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403 배우리의 성씨 이야기 264 `연안이씨
연안이씨(延安李氏)
□ 뿌리
우리 나라에서 현존하는 이씨의 본관은 140여 본으로 추정되며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명문으로 통하고 인구 수로는 김씨 다음으로 두번째다(남한 약 7백만).
신라 경문왕 때에 당나라에서 귀화한 이원(李瑗)의 아들들이 왜구의 침략을 평정한 공으로 이씨(李氏)로 사성받아 갈려 나갔다.
연안이씨(延安李氏)는 비조(鼻祖) 고요(皐陶)와 노자(老子)의 후예인 중국 농서이씨(농西李氏) 후손 )중에 한(漢) 무제(武帝) 때 명장 리광(李廣 ?-BC119)이 있으며 그의 후손에서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 서량(西凉:西紀400-421)을 세운 무소왕(武昭王) 리호(李暠:漢族)가 있고 무소왕(의 아들 흠(歆:西凉의 二代王) 순(恂:西凉의 三代王) 번(飜) 중 당나라 황실은 흠(歆)의 계통이고 우리 나라쪽에서는 번(飜)의 계통이라 한다 그리하여 당나라 황실과 종실간이라 전한다
여러 파(派)로 분파 되었다 하나 (年代順)
1. 현려(賢呂):고려(高麗) 의종(毅宗)때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少府監의 長인 判事)
2. 습홍(襲洪):고려(高麗) 고종(高宗)때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3. 핵(核):고려(高麗) 예부상서(禮部尙書)
4. 송(松):고려(高麗) 고종(高宗)때 대장군(大將軍)
5. 분양(汾陽):고려(高麗) 이부시랑(吏部侍郞)
6. 엄(儼):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때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 연안군(延安君)
7. 운(芸):고려(高麗) 충혜왕(忠惠王)때 지신사(知申事) 엄(儼)의 아우
8. 권(權):고려(高麗) 충목왕(忠穆王)때 판삼사사(判三司事) 연성군(延城君) 오원부원군(五原府院君)
9. 방(昉):고려(高麗) 공민왕 때 전법판서(典法判書)
10. 득량(得良):고려(高麗) 밀직부사(密直副使)
11. 백연(伯衍):고려(高麗) 판도정랑(版圖正郞)
12. 계연(季衍):고려(高麗) 영광군사(靈光郡事) 백연(伯衍)의 아우
13. 지(漬):고려(高麗) 공민왕 때 통례문부사(通禮門副使)
현재는 소부감판사공파(少府監判事公派) 태자첨사공파(太子詹事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통례문부사공파(通禮門副使公派) 등 4파만 전해 내려오고 있고 각파간에 세대 구분을 알 수 없어 항렬자는 따로 쓰고 있다.
앞으로도 보첩(譜諜)이 발견되어 고증이 되면 여러 파가 더 나올 수도 있고 연안이씨 자손이란 것만 알고 선계를 알수 없을 때 새로운 파가 생길 수도 있다.
또 연안이씨 첨사공파(詹事公派)에서 분적해 나갔다고 하는 안산이씨 인수(仁守:根粹의 子라고 함) 계통이 있다.
□ 시조
당나라 중랑장(中郞將) 신라 시염성주(시鹽城主) 이무(李茂)
시조는 중국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 서량(西凉)을 세운 무소왕(武昭王:이호李暠)의 후손으로서 660년 당 고종(高宗) 현경顯慶) 5년 소정방(蘇定方) 장군과 함께 신라 원군의 장수로 참전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하는데 공을 세워 중랑장(中郞將)에 오르고 나당 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데 크게 기여한 분이다.
백제를 정복한 후 소정방 장군이 백제전의 승세를 몰아 신라까지 정벌할 욕심으로 여러 장수들과 논의하였는데 시조는 신라 군사가 막강하고 고구려가 건재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신라와의 연합이 당의 국익(國益)이라는 올바른 판단으로 소정방 장군을 설득하여 먼저 나당간에 무술시합을 해 본 연후에 결정하는 것이 옳겠다고 건의하여 망해정(望海亭)에서 궁술을 시합하여 신라쪽이 이기니 소정방 이 탄복하면서 이무 장군의 건의가 없었다면 대사를 크게 낭패할 뻔하였다 하고 계획을 변경했다.
시조가 나당군의 위험한 대치 상황을 무술시합으로 유도하는 기지를 발휘하여 나당간의 화합을 굳히는 계기로 만들었으며 신라인들한테는 크나큰 은인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유인원(劉仁願) 장군과 함께 백제 땅에 머물러 지키다가 668년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까지 정복하고 시조는 시염성(시鹽城:現 黃海道 延安)을 유수(留守)하셨다.
그 뒤 우리 시조의 나당화합과 신라가 삼국통일에 기여한 공으로 김유신 장군의 주청에 의하여 문무왕가는 시염성을 식읍으로 주고 높은 벼슬을 제의했으나 극구 사양하므로 국빈으로 예우했다 한다.
그 때 당나라에서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섭정 국정을 어지럽히던 때이므로 시조는 본국인 당나라로 귀국하지 않으고 신라에 머물러 오늘날 연안이씨의 시조가 되시었다.
경북 군위군 효령면 장군리에 삼장군(三將軍) 사당이 있어 신라에서 삼국통일에 큰공을 세우신 김유신, 소정방, 이무 장군을 봉안하고 매년 단오절에 관청에서 제수를 준비하고 백성들과 함께 제향을 올리고 깃발을 들고 풍악을 울리며 축제일로 삼아 조선시대말엽까지 이어져 내려왔다 한다.
지금은 군위군(軍威郡)과 김해김씨 연안이씨 후손들이 해마다 단오절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시조 이후 약 500 여년간 나라가 바뀌고 수많은전쟁과 재해등으로 문헌이 실전(失傳)되어 여러대(代)의 선계(先系)를 잃게 되었고 각파(各派)간에 세대(世代)구분이 불분명하게 되었다.
여러 파로 분파되었다 하나 현재는 판사공파(判事公派) 첨사공파(詹事公派)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부사공파(副使公派)등 4파만 전해 내려오고 있다.
□ 인물
조선시대 정1품까지 오른 분이 24인 중에서 부원군(府院君:정1품 공신이나 왕의 장인에게 주었던 칭호) 5인, 상신 9인이 나왔고, 대제학 7인, 판서 54인 공신 10인, 청백리 8인, 문과 급제자 255인을 나와 명문가 하면 연리광김(延李光金)이라 하여 양반 가문 중에서도 첫째로 꼽힌다. '연리광김'이란 연안리씨와 광산김씨를 일컫는다. 남한에 약 15만 정도 있고 각계에서 큰 활약을 하고 있다.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는 인물로는 대장군 송(松)의 아들인 위사공신(衛社功臣) 분희(汾禧)와 습(습)형제 연안군(延安君) 엄(儼)과 연성군(延城君) 오원부원군(五原府原君)에 오른 권(權), 안변부사와 전법판서(典法判書)를 지낸 방(昉)이 있다.
판사공파(判事公派)
고려 의종때에 소부감(少府監)의 판사(判事)인 판소부감사(判少府監事)를 지내고 송(宋) 금(金) 양국에 사신으로 다녀온 현려(賢呂)
그의 아들인 태의감(太醫監) 의정동정(醫正同正)을 지낸 영군(暎君)과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안군(顔君) 형제
상사국(尙舍局) 직장동정(直長同正)에 오른 인부(寅富)
군기감(軍器監) 주부(注簿)를 지낸 원규(原珪)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효신(孝臣)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추증된 광(匡)
호조전서(戶曹典書)를 지낸 종실(宗實) 서운관부정(書雲觀副正)을 지낸 종미(宗美) 조선 태조때 공조전서(工曹典書)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된 종무(宗茂) 등 3형제
공조전서를 지낸 제경(齊卿)
태종 때 대호군을 지내고 좌의정(左議政)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추증된 회림(懷林)
판사공파(判事公派)의 중흥조(中興祖)인 석형(石亨)은 세종때 과거시험(科擧試驗)이 생긴 이래 처음으로 생원(生員) 진사(進士) 문과를 모두 장원으로 급제하고 호당(湖堂)에 뽑히고 집현전 학사로서 저헌집(樗軒集) 완산별곡(完山別曲) 대학연의즙략(大學衍義輯略)등을 저술하고 치평요람(治平要覽) 고려사(高麗史) 역대병요(歷代兵要) 황화집(皇華集)등의 편찬에 참여했다.
판공주목사 수문전 제학 전라 황해 경기도 관찰사 개성부 유수를 거쳐 대사헌 형조 호조참판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팔도도체찰사(八道都體察使)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역임. 성종 때 좌리공신(佐理功臣) 연성부원군(延城府院君)에 봉해지고 청렴한 생활과 학자로써 성균관에서 후진 양성을 하여 연안이씨를 중흥시킨 명신이었다.
사헌부 장령과 성균관 사예를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혼(渾) 사화를 피해 은둔생활을 하다 대호군에 오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수장(壽長) 대호군에 오른 명장(命長) 복장(福長) 효장(孝長)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영의정에 추증된 순장(順長) 첨지중추부사겸 오위장을 역임한 경장(敬長) 등 6형제
수장(壽長)의 아들인 기( )가 조광조의 문인(門人)으로서 광주목사(廣州牧使) 첨지중추부사등을 역임하고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판사공파(判事公派)는 인조(仁祖) 때에 이르러 정구(廷龜)와 귀(貴)를 배출하면서 조선시대 말엽까지 찬란한 문중의 전성시대를 맞는다. 정구(廷龜)는 우리 역사상 손꼽히는 한문학의 대가로서 그는 선조때 대제학을 거쳐 인조 때 좌의정까지 올랐으며 명나라 까지 명성을 떨쳤다.
아들 명한(明漢)이 대제학과 이조판서를, 소한(昭漢)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좌의정에 추증되었고, 문장과 글씨가 뛰어나 아버지와 함께 3부자가 송나라의 삼소(三蘇: 蘇詢, 軾(東坡), 轍)와 비교되고, 명한(明漢)의 아들 일상(一相)이 대제학 예조판서등을 역임하고 우의정에 추증되었으며 3대 대제학을 배출 가문의 명예를 더욱 빛냈다.
또 부제학을 지내고 이조판서에 추증된 단상(端相)과 이조참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된 희조(喜朝) 부자(父子)가 성리학자로서 유명하다. 소한(昭漢)의 아들인 은상(殷相)이 형조판서를 익상(翊相)이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귀(貴)는 학자의 집안인 연안이씨의 번영을 정치적으로 뒷받침 명실공히 명문의 위치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그는 광해군의 난정을 보다못해 아들 및 김류(金류) 최명길(崔鳴吉) 등 동지들과 인조반정을 주도하여 쓰러져가는 사직을 바로 세웠고 이조판서 좌찬성등을 역임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종묘 인조묘정(仁祖廟庭)에 배향되었다.
그 아들인 영의정 정사공신(靖社功臣) 연양부원군(延陽府院君) 청백리에 오른 시백(時白), 충주목사 동지중추부사에 오르고 병조판서에 추증된 시담(時聃), 호조 형조 공조판서와 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고 정사공신(靖社功臣) 연성군(延城君)에 봉해지고 영의정 연성부원군에 추증된 시방(時昉)등 3형제 홀로 되어 여승이 된 그의 딸도 광해군이 총애하던 김상궁(金尙宮)의 수양딸로 궁중에 출입하면서 아버지를 도와 반정을 성공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다. 대대로 10대나 봉군(封君)에 올라 10) '봉군집'이란 영예를 얻었다.
시방의 아들인 관(慣)이 공조참판과 총융사를 역임했다. 병자호란때 강화가 함락되자 순절한 충신 시직(時稷)이 강화 충렬사(忠烈祠)와 대전(大田) 숭현서원(崇賢書院) 용인 충렬서원(忠烈書院)에 배향되었다.
정신(正臣)이 호조참판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들인 철보(喆輔)가 이조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손자 복원(福源)이 대제학 및 좌의정을 지내고 복원(福源)의 아들인 시수(時秀)가 영의정이 되고 종묘(宗廟) 순조묘정(純祖廟庭)에 배향되었고, 또 만수(晩秀)가 6조판서 및 대제학 판중추부사를 지내 부자(父子) 정승(政丞)과 부자(父子) 대제학을 배출하여 3대(三代) 대제학과 부자(父子) 대제학을 배출한 가문으로도 명성을 떨쳤다.
또 철보(喆輔)의 동생 길보(吉輔)가 공조판서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길보(吉輔)의 아들 성원(性源)이 좌의정을 지내고 증손(曾孫) 약우(若愚)가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청녕군(淸寧君)에 봉해지고, 현손 순익(淳翼)이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호조참판에 오르고 좌찬성에 추증된 우신(雨臣), 그의 아들인 정보(鼎輔)가 대제학과 예조판서 판중추부사를 역임하고 특히 시조(時調)를 잘 지어 정철(鄭澈) 윤선도(尹善道)와 함께 시조(時調)의 3대가(三大家)로 일컬어지고, 정보의 동생 익보(益輔)가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명희(命熙)가 호조참판과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지고 영의정 연원부원군에 추증되었고 그 아들 유(瑜)가 이조판서와 연릉군(延陵君)에, 후(후)가 사도세자의 스승이 되고 좌의정을 지냈다.
천보(天輔)가 영의정을 지내고 좌의정 후(후) 우의정 민백상(閔百祥)과 함께 사도세자의 평양원유사건(平壤遠遊事件)에 책임을 지고 음독 자결한 충신들이다.
천보(天輔)의 아들 문원(文源)이 병조 이조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또 손자 재수(在秀) )가 경상도 관찰사를 존수(存秀)가 6조판서 및 좌의정을 지내고 시문(詩文)에도 조예가 깊었고 우수(友秀)가 형조참판을 지냈다.
민보(敏輔)가 형조판서와 판돈녕부사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그의 아들인 시원(始源)이 이조판서를 손자 학수(鶴秀)가 이조판서 및 판돈녕부사 증손 면우(勉愚)가 이조참판을 역임, 또 조원(肇源)이 6조판서를 손자 용수(龍秀)가 형조판서 증손 종우(鍾愚)가 이조판서와 판의금부사. 글씨를 잘 써 그가 쓴 글씨체를 석농체(石農體)라 한다.
현손 교익(喬翼)이 예조판서를 역임해 내리 5대나 판서를 지내고 또 현손 현익(玄翼)이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이조판서 판중추부사 청백리에 오른 명식(命植)이 있으며 그의 아들 면응(冕膺)이 예조판서를 지 냈다. 심원(心源)이 대사헌을 조원(祖源)이 예조판서를 갑이 이조판서 및 연풍군(延豊君)에 봉해지고 직보(直輔)가 이조판서 조승(祖承)이 예조판서 가우(嘉愚)가 한성판윤을 10번이나 역임. 판윤대감으로 명성. 이조판서및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풍익(豊翼)이 이조판서와 판돈녕부사를 그의 아들 세재(世宰)가 예조판서를 역임했다.
형조판서에 오른 공익(公翼)이 있으며 그의 아들 명재(命宰)가 이조참판을 지냈다.
준(儁)이 공조참판을 역임하고 조연(祖淵)이 예조참판을 지내고 좌찬성에 추증되었고 갑신정변때 사대당(事大黨)의 거물로 지목되어 개화당의해 피살 되었고 도재6부대신과 찬정대신(贊政大臣)을 역임했다.
판사공파(判事公派)에서는 조선시대 정1품까지 오른 분이 20인 그 중에서 부원군 3인 상신 8인이 나왔으며 대제학 6인 판서 42인 공신 4인 청백리 2인 기사(耆社)에 든 분이 14인 종묘배향(宗廟配享) 2인 문장가 4인을 배출해 연안이씨를 명문가로 올려놓는데 큰 몫을 하였다. 이 파는 황해도 연안 서흥 봉산 금천 함남 안변 서울 경기도 용인 고양 양주 포천 가평 개성 충남 공주 논산 부여 예산 홍성 보령 당진 서산 충북 보은 청원 괴산 전북 익산 강원도 홍천 통천 회양 평남 용강 성천 강동 중화 덕천 등에 많이 살고 있다.
첨사공파(詹事公派)
고려 고종 때에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에 오른 습홍(襲洪)이 있고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경무(景茂) 전공판서(典工判書)를 지낸 원발(元發)과 그의 아들인 조선 태조로 부터 태종 때까지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한 귀령(貴齡)과 경상도 관찰사와 호조판서에 오른 귀산(貴山) 형제가 있고 좌부승지를 지내고 청백리에 오른 인충(仁忠) 중종반정때 정국공신(靖國功臣)으로서 이조참의 오위장 연성군(延城君)에 오른 곤(坤)이 있고 효자 지남(至男)의 집은 어머니 본인 아내 아들 딸 손자 손부등 8명이 정문(旌門)을 받아 집으로 널리 알려졌는데 뒤에 5명이 정문을 더 받아 13정문집으로 더욱 유명하게 되었다.
또 지남의 아들 기설(基卨)과 증손 후정(后定)이 청백리에 선정되었고 기설(基卨)의 아들 돈오(惇五)와 돈서(惇敍) 형제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에 침입한 적군과 싸우다 순절 강화 충렬사(忠烈祠)에 배향되었다
이조판서 호성공신(扈聖功臣) 연원부원군(延原府院君)청백리에 오른 광정(光庭)과 그의 동생인 함경도 관찰사를 지낸 창정(昌庭)이 있고 홍로(弘老)가 경기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광정(光庭)의 아들 현(현)이 평안도 관찰사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지고 좌참찬에 추증되었고 손자 성징(星徵)이 황해도 관찰사를 역임했다.
창정(昌庭)의 손자인 관징(觀徵)이 이조판서와 판중추부사를 지내고 또 봉징(鳳徵)이 형조참판을 역임하고 관징(觀徵)의 아들 옥(沃)이 호조참판을 지냈다.
식(湜)이 황해 전라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고 만원(萬元)이 공조참판 평안도 관찰사를 역임하고 연릉군(延陵君)에 봉해지고 조카 지억(之億)이 형조 공조 예조판서에 오르고 만회(萬恢)가 병조참판을 역임했다.
첨사공파(詹事公派)
조선시대 부원군 1인 상신 1인 정일품까지 오른 이가 3인, 판서 5인, 공신 2인, 청백리 4인 배출.함남 안변 경기도 용인 파주 김포 강화 안산 충북 청원 경남 거창 강원 이천 등에 많이 산다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고려 고종때 대장군을 역임한 송(松)이 있고 그의 아들인 분희(汾禧)와 습(습. 초명:汾成)이 원종(元宗)의 총애를 받아 분희(汾禧)가 위사공신(衛社功臣)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에 습(습)이 지신사(知申事)를 역임했다. 함남 정평 함흥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부사공파(副使公派)
고려 공민왕 때 통례문 부사에 오른 지(漬)와 그의 아들인 계손(係孫)이 공조전서를 역임하고 손자 즐이 문과에 급제하고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냈다. 조선시대(朝鮮時代)에 들어와서 공조 예조참판을 역임하고 병조판서와 연천군(延川君)에 추증된 보정(補丁)과 그의 아들 숭원(崇元)이 이조 병조판서와 좌리공신(佐理功臣) 연원군(延原君)에 봉해지고 청백리에 올랐다.
이시애의 난과 여진족을 토벌하고 적개공신(敵愾功臣)과 좌리공신(佐理功臣)등 2번의 공신과 호조판서 연안군(延安君)에 오른 이숙기(李淑琦)와 이조참판을 역임한 숙함(淑함)형제가 있다.
이숙기의 증손 우민(友閔)이 예조참판을 지냈다.
그의 동생 호민(好閔)은 임진왜란 때, 외교적 수완으로 명의 원병을 끌어들이는 데 공을 세웠고, 외교 문서를 도맡아 기초하는 등 문장에도 뛰어나고 조복(朝服)으로 삼베옷을 항상 입고 다닐 만큼 청렴했다. 대제학 예조판서 좌찬성 역임. 호성공신(扈聖功臣) 연릉부원군(延陵府院君)에 봉해졌다.
호민의 아들 경엄(景嚴)이 판한성부윤을 지내고 연천군(延川君)에 봉해지고 조카 경의(景義)가 이조참판이 되었고 문장으로도 이름을 떨쳤다.
숙함(淑함)의 증손 후백(後白)은 호조, 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거친후 광국공신(光國功臣) 연양군(延陽君) 청백리에 오르고 좌찬성에 추증 되었고 문장에도 뛰어났다.
그의 손자 유길(有吉)이 광해군 때 명나라 원군으로 가서 후금과 싸우다 순절 충신 정려를 받았다.
형조판서를 지낸 정운(鼎運)과 예조판서를 지낸 익운(益運)형제가 있고 정운(鼎運)의 아들 명적(明迪)이 이조판서를 역임했다.
부사공파(副使公派)
조선시대 부원군 1인 대제학 1인 판서 7인 공신 4인 청백리 2인을 배출했다. 이 파(派)는 경기도 양평, 경북 김천 군위, 경남 거창 전남 해남 강진, 충남 아산 등지에 많이 살고 있다.
■ 근세 인물
이동녕(李東寧) : 항일운동 앞장. 상해 임시정부 초대 의정원(議政院) 의장 주석을 역임
이병기(李秉岐) : 호 가람. 국문학자 시조작가
이원순(李元淳) : 독립운동가, 경제인. - 그의 부인 리매리 여사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중재(李重宰) : 재무부 장관
이철승(李喆承) : 상공부 차관
이도영(李道榮) : 홍익대 설립자, 경제인
이정림(李庭林) : 경제인 연합회 회장. - 개풍상사를 일으켜 6.25 후 경제발전에 큰 공헌
이연(李然) : 동원탄좌 회장
이숭녕(李崇寧) : 국문학자
이항녕(李恒寧) : 법학자
이지호 : 지리학자
이봉녕(李奉寧) : 쌍방울 회장
이웅희(李雄熙 1930~) : 문화공보부 장관
□ 성세
145,445명. (2000년)
□ 연안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
고(高), 김(金), 단(段), 류(柳), 유(劉), 이(李), 은(殷), 송(宋), 인(印), 이(李), 전(田), 차(車) /// (방송 대담 ; 배우리)
[출처] 배우리의 성씨 이야기-연안이씨- KBS-2R|작성자 이름사랑
연안이씨 종중 문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