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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 사군자

서예가 운재(芸齋) 윤제술(尹濟述)(1904~1986)

작성자이 용갑|작성시간12.03.25|조회수1,658 목록 댓글 0

 

 

 

 

 

 

 

 

 

 

 

칼날같은 새로운 서체를 창조한 이 지역의 교육자요.정치가로 활동한 시, 문에 능한 서예가』 

  이 지역 사학(私學)의 명문(名門) 이리남성고등학교교장을 거쳐 정계에 입문하여 해박한 이론과 특유한 언변으로 당 대변인

 국회부의장을 역임하면서 국민의 존경을 받았고 서예가로서도 명성이 높았던 윤제술(尹濟述 : 1904~1986)은 전북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양청마을 159번지에서 망국의 기운이 감돌던 격동기에 아버지 윤영삼(字 광진)과 어머니 나금영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는 운재(芸齋)요, 본관은 파평(坡平)으로 7세에 가까운서당에 들어가 천자문(千字文)을 읽고 사자소학(四字小學)과

동몽선습을 배웠는데 머리가 뛰어나 다른 학동들보다 빨리배웠기 때문에 동네에서는 신동(神童)으로 불렀다.

  그 후 근동에서 학문이 높은 강초산(姜楚山)을 모셔와 3년동안통감 11권을 통독하니 문장의 뜻과 문리가 통할 위치에 올랐다.

  그는 14살에서예가 강암 송성용의 손위 종매인 송이순과 결혼하게 되자 그의 부친은 운재를 처가로 보내어 아내의 처 숙부이자

 강암의 선고장인 유재 송기면에게글씨와 학문을 배우게 하였다.

  그의 호인 운재(芸齋)는 유재가 지어준 것으로 운(芸)자는 해충을 몰아내는 향기 나는 풀을 뜻하고 중국 고대의 완운대(玩芸臺)

구절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지어 주었다 한다.

  그후 15세에는계화도에 있는 간재 전우선생을 찾아가 뵙고 그에게 가르침을 받게 된다.

  간재 선생은 아침에 모든 제자들을 모아 놓고강론을 하였고, 곧은 사상과 준수한 용모는 운재가 평생을 살아가는데 좌표가

되었다고 그때를 운재는 다음과같이 회고하였다.

  “내가 간재선생 문하에서 지내던 세월은 나의인생에 커다란 전기가 되었다. 그 어른(간재)은 글을 친히 가르치지는 않으셨지만

친자지교(親炙之敎)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그 어른의 학문이나 수양의 경지를 따라갈 수없어 그저 멀리서 우러러 보기만 했어도

그 어른의 체취라 할까, 그런 것이 내 몸에 배었고 후일에 와서생각해 보니 내 나름으로 가지고 있는 유학관(儒學觀)이나선비관이란

것이 간재선생의 밑에서 그 바탕이 마련되었던 것 같다”고 술회한바 있다.

  그 후 그는 새로운 서구문화와 새로운 학문을배우기 위해 청운의 꿈을 안고 개화도에서 나와 서울로 올라가 과감히 상투를 자르고

중동학교에 입학하게 되면서 새로운 학문에 열중하여 3년 과정을 마치고 당시 일본인들도 입학하기가 하늘의 별따기 보다 더

어렵다는 수재들만이 모이는 명문 ‘동경고등사범학교’에합격하여 그는 김제의 천재가 아닌 전 일본 나아가서는 세계적인 수재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폭넓은 독서로 새로운 학문에 도전하게 된다.

  그러나 일제 때에 사범계 학교를 졸업하면 일정기간의무적으로 교편을 잡도록 되어있어 주임교수인 시노다(조田錦策) 교수의

추천으로 ‘이키다현’(추천현)의 어느 중학교로 부임하게 되었는데모교인 중동학교에서 명망이 높은 최규동 선생이 그를 초빙하여

중동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게 되었다.

  그 후 보성중학교를 거쳐 성남중학교에 교감으로부임하였으나 이 학교는 황국신민을 귀감으로 내세우던 김석원씨가 설립한

학교로 일본에서 갓 나온 일본인을 명목상 교장으로 내세우고 본인은 교두(校頭)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김석원은 맹신적 군국주의를 앞세워 일본군부의 주구(走拘)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으므로 강직한 운재는이에 뜻이 맞지

 않아 겨우 2년 만에 교두와 언쟁을 하고 김제로 낙향하게 되었다.

  고향에 돌아온 그는 귀거래사를 읊으면서 평소즐기던 서예와 낚시로 소일하며 지내다가 8.15해방을 맞이하게 되면서 이때

‘이리남성고’를 설립한 이윤성여사와 이춘기 재단이사장이 찾아와 교장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어 처음에는 겸손하게

사양하였으나 삼고초려하여 마침내 수락하고 남성고등학교 교장에취임하면서 수시로 수업을 참관하면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독찰하여 단 시일 내에 전국의 명문고로 급부상 시켰다.

  그 후 정부가 수립되고 국회가 열리자 학교를떠나 정계로 진출하기 위해 김제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민주당에 입당하여 대변인을 거쳐 1968년에는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어 의회정치의 민주화에 공헌하였고 노년에는

정계를 떠나 유유자적 하면서 붓 끝에자기의 사상을 담아내는 칼날 같은 새로운 서체를 창조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운재의 서예는 일찍 그의 부친이 필재를 인정하고 9세에 서예선생을 수소문하여 완주군 구이면 와동마을에 벽하 조주승의

아들인 심농 조기석(선전에 입선한 서예가)이 서당을 열고 전통서예와 글을 가르치고 있다는소문을 듣고 찾아가 이곳에서

숙식을 하면서 약 2년간 글씨공부를 하였는데 심농 조기석은 시종일관 해서(楷書)만 쓰게 하였다 하니 그의 글씨의 바탕은

심농의 영향을 받은것이다.

  그 후 학교에 근무할 때 학생들의 수학여행 길에만주 봉천에서 전시관의 글씨를 보고 ‘글씨란 과연 이렇게 골격이 있어야

 되는구나’하는 생각을 하였으며 거기서 중국의 근대 명필들의 글씨를 보면서이것이 진필(眞筆)이라 느껴 이때부터 글씨를

보는 안목이달라졌다.

  그는 구양순 필첩과 황산곡첩을 주로공부하였고 국내의 창암 이삼만의 글씨를 쓰면서 완당 김정희의 글씨와 성당 김돈희의

글씨도 좋아하여 그의 회고록에서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내 글씨의 골격은 한마디로 지적하기는 어렵지만구양순 해서에다 ‘미불’ ‘황산곡’체를 가미한 것이다. 모방이 아니라 그분들의

글씨의 뜻을 따른 것이다. 그대로 써 가다가 자연히 한쪽으로 기울어지더니 내 체라고 할까 내 특징이랄까하는 것이 정립된 것이다”라

하였다.

  즉 그의 글씨를 보면 강한 개성미가 넘치고 있어획이 비록 가늘지만 그 획 속에는 강한 골격이 있음을 느낄 수 있어 아마 이런

 글씨는 구양순 필획에서 기초를 다졌기 때문이라 추정된다.

  그가 36세에쓴 조부의 비문을 보면 전, 후면을 구양순체로 썼는데 흠잡을 수 없는 간격과 포치를 유지하고 있을 뿐아니라

글씨에서도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

  운재는 항상 벽에 조선후기의 명필 창암 이삼만의글씨를 걸어놓고 매일 보았고 혼자 독백하기를  “저런 글씨를 고졸(古拙)

하다고 하지 예스런 것은 흉내를 낼수가 있는데 졸(拙)한 것을 흉내 낼수가 없어”라고 하였다. 
즉 고졸함과 골기(骨氣)를 제일로 삼으며 글씨를 썼다.

  1936년에는제15회 협전 서예부(協展 書藝部)에 출품, 민태식, 원충희(元忠喜) 등과 같이 입선하여 오세창(吳世昌) 김돈희(金敦熙)

안종원(安鍾元) 민형식(閔衡植) 등 정회원 작품과 함께 전시하게 되었다.

  ‘협전 서예부’(서화협회전)란 국내에서 근대 미술가 단체의 효시인 ‘서화협회’가 결성되어초대회장에 ‘안중식’이 선출되었으며

제1회 서화협회전(협전)이 개최된 것은 1921년 4월 1일부터 3일간 서울중앙학교(현. 중앙중교교) 강당에서 회원전으로 시작되고

 13회부터는 정회원 작품과 공모전을 통해 입선된 작품을 동시에 전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협회전은 15회까지 이어오다 중지되었다.

  서화협회에서는 민족사회의 갈채와 격려속에 제1회전(1921)을 마치고 사업목표였던 회지(會誌) ‘서화협회회보’(書畵協會報)라는

 최초의 미술잡지를 발간하면서 1921년 10월 15일 발간된 제1호에는연재 강좌로 김돈희(金敦熙) 집필의 ‘서예연원’(書藝淵源)과

 ‘서도연구의요점’(書道硏究의要點)이 게재되었고 이도영(李道榮) 고희동(高羲東) 집필의  동양화(東洋畵)와서양화(西洋畵)

 강좌가 게재되었다.

  서예협회전은1922년 총독부가 주관하는 ‘조선미술전람회’의 서부(書部)와 함께 15회의 서예협회전을 이어오다가 원인은

기록되지않고 폐지되었다.

  그러나 국내 최초의 민전(民展)으로 당대 최고의 서화가들이 참여하여 회보를 발간함으로써 미술발전에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 운재의 약력
o 1904년 : 갑진 3월 15일 전라북도 김제군 백산면 석교리 159번지에서 아버지 윤광진(尹匡鎭), 어머니 나주 나씨(羅氏)의

장남으로 출생, 본관은 파평
o 1910년 : 7세, 서당에서 한문 수학
o 1915년 : 12세, 심농 조우종(心農 趙又鍾) 문하에서 서도를 공부하다
o 1917년 : 14세, 송이순(宋二順) 여사와 결흔, 본관은 여산 o 1918년 : 15세, 간재 전우(艮齋 田愚) 문하에서 2년 반동안 한학을수학
o 1920년 : 중동학교에 입학, 3년간 수학하고 졸업한 뒤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1년동안 독학
o 1925년 : 동경(東京)고등사범학교 영문과 입학
o 1929년 : 동경고사 영문과 4년 졸업하고 모교인 중동중학교 영어 교사로 임명되어 그 후 10년 동안 재직, 보성중학교 교사,남중학교

 교감으로 재직하다 1945년 봉 교직을 떠나 향리에 내려가 쉬고 있을 때 해방을 맞다.
o 1946년 : 신설 이리 남성중 ·고등학교 초대교장으로 취임
o 1952년 : 전국 사림중 ·고등학교장회 전북 회장으로 피선되어 사학발전에 노력 하다.
o 1954년 : 51세, 교직을 떠나 고향인 김제에서 제3대 민의원 의원에 무소속으로 당선되어 정계에 나서다. 무소속동지회, 호헌동지회,

다시 무소속으로 원내활동을 하다가 1956년 민주당에 입당
o 1957년 : 민주당 문화부장, 정책위원회 위원장에 피선
o 1957년 : 중앙교직보호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퍼선
o 1958년 : 김제에서 제4대 민의원 의원으로 재선되어 반독재 투쟁의 선봉에서 활약
o 1959년 : 민주당 전라북도 당 위원장에 퍼선, 4.19를 겪고 1960년 5대 민의원 의원으로 김제에서 3선
o 1960년 : 민의원 문교위원장으로 피선되어 새로운 교육정책 수립에 많은 활약을 하다
o 1961년 : 민주당 구파 동지들과 함께 신민당을 창당, 야당투쟁을 벌이다가 5.16군사 쿠테타로 정치활동 정화법에 묶이다.
o 1963년 : 정치활동이 재개되어 민정당 창당에 참여하고 중앙상위의장에 피신되다
o 1963년 : 서대문 을구에서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
o 1964년 : 민정당 원내총무로 언론윤리위원회법과 학원보호법 반대의 원내 지휘를 맡음
o 1965년 : 한·일회담 비준에 반대, 국회의원직 사퇴, 한·일협정이 굴욕 외교라고 반대했음
o 1966년 : 의원직을 사퇴한 8의원과 함께 신한당을 창당하고 정무위원에 피선
o 1967년 : 신한·민중당을 합당한 신민당 창당에 참여
o 1967년 : 서대문 을구에서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
o 1967년 : 부정선거를 규탄하고, 등원을 거부한 신민당 협상대표로 합의의정서 발표(협상대표는공화당 白甫檍, 金振晩,

 신민당 尹濟述, 金義澤)
o 1968년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되어 국제회의 등에 참석 국위를 높였음.
o 1968년 :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어 의회정치의 민주화에 공헌하고 국회의원 파월장병 위문단장으로 월남을 방문
o 1971년 : 서대문 병구에서 제8대 국회의원에 당선, 신민당 정무회의 부의장 피선
o 1972년 : 유신체제 선포로 국회해산
o 1973년 : 민주통일당 창당, 최고위원에 피선
o 1980년 : 5 · 17사태로 국회, 정당해체
o 1983년 :후학들이 80회 생신을 기리기 위하여 「운재 윤제술」수연을 베풀다
o 1986년 : 3월 25일 부인 송이순 여사와 사별
o 1986년 : 7월 24일 서울 누상동 자택에서 영면, 향년 83세, 향리인 김제 백산면 대청 후록에 안장, 슬하에 3남 3녀를 두다.

志操로 일생 마침 

  이처럼 운재는 교육자로 많은 후진을 길러냈고정치인으로 서예가로 활동하면서도 항시 선비의 도리를 벗어나지 않고

청빈하게 살아오면서 많은 시문과 서화작품을 남기고 1986년 타계하였다.

  그의 묘는 김제시 백산면 석교리 양청마을에 있으며그의 묘비는 강암 송성용이 전면서를 쓰고 후면은 아산 송하영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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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재(芸齋) 윤제술(尹濟述) 1904년1월29일~ 1986년 7월24일

 

 

             정포은 선생  춘흥 (春興)   


          春 雨 細 不 滴 (춘우세부적)       봄비가 가늘어 빗방울 (낙수) 을 짓지 못하더니

          夜 中 微 有 聲 (야중미유성)       밤중에  작은 비소리가 들린다.

          雪 盡 南 溪 漲 (설진남계창)       이제 눈이녹아 남쪽의 개울물이  불어 흐르니 

          草 芽 多 少 生 (초아다소생)       푸른 새싹들이 얼마나 많이 돋아났을까. 

 

봄의 정취가 묻어나는  정몽주의 시구절 이다. 운재 선생이  정치적 봄을 기다리며  쓴것이 아닌가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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