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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자첨사공 중시조

태자 첨사공파 ~의정공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6.09.23|조회수210 목록 댓글 0

1世. 중시조

襲洪습홍

太子詹事公
태자첨사 행상약국봉어(太子詹事 行常藥局奉御)
고려 고종 조 ( 1214 ~ 1259 ) 때 태자첨사(태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기관의 명예직)로서 상약국의 봉어를 지냈다.
14세손 李 星(이 성)의 사보 및 16세손 李 泳(이 영)의 존경록에 다같이 이르기를 공이 고려 고종 때 벼슬 했다고 전했다.
19세손 李 祖延(이 조연)의 집에 수장된 존경록에 이르기를 공의 호가 학옹이라 하였다
역자주기
상약국에서는 왕실의 의약제를 관장하는 곳이고 봉어(정 6품관)는 상약국의 으뜸 벼슬이다.
이 어른이 바로 첨사공파의 중시조이다

2世.
克榮극영 
조의대부판대의감사지방다사   
역자주기
태의감에서는 의야과 치료를 관장하였으며 판태의감사(종3품직)는 태의감의 으뜸 벼슬이다.
다방의 맡은 바가 않으니 근래에 그의 조상이 벼슬을 하고 용모와 거동이 단정하고 재예와 논주가 있어 여기에 뽑혔으니 가이 짐작이 가는 일이다.
그렇다면 공의 거동이 단정하고 범절이 남의 선망을 받고 가문의 세적이 뛰어 났음이 분명한데 그 명망이 기록으로 전해지지 못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다방의 설치시기와 폐지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대개 문종원년(1047년)에 설치하고 충렬왕 24년(1298년)관제를 고칠 때  파했을 것으로 보인다.
다방이 하는 일은 주로 낮 시간에 측근에서 왕을 모신 듯 지방다사는 다방의 으뜸 벼슬이다.

3世.
景茂경무
봉익대부 밀직부사
역자 주기
밀직사는 정령 (숙위 : 궁중을 지키고 왕을 호위함) 군기를 관장하는 곳으로 부사는 정 3품관이다.
 
판도사는 호구, 공부, 전량을 관장하였으며 상서는 정 3품관이다 .
배위는 군부인 성주 김씨로 사의대부 감찰어사 대년의 따님이고 은청광록대부 추밀부사 병부상서 수연의 손녀이다.
 
외조는 통헌대부 전형판서 태자빈객 강득화로 본관은 신천이다.  

4世.
承顔승안
중정대부 좌우의 대호군
오위 중에서 좌우의 대호군(정 3품직)을 지냈다.
 
배위는 부인 전주 최씨로 내시봉의랑 고공정랑곡의 따님이요 어사대부 보문각 대학사 문절공 윤개의 손녀이며 벽상삼한 광정(금자광록)대부 수 태사문하시랑 평장사문정공 보순의 증손이다.
외조는 금자광록대부 태위문하시랑 문정공 조충으로 본관은 횡성이다.

5世.

靖恭정공
전보도감판관 추봉 광정대부문하평리 상호군
문하성에서는 백규(모든법률)와 서무를 관장하였으며 공민왕 21년(1372년)에 문하평리 전보도감이라고 그 이름을 바꿨으며 판관은 정 5품관이다광정대부 (종2 품) 문하평리 상호군으로 추봉되었다.
배위는 남평문씨로 추봉 통헌대부 지밀직사사 민부전서 상장군 유근의 따님이며 형부시랑겸 삼사부사 대륜의 손녀이고 금자광록대부수 사공 좌복야효식의 증손이다.
외조는 금자광록대부 문하시중 개국후 충익공 김위로 본관은 안산이다.  

6世.

元發 원발
議政公(의정공)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
 
처음에는 휘를 총이라 하였고 호는 은봉이다. (운곡 원척석 일기에 나와 있음)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궁을 지냈다
 
전공사는 산택 공장 영조를 관장 하였으며 봉익대부 전공판서는 종 2품관이며 상호군을 겸직 하였다.
 
조선조가 개국하면서 여러번에 걸쳐 출사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고려유신으로서 절의를 지켜 항절 불사하였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정승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예문관 춘추관으로 증직 되었다.
기일은 6월 10일이고 묘소는 용인시 이동면 구수동 불당골 해좌이고  표석이 있으니 앞면에 좌의정 이모(원발:原發)지묘 뒷면에 정통 4년(元帝 英宗의 년호) 기미(세종21년 1439년) 4월 모일 천장이라 했다.
 
배위는 강덕 군부인(고쳐서 송양 군부인) 성천 김씨이고 기일은 8월 18일이다. 좌위의 보승 중랑장 추봉 밀직부사 상호군 남보의 따님이며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 윤경의 손녀이고 추봉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상호군 선의 증손이며 추봉 광정대부 지첨의 부사 상장군 행주인 기지병의 외손녀이다.
 
공의 묘갈에 천장한  연월일을 기재 하였고 지금의 전라도 고선현 (현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서쪽 사직단뒤 소주치안에 영봉이 있고 표석에 완연하게"좌의정 이모(元發)지묘"라 쓰고 뒷면에 "부인 김씨 장우 용인 구수동"이라 하였고 숙종 42년(1716년)에 12대손 만성이 임실 현감으로 있을 때 곳을 찾아가서 묘지를 살펴보니 광중이 비어있고 지석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손들이 서로 왕래하며 편서의 첫머리 산도(山圖)아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첩보유에 전하기를 한 선비가 베옷에 짚신을 신고 새벽녘에 공의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두드리니 공이 버선발로 급히 나가 반가히 맞아 들여서 그와 더불어 오륙일을 지낸뒤에 그가 돌아 갔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며칠후 하인을 시켜 포백과 돈을 말에 잔뜩 실어서 청석동으로 보내면서 이르듸"그 곳에 가면 내 징표를 지닌 사람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이 물건을 말과 함께 모두 건네주고 곧 돌아와서  한말을 아뢰어라"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분이 바로 운곡 원척석이며 운곡은 은둔하기에 앞서 공을 찾은 것이며 그를 전별하면서 정의와 의리로서 이와같이 고려유신들이 은둔하면서 쓸 물품과 돈을 보내 주었다. (원척석 일기에 등재)
1984년 9월에 비석과 상석을 다시 세웠으며 향일은 음력 10월 10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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