍)받았다.
저서(著書)에는 사례간요(四禮簡要), 성조기휘 3권(聖朝紀彙 三卷), 소추유림(據臭類林) 등이 있으며 유고집이 있다.
■ 김 수 욱(金壽旭) : 1852년 ~ 1902년
종덕(宗德)의 현손(玄孫)이고 호(號)는 좌산(左山)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門下)에서 배우고 문학(文學)과 시례(詩禮)에 밝아 몸소 실천했다. 병신(丙申)에는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소모장(召募將)이 되고 전쟁에 참여했다.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수 담(金壽聃) : 1852년 ~ 1896년
양징(養渟)의 손자(孫子)이고 자(字)는 근수(謹璟)이다. 강인한 성품(性品)에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창의(倡義)하여 선봉장(先鋒將)이 되고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봉산(鳳山)전투에서 순국(殉國)했다. 건국훈장(建國勳章) 애족장(愛族章)을 추서(追廻)받았다.
■ 김 수 협(金壽莢) : 1853년 ~ 1896년
상원(尙瑗)의 8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영수(英璟)이다. 가학(家學)을 익히다가 운산공(云山公) 상종(象鍾)과 더불어 丙申에 창의(倡義)하여 관향장(管餉將)이 되어 전공을 세웠으나 1896년 3월 29일 봉산(鳳山) 전투에서 김수담(金壽聃)과 함께 순국(殉國)하였다. 건국훈장 애족장(建國勳章 愛族章)을 추서(追敍)받았다.
■ 김 상 호(金相鎬) : 1865년 ~ ?
양좌(養佐)의 5세손(世孫)이고 자(字)는 우창(遇昌)이다. 1894년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진사가 되었다.
■ 김 시 호(金時鎬) : 1876년 ~ 1916년
종발(宗發)의 5세손(世孫)이고 호(號)는 죽헌(竹軒)이다. 한말(韓末)에 주사(主事)를 역임하였다.
■ 김 호 직(金浩直) : 1876년 ~ 1916년
세종(世鍾)의 아들이고 호(號)는 우강(雨岡)이다. 1894년 고종(高宗) 갑오(甲午)에 진사(進士)가 되었다.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에게 배우고 경사(經史)에 독실(篤實)했다. 외화(外華)가 준수(俊秀)하고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았다. 문집(文集) 4권(卷)과 속집(續集), 동천자(東千字), 한양가(漢陽歌) 등의 저서(著書)가 있으며 건국포장(建國褒狀)을 추서(追敍)받았다.
<安東金氏沙村 門規(안동김씨사촌 문규)>
서문(序文)
자고(自故)로 우리 사촌은 안동김문(安東金門)의 집성촌이었으나 멀지 않은 옛날부터 안동권씨(安東權氏)와 풍산유씨(豊山柳氏)의 혼성대촌(渾成大村)이 되었으며 그 외 타성(他姓)도 뜸뜸이 살고 있다. 그 생활 예절은 반례(班禮)와 향례(鄕禮)와 가례(家禮)를 준수하여 순후(淳厚)한 민풍(民風)의 고장으로 칭송을 받고 있으니 이는 유교적 예속 보급을 통하여 향촌사회(鄕村社會)의 도덕적 질서의 확립과 양속미풍(良俗美風)이 간직되고 각종 재난에 상호부조하는 풍습이 불문률(不文律)처럼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슬러 생각하면 송(宋)나라의 람전현(藍田縣)에 살았던 도학자(道學者) 여대균(呂大均) 형제(兄弟)가 향리 사람의 교화를 위하여 함께 지켜야 할 규약(規約)을 마련하고 덕업상권(德業相勸), 과실상규(過失相規), 예속상교(禮俗相交), 환난상휼(患難相恤)의 사강목(四綱目)을 설정과 동시에 선적(善籍)과 악적(惡籍)을 두어 해당자를 기록으로 남겼다가 향중의 회의시에 상벌(賞罰)을 행하였던 것을 여씨향약(呂氏鄕約)이라 하였다. 이를 남송(南宋)의 주자(朱子)에 의해 약간의 증손(增損)을 거쳐 시행되고 우리나라에는 고려(高麗)말기에 성리학(性理學) 보급과 더불어 수용되었으나 본격적으로 실시되기는 조선조 중종(朝鮮朝 中宗) 당시로써 감사(監司)와 수령(守令)을 통해 보급하는 관치 향약으로 발전하였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예안(禮安)향약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해주(海州)향약은 우리 지역사회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대표적인 향약이다. 향약의 문헌(文獻)을 살펴볼때 향약(鄕約), 향안(鄕案), 향규(鄕規), 동계(洞契), 리약(里約) 등의 일정단위 자치규칙(自治規則)이 시행된 바 있다. 우리 의성에서도 회당 신원록(悔堂 申元祿)이 퇴계의 수편(手編)향약을 보급한 바 있고 자암 이민환(紫巖 李民譏)이 향약강신약조(鄕約講信約條)에 서문을 달아 시행하였으나 내용은 유사하고 추진은 강력하지 못하였다. 한 문중(門中)을 단위로 하는 문약(門約)이나 문규(門規)는 발견하지 못하였고 다만 임란(壬亂)의 귀화민(歸化民)으로 가창 우록(嘉昌 友鹿)의 김충선(金忠善)의 후손이 “우록동내외자손급동리조약(友鹿洞內外子孫及同里條約)”이 있을 뿐이다. 우리 사촌 일원(一圓)에서도 일찌기 1680년 숙종 경신(肅宗 庚申)에 지은 이계 남몽뢰(伊溪 南夢賚)의 사촌리약중수서문(沙村里約重修序文)을 살펴볼때 자락당 권수경(自樂堂 權守經), 신촌 남해준(新村 南海準), 남애 김상원(南厓 金尙瑗), 사오 김상기(沙塢 金尙琦), 오우재 권전(五友齋 權琠), 권선(權璿), 현감 손만웅(縣監 孫萬雄) 등이 김석좌(金碩佐), 김양좌(金良佐)를 시켜 마을에 통문을 돌리고 조약(條約)을 강정(講定)하였다고 기록(記錄)되었으나 설정된 절목(節目)은 상고(詳考)할 길 없다. 서문의 한 구절에는 “어른은 사랑을 두텁게 하고 젊은이는 어른을 공경하여 화목한 질서를 세웠고 또한 덕업을 서로 권하고 허물을 서로 조심하여 포악한 모습과 비열한 말을 삼가하여 아무런 폐단없이 수십년을 지났다”라고 말하였다.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사회에도 향약의 사대강목(四大綱目)의 뜻은 되새길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덕업상권(德業相勸)은 옳은 일은 서로 권하여 문중의 기풍을 바로 잡는 도덕을 선양하고자 함이며,
과실상규(過失相規)는 문중의 구성원들이 각자 성찰하면서 과실을 바로 잡아 앞으로의 잘못을 줄이고자 함이며,
예속상교(禮俗相交)는 올바른 범절로 서로 사귀고 어른을 섬기며 경조사에 상호부조하자는 내용이며,
환난상휼(患難相恤)은 천재나 지변 등의 뜻밖의 재난에 서로 도와 위기 대처에 상응하고자 함이다.
정축년 성하(丁丑年 盛夏)의 어느날 선재 만취당(先齋 晩翠堂)에서 문중의 장소분(長小分)이 자리를 함께 하고 동성가취의 악법이 국령으로 통과되었음을 개탄하며 오족(吾族)은 이를 엄금(嚴禁)하고 그외 사항을 포함하여 문규(門規)를 초안(抄案)하라는 명(命)을 받았으나 마음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생각하면 도시화 산업화의 과정에서 메말라가는 사회 문화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으나 선자(善者)와 악자(惡者)의 가름이 분명하기 어렵고 상벌(賞罰)의 기준이 또한 사회의 형태에 따라 다양하기 그지없다. 삼가 신명(神明)에 대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권장사항(勸奬事項)과 규제사항(規制事項)을 정리하여 별지에 기록하고 머릿말을 대신한다.
1997年 丁丑 12月 日
- 문규제정발기인(門規制定發起人)
김강호(金康鎬), 김위만(金渭萬), 김성수(金聲秀), 김학수(金鶴秀)
김희경(金熙璟), 김벽수(金璧秀), 김희국(金熙國), 김형수(金瀅秀)
김영균(金永均), 김창회(金昌會), 김형수(金瀅秀)
*기타
1. <만취당 중수 개요(2003. 4. 2. 정중(도) 제공)>
1. 명 칭 : 의성만취당(義城晩翠堂)
2. 지정별 : 경북(慶北)유형문화재 제169호 (1983. 6. 20 지정)
3. 소재지 : 경북 의성군 점곡면 사촌동 207
4. 예 산 : 25,000천원 (국비 12,500천원, 지방비 12,500천원)
5. 연 혁
본 건물은 조선 선조 15년(1582)부터 3년간에 걸쳐 축조하여 완성되었으며 숙종(肅宗) 37년(1711)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고 영조(英祖) 3년(1727)에 복재(復齋)를 영조(英祖) 40년(1764)에 서소익실(西小翼室)을 증축(增築)하여 현재의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 선조(宣祖)때 부호군(副護軍)을 지냈으며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시호는 문충(文忠), 1542∼1607)의 외종질(外從姪)인 김사원(金士元)(성종∼선조)의 호(號)를 따서 만취당(晩翠堂)이라 하였다. 현판글씨는 한호(韓濩)(호(號) : 석봉(石峯), 1543∼1605)의 친필(親筆)이다.
6. 주변현황
의성군 단촌면(丹村面)에서 지방도를 따라 약 6㎞ 떨어진 점곡면(點谷面) 소재지(所在地) 중앙에 위치하여, 주변 민가들과 토석담을 경계로 인접하여 서 있다. 부속건물로는 관리사(管理舍)가 있으며 만취당(晩翠堂)의 복재(復齋)는 현재 종중제실(宗中祭室)(安東金氏 晩翠堂 派)로 사용되고 있다.
7. 보수대상건물현황
晩翠堂의 평면형태는 정면 4간, 측면 2간의 누각(樓閣) 건물에 복재(復齋)와 서소익실(西小翼室)이 누각 우측면 측간 동서편에 붙어 있어 전체적으로 T자형을 이루고 있다. 루(樓)는 5량(梁) 가구(架構)에 팔작집으로 우물마루 바닥 연등천정이며, 기둥머리에는 초익공(初翼工)으로 짜여져 있다. 양익사(兩翼舍)는 3량(梁) 가구(架構)에 맞배집으로 온돌방과 고미반자로 되어 있다. 각부분별 현황은 다음과 같다.
기단 및 계단 : 콘크리트로 그 규격은 아래와 같다.
-익사창호(翼舍窓戶) 전면 기단(전장(全長): 8.8m, 높이: 36㎝)
-누각(樓閣) 우측면 기단(전장: 15.21m, 높이: 13㎝)
-누각(樓閣) 전면 계단(階壇)(높이: 1.15m, 폭: 1.86m, 6단)
-누각(樓閣) 우측면 계단(階壇)(높이: 65㎝, 폭: 1.36m, 3단)
초석(礎石) 및 기둥 : 초석은 직경 60∼120㎝ 크기의 자연석 덤벙주초로 기단면에서 약 7∼20㎝ 돌출되어 있다. 누(樓)의 기둥은 상부직경 30㎝내외, 하부직경 36㎝내외, 길이 3.6m이고, 양익사(兩翼舍)의 기둥은 상부직경 23㎝, 하부직경 27㎝, 길이 2.3m이며, 양쪽 다 원주(圓柱)로 강한 민흘림을 가지고 있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대량(大梁), 종량(宗梁), 도리(道里) : 대량(大梁)의 규격은 가로 56㎝, 세로 46㎝, 길이 6.2㎝로 모서리를 굴린 장방형(長方形)이며 종량은 가로 33㎝, 세로 33㎝, 길이 2.8㎝의 정방형(正方形) 보이며, 도리는 직경 24㎝로 이음은 누(樓)는 나비장으로, 양익사(兩翼舍)는 두겁 주먹장으로 이음되어 있다.
연목, 부연(浮緣) : 연목(椽木)은 모두 239개로 장연(長椽)(굵기: 13㎝, 길이: 3.06m) 128개, 단연(短椽)(굵기: 12㎝, 길이: 2.02m) 73개, 선자연(扇子緣)(굵기: 13.5㎝, 길이 4.29m) 38개가 있으며 이중 장연(長椽) 63, 단연(短椽) 21, 선자연(扇子緣) 22개가 부식이 심하다. 또 연목이 흘러내려 처마앙곡이 거의 없으며 구조적으로도 위험하다. 부연(浮緣)은 길이가 9㎝각으로 길이 1.1 m이며 27본이 부식되어 있다.
기와상태 : 암기와는 폭 30㎝, 길이는 45㎝인데 풍화가 심하고 2겹이음정도로 늘어지게 이어졌으며, 숫기와는 산란(散亂)이 심하다.
벽체(壁體), 창호(窓戶) : 벽체는 회반죽 바름으로 마감되어 있으며 기울어진 기둥에 밀려 모서리 부분의 탈락이 심하다. 누(樓)의 창호(窓戶)는 모두 인멸(湮滅)되어 문선(門線) 등에 나오는 창호철문의 홈을 조사하여 당초의 모양을 추정할 수 밖에 없는 상태이며 익사(翼舍)는 양여닫이 띠살문 3개소, 외여닫이 띠살문 2개소가 있으며 상태는 양호하다.
협문, 담장 : 협문은 동서(東西)담장에 1개소씩, 모두 2개소가 있으며 건물에 비해 규모가 적으며 일식문(日式門)으로 변형(變形)되어 있다. 담장은 높이 1.6m, 길이 93m인 장방형(長方形)으로 만취당(晩翠堂)을 둘러쌓고 있으나 옥개부(屋蓋部)는 양기와로 이어졌으며 맛벽이 탈락(脫落)된 곳이 많다.
8. 사업개요
가. 지 침
만취당(晩翠堂) : 번와보수 및 부식재 교체, 창호, 기단보수 협문 : 1동은 해체후 복원하며 1동은 신축한다. 담장 : 기와고르기를 한다.
나. 공사내용
1) 만취당(萬翠堂) 보수(28.12평)
연목이상 해체
부식목부재 교체시 발생되는 부식재중 재사용 가능한 부분을 선별 치목(治木)하여 적심(積心)으로 이용하였으며 목부재 교체수량은 다음과 같다.
-평연재 : 장연 63본, 단연 21본, 부연 27본, 목기연 6본 -축부재 : 부연개판 30% 교체, 기둥 6개소 드잡이 -선연재 : 선자연 22본, 연함, 평고대 100%
지붕공사는 적심(積心), 강회다짐(18.17㎥), 보토다짐(36.35㎥)을 한 후 암기와 4,176매(70%), 숫기와 1,605매(60%)를 보충하여 기와잇기를 하였음
기존 회반죽 바름벽을 해체하고 재사벽치기(면적: 36.53㎡)를 했으며 연골사이는 재사 앙벽바르기(164.48㎡)시행
창호설치는 누각(樓閣) 좌측면(남측)은 띠살문으로 배면(서측)은 판문으로 복원
복재(復齋)와 서소익실(西小翼室)의 벽, 천정, 바닥을 수장했으며 교체 목부재는 고색가칠(146.5㎡)을 하였음
2) 협문복원 1동
서측 출입문인 일본식 협문을 한식 협문으로 복원
-최고높이 : 2.8m -처마높이 : 2.06m -주간거리(柱間距離) : 1.5m
다. 설계현황
접 수 일 : '85. 12. 27 설 계 자 : 금성종합건축 김상식 설계금액 : 28,622천원 승 인 일 : '86. 2. 10 검 토 자 : 건축기원 오석근 검토금액 : 26,840천원
라. 공사감독현황
계 약 일 : '86. 4. 25 도 급 자 : 대화기업(주) 이실근 공사기간 : '86. 5. 2∼'86. 7. 30 감 독 관 : 건축기사보 남기송 검 수 관 : 건축기사 변철수 계약금액 : 21,800천원 준공금액 : 21,800천원 현장대리인 : 보수 제173호 김한승 기 능 공 : 목공 제492호 이 운, 와공 제498호 김병호 검 수 일 : '86. 8. 5
<중수 공사 후의 만취당, 도평의공파 종택 모습>(2003. 4. 20. 정중(도) 제공)

<만취당>

<도평의공파 종택>
<도평의공파 파보 간행 추진위원 명단> (2003. 4. 20. 정중(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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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준비중입니다.
*도평의공파 여러분께서는 다음의 내용을 준비하시어 관리자 이메일로 조속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다 음
1.설립일시 :
2.사무실 및 연락처
1)사무실 : 주소 : 전화 :
2)회장 : 주소 : 전화 :
3)총무 : 주소 : 전화 :
3.문중회 소개
1)파조이신 ○○ 이하 후손들의 문중회이다.
2)관리 또는 향사하고 있는 묘소 및 설단위 :
3)주요 향사일 및 장소 :
4.연혁 : 연도별로 주요 활동내용 기록
5.회칙(정관)
6.임원명단
1)역대 임원명단(회장 중심)
2)현 임원명단
7.파 문중회내 주요 조상님 소개.
8.파 문중회내 주요 자료 소개
예) 묘소, 사당, 문헌, 교지, 유물, 역사 유적지, 신도비 등 사진을 스캔에 떠서(PC방 이용) JPG파일로 저장하여 보내며, 사진 설명을 곁들여 보냄.
9.파내 기타 소파 문중회 소개
<주의사항>
*모든 내용은 컴퓨터의 아래한글로 작성하여 보냅니다.
*사진은 위 7번 8번항에서 설명하여 작성하고, 스캔으로 떠서 저장한 사진은 따로 입력하여 보내야 함.
*보낼 곳
1)이메일 주소 : khy5278@chollian.net
2)자택주소: 서울시 강남구 개포동 주공아파트 604동 1504호김항용(金恒鏞)
3)전화 : 011-892-5273
이 땅에는 어느 고장을 가더라도 유서깊은 반촌이 있고, 그 마을에는 으레 풍수와 관련된 전설이 있다. 그 전설은 대개 그 마을이, 혹은 그 마을의 어느 집이 명당에 자리잡아 큰 인물이 몇 명 날 자리라는 식이거나 아니면 특정 조상의 무덤터와 관련된 후손의 발복 운운하는 이야기이게 마련이다. 그 뒤엔 또 그 전설을 철석같이 믿고, 후손들이 벌였다는 웃지못할에피소드들도 사족처럼 그럴듯하게 덧붙여져 재미를 더한다. 생각이 있는사람이라면 그냥 재미있는 이야기쯤으로 받아 넘기겠지만 가문과 땅에 대한 집착이 유별났던 시절에는 그 땅의 발복에 대한 믿음이 조상에 대한 경애심처럼 굳건하기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