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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공 6世

의정공 휘 원발 신도비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3.08.31|조회수166 목록 댓글 0

이원발 신도비(李元發神道碑) 이병관(李炳觀)

 

이 비는 1878년(고종 15년) 경기도 용인에 건립된 이원발신도비(李元發神道碑)로 18세손인 이병관(李炳觀)이 비문을 지었고, 19세손인 이만녕(李萬寧)이 글씨를 썼다.

이원발(李元發 : 생몰년 미상)의 본관은 연안이고, 호는 은봉(隱峯)이다. 고려 공민왕, 공양왕 양조에 벼슬하여 전공판서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개국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다. 후에 태조가 우의정을 배수하였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다. 후에 아들이 귀해짐으로 인해 좌의정에 증직되었다.

 

봉익대부 전공판서 증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좌의정 이공신도비명 병서.

 

18세손 가선대부 경연시강관 규장각지후관 병관은 삼가 글을 짓고,

19세 사손 만녕은 삼가 글씨를 썼으며,

숭록대부 판돈녕원사 해평 윤용구는 전액을 함.

 

오호라! 기에 이르기를, “선조의 선행이 있는데도 알지 못하면 이는 불명함이요, 알고도 전하지 아니하면 이는 불인함이다.”하였으니, 선조의 지업은 자손으로서 아니 전할 수는 없는 것이다. 생각건대, 여말의 신하들은 혹은 교려로 과장도 하고 혹은 침명하여 보전도 하면서 선왕을 위해서 자정을 하였으니, 이러한 사람들을 어떻게 다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고려의 역사는 더욱 체통을 잃어 모든 고신 유로들의 작은 행실과 고독한 지조, 즉 윤기를 심고 후세에 교훈이 될 만한 것은 10분의 1, 10분의 2도 채택되지 않았으니, 어쩌면 사직이 바뀔 즈음이라 말 못할 사정이 있어 춘추의 지회의 뜻을 따라버려서 그런 것일까? 희라! 공의 일은 오백년이나 되었으니, 세대도 멀고 일도 변하였는데, 문헌의 징빙도 없이 근거로 삼는 것은 다만 보첩뿐이니, 감히 선조의 미를 다 밝혔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급급하게 심력을 다하여 구하지 아니하면 갈수록 운연처럼 사라지고 물거품처럼 꺼져버리지 않는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이를 두려워하여 지금 경향의 제손들이 일심으로 일을 도와 여생의 돌을 떨어다가 공의 사행을 열거하여 오래 전하기를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사손 만령보가 나에게 묘문을 청해왔다. 그러니 감이 사양할 수도 없고 하여 삼가 서술하는 바이다.

공의 휘는 원발이니, 초휘는 총이요, 호는 은봉이며, 성은 이씨이다. 시조는 당의 중랑장무이니,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평정하여 연안백에 봉해졌는데, 신라에 머물러 진무하였기에 자손들이 드디어 연안을 본관으로 삼았다. 그 뒤로는 세차가 전해지지 못하여 고려조의 태자첨사 습홍으로 중조를 삼고 있다. 이 분이 극영을 낳으니, 태의감사요, 이 분이 경무를 낳으니, 판도판서요, 이 분이 승안을 낳으니, 초휘는 안으로 대호군이요, 이 분이 정공을 낳으니, 상호군이다. 배위는 남유근의 따님이니, 이들이 공의 고비이다.

공은 공민왕, 공양왕 양조에 벼슬하여 전공판서에 이르렀는데, 고려의 운세가 다 되어 세상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니, 상개한 마음을 품고 세상에는 뜻이 없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바람도 슬퍼하고 비도 우는 속에서 남 몰래 한숨짓고 탄식하면서 문을 닫고 자취를 감추며 지냈다. 함께 어울려서 즐긴 사람으로는 원운곡이 있었는데 덕과 의가 같아 문을 두드려 5, 6일씩 머물다가 떠났으나, 집안사람도 그가 누구인지를 몰랐었다. 한번은 창두에게 노자를 두둑하게 실려서 청석동구로 보내 대기하고 있던 사람에게 하나도 남김없이 우마까지 다 주고 오게 하였는데, 이것은 원 진사 천석이 공과 하직하고 치악으로 떠나는 길이였었다. 그 뒤에 관찰공이 관동에 재임할 때에도 관름을 다달이 운곡의 거처로 보내줬는데, 부친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은 태조와 퐁의의 친교가 있어 누차 불렀으나 가지 않았고 우의정을 제배하기까지 하였으나, 기어코 응하지 않았다. 뒤에 장자가 귀히 되어 좌의정에 증직되었고 기일은 6월 10일이다.

고산현 소주치에 초장하였다가 정통 4년 기미년에 용인 구수동 해좌원에 천장하였다. 배위 송양군부인 성천김씨의 기을은 8월 18일인데, 중랑장 남보의 따님이다. 묘는 동원에 있다. 2남 2녀를 두었는데, 장남 귀령은 본조 태종조에 벼슬하여 좌명원종훈에 책록되고, 세종조에 좌의정에 이르렀는데, 자리와 덕이 아우 관찰사공과 나란하였고 중망도 같았다. 증조에 사신으로 들어가니, 황제가 태종의 구장면복과 금인, 패옥, 경적 및 약품을 내리고, 또 왕비의 주취칠적관, 하피, 금추 및 채패도 내렸으며, 그 후로는 세헌의 공폐중 특별히 4,5가지를 특감하여 주었는데, 이 사실은 명사에 기재되어 있다. 정통 4년 기미년 6월 6일에 세상을 뜨니, 향년 94세요, 시호는 강호공이라 내렸으며, 구수동 건좌원에 예장하였다. 배위 정경부인 남양홍씨는 판중추 언수의 따님인데, 자식이 없었으며, 계배 정경부인 창령성씨는 예문관 학사 준득의 따님인데, 2남을 두었다.

맏이 책은 예빈시사요, 다음 돈은 예빈소윤이다. 차남 귀산은 태조의 잠저시에 노관의 친교가 있어 전라, 경상, 강원 삼도의 도관찰사를 연배하고 또 형조, 호조판서를 지냈는데, 묘는 구수동에 있다. 배위 고령현부인 김씨는 고양부원군 남득의 따님인데, 정통 3년 무오년 2월에 은봉공의 계하 해좌원에 장사 지냈다. 태종이 공의 넷째 아들 근수를 부마로 삼고자 맹인, 지화를 중매로 보냈는데, 공이 농담으로 대답했다가 죄를 입어 귀양간 일이 있었다. 여서 최지는 총랑이요, 차서 유량은 좌의정이다. 예빈시사는 1남을 두었으니, 효충은 대호군이다. 예빈소윤은 2남을 두었는데, 장 광명은 현감이요, 차 영명은 상장이다. 춘천부사는 4남을 두었는데, 장 근강은 장사랑이요, 다음은 근수인데, 태종과의 혼담으로 죄를 얻어 수재로 창원에 귀양 갔었기에, 자손이 그곳과 이천에 살게 되었다.

대호군은 3남을 두니, 맏이 문핵은 군수요, 다음은 문형이요, 다음 문휘는 문과 찬성이다. 현감은 2남을 두었으니 맏이 희문은 현령이요, 다음은 휘무이다. 상장은 2남을 두었는데, 맏이 종규는 문과 예조판서요, 다음 순회는 무후하였다. 장사랑은 1남을 두었는데, 인휴는 판관이다. 생원은 4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인문이요, 다음 진문은 병조참의로 예조참판에 증직되고 연안군에 봉해졌는데, 공이 상소하여 비로소 금고가 풀렸다. 다음 인행은 현감이요, 다음 인충은 문과 부승지를 지냈는데, 청백리에 뽑혔다. 근정은 6남을 두었음에 인온, 인량, 복중, 길중, 말중, 계중이다. 수재는 4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호요, 다음은 비요, 다음은 봉일이요, 다음은 회이다. 여타도 많지만 다 기록치 못한다.

오호라! 사람이 불우함은 명도요, 시대가 불행한 것은 천운이다. 공은 정의와 대도로 공민왕조에 벼슬하여 재덕이 크게 쓰일 듯하였는데, 그렇지 못하고 벼슬은 열경에서 그쳤으며, 공양왕이 즉위한 지 몇 해가 되지 않아 시골에 숨게 되었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랴? 공은 판탕한 시대를 당하여서도 높다랗게 우뚝 서, 충성은 금석을 꿰뚫었으며, 덕행은 신명과 통하였으니, 큰일에 다달아 대의를 결함에는 지성에서 나오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공은 잠덕과 의절을 겸하고 있었으니, 이것만으로도 불휴함이 마땅하다 하겠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훌륭하도다. 우리 조상은, 하악의 정기로 태어났도다.

이당의 화족이요, 송려의 명경이었도다.

산하의 국세는 바뀌고, 천지도 위치가 뒤바뀌었도다.

그럴 때에 신하의 직분 다하여, 절조를 지키며, 의로써 항거하였도다.

임금을 섬김에는 충성을 다하였고, 마음가짐은 이심이 없었도다.

공의 일신을 생각해보면, 나라와 공도만을 생각하셨도다.

현릉조에 벼슬하여 좋은 자리 두루 거쳤도다.

생각해보면 시론은, 크게 불가함이 있었도다.

주운이 바야흐로 성하니, 상나라 사직을 옮겨갔도다.

천명이냐? 시운이냐? 지사는 슬퍼하였도다.

성조에서는 가상히 여겨, 예소가 빈번하였으나, 황각의 상상도 마음에는 없었도다.

천년이 옛날이 아니구려! 기침소리 들리는 듯하도다.

구성의 남쪽, 구수동의 동천이로다.

세한송백은 울울창창하도다.

큰 돌에 뚜렷이 새기니, 몇 년이나 경영하였던가?

이제야 마치게 되었나니, 자손들 정성을 다함이로다.

 

무인년(고종 15, 1878년) 8월 일.

 

李元發神道碑

 

奉翊大夫典工判書 贈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李公神道碑銘并序

 

      十八世孫嘉善大夫 經筵侍講官奎章閣祗候官 炳觀謹撰

      十九世嗣孫 萬寧謹書

      崇祿大夫判敦寧院事海平 尹用求篆

 

嗚呼記曰有善而不知不明也知而不傳不仁也先祖志業子孫之所不可不傳也竊想麗末之臣或皎厲而張之或沈

㝠而全之以自靖於先王者惡可量哉勝國歷史尤失體要凡孤臣遺老一行獨操所以扶樹倫常敎詔萬世者十不一

二採焉豈鼎革之際事有難言以附春秋志晦之義而然歟噫公之事垂於五百年之後世遠事遽文獻無徵所據者只

譜牒非敢曰闡發先徽不汲汲殫心力而求之則其有不煙雲銷而泡沫滅者乎用是爲懼今其京鄉諸孫同心相役伐

麗牲之石列公事行以圖久遠日嗣孫萬寧甫請余墓文乃不敢辭而謹叙之曰  公諱元發初諱寵號隱峯姓李氏始

祖唐中郎將諱茂從蘇定方平百濟封延安伯因留新羅鎭撫之子孫遂爲延安人其後世次無傳至麗朝太子詹事諱

襲洪爲中祖生諱克榮太醫監事生諱景茂版圖尙書生諱承顏初諱顏大護軍生諱靖恭上護軍配南平文氏上將軍

惟瑾女寔公考妣也公仕恭愍恭讓朝至典工判書及麗運將訖時事日非心懷慷慨無意於世解官歸鄉潜欷寤歎於

風噫雨泣之中杜門遯跡所與爲歡有元耘谷同德並義款門留宿五六日而去家人不知其爲誰命蒼頭載贐物駄送

于靑石洞口有來候者無留一物並其牛馬給之此其元進士天錫辭公歸雉岳之路也後觀察公在任東藩以官廩月

送耘谷所居有親命故耳公與  太祖有布衣之舊屢徵不越拜右議政矢心不應後以長子貴  贈左議政忌六月十

日初葬高山縣燒酒峙正統四秊己未遷窆于龍仁九水洞亥坐之原配松壤郡夫人成川金氏忌八月十八日中郎將

南寶女墓同原生二男二女長男貴齡仕本朝  太宗朝錄佐命原從勳  世宗朝至左議政位德與弟觀察使公俱有

重望奉使中朝帝賜  太宗九章冕服金印佩玉經籍及藥品又賜  王妃珠翠七翟冠霞帔金墜及綵幣自後歲獻貢

幣特減四五事載明史正統四年己未六月六日卒享壽九十四  贈諡康胡公禮窆于九水洞乾坐之原配貞敬夫人

南陽洪氏判中樞彥修女無育繼配貞敬夫人昌寧成氏藝文館學士凖得女生二男長策判禮賓寺事次敦禮賓少尹

次男貴山  太祖潜邸時有盧綰之契連拜全羅慶尙江原三道都觀察使亦經刑戶曹判書墓在九水洞配高靈縣夫

人金氏高陽府院君南得女正統三年戊午二月葬于隱峰公階下亥坐生一男續春川都護府使  太宗以公第四子

根粹擬駙馬以盲人池和行媒公戱談答之因被罪坐謫女壻崔智總郎次壻柳亮左議政禮賓寺事生一男孝忠大護

軍禮賓少尹生二男長光明縣監次永明上將春川府使生四男長根剛將仕郎次根健成均生員以禁錮不得從仕次

根精次根粹  太宗議婚得罪以秀才謫昌原後裔因居或居伊川大護軍生三男長文核郡守次文椽次文檜文賛成

縣監生二男長熙文縣令次熙武上將生二男長宗揆文科禮曹判書次順會無後將仕郎生一男仁畦判官生員生三

男長仁文進文兵曹參議  贈禮曹參判延安君公上疏始解錮次仁行縣監次仁忠文左副承旨淸白吏根精生六男

仁溫仁良福重吉重末重季重秀才生四男虎次貔次奉日次檜餘不盡錄嗚呼命人之不遇者命也時之不幸者天也

公以正義大道事恭愍朝才德將大用未果致位列鄕當恭讓即位未幾年遜于荒豈非天哉公遭時板蕩嶷然自立忠

誠貫金石德行通神明其出處進退磊落光明無一不出於至誠臨大事決大義無一不出於至正噫公之潜德懿節兼

有之用是而不朽也宜矣繼而謹銘曰

顯允我祖河嶽鍾靈李唐華族松麗名卿山河改局天地易位惟時臣職秉節抗義盡忠所事擔心不貳言念公身國耳

公耳仕于玄陵歷敭華美顧惟時論有大不可周運方盛商鼎遽移命也時也志士傷悲  聖朝嘉乃禮召頻繁黃閣上

相匪心所存千穓非昔警咳如聞駒城之南九水洞天歲寒松柏鬱鬱蒼蒼穹石顯刻幾年經營今乃告成雲仍殫誠

      戊 寅 八 月 日

 







이원발신도비(李元發神道碑)
   
 
시대
조선
연대
1878년(고종15년)
유형/재질
비문 / 돌
문화재지정
비지정
크기
높이 190cm, 너비 66cm, 두께 38cm
출토지
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소재지
(한국)경기도박물관-경기도 용인시 기흥읍 상갈리 85, (한국)-경기도 용인시 이동면 서리
서체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이병관(李炳觀) / 이만녕(李萬寧) / 미상
 
1878( 15) () 18 () , 19 () .
( : ) , (). , , . . .
, 1980 .
() , 5, , 1992

출처 한국금속학 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8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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