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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성군11世

연성군(延城君) 휘 곤(李坤)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2.01.25|조회수257 목록 댓글 0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의 가계(家系)와 묘역(墓域)

김유신(金庾臣 595-673)의 흥무왕실기(興武王實記)에 의하면 연안이씨(延安李氏)의 시조는 당(唐) 중랑장(中郞將) 이무(李茂)로, 신라와 함께 백제를 정벌한 뒤 신라와 당나라를 화합시킨 공으로 연안(延安)에 식읍 1천호를 받아 그곳을 본관으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란 등으로 세계(世系)를 알 수 없게 되다가 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 습홍(襲洪)(1166-?), 소부감(小府監) 판사(判事) 현여(賢呂)(1136-?), 통예문(通禮門) 부사(副事) 치(漬)(1307-?)를 중시조로 하는 계대(系代)가 이어져 와 연안이씨의 가계(家系)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첨사공파(詹事公派)에서는 귀령(貴齡)․귀산(貴山)․ 광정(光庭)등, 판사공파(判事公派)에서는 석형(石亨)․ 정구(庭龜)등, 부사공(副事公派)에서는 숙기(淑琦)․숙함(淑王+咸)․ 호민(好閔) 등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즉, 재상(宰相) 9분, 대제학(大提學) 7분, 제학(提學)․옥당(玉堂)․호당(湖堂) 80분, 청백리(淸白吏) 7분, 문과급제(文科及第) 236분을 배출했으니 가히 명문이라 할 수 있다. 연안이씨는 전국 인구순위 58위의 가문으로 이와 같이 많은 문신들을 배출했으니 자랑할만 하다.

이번 학술회의의 대상인 연성군(延城君) 이곤(李坤)(1462-1524)은 첨사공파에 속하는 인물로 고조는 호조판서를 지낸 귀산(貴山)이요, 증조는 춘천도호부사를 지낸 속(續)이요, 조는 이조참의를 지낸 근건(根健)이요, 부는 예조참판을 지낸 연안군(延安君) 인문(仁文)이다. 모두 문관직을 가지고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장남은 재령군수를 지낸 대승(大升)(1497-1557)이요, 차남은 장예원(掌隸院) 사평(司評)을 지낸 공승(公升)으로 미관말직이나마 하고 있었다. 당사자인 녹창(鹿窓) 곤(坤)은 1483년(성종 14) 21세로 생원시에, 1492년(성종 23) 30세로 식년문과(式年文科) 병과(丙科)에 급제해 병조정랑․사간원 헌납․해주목사․밀양부사 등의 요직들을 역임했다.

그러나 녹창의 조상들에게 시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의 증조 춘천도호부사 속(續)의 넷 째 아들 근수(根粹)의 혼사문제로 서인으로 강등된 바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처지를 아버지 인문(仁文)이 상소해 신원(伸寃)을 받아냄으로서 녹창의 과거길과 사환길이 트일 수 있었다.

녹창은 사림파의 일원으로 활약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와 사림파(士林派)가 대결하는 정국에서 그의 관직생활은 부침을 거듭했던 것이다.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국문을 받거나 중종반정(中宗反正)에 가담한 것 등이 그 예이다. 그는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현철했으며, 사림파와 행동을 같이해 선조 이후 사림파의 세상에서 연안이씨가 명상(名相)․석보(碩輔)․문형(文衡)을 많이 낸 명족(名族)으로 발돋음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이러한 녹창의 직계 가족들이 판교 일대에 5,6백년간 세거하고 있어서 그 분묘와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다. 그의 아버지 인문(仁文)의 묘를 비록해 그의 형인 오(塢)의 묘, 자신의 묘, 아들인 대승(大升)․공승(公升)의 묘, 손자인 숙(俶)․간(侃)․탁(倬)의 묘, 증손자 성(晟)의 묘, 할머니인 단양우씨(丹陽禹氏)의 묘 등 조선 시대의 10 여기의 묘와 석물들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이들 묘역은 연안이씨를 비롯한 양반가문의 연구와 15-17세기 조선시대 묘제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런데 지금 판교개발로 이러한 유적들이 일거에 회손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개발도 좋지만 귀중한 문화재는 보호해야만 한다. 차제에 이들 묘역을 조사해 문화재가 다치지 않도록 다같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2004. 2, 25. 제 2회 성남문화원 학술토론회 “판교지역의 延城君 李坤 金石文 연구”, 낙생농협 강당)

 

 

 

    비두에 삼족오가 새겨져 있는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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