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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공 6世

의정공議政公 휘 원발 李元發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2.01.25|조회수139 목록 댓글 0

議政公 의정공 元發 원발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
처음에는 휘를 총이라 하였고 호는 은봉이다. (운곡 원천석(元天錫) 일기에 나와 있음)
봉익대부 전공판서 상호군을 지냈다
전공사는 산택 공장 영조를 관장 하였으며 봉익대부 전공판서는 종 2품관이며 상호군을 겸직 하였다.
조선조가 개국하면서 여러번에 걸쳐 출사하기를 간청하였으나 고려유신으로서 절의를 지켜 항절 불사하였다.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좌정승겸 영 경연 홍문관 예문관 예문관 춘추관으로 증직 되었다.
기일은 6월 10일이고 묘소는 용인시 이동면 구수동 불당골 해좌이고 표석이 있으니 앞면에 좌의정 이모(원발:原發)지묘 뒷면에 정통 4년(元帝 英宗의 년호) 기미(세종21년 1439년) 4월 모일 천장이라 했다.
배위는 강덕 군부인(고쳐서 송양 군부인) 성천 김씨이고 기일은 8월 18일이다. 좌위의 보승 중랑장 추봉 밀직부사 상호군 남보의 따님이며 봉익대부 밀직부사 상호군 윤경의 손녀이고 추봉 봉익대부 지밀직사사 상호군 선의 증손이며 추봉 광정대부 지첨의 부사 상장군 행주인 기지병의 외손녀이다.
공의 묘갈에 천장한 연월일을 기재 하였고 지금의 전라도 고선현 (현 전북 완주군 고산면) 서쪽 사직단뒤 소주치안에 영봉이 있고 표석에 완연하게"좌의정 이모(元發)지묘"라 쓰고 뒷면에 "부인 김씨 장우 용인 구수동"이라 하였고 숙종 42년(1716년)에 12대손 만성이 임실 현감으로 있을 때 곳을 찾아가서 묘지를 살펴보니 광중이 비어있고 지석도 없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들은 자손들이 서로 왕래하며 편서의 첫머리 산도(山圖)아래를 자세히 살펴보았다.
세첩보유에 전하기를 한 선비가 베옷에 짚신을 신고 새벽녘에 공의 집에 당도하여 대문을 두드리니 공이 버선발로 급히 나가 반가히 맞아 들여서 그와 더불어 오륙일을 지낸뒤에 그가 돌아 갔으나 아무도 아는 이가 없었다.
며칠후 하인을 시켜 포백과 돈을 말에 잔뜩 실어서 청석동으로 보내면서 이르되"그 곳에 가면 내 징표를 지닌 사람이 반드시 찾아 올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이 물건을 말과 함께 모두 건네주고 곧 돌아와서 한말을 아뢰어라" 하였다.
 세상에 전하기를 그분이 바로 운곡 원척석이며 운곡은 은둔하기에 앞서 공을 찾은 것이며 그를 전별하면서 정의와 의리로서 이와같이 고려유신들이 은둔하면서 쓸 물품과 돈을 보내 주었다. (원척석 일기에 등재) 1984년 9월에 비석과 상석을 다시 세웠으며 향일은 음력 10월 10일이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 불당골 의정공 묘소

 

좌측 "左議政李元發之墓" 라 새겨진 비석이 전북 완주 고산 천장 터 원래 비석이라고 한다.

 

 

 

 

 

 

 

 

 

 

 

 

 

 

 

 

 

 

 

 

 

 

 

 

 

사진출처 한국참 풍수 지리학회

http://cafe.daum.net/hsfrs/AcvZ/571?docid=3095170201&q=%BF%AC%BE%C8%C0%CC%BE%BE%20%C0%CC%BF%F8%B9%DF&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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